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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욱 묘역 (파주시)
( 黃廷彧 墓域 , Hwangjeongukmyoyeok )
문화 >> 인물 >> 묘(묘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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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금승리 산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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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로 - 월롱역 - 월롱면 사무소 - 덕은리 - 탄현 금승리 방면으로 진행하다 금승리 마을회관 전 우측 산에 위치 ◈자유로 - 낙하IC - 낙하리 사거리 - 금승리 방향 진행 하다 금승리 마을회관 지나 좌 측 산자락에 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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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현명소재지에서 버스로 10분 , 배차시간 1시간 30분
◈황정욱(1532-1607)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경문(景文), 호는 지천(芝川),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조선초기의 명재상인 황희(黃喜)의 후손으로 부호군을 역임한 열(悅)의 아들이다. 1552년(명종 7)사마시에 합격하고 155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61년 호조 예조의 좌랑을 역임하고 해미현감으로 나갔다가 1565년에는 부수찬을 거쳐 지평을 지냈다. 1580년(선조 13)진주목사를 거쳐 충청도관찰사를 지낸 뒤, 1584년에는 주청사로 명에 가서 여러 왕대에 걸쳐 명나라 문헌에 태조 이성계의 부친이 이인임으로 잘못 기재된 문제 즉"종계변무(宗系辨誣)문제를 해겨라고 돌아와 동지중추부사가 되고 곧이어 호조판서로 승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소사가 되어 왕자 순화군을 배종하여 관동으로 피신하여 의병을 모집하기도 하였으나, 순화군, 임해군과 함께 포로가 되어 선조에게 보내는 항복권유문을 쓰도록 강요받아 아들 혁이 대신 썼다. 왜군이 철수할 때 석방되었으나 항복권유문을 기초한 문제가 동.서인 간의 정치쟁점이 되어 정권을 장악한 동인에 의해 길주로 유배되었다가 1597년 석방되었으나 복관되지 못한 채 죽었다. 후에 신원되어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저서로 지천집(芝川集)이 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묘역은 황정욱과 정경부인 순창조씨 의 합장묘로 봉분과 묘표석, 상석, 향로석, 문인석등이 배치되어 있다. 신도비는 묘역 50여미터 아래에 비각을 세우고 안치하였는데 높이 3m, 폭 1m의 규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