강한철<1979년 서울생 서울법대 98학번 >합격생의 합격기
더 이상 吳下의 阿蒙은 아니리.
<1979년 서울생 서울법대 98학번 3학년 재학중>
1. 들어가며...
글을 쓴다는 것 특히 누군가 읽어줄 분들을 의식하면서 글을 쓴다는 것은 스스로의 알몸을 드러내는 듯한 당혹감을 느끼게 하는 일이라고 했던 사람이 진순신인지 시오노 나나미인지 뚜렷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저 역시도 단지 운 좋게 시험에 합격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원고청탁을 받고 이 글을 쓰게 되니 의외로 민망한 느낌이 들어서 덜컥 청탁에 응해버린 스스로에 대해 다소의 원망마저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저보다도 훨씬 훌륭한 인격과 완비된 실력을 가지신 분들 앞에서 법학에 입문한지 겨우 2년여에 불과한 초학도가 이런저런 문제에 대해 왈가왈부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넌센스이지만 그저 힘겨운 수험생활을 계속해 나가고 계시는 여러 수험생분들께 이글이 하나의 청량제로 작용할 수 있다면 하는 바램으로 이글을 시작하려 합니다.
2. 2년간의 수험생활
저 역시도 수험 공부를 하는 동안 많은 선배님들의 합격기를 읽어본바 있고 그같은 글들을 읽으면서 많은 힘과 용기를 얻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분들의 글들을 읽으면서 감동을 받았던 점은 특히 80년대의 선배들이 보여주신 투철한 역사와 사회에 대한 의식이었고 그것이 힘든 수험생활을 견디어내게 하는 동력으로 작용하였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제게는 그같은 경험이 참으로 일천하고 바로 그 점이 이례적으로 어린 나이에 합격했다는 것에 주목하여 시험을 준비하게된 계기를 묻는 분들 앞에서 제가 종종 스스로 부끄러워지는 이유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사실 왜 그렇게 일찍 시험을 시작하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그저 예능분야나 과학방면에 특출한 재능이 있었던 것도 아닌 지극히 평범한 학생으로서 법조인이 되면 밥벌이에는 문제가 없다더라는 식의 속물적인 고려와 아울러 그나마 스스로의 신념과 소신을 지키면서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리라는 막연한 생각 속에 사법시험을 준비하게 된 것이 아닌가하는 정도의 대답밖에는 내놓을 것이 없는 것이 솔직한 현실인 것입니다. 대학에 입학하여 1학기에는 이곳저곳 놀러도 다녀보고 왠지 모를 의무감에 카를 포퍼나 마르쿠제, 에리히 프롬이나 하버마스의 저술들을 뒤적거려보기도 하였지만 뭐랄까 치열한 삶이 결여된 듯한 느낌에서 한번쯤 꿈을 위해 안락과 타성에 젖은 생활을 청산해 봐야하겠다는 대망(?)이 아주 없었던 것만은 아니기도 했습니다만...
결국 반드시 올곧은 법조인이 되어 사회에 일조하겠다는 의무감이나 절실한 생활상의 필요, 하다못해 속물적인 입신출세의 야망조차 없이 시작한 공부인지라 어정쩡한 상태에서의 생활의 연속이 저의 초기수험생활이었던 것 같습니다. 입학 직후 보름인가 아침 7시에 법대도서관에 나와 곽윤직교수님의 '민법총칙'과 폴 케네디의 '강대국의 흥망'을 번갈아가며 읽었던 것 외에는 본격적으로 법서를 보았던 경험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고 그래도 명색이나마 고시공부를 시작한 것은 98년 늦은 여름께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렇듯 느슨하게 시작한 공부였기에 99년의 1차합격은 기대하지도 않았으며 그저 느지막히 학교에 나와 지겨워질때까지 법서를 보는 정도의 순수한 아마추어리즘에 입각한 수험생활이었습니다. 그래도 어릴적에 배운 속독이 효과를 발휘하여 2학기가 시작하기 전까지 곽윤직 교수님의 민법시리즈와 권영성 선생님의 헌법책을 그럭저럭 1회독 할 수 있었습니다.
2학기가 시작되고 왠지 바쁘게 돌아가는 분위기 속에서 저 역시 보다 열심히 공부를 해야겠다는 각오로 생활 태도를 보다 진지하게 가져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황금같은 1학년 여름방학에 친구들과 여행기회조차 가지지 못하고 명색으로나마 공부를 하였는데 그에 대한 보상은 받아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특히 아버지께서 지점장으로 30년이 넘게 봉직해 오시던 제일은행에서 퇴직하심에 따라 침체된 집안 분위기를 전환시킬 수 있는 계기로 시험합격을 나름대로 염두에 두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침 6시 기상을 필두로 여러 선배님들에게 정보를 취합하여 나름대로 짜임새있게 만들어낸 생활계획은 그 시작부터 일그러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재상 교수님의 형법총론...강의조차 들은바 없이 그저 무식하게 돌파해내기에는 참으로 버거운 책이었습니다. 특히 행위론부터 시작되는 그 암호와도 같은 낱말들의 연속은 초학도의 의지력을 시험하기에 충분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곽윤직 교수님의 책을 볼때는 하루에 400페이지씩도 읽을 수 있었으나 형법총론을 읽는데는 너무나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고 심지어는 하루종일 10페이지도 못보고 도서관을 나와야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시 우직함은 어디서나 통하는 것인지 이재상교수님의 책만이 아니라 김일수, 배종대, 정성근 선생님의 책들까지 읽고 난생처음 서브노트 비슷한 것을 하는 정성을 기울인 끝에 9월 한달이 다가서야 이재상 교수님의 총론을 일독하고 범죄체계론의 기초를 세울수가 있었습니다.
어느덧 10월... 맘은 조금씩 조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선택과목은 물론이고 친족상속법이나 형법각론도 채 보지 못한 어설픈 기본 삼법 1회독이 저의 공부량의 전부였고 외국어로 선택하기로 맘을 먹은 중국어 역시 1학기때 교양중국어를 수강한 것 외에는 외국어고등학교때의 실력이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점차 시간은 지나가는 가운데 과연 내가 99년 1차에 응시나마 할 수 있을 것인가에 진지한 의구심이 들기 시작하였지만 이미 친구들 사이에서 소문도 나버릴대로 나버린대다가 그저 포기하기엔 왠지 스스로가 너무 왜소한 듯 느껴졌기 때문에 한번 밀어붙일 수 있는 데까지는 밀어붙여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은 5개월을 최대한 의미있게 보내기 위해 친구들과의 연락도 최대한 피하면서 철저히 공부위주의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하루에 7시간이상씩은 꼭꼭 자야하는 체질이기에 잠을 줄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두 깨어있는 시간만큼은 최대한 밀도 있게 사용하려 노력하였습니다.
이 시기 학교강의를 빼고는 평균잡아 하루에 7시간쯤 공부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10월에서 방학이 시작되는 12월까지 그럭저럭 기본삼법을 2회독씩 더하고 선택과목으로 택한 형사정책과 노동법 기본서들을 볼수가 있었습니다.
12월 중순 경부터 방학이 시작되자 이듬해 1차시험을 대비한 3개월간의 본격적인 레이스가 시작되었습니다. 흔히들 사법시험공부를 그 내용의 방대함으로 인해 '밑빠진 독에 물붓기'라고 표현하는 일이 많은데 저 역시도 그같은 비유가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같은 밑빠진 독에 잠시나마 물이 가득 찬 상태를 유지시키기 위하여는 단기간동안 다량의 물을 쏟아붓는 방법외에는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사법시험 역시 시험이 많이 남은 상태에서의 6개월보다 직전의 6일이 더 중요하다는 여러 선배들의 말이 과장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저역시도 방학이 시작되기 이전까지는 어쩌면 고시생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의 방만한 생활을 하여왔었지만 방학이 시작됨과 동시에 어쩌면 생애 최초일 정도의 진지한 자세로 공부에 매진하였습니다. 이때 처음으로 신림동 고시원이라는 데에 들어가 시험에 대비하였는데 식사시간과 잠자는 시간외에는 되도록 공부하는 시간만으로 채우려 노력하였습니다.
기본적으로 제가 사람을 좋아하는 성미이기 때문에 이때의 고독은 상당히 견디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식사도 되도록 혼자 하려고 했고 고시원에서도 줄곧 혼자였기 때문에 그런 생활이 장기화되자 정신적으로 피폐해져갔습니다. 그때마다 무라카미 하루끼의 미문들을 읽고 음악을 들으면서 스스로의 감정들을 컨트롤해나갔습니다. 물론 도저히 공부가 안될듯한 날에는 친구들을 불러 술을 먹으며 맺힌 감정들을 털어내기도 하였고 1월에는 혼자서 2박3일 일정으로 동해로 겨울바다를 보러 다녀오기도 하였지만 아마도 이때가 제 수험기간동안 가장 힘들었을 때가 아닌가합니다.
더욱이 제가 188cm의 장신이기 때문에 체구에 비해 많이 작은 고시원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것이 큰 고역이었고 고시원에 들어간지 한달이 지나자 온몸이 안아픈 곳이 없는 상태로까지 변했습니다. 마침내 시험을 한달 남기고 황량해진 몸과 마음으로 고시원을 나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머니의 차에 짐과 지친 몸을 싣고 돌아오는 길에 왜그리 씁쓸한 기분이었는지... 그러나 그 와중에도 2개월여의 고시원 생활 끝에 기본삼법 객관식 문제집을 한번씩 풀 수 있었고 선택과목과 외국어에도 어느정도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때 지나치게 에너지를 낭비한 탓인지 시험을 1개월 정도 남긴 시점부터는 도무지 책이 손에 잡히질 않아 맘고생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저 멍하니 방안에 앉아 창문너머로 떨어지는 빗방울만 바라보던 기억들이 생생합니다. 결국 거의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99년 1차 시험에 응시하게되었습니다.
1차 시험일... 1교시만 응시하고 2교시를 포기하고 나오면 1차시험 응시제한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선배의 말을 믿고 신양균 선생님의 형사정책 한권을 달랑 들고 시험장으로 향했습니다. 처음보는 내용 태반인 민법과 철저히 판례위주인 형법문제를 보면서 내가 얼마나 방만하게 공부해왔는지 스스로 부끄럽고 열심히 시험지를 풀고 게신 여러 선배님들 앞에 죄스러운 감정이 들어 당장이라도 시험장을 빠져 나오고 싶은 일념뿐이었습니다. 실제로 1교시가 끝나자 책을 싸서 시험장을 나올 생각마저 하였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미 저지른 일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을 지는 것이 온당하다는 생각에 2교시까지 최선을 다해 응시하여야겠다고 마음을 다잡게 되었고 남은 시간동안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시험에 응하였습니다.
1차시험이 끝난 후에는 제법 여유있는 보통 대학생의 생활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듬해 1차시험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1년이나 남은 상황에서 그다지 서두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고 그간에 소원했던 인간관계도 다시 돈독히 하고 싶었기 때문에 발표일까지 참으로 여유있게 친구들과 어울려 지냈습니다. 물론 이때 어설프게 나마 2차 시험 과목 가본서들을 일독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었지만 그 실행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친구들과 밤새도록 술을 마시거나 게임방에서 게임에 몰두하거나 하는 일이 잦았고 신학기 봄의 들뜬 분위기 속에 그저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랬기에 발표일이 다가와도 전혀 떨리는 기분이 없었으며 커트라인이 82점을 상회한다는 말을 들었을때도 '엄청나네... 열심히 해야겠군..'이라는 정도의 감정외에는 별다른 느낌이 없었습니다.
시험 합격 발표당일날에도 합격에의 기대가 전혀없는 상태에서 그저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놀고 있었는데 과친구가 1차합격자란에 내이름이 들어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어서 찾아본 결과 제가 1차시험에 합격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합격자란을 찾아볼때만 해도 십중팔구는 동명이인일 것이라는 생각이었으나 명단의 이름과 수험번호가 정확히 저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정말 뛸 듯이 기뻤습니다. 제 친구들은 '저놈은 복권당첨된거나 다름없이 1차에 붙은거야'라고 놀려댔는데 제 생각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정말 기대조차 하지 않던 와중에 합격하였기에 이때의 일이 지난 수험기간동안 가장 기뻤던 일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다시 당장 두달 앞으로 다가온 2차시험준비로 마음이 무거워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1차가 끝난 이후 아예 2차 공부를 안해둔 상태였기 때문에 과연 내가 이듬해 2차에라도 합격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에 점차 초조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99년의 2차시험에는 응시조차 안하기로 하고 맘편히 이듬해 2차에 대비하여 장기적인 수험전략을 세워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외국어나 선택과목 선정, 시험직전의 마무리 공부 상태에 따라 변수가 많은 1차시험에 비해 2차시험은 예측가능한 결과를 내는 것이 사실인 것 같고 또한 성실한 공부가 전제된다면 합격의 가능성 역시 1차보다 훨씬 높은 것 같습니다. 저는 2차를 준비할 때 스터디의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수험정보의 취합과 구성원 상호간의 선의의 경쟁을 통한 의욕 고취, 심리적인 안정이라는 차원에서 2차때는 스터디의 필요성이 절대적인 것 같습니다. 여담으로 저희 스터디의 자랑을 좀 하자면 42회 최연소합격의 영예를 안은 아람이를 비롯하여 서울과학고 수석졸업과 서울의대 수석입학에 빛나는 상언이형, 천재적인 두뇌를 자랑하는 재욱이형, 지덕겸비의 효인이형에 이르기까지 기라성 같은 동료와 선배들이 대부분이어서 잠시도 긴장을 늦출수가 없었습니다. 스터디는 겨울방학 전까지 각자 2회독씩하는 것을 목표로 그 이후부터 3월까지 연수원에 다니시는 선배들의 지도로 모의시험과 첨삭을 내용으로 하게끔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겨울방학 전까지 저는 학원강의를 듣기도 하고 여러논문들을 찾아보기도 하면서 기본서를 충실히 읽는데 주안을 두고 학습하였습니다. 남들이 보는 수험가의 요약서를 철저히 배제하고 양이 좀 많아도 정평이 나있는 교수님들의 교과서를 가지고 공부를 하였는데 지금 생각해도 그것은 옳은 결정이었다고 봅니다. 교수님들의 기본서가 약간 산만한 느낌이 든다해도 이는 스스로의 목차구성과 언더라인으로 충분히 보완이 가능한 것이고 양이 방대하다 하여도 이는 오히려 깊이 있는 공부라는 측면에서 장점이 될 수 있는 것이지 문제점이 될 수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수험과정에서는 필요없는 부분이라면 과감히 생략하는 결단력도 필요함은 물론이겠습니다만...
그래도 기본서에는 미진한 부분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수험가의 자료나 다른 교수님들의 교과서를 가지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소위 단권화 작업은 필수적인 것이라고 사료됩니다. 저 역시도 예컨데 민법은 기본서로 잡은 곽윤직교수님의 책에 김형배 선생님의 교과서로 보완하였고 헌법 역시 허영선생님의 책과 권영성선생님의 책을 합하였습니다. 또한 상법의 경우 회사법은 이태로,이철송선생님의 책으로 미진한 부분을 보충하였고 보험법은 오히려 양승규선생님의 책을 기본서로 잡았습니다. 또한 형소법의 경우에도 배종대,이상돈 교수님의 책을 이재상 교수님의 책에 붙여넣는 등 입체적인 공부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였습니다. 선배들 모두가 시험기간 4일 동안 1독을 할수 있는지가 당락의 관건이라고들 하셨기 때문에 기본서의 양을 줄이면서도 충실한 내용이 될 수 있도록 언더라인과 포스트잇, 여백활용을 통해 단권화작업을 2000년 3월까지는 그럭저럭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같은 작업들이 순조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조로운 생활에 지쳐 고시원과 시립도서관, 학교 도서관과 집앞 독서실을 전전하며 고통스러워하기도 했고 대개의 젊은이들이 그렇듯 이성문제가 주는 괴로움 때문에 시험을 포기할까하는 생각마저 가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럴때마다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며 공부하는 친구들과 선배들이 제겐 이루말할 수 없을 만큼 큰 힘이 되어주었고 너무 흔들릴때면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며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강건함을 주시기를 갈구하였습니다. 이런저런 문제에 직면하고 계신 분들이 많겠지만 수험생활이라는 장도에 누구나 거치게 마련인 장애라는 점을 기억하고 힘겨울때마다 스스로를 추켜세울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침내 3월이 되자 시험은 100일 앞으로 다가왔고 저는 10-3-1작전에 돌입하였습니다. 이는 2차 7과목을 10,3,1일간에 걸쳐 돌려보겠다는 야심찬(?) 계획으로 저자신도 그 계획의 실현가능성에는 무척 회의적일 수 밖에 없는 힘겨운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실행해낸다 면 시험전날과 당일의 1독씩을 합해 단기간동안 총 5회독을 하게되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합격을 담보해낼 수 있는 수험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간에 크게 맘에 상처를 입는 일이 생겨 몇일동안 책을 보지 못하고 술로 밤을 지새던 일도 있었지만 2차 시험 전일까지 휴일도 없이 공부한 결과 그 목표는 단 하루를 넘기고 어설프게나마 모두 달성되었습니다.
마침내 운명의 2차시험일이 다가왔습니다. 재시로 2차시험을 경험해본 선배들이 그 4일간을 '전쟁'이라고들 표현하는데 저 역시도 그 기간을 '전쟁'이라는 용어 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4일간의 팽팽한 긴장감과 정리를 요하는 막대한 분량의 학습량, 그리고 무엇보다 최소 2년의 수험기간을 총결산한다는 부담감까지... 저역시도 그때 4일동안 총 1만페이지가 훨씬 넘는 기본서를 읽고 80매가 넘는 답안을 작성해냈다는 것이 지금도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첫째날은 긴장감에 한숨도 이루지 못한채 시험장에 갔고 마지막 날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이 아파 진통제를 먹으면서 시험에 응해야 했지만 그래도 그 4일을 무사히 넘겼을때의 기쁨과 해방감은 힘든 고비를 넘겨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최대의 보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침내 그렇게 치열하던 4일간의 일정이 끝나고 모든 것은 다시 지극히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시험이 끝난후 제가 방황하던 기간에도 언제나처럼 제자리에서 저를 기다려준 고마운 친구들과 함께 술도 마시고 짤막한 여행을 다녀오기도 하면서 잊고 지냈던 일상의 즐거움들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되도록 시험결과는 잊고 지내려 노력했는데 형사법학회에서 주최하는 모의재판에서 검사역을 맡아 더운 여름 연수원과 법원을 오가며 재판을 준비하던 일과 정종섭교수님의 법정치학을 수강하면서 여러 국회의원님들과 인터뷰도 하고 국회의 연수과정에 참가하여 의회제도의 운영과정을 직접 관찰했던 경험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결국 시험 결과를 발표하던 날 나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에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겸허하게 수용하겠다는 각오를 하였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들려온 합격소식에 지난 2년여의 고통이 결코 헛수고는 아니었다는 생각에 뿌듯한 기쁨을 느낄수가 있었습니다.
시험에 합격하여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을 든다면 주위의 친구들에게 의도하지 않은 용기를 주었다는 점일 것입니다. 강한철 같은 놈도 붙을 수 있다는 생각에 많은 친구들이 용기백배했다는 사실은 제게 많은 기쁨을 가져다주기 충분했습니다.
3.나가면서...
이 글의 제목으로 정한 吳下의 阿蒙이란 삼국지 여몽전의 너무도 유명한 고사에서 따온 것입니다. 한때 불량소년에 불과했던 여몽이 손권이나 장흠과 같은 주위사람들의 부단한 자극과 도움속에서 희대의 명장으로 성장했듯이 저 역시도 어릴적 한때 많이 흔들렸지만 주위에 너무도 훌륭한 선배님들과 동료들이 있었기에 이만큼이라도 이뤄내지 않았나하는 생각에 고마운 맘 어떻게 표시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우선 원하는바 이루도록 허락해주신 좋으신 하나님께 영광돌립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어머니, 누나, 형과 조카들을 비롯한 가족들에게 너무도 큰 감사의 말씀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내 영원한 마음의 벗 재혁, 힘들때면 언제나 쉴자리를 마련해준 호찬, 생의 갈림길에서 언제나 진지한 의논상대가 되어주는 정훈이, 힘든 시간을 함께한 아람이, 언제나 지혜로운 조언자가 되어준 수연이에게도 고마움의 인사를 전합니다. 그리고 물론 언제나 내편이 되어줄 친구들... 상우, 권환, 명석, 상용, 성민, 태겸, 용민, 용묵, 경식, 나영, 홍배 그리고 여기 미처 적지 못한 많은 벗들에게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사를 표합니다.
또 수험초기에 많은 조언 해주신 현섭이형을 비롯하여 효인이형, 재욱이형, 상언이형, 진수형, 현구형, 상돈이형, 은상이형, 용우형, 정렬이형, 성희형, 기대형, 재현이형, 한이형, 정원이 누나, 석진이형, 종훈이형에게도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사의 정을 표하고자 합니다. 앞으로도 부족한 점이 많은 동생을 바른길로 이끌어주시기 삼가 부탁드립니다.
이제 겨우 법조의 말석에 낄 수 있는 자격을 얻었을 뿐인 저로서 겨우 시험에 합격하였다고 하여 자기만족감에 빠지거나 나태해지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제 이미 사법시험이 입신 출세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전문직업인의 자격시험으로 재편된 이상 시험 합격은 단지 법조계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본 자격을 의미할 뿐이지 그 이상은 아니라는 것은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연수원에 입학하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사회의 의사라는 법조인의 책무를 올바로 수행해나갈수 있도록 스스로의 자질을 갈고 닦는 것이야말로 저를 이만큼 키워준 이 사회에 최소한의 보답이라도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이미 제 주위에 계신 분들이나 앞으로 만나뵙게 될 분들 모두의 지도편달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더 이상 吳下의 阿蒙은 아니리.
<1979년 서울생 서울법대 98학번 3학년 재학중>
1. 들어가며...
글을 쓴다는 것 특히 누군가 읽어줄 분들을 의식하면서 글을 쓴다는 것은 스스로의 알몸을 드러내는 듯한 당혹감을 느끼게 하는 일이라고 했던 사람이 진순신인지 시오노 나나미인지 뚜렷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저 역시도 단지 운 좋게 시험에 합격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원고청탁을 받고 이 글을 쓰게 되니 의외로 민망한 느낌이 들어서 덜컥 청탁에 응해버린 스스로에 대해 다소의 원망마저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저보다도 훨씬 훌륭한 인격과 완비된 실력을 가지신 분들 앞에서 법학에 입문한지 겨우 2년여에 불과한 초학도가 이런저런 문제에 대해 왈가왈부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넌센스이지만 그저 힘겨운 수험생활을 계속해 나가고 계시는 여러 수험생분들께 이글이 하나의 청량제로 작용할 수 있다면 하는 바램으로 이글을 시작하려 합니다.
2. 2년간의 수험생활
저 역시도 수험 공부를 하는 동안 많은 선배님들의 합격기를 읽어본바 있고 그같은 글들을 읽으면서 많은 힘과 용기를 얻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분들의 글들을 읽으면서 감동을 받았던 점은 특히 80년대의 선배들이 보여주신 투철한 역사와 사회에 대한 의식이었고 그것이 힘든 수험생활을 견디어내게 하는 동력으로 작용하였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제게는 그같은 경험이 참으로 일천하고 바로 그 점이 이례적으로 어린 나이에 합격했다는 것에 주목하여 시험을 준비하게된 계기를 묻는 분들 앞에서 제가 종종 스스로 부끄러워지는 이유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사실 왜 그렇게 일찍 시험을 시작하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그저 예능분야나 과학방면에 특출한 재능이 있었던 것도 아닌 지극히 평범한 학생으로서 법조인이 되면 밥벌이에는 문제가 없다더라는 식의 속물적인 고려와 아울러 그나마 스스로의 신념과 소신을 지키면서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리라는 막연한 생각 속에 사법시험을 준비하게 된 것이 아닌가하는 정도의 대답밖에는 내놓을 것이 없는 것이 솔직한 현실인 것입니다. 대학에 입학하여 1학기에는 이곳저곳 놀러도 다녀보고 왠지 모를 의무감에 카를 포퍼나 마르쿠제, 에리히 프롬이나 하버마스의 저술들을 뒤적거려보기도 하였지만 뭐랄까 치열한 삶이 결여된 듯한 느낌에서 한번쯤 꿈을 위해 안락과 타성에 젖은 생활을 청산해 봐야하겠다는 대망(?)이 아주 없었던 것만은 아니기도 했습니다만...
결국 반드시 올곧은 법조인이 되어 사회에 일조하겠다는 의무감이나 절실한 생활상의 필요, 하다못해 속물적인 입신출세의 야망조차 없이 시작한 공부인지라 어정쩡한 상태에서의 생활의 연속이 저의 초기수험생활이었던 것 같습니다. 입학 직후 보름인가 아침 7시에 법대도서관에 나와 곽윤직교수님의 '민법총칙'과 폴 케네디의 '강대국의 흥망'을 번갈아가며 읽었던 것 외에는 본격적으로 법서를 보았던 경험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고 그래도 명색이나마 고시공부를 시작한 것은 98년 늦은 여름께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렇듯 느슨하게 시작한 공부였기에 99년의 1차합격은 기대하지도 않았으며 그저 느지막히 학교에 나와 지겨워질때까지 법서를 보는 정도의 순수한 아마추어리즘에 입각한 수험생활이었습니다. 그래도 어릴적에 배운 속독이 효과를 발휘하여 2학기가 시작하기 전까지 곽윤직 교수님의 민법시리즈와 권영성 선생님의 헌법책을 그럭저럭 1회독 할 수 있었습니다.
2학기가 시작되고 왠지 바쁘게 돌아가는 분위기 속에서 저 역시 보다 열심히 공부를 해야겠다는 각오로 생활 태도를 보다 진지하게 가져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황금같은 1학년 여름방학에 친구들과 여행기회조차 가지지 못하고 명색으로나마 공부를 하였는데 그에 대한 보상은 받아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특히 아버지께서 지점장으로 30년이 넘게 봉직해 오시던 제일은행에서 퇴직하심에 따라 침체된 집안 분위기를 전환시킬 수 있는 계기로 시험합격을 나름대로 염두에 두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침 6시 기상을 필두로 여러 선배님들에게 정보를 취합하여 나름대로 짜임새있게 만들어낸 생활계획은 그 시작부터 일그러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재상 교수님의 형법총론...강의조차 들은바 없이 그저 무식하게 돌파해내기에는 참으로 버거운 책이었습니다. 특히 행위론부터 시작되는 그 암호와도 같은 낱말들의 연속은 초학도의 의지력을 시험하기에 충분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곽윤직 교수님의 책을 볼때는 하루에 400페이지씩도 읽을 수 있었으나 형법총론을 읽는데는 너무나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고 심지어는 하루종일 10페이지도 못보고 도서관을 나와야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시 우직함은 어디서나 통하는 것인지 이재상교수님의 책만이 아니라 김일수, 배종대, 정성근 선생님의 책들까지 읽고 난생처음 서브노트 비슷한 것을 하는 정성을 기울인 끝에 9월 한달이 다가서야 이재상 교수님의 총론을 일독하고 범죄체계론의 기초를 세울수가 있었습니다.
어느덧 10월... 맘은 조금씩 조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선택과목은 물론이고 친족상속법이나 형법각론도 채 보지 못한 어설픈 기본 삼법 1회독이 저의 공부량의 전부였고 외국어로 선택하기로 맘을 먹은 중국어 역시 1학기때 교양중국어를 수강한 것 외에는 외국어고등학교때의 실력이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점차 시간은 지나가는 가운데 과연 내가 99년 1차에 응시나마 할 수 있을 것인가에 진지한 의구심이 들기 시작하였지만 이미 친구들 사이에서 소문도 나버릴대로 나버린대다가 그저 포기하기엔 왠지 스스로가 너무 왜소한 듯 느껴졌기 때문에 한번 밀어붙일 수 있는 데까지는 밀어붙여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은 5개월을 최대한 의미있게 보내기 위해 친구들과의 연락도 최대한 피하면서 철저히 공부위주의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하루에 7시간이상씩은 꼭꼭 자야하는 체질이기에 잠을 줄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두 깨어있는 시간만큼은 최대한 밀도 있게 사용하려 노력하였습니다.
이 시기 학교강의를 빼고는 평균잡아 하루에 7시간쯤 공부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10월에서 방학이 시작되는 12월까지 그럭저럭 기본삼법을 2회독씩 더하고 선택과목으로 택한 형사정책과 노동법 기본서들을 볼수가 있었습니다.
12월 중순 경부터 방학이 시작되자 이듬해 1차시험을 대비한 3개월간의 본격적인 레이스가 시작되었습니다. 흔히들 사법시험공부를 그 내용의 방대함으로 인해 '밑빠진 독에 물붓기'라고 표현하는 일이 많은데 저 역시도 그같은 비유가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같은 밑빠진 독에 잠시나마 물이 가득 찬 상태를 유지시키기 위하여는 단기간동안 다량의 물을 쏟아붓는 방법외에는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사법시험 역시 시험이 많이 남은 상태에서의 6개월보다 직전의 6일이 더 중요하다는 여러 선배들의 말이 과장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저역시도 방학이 시작되기 이전까지는 어쩌면 고시생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의 방만한 생활을 하여왔었지만 방학이 시작됨과 동시에 어쩌면 생애 최초일 정도의 진지한 자세로 공부에 매진하였습니다. 이때 처음으로 신림동 고시원이라는 데에 들어가 시험에 대비하였는데 식사시간과 잠자는 시간외에는 되도록 공부하는 시간만으로 채우려 노력하였습니다.
기본적으로 제가 사람을 좋아하는 성미이기 때문에 이때의 고독은 상당히 견디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식사도 되도록 혼자 하려고 했고 고시원에서도 줄곧 혼자였기 때문에 그런 생활이 장기화되자 정신적으로 피폐해져갔습니다. 그때마다 무라카미 하루끼의 미문들을 읽고 음악을 들으면서 스스로의 감정들을 컨트롤해나갔습니다. 물론 도저히 공부가 안될듯한 날에는 친구들을 불러 술을 먹으며 맺힌 감정들을 털어내기도 하였고 1월에는 혼자서 2박3일 일정으로 동해로 겨울바다를 보러 다녀오기도 하였지만 아마도 이때가 제 수험기간동안 가장 힘들었을 때가 아닌가합니다.
더욱이 제가 188cm의 장신이기 때문에 체구에 비해 많이 작은 고시원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것이 큰 고역이었고 고시원에 들어간지 한달이 지나자 온몸이 안아픈 곳이 없는 상태로까지 변했습니다. 마침내 시험을 한달 남기고 황량해진 몸과 마음으로 고시원을 나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머니의 차에 짐과 지친 몸을 싣고 돌아오는 길에 왜그리 씁쓸한 기분이었는지... 그러나 그 와중에도 2개월여의 고시원 생활 끝에 기본삼법 객관식 문제집을 한번씩 풀 수 있었고 선택과목과 외국어에도 어느정도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때 지나치게 에너지를 낭비한 탓인지 시험을 1개월 정도 남긴 시점부터는 도무지 책이 손에 잡히질 않아 맘고생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저 멍하니 방안에 앉아 창문너머로 떨어지는 빗방울만 바라보던 기억들이 생생합니다. 결국 거의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99년 1차 시험에 응시하게되었습니다.
1차 시험일... 1교시만 응시하고 2교시를 포기하고 나오면 1차시험 응시제한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선배의 말을 믿고 신양균 선생님의 형사정책 한권을 달랑 들고 시험장으로 향했습니다. 처음보는 내용 태반인 민법과 철저히 판례위주인 형법문제를 보면서 내가 얼마나 방만하게 공부해왔는지 스스로 부끄럽고 열심히 시험지를 풀고 게신 여러 선배님들 앞에 죄스러운 감정이 들어 당장이라도 시험장을 빠져 나오고 싶은 일념뿐이었습니다. 실제로 1교시가 끝나자 책을 싸서 시험장을 나올 생각마저 하였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미 저지른 일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을 지는 것이 온당하다는 생각에 2교시까지 최선을 다해 응시하여야겠다고 마음을 다잡게 되었고 남은 시간동안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시험에 응하였습니다.
1차시험이 끝난 후에는 제법 여유있는 보통 대학생의 생활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듬해 1차시험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1년이나 남은 상황에서 그다지 서두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고 그간에 소원했던 인간관계도 다시 돈독히 하고 싶었기 때문에 발표일까지 참으로 여유있게 친구들과 어울려 지냈습니다. 물론 이때 어설프게 나마 2차 시험 과목 가본서들을 일독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었지만 그 실행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친구들과 밤새도록 술을 마시거나 게임방에서 게임에 몰두하거나 하는 일이 잦았고 신학기 봄의 들뜬 분위기 속에 그저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랬기에 발표일이 다가와도 전혀 떨리는 기분이 없었으며 커트라인이 82점을 상회한다는 말을 들었을때도 '엄청나네... 열심히 해야겠군..'이라는 정도의 감정외에는 별다른 느낌이 없었습니다.
시험 합격 발표당일날에도 합격에의 기대가 전혀없는 상태에서 그저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놀고 있었는데 과친구가 1차합격자란에 내이름이 들어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어서 찾아본 결과 제가 1차시험에 합격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합격자란을 찾아볼때만 해도 십중팔구는 동명이인일 것이라는 생각이었으나 명단의 이름과 수험번호가 정확히 저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정말 뛸 듯이 기뻤습니다. 제 친구들은 '저놈은 복권당첨된거나 다름없이 1차에 붙은거야'라고 놀려댔는데 제 생각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정말 기대조차 하지 않던 와중에 합격하였기에 이때의 일이 지난 수험기간동안 가장 기뻤던 일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다시 당장 두달 앞으로 다가온 2차시험준비로 마음이 무거워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1차가 끝난 이후 아예 2차 공부를 안해둔 상태였기 때문에 과연 내가 이듬해 2차에라도 합격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에 점차 초조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99년의 2차시험에는 응시조차 안하기로 하고 맘편히 이듬해 2차에 대비하여 장기적인 수험전략을 세워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외국어나 선택과목 선정, 시험직전의 마무리 공부 상태에 따라 변수가 많은 1차시험에 비해 2차시험은 예측가능한 결과를 내는 것이 사실인 것 같고 또한 성실한 공부가 전제된다면 합격의 가능성 역시 1차보다 훨씬 높은 것 같습니다. 저는 2차를 준비할 때 스터디의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수험정보의 취합과 구성원 상호간의 선의의 경쟁을 통한 의욕 고취, 심리적인 안정이라는 차원에서 2차때는 스터디의 필요성이 절대적인 것 같습니다. 여담으로 저희 스터디의 자랑을 좀 하자면 42회 최연소합격의 영예를 안은 아람이를 비롯하여 서울과학고 수석졸업과 서울의대 수석입학에 빛나는 상언이형, 천재적인 두뇌를 자랑하는 재욱이형, 지덕겸비의 효인이형에 이르기까지 기라성 같은 동료와 선배들이 대부분이어서 잠시도 긴장을 늦출수가 없었습니다. 스터디는 겨울방학 전까지 각자 2회독씩하는 것을 목표로 그 이후부터 3월까지 연수원에 다니시는 선배들의 지도로 모의시험과 첨삭을 내용으로 하게끔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겨울방학 전까지 저는 학원강의를 듣기도 하고 여러논문들을 찾아보기도 하면서 기본서를 충실히 읽는데 주안을 두고 학습하였습니다. 남들이 보는 수험가의 요약서를 철저히 배제하고 양이 좀 많아도 정평이 나있는 교수님들의 교과서를 가지고 공부를 하였는데 지금 생각해도 그것은 옳은 결정이었다고 봅니다. 교수님들의 기본서가 약간 산만한 느낌이 든다해도 이는 스스로의 목차구성과 언더라인으로 충분히 보완이 가능한 것이고 양이 방대하다 하여도 이는 오히려 깊이 있는 공부라는 측면에서 장점이 될 수 있는 것이지 문제점이 될 수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수험과정에서는 필요없는 부분이라면 과감히 생략하는 결단력도 필요함은 물론이겠습니다만...
그래도 기본서에는 미진한 부분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수험가의 자료나 다른 교수님들의 교과서를 가지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소위 단권화 작업은 필수적인 것이라고 사료됩니다. 저 역시도 예컨데 민법은 기본서로 잡은 곽윤직교수님의 책에 김형배 선생님의 교과서로 보완하였고 헌법 역시 허영선생님의 책과 권영성선생님의 책을 합하였습니다. 또한 상법의 경우 회사법은 이태로,이철송선생님의 책으로 미진한 부분을 보충하였고 보험법은 오히려 양승규선생님의 책을 기본서로 잡았습니다. 또한 형소법의 경우에도 배종대,이상돈 교수님의 책을 이재상 교수님의 책에 붙여넣는 등 입체적인 공부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였습니다. 선배들 모두가 시험기간 4일 동안 1독을 할수 있는지가 당락의 관건이라고들 하셨기 때문에 기본서의 양을 줄이면서도 충실한 내용이 될 수 있도록 언더라인과 포스트잇, 여백활용을 통해 단권화작업을 2000년 3월까지는 그럭저럭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같은 작업들이 순조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조로운 생활에 지쳐 고시원과 시립도서관, 학교 도서관과 집앞 독서실을 전전하며 고통스러워하기도 했고 대개의 젊은이들이 그렇듯 이성문제가 주는 괴로움 때문에 시험을 포기할까하는 생각마저 가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럴때마다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며 공부하는 친구들과 선배들이 제겐 이루말할 수 없을 만큼 큰 힘이 되어주었고 너무 흔들릴때면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며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강건함을 주시기를 갈구하였습니다. 이런저런 문제에 직면하고 계신 분들이 많겠지만 수험생활이라는 장도에 누구나 거치게 마련인 장애라는 점을 기억하고 힘겨울때마다 스스로를 추켜세울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침내 3월이 되자 시험은 100일 앞으로 다가왔고 저는 10-3-1작전에 돌입하였습니다. 이는 2차 7과목을 10,3,1일간에 걸쳐 돌려보겠다는 야심찬(?) 계획으로 저자신도 그 계획의 실현가능성에는 무척 회의적일 수 밖에 없는 힘겨운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실행해낸다 면 시험전날과 당일의 1독씩을 합해 단기간동안 총 5회독을 하게되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합격을 담보해낼 수 있는 수험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간에 크게 맘에 상처를 입는 일이 생겨 몇일동안 책을 보지 못하고 술로 밤을 지새던 일도 있었지만 2차 시험 전일까지 휴일도 없이 공부한 결과 그 목표는 단 하루를 넘기고 어설프게나마 모두 달성되었습니다.
마침내 운명의 2차시험일이 다가왔습니다. 재시로 2차시험을 경험해본 선배들이 그 4일간을 '전쟁'이라고들 표현하는데 저 역시도 그 기간을 '전쟁'이라는 용어 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4일간의 팽팽한 긴장감과 정리를 요하는 막대한 분량의 학습량, 그리고 무엇보다 최소 2년의 수험기간을 총결산한다는 부담감까지... 저역시도 그때 4일동안 총 1만페이지가 훨씬 넘는 기본서를 읽고 80매가 넘는 답안을 작성해냈다는 것이 지금도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첫째날은 긴장감에 한숨도 이루지 못한채 시험장에 갔고 마지막 날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이 아파 진통제를 먹으면서 시험에 응해야 했지만 그래도 그 4일을 무사히 넘겼을때의 기쁨과 해방감은 힘든 고비를 넘겨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최대의 보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침내 그렇게 치열하던 4일간의 일정이 끝나고 모든 것은 다시 지극히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시험이 끝난후 제가 방황하던 기간에도 언제나처럼 제자리에서 저를 기다려준 고마운 친구들과 함께 술도 마시고 짤막한 여행을 다녀오기도 하면서 잊고 지냈던 일상의 즐거움들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되도록 시험결과는 잊고 지내려 노력했는데 형사법학회에서 주최하는 모의재판에서 검사역을 맡아 더운 여름 연수원과 법원을 오가며 재판을 준비하던 일과 정종섭교수님의 법정치학을 수강하면서 여러 국회의원님들과 인터뷰도 하고 국회의 연수과정에 참가하여 의회제도의 운영과정을 직접 관찰했던 경험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결국 시험 결과를 발표하던 날 나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에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겸허하게 수용하겠다는 각오를 하였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들려온 합격소식에 지난 2년여의 고통이 결코 헛수고는 아니었다는 생각에 뿌듯한 기쁨을 느낄수가 있었습니다.
시험에 합격하여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을 든다면 주위의 친구들에게 의도하지 않은 용기를 주었다는 점일 것입니다. 강한철 같은 놈도 붙을 수 있다는 생각에 많은 친구들이 용기백배했다는 사실은 제게 많은 기쁨을 가져다주기 충분했습니다.
3.나가면서...
이 글의 제목으로 정한 吳下의 阿蒙이란 삼국지 여몽전의 너무도 유명한 고사에서 따온 것입니다. 한때 불량소년에 불과했던 여몽이 손권이나 장흠과 같은 주위사람들의 부단한 자극과 도움속에서 희대의 명장으로 성장했듯이 저 역시도 어릴적 한때 많이 흔들렸지만 주위에 너무도 훌륭한 선배님들과 동료들이 있었기에 이만큼이라도 이뤄내지 않았나하는 생각에 고마운 맘 어떻게 표시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우선 원하는바 이루도록 허락해주신 좋으신 하나님께 영광돌립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어머니, 누나, 형과 조카들을 비롯한 가족들에게 너무도 큰 감사의 말씀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내 영원한 마음의 벗 재혁, 힘들때면 언제나 쉴자리를 마련해준 호찬, 생의 갈림길에서 언제나 진지한 의논상대가 되어주는 정훈이, 힘든 시간을 함께한 아람이, 언제나 지혜로운 조언자가 되어준 수연이에게도 고마움의 인사를 전합니다. 그리고 물론 언제나 내편이 되어줄 친구들... 상우, 권환, 명석, 상용, 성민, 태겸, 용민, 용묵, 경식, 나영, 홍배 그리고 여기 미처 적지 못한 많은 벗들에게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사를 표합니다.
또 수험초기에 많은 조언 해주신 현섭이형을 비롯하여 효인이형, 재욱이형, 상언이형, 진수형, 현구형, 상돈이형, 은상이형, 용우형, 정렬이형, 성희형, 기대형, 재현이형, 한이형, 정원이 누나, 석진이형, 종훈이형에게도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사의 정을 표하고자 합니다. 앞으로도 부족한 점이 많은 동생을 바른길로 이끌어주시기 삼가 부탁드립니다.
이제 겨우 법조의 말석에 낄 수 있는 자격을 얻었을 뿐인 저로서 겨우 시험에 합격하였다고 하여 자기만족감에 빠지거나 나태해지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제 이미 사법시험이 입신 출세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전문직업인의 자격시험으로 재편된 이상 시험 합격은 단지 법조계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본 자격을 의미할 뿐이지 그 이상은 아니라는 것은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연수원에 입학하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사회의 의사라는 법조인의 책무를 올바로 수행해나갈수 있도록 스스로의 자질을 갈고 닦는 것이야말로 저를 이만큼 키워준 이 사회에 최소한의 보답이라도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이미 제 주위에 계신 분들이나 앞으로 만나뵙게 될 분들 모두의 지도편달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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