퓰리처상을 수상한 뉴질랜드계 미국 언론인이자 전쟁 특파원이었던 피터 아넷이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고 영국 BBC가 AP 통신과 CNN 등 고인이 일했던 미국 언론들의 보도를 인용해 18일(현지시간) 전했다. 고인은 2001년 9월 11일 미국에 대한 테러 공격을 배후에서 조종하기 4년 전인 1997년 서방 매체 기자로는 처음 오사마 빈 라덴과 인터뷰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아넷은 1996년 AP의 베트남 전쟁 보도로 국제 보도상을 수상했다. 그는 또 CNN 소속으로 1차 걸프 전쟁을 현장에서 생생하게 보도해 얼굴을 널리 알렸다. 수십 년에 걸친 경력 내내 이라크, 베트남, 엘살바도르 등 여러 국가의 분쟁 현장을 취재했다.
뉴질랜드 출신인 그는 전날 캘리포니아 뉴포트 비치에서 가족과 친구들에 둘러싸여 세상을 떠났다고 아들이 취재진에게 밝혔다. 그는 전립선암 호스피스 치료를 받고 있었다.
아넷은 1962년부터 1975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베트남에서 AP 통신 특파원으로 근무했으며, 종종 병사들과 함께 임무를 수행했다. 2013년 한 강연에서 그는 베트남에서 지도를 읽던 군인이 총에 맞아 죽는 장면을 회상했다. 아넷은 미국도서관협회 강연 도중 "대령이 그것을 들여다볼 때, 총알이 지도를 뚫고 그의 가슴을 관통하는 네 발의 큰 총성이 들렸다. 내 얼굴에서 몇 인치 떨어진 곳이었다"면서 "그가 내 발치에 쓰러졌다"고 얘기했다.
그는 1981년 AP를 떠나 미국 CNN에 합류했다. AP에 따르면, 그는 바그다드에 머무른 몇 안 되는 서방 기자 중 한 명이었으며, 이 도시에서 처음 방송하다 미사일과 공습 사이렌 소리에 방해받았다. 그는 생방송 도중 "내 바로 근처에서 폭발이 있었다. 여러분은 들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외쳤다.
이라크에 머무르는 동안 그는 사담 후세인 당시 대통령을 인터뷰했다. 로어노크 타임스에 이 경험을 기고하며 아넷은 "상황이 허락하는 한 질문에 대해 최대한 강경하게 대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바그다드의 도살자'라 불렀던 그를 만난다는 생각에 위축되지 않았다. 나는 그가 내게 더 나쁜 짓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바그다드에 대한 끊임없는 폭격이 (인터뷰를) 위협하는 것이었다"고 돌아봤다.
빈 라덴을 아프가니스탄의 비밀 은신처에서 인터뷰해 처음 서방에 알린 언론인이기도 했다. 여러 미국 언론 보도에 따르면, 빈 라덴은 자신의 계획에 대해 "신의 뜻이라면, 언론에서 보게 되고 들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넷은 이후 NBC에서 근무했는데 이라크 국영 텔레비전 인터뷰를 통해 미국의 군사 전략을 비판했다는 시비를 불러일으킨 뒤 NBC에서 해고되며 다시 한번 이름을 알렸다.
그는 몇 시간 후 데일리 미러에 채용됐는데, 해고된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영국 신문에 "나는 바그다드에서 벌어지는 일의 진실을 보고하며 이에 대해 사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고했다.
1934년 11월 13일 뉴질랜드 리버턴에서 태어난 아넷은 이후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고 2014년부터 남부 캘리포니아에 거주했다. AP에서 여전히 근무하는 옛 동료 에디스 레더러는 회사 부고 기사에 "피터 아넷은 그의 세대 가운데 가장 위대한 전쟁 기자 중 한 명이었으며, 용감하고 두려움 없으며 아름다운 작가이자 이야기꾼이었다. 그의 인쇄물과 카메라 앞에서의 보도는 앞으로도 여러 세대 언론인 지망생과 역사가들에게 유산으로 남을 것"이라고 적었다.
베트남에서 아넷과 함께 일했던 은퇴 사진작가 닉 우트는 그를 "형제 같다"면서 "그의 죽음은 내 인생에 큰 구멍을 남길 것"이라고 AP에 밝혔다.
유족으로는 부인 니나 응우옌과 자녀 앤드류, 엘사를 남겼다.
RealityTea에 따르면 피터가 CNN을 떠난 것은 부정확한 보도 때문이었다. 1971년에 그는 1년 전 라오스에서 탈영한 미군에게 치명적인 신경가스가 사용됐다고 전했다. 하지만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그런 내용이 담긴 보고서를 읽었을 뿐, 자신이 지어낸 얘기가 아니라고 극구 부인했지만 그의 명성과 경력에 심각한 오점을 남겼다. CNN은 기사를 철회해야 했다.
2007년, 아넷은 중국 산터우 대학에 저널리즘 강사로 합류한 뒤 2014년에 은퇴했다.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 수도 사이공(현재 호치민) 미국 대사관에서 헬기 한 대가 탈출하는 사진은 미국의 패배로 베트남 전쟁이 끝났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 됐다. 남베트남 정부의 종용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사이공에 남아 있었던 아넷과 조지 에스퍼, 맷 프랜졸라, 사진작가 사라 에링턴 등 AP 통신 사이공 지국 기자들이 촬영한 것이었다.
당시 아넷은 "베트남 전쟁을 13년간 취재하면서 오늘처럼 끝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본사에 기사를 송고한 것을 50년 지나서도 분명히 기억했다. "'사이공 함락으로 20년간의 전쟁이 끝났다. 5만 8000명 이상의 미국인과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베트남인이 사망한 전쟁이 끝났다'는 기사를 하루 종일 보낸 뒤 통신선은 끊어졌다"고 돌아봤다.
아넷은 2003년 한국언론재단의 초청을 받아 강연한 일이 있다. 이희용 연합뉴스 기자는 그가 종군 기자를 택하게 된 계기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고 보도했다.
"나는 종군기자로 유명해졌지만 역설적이게도 군대에 가지 않기 위해 21살 때 조국 뉴질랜드를 떠났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문사에서 일하던 중 한국전쟁이 터졌는데, 당시에는 의무복무제여서 징집되면 UN군의 일원으로 파병될 처지에 놓여 있었다. 나는 호주로 건너갔다가 시드니에서 캐나다 여성을 만나 함께 영국으로 향했다. 그러나 도중에 들른 태국의 매력에 흠뻑 빠져 나만 혼자 남고 말았다. 여기서 영자지 기자 일을 시작했는데 2차대전과 한국전쟁의 종군 경험을 지닌 동료들을 만나 깊은 감동을 받았다. 나를 결정적으로 종군기자의 길로 이끈 것은 1966년 라오스의 쿠데타를 취재한 것이었다. AP의 파트타임 기자로 일하던 나는 모든 통신시설이 두절돼 혼자 메콩강을 헤엄쳐 건넌 뒤 태국에서 본사로 전화해 쿠데타 사실을 특종 보도했다. 이후 베트남전을 거치면서 내 자질이 어떤 쪽에 유용한지 깨닫게 됐고 이후 본격적인 종군기자의 길로 나섰다.
내가 보수파로부터는 악명을 얻고 있고 반대쪽에서는 미국 정부에 도전하는 영웅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기자의 가장 큰 무기는 사실이며 언론과 정부는 긴장관계에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