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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마오의 중국에 28개월 억류됐던 로이터 특파원 앤서니 그레이

작성자알자지라|작성시간25.11.01|조회수44 목록 댓글 0
중국 베이징을 다시 찾아 자금성 앞에서 포즈를 취한 앤서니 그레이 가족 컬렉션 로이터

영국 기자 앤서니 그레이는 1964년 로이터 통신 입사 면접에서 왜 국제 뉴스를 취재하고 싶은지 질문을 받았다. 중요한 일들에 엮이고 싶어서라고 답했다. 그 소원은 파멸적으로 이뤄졌다.

3년 후 로이터 통신의 베이징 특파원이었던 그레이는 중국과 영국의 장기 불화에 볼모가 됐다. 영국 왕실의 홍콩 총독부가 공산주의 기자들을 체포하자 중국 당국은 그레이를 가택연금하는 보복을 가했다. 그의 시련은 2년 4개월이나 지속됐고,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이 됐다.

1969년 10월 마침내 풀려난 그는 언론에 "여러 차례 아주 우울한 기분을 느꼈지만 절망하지는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그레이는 그 뒤로도 계속 BBC에서 일했고, 여러 유명 소설을 썼으며, 다른 인질들을 돕기 위해 자선단체를 설립했다. 그는 자신을 구금한 이들에 원한을 품지 않았지만 독방에 갇힌 트라우마는 평생 이어졌다. 

파킨슨병을 앓던 그레이가 지난 11일(현지시간) 영국 노리치에서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사실이 뒤늦게 고인의 두 딸 루시와 클라리사가 확인해줬다고 로이터가 30일 보도했다.

 

'중요한 일에 엮이고 싶다'

앤서니 키스 그레이는 1938년 7월 5일 노리치에서 운전사 알프레드 그레이와 상점 주인 아그네스 니 불런트의 둘째 자녀로 태어났다. 부모의 이혼 후 어머니 손에 자라난 그레이는 일생의 대부분을 부친과 소원한 채로 지냈다. 운동에 소질 있었던 그는 한때 친구의 어머니로부터 "안절부절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 정작 그는 그 별명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16세에 학교를 그만둔 후 그는 글래스고에서 공군 복무를 했다. 안경이 필요하다는 우려 때문에 조종사가 되지 못했다. 소설을 쓰고 싶다는 또 다른 희망을 품고 있던 그레이는 먼저 삶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 한다고 느껴 저널리즘을 선택했다.

1960년에 그는 노리치의 이스턴 데일리 프레스 신문에 입사했는데 올해 초 사망한 프레드릭 포사이드와 겹쳤다. 두 기자 모두 소설을 쓰기 전에 로이터에 합류했다.

통신사는 먼저 그레이를 동베를린으로 파견했고, 그 전에 그는 런던에서 셜리 맥귄이라는 교사와 함께 독일어 수업을 들었다. 그녀는 나중에 그의 아내가 됐다.

베를린을 본거지로 삼은 그레이는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헝가리, 불가리아, 폴란드를 여행했다. 그는 소련 요원들에게 여러 차례 미행 당해 심문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의 업적 중에는 러시아에 인질로 잡혀 있던 영국인 강사 제럴드 브룩을 석방하기 위해 포로 교환이 진행 중이라는 단독 기사를 쓴 것이 있었다. 실제 교환이 이뤄진 것은 몇 년 뒤였다.

 

'특파원의 꿈'

1967년 1월의 어느 날 밤, 로이터 통신의 한 간부가 전화를 걸어 베이징에 갈 것인지 물었다. 그레이는 1970년 저서 '북경의 인질'에서 "그것은 특파원의 꿈이었다"고 돌아봤다. 당시 문화대혁명으로 경련을 일으켰던 중국 수도는 연일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었지만 서방 기자는 단 4명뿐이었다.

"나는 대답하고픈 열정을 억제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나는 스물여덟 살이었다. 나는 지나치게 열성적이고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맞다, 그 아이디어가 꽤 마음에 들었다."

그레이는 중국에 대해 특별한 지식이 없었다. 그가 가진 것은 세계의 또 다른 공산주의 지역인 동유럽을 취재한 18개월의 경험뿐이었다.

출발하면서 그는 열차 좌석에 앉아 공장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지, 논의 벼 싹이 피어오르는지 여부를 통해 국가의 상태를 측정하라는 조언을 받았는데, 그는 나중에 "당시 중국 상황에 외부인들이 얼마나 무지한지 드러낸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그의 첫 번째 보도 중 하나는 중국 남부에 기근이 발생했다고 주장하는 러시아 뉴스 게시판을 폭로한 것이었다. 몇 주 뒤 그가 메이데이 축하 행사를 취재할 때 마오쩌둥이 몇 발자국 떨어진 곳을 지나갔다. 군중의 소란에 휘말린 그레이는 마오 주석을 촬영하는 데 실패했다.

상념에 잠긴 앤서니 그레이. 그레이 가족 컬렉션 로이터

 

'그레이를 목매달자!'

그레이의 자유는 1967년 7월 21일에 갑자기 끝났다. 외교부 관리는 홍콩에서의 중국 특파원에 대한 "불법 박해"와 "파시스트 잔학 행위"를 고려해 앞으로 집 밖에 나갈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고용주가 영국 정부로부터 독립적이라고 항의했지만 소용 없었다.

그레이는 그 날 저녁 일기에 가택 연금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 참신함은 내가 우울함을 느끼는 것을 막았다. 그 조치가 얼마나 부당한지 조금씩 느낀다."

자금성 가장자리에 있는 로이터 통신의 직원이 있는 2층짜리 저택에서 4주 동안은 비교적 정상적이었다. 8월 18일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 날 밤, 홍위병들이 집에 들이닥쳐 그에게 페인트를 칠하고 마당으로 끌고 갔고, 그의 팔은 등 뒤로 비틀리고 머리는 강제로 숙여졌다. 침입자들은 그의 고양이 밍밍을 죽인 뒤 "그레이를 목매달자! 그레이를 목매달자!"라고 외쳐댔다.

자정쯤 그들은 떠났다. 그는 "온몸이 아프고 숨이 차서 오랫동안 앉지 못했다"고 일기에 적었다. 

그 뒤 구금 조건은 훨씬 가혹해졌다. 경비원들은 그레이를 작은 방에 가뒀고, 그 벽은 마오주의 선전으로 도배됐다.

펜은 그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것으로 그는 비밀리에 일기를 쓰고, 단편 소설을 쓰고, 십자말풀이를 편집했다. 그는 1975년 시집 '북경의 십자말풀이' 서문에 "나는 진부한 표현과 구어체 문구를 떠올리며 똑똑하거나 감탄을 자아내는 말장난을 단서로 만들어내며 시간의 공허함을 채우곤 했다"고 썼다.

 

'체면 싸움에 휘말리다'

영국 정부는 중국과의 조용한 협상을 고집했다. 그러나 이런 접근 방식이 결실을 맺지 못하자 그레이의 동료들은 그의 석방을 확보하기 위해 훨씬 더 공개적인 캠페인을 시작했다. 키가 크고 날씬한 기자는 신문 1면에 고정된 사람이 됐다.

마침내 기다림이 끝났을 때, 한 중국 관리는 그에게 공산당 기자들의 석방 덕분에 자유를 얻었다고 말했다. 그레이는 나중에 "나는 북경이 홍콩의 뉴스 종사자들 자체에 대해 필사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나는 단순히 비타협적인 두 정부의 체면 싸움에 휘말렸을 뿐"이라고 돌아봤다.

사회에 다시 적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는데, 특히 그가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영국이 너무 많이 변했기 때문이다. 기분전환을 위한 마약이 넘쳐났고, 미니스커트, 장발 남성, 뮤지컬 '헤어'와 함께 무대 위의 누드도 많았다.

그의 지위도 바뀌었다. 그레이는 수십 년 뒤 저서 '인질 핸드북'에 "기자단 무리와 함께 안전하게 사냥하는 데 익숙했던 전직 뉴스 사냥개는 따로 떨어진 여우, 사냥 당하는 신세가 됐다"고 적었다.

그는 계속해서 BBC 라디오의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여러 스릴러를 썼다. 그러나 1977년 카이로에서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홀든이 의문사하자 그레이는 소설에서 가볍게 상상했던 일이 소름끼치는 실제 사건으로 벌어졌다며 스릴러 장르를 접었다. 그 뒤 그는 중국, 베트남, 일본을 배경으로 한 방대한 역사 소설을 썼다. 그의 베스트셀러 작품은 '사이공'이었다.

 

'나는 극단으로 간다'

그레이는 저널리즘과 몇 가지로 관심을 넓혔다. 1983년에 그는 1967년 바다에서 익사한 것으로 널리 알려진 호주의 해롤드 홀트가 실제로 중국 잠수함을 타고 호주를 탈출했다고 주장하는 책 '총리가 스파이였다'를 썼다. 극도로 반공주의자인 홀트가 38년 동안 중국을 대신해 스파이 활동을 해왔다고 그레이는 썼다.

홀트의 전기 작가 팀 프레임은 이 이론을 "완전한 날조"라고 불렀다. 그레이 자신은 중국인 정보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전직 호주 해군 장교에 의존해 자신의 설명에 대해 "그것이 사실이라고 보장할 수 없다"고 썼다.

미확인 비행 물체에 관한 1996년 BBC 라디오 다큐멘터리는 그를 더욱 정통적이지 않은 견해로 이끌었다. "내 조사가 끝날 무렵, 나는 개인적으로 외계 우주선이 우리를 방문하고 있다고 확신한다"고 방송에서 단언했다. 

그 후 그레이는 인류가 외계 과학자들에 의해 창조됐다고 주장한 프랑스인 라엘을 추종했다. 라엘리즘은 스스로를 무신론 종교로 정의한다. 프랑스 의회 조사에서는 사이비 종교라고 규정했다.

라엘의 2005년 저서 'Intelligent Design' 서문을 쓰게 된 그레이의 믿음은 한동안 모든 것을 소모하게  했다. 그의 재정, 평판, 정신건강을 집어삼킬 위협을 가했고, 후자는 이미 베이징에서의 경험 때문에 크게 발걸음을 늦추지 못했다.

포로로 잡혀 있던 지 40년이 지난 후, 그레이는 마침내 정신과 의사를 만나 우울증을 빠져나왔다. 그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을 받았다.

밝은 순간에는 딸 루시와 함께 빌리 조엘의 가사 '자기야. 내가 왜 극단으로 가는지 모르겠어/ 너무 높거나 너무 낮아서 중간이 없어'에 얼마나 공감했는지 얘기하며 웃곤 했다. 그레이는 개방적이지만 고민스러운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는 또 "놀랍도록 어리석은" 사람일 수도 있다고 다른 딸 클라리사는 말했다. 두 딸 모두 기자다. 루시의 자녀 에디와 오스카까지 유족으로 남겼다.

 

'그래피티의 법칙?'

용서를 설교하면서 그레이는 영국과 중국 당국뿐만 아니라 가장 낮은 시기에도 그에게 기사를 요구했던 동료 언론인들에 대한 분노를 내려놓았다. 그는 'Hostage Action Worldwide'과 'Planet of Forgiveness'를 비롯한 여러 자선단체를 설립했다.

영국 사우스 다운스에 있는 집에 앉아 시바스 리갈을 손에 들고 존 윌리엄스의 '카바티나'를 듣는 것이 그의 행복에 대한 생각이었다.

그는 셜리와 22년 동안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 별거 후, 그리고 1995년 그녀가 암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둘은 친한 친구로 남아 있었다. 그는 매주 그녀를 방문해 함께 십자말풀이를 풀곤 했다. 좋아했던 단서 중 하나가 '그래피티의 법칙(The law of graffiti)?였지만 좀처럼 독자에게 알려주지 않았던 그의 답은 '벽에 쓰기(Writing on the wall)'였다. 반세기 전 네 벽 전체가 마오주의 진언으로 뒤덮인 감방에 갇혔을 때의 이 말장난은 그의 얼굴에 미소를 가져다줬다.

아내 셜리 맥귄과 함께 십자말풀이를 하며 미소 짓는 앤서니 그레이. 그레이 가족 컬렉션 로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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