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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진사가 어느정도 직책인지요?

작성자조대주(청)사무국장|작성시간10.08.12|조회수1,355 목록 댓글 0

진사는 벼슬이름이 아닙니다.

 

조선의 소과든

 

성균관 입학과 대과를 치를수 있는 자격을 주는 시험이었으며,

 

유교경전을 시험보는 명경과에 합격하면 생원,

시부책과 한문학을 시험보는 제술과에 합격하면 진사의 호칭을 받았습니다.

 

무과의 경우 시험에 합격하면 '선달'의 호칭을 받았습니다.

 

조선시대에는 관직의 수는 크게 변화가 없었으면서도,

정기시험인 식년시외에 알성시, 별시들을 치뤄,

많은 수의 예비문인관료들을 배출하였고,

 

대과 합격자들도 상위 몇%를 제외하고는 벼슬길이 막혀버리는 황당한 시스템이라...

 

대부분의 생원, 진사, 선달들은

과거합격을 통해 근근히 양반신분을 유지하는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소과합격자명단인 사마방목에 이름은 오르나,

그 이름자체가 벼슬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사(進士)
고려·조선시대 진사과(進士科;製述科)에 합격한 사람에게 주던 칭호.
958년(광종 9)에 과거제도를 처음으로 실시, 시(詩)·부(賦)·송(頌) 및 시무책(時務策)으로 진사를 뽑기 시작한 것이 시초였다.
때에 따라 시험 과목과 선발 인원이 일정하지 않았다.
진사는 생원과 마찬가지로 3년마다 실시하는 식년시(式年試)와 국가 또는 왕실에 큰 경사가 있을 때 수시로 실시하는 증광시(增廣試)의 소과에서 각각 100명이 배출되었다.
시험에는 초시(初試)와 복시(覆試)가 있는데, 한성시(漢城試)에서 200명, 지방의 향시(鄕試)에서 700명을 뽑아, 서울에서 2차시험인 복시를 보게 하여 100명을 뽑았다.
그뒤 경기의 향시를 폐지하고 한성시를 두 곳으로 나누어서 보게 하였다. 이렇게 복시에 합격한 사람들에게 1438년(세종 20)부터는 그 합격증서로 백패(白牌)를 주었다.
이들은 생원과 더불어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고, 문과에 응시, 급제한 뒤 관직에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성균관에 들어가지 않고 참봉·훈도·오위장 등 종9품직에 제수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서 경학(經學)보다 사장(詞章)을 중시하는 풍조에 따라 그 전과는 달리 진사의 사회적 존경도가 생원보다 높았고, 특히 후기에 과거가 권문세가의 농락을 받게 되자 지방의 과거 응시자들은 거의가 진사 합격에만 뜻을 두어 대과(大科)에 응시하지 않는 풍조가 생겼다.
한편 진사가 선비의 존칭으로 보편성을 띠자 생원도 진사 칭호를 사용하였다.

■ 과거제도

■ 초시 : 각도 감영에서 행하는 향시나 중아에서 행하는 생진과 초시를 조홀강이라 한다. 이 조홀강에 급제하면 조홀첩을 주는데, 이것이 있어야 생진과에 응시할 자격이 부여도니다. 이 조홀강을 초시라 하며 여기에 급제하면 이초시·김초시 라고 불러준다.

■ 생진과 : 각 지방에서 조홀강에 급제한 사람들이 모여들어 4년 만에 한번씩 과거를 보이는데, 4년 1시를 식년시라고 하며 子(자)·午(오)·卯(묘)·酉(유)년에 시행하는 것이다.

생원과 - 경서를 암송하게 하고 또 거기에 대한 뜻을 물어본다. 시험관은 응시자를 불러 시험을 보아 그 공부 정도를 通(통)·略(약)·祖(조)·不通(불통)의 네 가지로 나누어 通은 2점, 略은 1점, 祖는 반점, 不通(불통)은 0점으로 하여 총 14점 반 이상에 달하는 자를 급제로 했다. 이 시험에 통과한 사람을 이생원 김생원이라 했다.

진사과 - 제술과 라고도 한다. 본과 시험에 시험관이 제목을 내고 시를 짓게 하여 시간을 엄수토록 명한다. 응모자들은 각자 준비된 필묵으로 시를 지어내면 시험관들은 그 시를 모아서 우선 글만 잘 지었으면 上上, 上中, 上下, 二上, 二中, 二下, 三上, 三中, 下下 아홉 단계로 정한 뒤 上上은 9점 ~ 下下는 1점으로 등분하여 채점한다. 대개 二下(4점)까지를 택하여 급제로 정했다. 이 시험에 들은 사람을 최진사, 장진사라 했다.
** 생진과 급제자에게는 그 증서를 백패 즉 백지에다 써서 준다.

■ 대과 : 지방에서 생진과와 진사과에 합격한 사람으로 대과 즉 문과에 응시하려는 사람은 성균관에 입학을 허가하였다. 4년에 한번씩 생진과를 통해 배출된 100명의 생원과 진사를 배출하였던 것이다.

방식 : 제1차 시험 초장 - 경서암송, 제2차 시험 중장 - 서부, 제 3차 시험 - 전시(이 전시 결과 - 33명의 등급을 갑·을·병 3등급으로 나누어 선발) ** 대과에 급제하면 그 증서를 홍패 즉 홍색지에 써 주었음.





3년마다 한 번씩 식년(式年 : 子·卯·午·酉年)에 실시되며, 초시(初詩) · 복시(覆詩) · 전시(殿詩)의 3단계가 있다. 초시에서는 서울·지방에서 270명, 복시에서는 28명을 뽑았으며, 마지막 전시에서는 이들 28명으르 갑과(甲科) 3명, 을과(乙科) 5명, 병과(丙科) 20명의 등급으로 구분하였다.
전시 합격자에게는 홍패(紅牌)라는 합격증서를 주고「출신(出身)」이라고 불렀다.

홍패 : 붉은 바탕의 종이에 합격자의 성적·등급·성명 등을 먹으로 썼다.

백패 : 흰 종이에 관명(官名) · 성명 · 과별(科別 : 생원 · 진사 · 잡과 등) 성적등급(成積等級)이 적혀 있는데, 생원은 동편에 진사는 서편에 줄지어 서서 국왕에게 사배(四排)를 올린 뒤 합격증인 백패(白牌)와 주과(酒果)를 하사받았다.

 

진사는요. 일반 과거제도 합격자와는 달라요.

쉽게 말해 진사는 명예죠. 특정한 관직을 주는 건 아니거든요.

그래서 일반과거제도에서 급제라도 한 사람들은 관직을 받지만 진사는 중앙에서 어떤

관직을 부여 받지는 않아요.

오늘날의 어떤 것과 비교하긴 힘드네요.

오늘날 고시 같은 거나 7급, 9급 같은 거 합격하면 공무원으로 중앙에서 일할 수 있긴 하죠~

 

진사라는 벼슬은

 

소과 라는 과거에 붙었을 때 주는 명칭인데,

이것은 벼슬이라기 보다는 그냥 명예직 같은 것입니다.

 

소과에 붙어서

생원이나 진사가 되면

그 다음에 문과인 대과를 치를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대과에 붙은 다음에야 실제로 벼슬을 받을 자격이 주어졌던 것이죠.

 

벼슬을 받은 다음에야 뭐 요즘이랑 똑같죠.

일 잘하고 상관한테 잘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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