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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제가 카페에 올린글 모두 삭제되었나요 다시올립니다(5건)

작성자행정 泰國|작성시간14.10.23|조회수278 목록 댓글 0

몇년전 부터 제가 키페에 올린글이 왜? 모두 삭제 되었지 매우 궁금합니다

올렸던 모든글 다시 올리고 싶은 생각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문중에 필요한 내용만 몇가지 골라서 이렇게 다시 올립니다

읽기가 지루 하시더라도 제목만이라도 한번 읽어보세요  

1, 순창조씨 "천년의 꿈" 이루어지다

2, 순창조씨 현조경배단 비명(한문)

3, 순창조씨 현조경배단 비명(한글번역) 

4, 순창조씨 현조경배단 지석(위패)

5, 순창조씨 세거지향 비명

 

1, 淳昌趙氏“千年의 꿈”이루어지다

2012년 11월 1일대종회 카페에 올린 글

우리 淳昌趙氏는 始祖부터 十世 (西山公, 諱 璥의 墓만 唯一하게 實存됨)까지의 墓所가 失傳되었으나 壇山所가 없어 지금까지 祖上님께 享祀를 올리지 못하고 闕祀하여왔기에 先祖님들께 罪悚한 마음 禁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先祖님들의 설단을 조성하여 享祀를 모실 수 있는 것이 우리 門中의 오랜 宿願 事業으로 생각 하였습니다.

다행히 今年度에 顯祖敬拜壇 조성사업을 실시하게 되어 이제는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나고 음력 10월 1일(양 11월14일)은 우리문중“千年의 꿈”이 우리의 現實 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이렇게 즐겁고 기쁜 날을 自祝하기겸 조상님께 인사를 드리려고 全國 各地에서 創氏이래 가장 많은 宗親들이 參席하시리라 믿습니다. 참석하실 분들은 죄송하지만 사전에 大宗會에 연락을 해주셔야 식사준비 등 사전준비를 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현재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추진하는 사람들 모두가 즐겁고 幸福한 마음으로 추진하고 있답니다. 왜냐하면 풍수지리를 전공 하시는 분(일명,지관)들이 오시면 현조경배단 자리가 아주 明堂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보아도 현조경배단 건립 위치에서 내려다보면 좌청룡(左靑龍)은 소들 뒤를 거쳐 성황 천까지 감싸 안았고 우백호( 右白虎)는 전법 뒤를 거쳐 신기 천까지 포근하게 감싸 안았고 앞의 들판은 지평선처럼 넓은 평야를 이루고 저 멀리에는 폭이 100m가 넘는 하천이 흐르는데 흘러 들어오는 물줄기는 보이는데 내려가는 물줄기는 보이지 않고 전망에 보이는 높은 산은 겹겹이 경배단을 바라보니 이보다 더 좋은 明堂 이 어느 곳에 있겠습니까?

이 자리는 선조님들이 각본 없는 드라마를 연출하신 느낌입니다. 이유는 14세인 松齋公(世球)의 묘소를 산 밑에 모셨기 때문에 그 위에 산소를 쓰게 되면 역장(逆葬)이 되기에 후손들이 감히 엄두도 못 냈던 자리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광덕리 아미산에 모셨던 11세 사정공(旅), 12세동래공(悰), 13세 선전공(澣)의 묘소 위에 후손들이 逆葬하여 말썽이 많던 묘소 3위를 14세 松齋公 묘소위(송재공의 부, 조부, 증조부)로 移葬하여 公의 子인 參判公(胖,은 송재공묘,하단)과 함께 5代를 나란히 모시게 되었고

더구나 금번 현조경배단(顯祖敬拜壇)은 11세 사정공(묘소중 맨위) 묘소위에 조성 하게 되어 始祖부터 15세까지 한자리에 모시게 되니 각본 없는 드라마가 아니겠는 가요 이는 우리가 원하고 바란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천재일우(千載一遇) 의 기회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송재공 묘소위에 선조의 3대 묘소가 이장되고 또다시 시조부터 10세까지 12위의 현조경배단이 건립 될 것을 우리 선조님들은 몇 백년 전에 선견지명(先見之明)이 계셔서 공지(空地)로 남겼을까요? 인위적(人爲的)으로는 불가능(不可能)하며 현재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신비(神秘)에 가까운 일이며 부가사의(不可思議)하고 영묘(靈妙)한 비밀이기에 우리가 풀 수 없는 영원한 숙제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나 11세, 12세, 13세의 3대 묘소를 이장(移葬)한 이후에 우리 宗中에서는 많은 변화가 발생하고 있답니다. 저는 잘 모르지만 대종회 根植 사무총장께서 전국 우리 종친의 동향을 잘 알고 계시는데 그분 말씀을 빌리자면 3位 의 移葬 후에 우리 문중에서 판, 검사 변호사가 많이 탄생 하였답니다 그러나 죄송하지만 지금까지 궐사하셨던 조상님들을 지관들이 감탄하는 최고의 명당에 모셔놓고 매년 향사를 잘 모시겠다는데 조상님들께서도 감흥을 하셔서 지금보다 더욱더 보살펴 주시지 않을까요? 後孫으로서 당연히 하여야할 의무이기 때문에 바라서는 아니 되지만 그래도 선조님들께서는 후손들 잘되기를 지하에서도 기원(祈願)해 주실 것이라 믿고 싶습니다.

3대를 이장(移葬)하여 모셔서 우리 문중에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분들 묘소 보다 위에 계시고 더구나 크나큰 明堂에 先祖님들의 현조경배단을 모시게 되니 금시발복(今時發福)(당장에 복이 트이고 부귀를 누리게 됨)이 확실합니다.

그래서 하늘과 같은 선조님들께서 우리 후손에게 남기신 忠과 義를 숭상하고 孝를 실천하는 유훈(遺勳)을 받들고 있는지 모르지요....

더구나 他 종중에서는 종재가 많아 시제에 참석하는 사람에게는 봉투에 차비를 넣어 준다는데 우리는 생활이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현조경배단 조성에 소요되는 금액을 파전이 아닌 십시일반(十匙一飯) 자발적으로 찬조금(贊助金)을 내어 造成하니 우리 순창조씨의 저력(底力)을 그 어디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자랑스럽고 고맙기만 합니다.

또한 현조경배단 자리가 명당(明堂)이라 하니 우리 문중에서 大統領이나 國務總理가 나오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아마도 멀지 않고 가까운 시기에 꼭 實現될 것이라 確信 합니다 이렇게 말씀 드리면 왕족(조선조)시대 같으면 역적들의 모략 때문에 난리가 났겠지요. 나뭇잎에 꿀을 발라 주초위왕(走肖爲王)을 새겨서 정암 조광조 선생을 귀양 보내듯이 우리에게 妨害를 하겠지만 지금은 21세기이고 民主主義時代를 살고 있기 때문에 괜찮겠지요.

現在는 國會議員도 趙正湜씨 한분뿐이지만 앞으로는 國會議員, 장, 차관, 판, 검사, 박사가 우리 문중에서 많이 誕生하여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할 시기가 그렇게 멀지 않았습니다. 家門이나 집안에서 훌륭한 사람이 탄생되면 모든 것을 조상님의 德으로 생각하시고 더욱더 숭조상문(崇祖尙門) 하십시요.

저도 앞에서 말씀드린 그런 영광 모두 누리고 직접 제 눈으로 확인한 후 死後에 祖上님들께 세세히 보고해야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宗親 여러분도 健康하셔야 합니다. 光明을 보셔야 하니까요 특히 우리가 힘들더라도 더욱더 후진(子孫)양성에 힘을 기우려야 하겠습니다. 피나는 노력과 각오를 우리 모두 다짐해 봅시다.

종친 여러분 희망을 향하여 前進합시다.

우리에게 미래가 있습니다. 아니 우리에게 미래가 미리 와있다고 생각합니다. 祖上님들께서는 항상 우리들 곁에 계시면서 우리를 굽어 살펴 주실 테니까요.

순창조씨 파이팅!!!

순창조씨 파이팅!!!

순창조씨 파이팅!!!

주초위왕(走肖爲王)이야기가 앞에서 나왔기에 참고로 우리 선조이신 14세 송재공,휘 세구(松齋公,諱 世球)와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선생이 절친 하셨으므로 을묘사화(乙卯士禍)때 정암 선생이 귀양 가실 때 송재공의 전송 시와 정암 선생의 답화시 한수를 소개하고자합니다.

▶ 丹月驛 餞靜菴 趙光祖 赴謪所(松齋 趙世球.避世亭再建)

中宗反正(1506년)이 일어나자 超然하게 낙향하여 避世亭을 다시세우고 은거한 松齋公께서乙卯士禍(1519년)로 忠州 丹月驛에서 不歸의 귀양길을 떠나는 靜庵 선생에게 드린 餞送詩 이며 松齋公 의 詩文은 모두 유실되고 이 한수만 전해 오고 있다.

吾知孝直有今行 諫札丁寧不世情 雷礮豈應終日怒 電播猶照寸心明 維鳩驛裏龍眼活 徒鰐城邊馬步輕 大丈夫身非寂寞 一時評叱亦殊榮

내가 아노니 孝直(趙光祖의 字)이 이번 귀양길을 떠나는 것은 그대의 諫한 상소문이 너무나 정연하여 세상에서 용납되지 못한 탓이리라 우렛소리가 終日토록 나지 않음과 같이 임금님의 怒하심도 오래가지 않을 것이고 번쩍이는 번개 빛도 간절한 그대의 忠心과 같이 밝으리라 鳩驛 안에서는 龍의 잠이 깨일 터인데 徒鰐城 밖에는 말의 걸음이 빠르도다. 大丈夫의 신상이 오랫동안 적막하지 않으리니 一時的인 꾸지람 뒤에는 영화롭게 되리로다.

▶ 和 趙友松齋 餞別韻(靜庵 趙光祖 漢陽人)

松齋公 餞送詩에 대한 靜庵 선생의 和答詩

灘叟松齋餞我行 瓊章字字句句情 三千遠路靑衫濕 九萬長天白日明 靑白雲問還白貴 熊魚味上反魚輕 虛名實學從今別 平日誰知禍福榮

嘆叟(李廷慶 廣州人)와 松齋께서는 나의 떠남을 餞送하니 좋은 글의 글자마다 구절마다 情이 담뿍 담아있네 三千里 머나먼 길에 눈물로 옷깃 적시고 九萬里 長天에는 白日이 나의 마음 알 것일세 벼슬길 좋다지만 벼슬 안했으면 좋은 것을 큰 세력에 눌리어서 작은 세력 없어지네! 實學을 배운다는 이름조차 이별하니 평소에 누가 능히 禍와 福을 알았으리.

▶ 贈 松齋 次避世亭詩(靜庵 趙光祖 漢陽人)

乙卯士禍(1519년)때 走肖爲王등의 무고로 賜死 후

領議政에 추증된 靜庵 선생께서 松齋公에게드린 避世翁 崇慕詩

特松凌雪碧 孤月照氷寒 欲識先生節 請取松月看

우뚝 솟은 소나무는 눈 속에서도 푸르고 외로운 저 달은 모진 추위에도 밝게 비추도다. 先生의 높은 절개 알려거든 저 푸른 소나무와 밝은 달빛 볼지어다.

▶ 過避世亭 舊墟(靜庵 趙光祖 漢陽人)

靜庵 先生께서 避世亭 앞을 지나다가 황량한 빈 정자 터에 올라 개연한마음으로 두수의 避世亭詩를 읊은바 있다 이는 그중한수다

避世亭留地 溪山分外寄 況有手澤在 先生昔居斯

避世亭 자리는 산이나 물이 가지고 있는 본분보다 더욱 빛나도다. 하물며 선생의 손때가 묻고 옛날 이곳에 계셨으니 더할 말 있으리오.

 

 

2, 淳昌趙氏顯祖敬拜壇碑銘

淳昌趙氏始祖의諱는子長이요高麗朝에서戶長을지냈으며配位와墓所는未詳이다二世의諱는先賢이요高麗朝에서戶長을지냈으며配位와墓所는未詳이다三世의諱는이요高麗時代鄕職인甫尹을지냈으며配位와墓所는未詳이다四世의諱는元軾이요高麗時代鄕職인甫尹을지냈으며配位와墓所는未詳이다文獻에依하면新羅時代여러地方에흩어져사는公族과大臣들이安逸하게지내도록戶長을삼았으며그任務를代代로물려받았다고한다高麗太祖가이制度를引用하여벼슬을주어始祖부터四世까지淳昌에서戶長을世襲하였다五世의諱는仁平이요高麗明宗七年(一一七七)에鷄龍山賊亡金과亡鶴을討平하는等,軍功一等에올라鄕里를떠나官職에들었으며明宗末年에金吾衛郞將同正에오르고이어서檢校衛大將軍으로陞官되었다配位와墓所는未詳이다六世의諱는光明이요又諱는光肅이다東國史略에光肅의官이行興威衛散員同正에이르렀고贈職이金紫光祿大夫門下侍郞平章事이다墓는淳昌사람들말에依하면故鄕에있다고한다配는貞敬夫人淳昌薛氏이며墓所는未詳이다七世의諱는文琔(一二六三~一三三二)이요明經科에及第하고忠烈王十四年에伊川監務兼勸農使가되었으며다음해入關寶副使에오르고忠烈王三十一年(一三0五)에中顯大夫左右衛大護軍으로陞官되었다配는貞夫人丹陽李氏이며墓所는未詳이다家宅은槐山에있었으니紳의子孫에게傳하였다八世의諱는이요初諱는永堅이며字는魯直이요號는中齋이다高麗忠烈王十九年(一二九三)에槐山松坪에서出生하고公의나이九歲에司醞寺同正을거쳐忠肅王二年(一三一五)文科에올라藝文館檢閱을歷任하였다戊辰(一三二八)에中國元나라科擧에올라將仕郞瀋陽等路軍民總管知府事의勅命을除受받았으며高麗朝의벼슬은匡靖大夫政堂文學密直司使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事上護軍에이르렀다追贈된諡號는文貞公이다丙戌(一三四六)十二月十四日元나라朝廷에있을때卒하였는데帝가太醫를보내어患候를살펴보게했다壽는五十四이다後에松都城內로葬地를옮겼는데時俗에따라封墳하지아니하였다輿地勝覽錄에公이淳昌人物이라했고또한鄭麟趾의麗史本傳과權近의東賢史略에도公의史蹟이실려있으며遺稿가東文選에도나타나있다配는貞敬夫人羅州陳氏이다九世의諱는(一三一九~一三八五)이요禮儀判書,版圖判書를歷任하였으며誠勤明亮佐理功臣重大匡淳城君에封해졌다追贈된諡號는良度公이다公이父親을따라元나라에갔었는데父親의病患이위독할때손가락을불태워약에타고지성으로기도하니父親의命이끊어졌다가다시소생했으므로因하여사람들이燒指公이라일컬었다配는貞敬夫人鳳山李氏이고墓는失傳했다九世의諱는(一三二四~一四0二)이요字는進士며號는避世亭이다高麗朝末年에進士에合格하고壬申(一三九二)革命으로李成桂가朝鮮을開國하자어머니를모시고槐山松坪에遁跡하여杜門隱居하고一片丹心亡國高麗를연모하며終身토록不事二君의忠節을굳게지켰다이때머무른亭子의懸板을避世亭이라하고이를自號로삼았다配는端人江華黃氏이며墓는未詳이다十世의諱는이요(諱縫의子.一三五七~一四一六)司馬試에及第하고文科에올라林川郡事를歷任했다革世後官職을辭退하고君主에대한忠誠을지키기위해首陽山(西山)에숨어고사리캐먹다굶어죽은中國의故事伯夷叔齊를본받아西山으로自號삼아隱遁하였으니바로西山別墅이다工曹典書光州牧使等官職을除授했으나모두辭讓하고끝까지忠節과志操를굳게지켰다遺命으로除授한官號를墓表에쓰지말라고하였으며이로부터楊州一峴을西山이라일컬었다配는淑人同福吳氏이며墓는楊州一峴(西山)에있다墓는한때溫陵안에들어가失傳狀態였으나임금행차앞에서泣訴하고(驪州章夏)至極한精誠으로位土를마련하는等(佳州重參)崇祖睦族精神의發露로十世이상先祖墓所中唯一하게保存되었다十世의諱는이요(諱紳의子)成均進士이며配는端人光州潘氏이다

祖上은나의根本이다故로祖上을우러러받드는것은後孫된者의마땅한道理이다그러나우리門中은始祖부터十世까지의산소를失傳하였으나中始祖以下三代(八,九,十世)만祭壇을마련하여享祀를받들고始祖로부터七世까지闕祀하여왔다이를안타깝게생각해온大宗會長泰東(성종)과大宗孫根浩(평택)가發議하여顯祖敬拜壇을造成하고合同祭禮하기로뜻을모았으니이는우리門中千年史의빛나는劃期的인快擧이며祭禮文化의革新이요崇祖尙門의龜鑑이다淳昌趙氏의後裔들이여榮光과繁榮이永遠無窮하라

西紀 二千十二年 壬辰 十月 一日

淳昌趙氏 二十六世 杏亭 德善 謹撰

 

 

3, 순창조씨 현조경배단 비명(한글번역)

순창조씨 시조의 휘는 자장이요, 고려조에서 호장을 지냈으며 배위와 묘소는 미상이다. 2세의 휘는 선현이요, 고려조에서 호장을 지냈으며, 배위와 묘소는 미상이다. 3세의 휘는 이요, 고려시대 향직인 보윤을 지냈으며, 배위와 묘소는 미상이다. 4세의 휘는 원식이요, 고려시대 향직인 보윤을 지냈으며, 배위와 묘소는 미상이다. 문헌에 의하면 신라시대 여러 지방에 흩어져 사는 공족과 대신들이 안일하게 지내도록 호장을 삼았으며, 그임무를 대대로 물려받았다고 한다. 고려 태조가 이 제도를 인용하여 벼슬을 주어 시조부터 4세까지 순창에서 호장을 세습하였다. 5세의 휘는 인평이요, 고려 명종7년(1177)에 계룡산적 망김과 망학을 토평하는등, 군공 일등에 올라 향리를 떠나 관직에 들었으며 명종 말년에 금오위랑장동정에 오르고 이어서 검교위 대장군으로 승관되었다. 배위와 묘소는 미상이다. 6세의 휘는 광명이요, 우휘는 광숙이다. 동국사략에 광숙의 관이 행흥위위산원동정에 이르렀고, 증직이 금자광록대부 문하시랑 평장사이다. 묘는 순창 사람들 말에 의하면 고향에 있다고 한다. 배는 정경부인 순창 설씨이며, 묘소는 미상이다. 7세의 휘는 문전(1263~1332)이요, 명경과에 급제하고 충열왕 14년에 이천감무겸권농사가 되었으며, 다음해 입관보부사에 오르고충렬왕 31년(1305)에 중현대부 좌우위 대호군으로 승관되었다. 배는 정부인 단양이씨이며, 묘소는 미상이다. 가택은 괴산에 있었으니 신(紳)의 자손에게 전하였다. 8세의 휘는 이요, 초휘는 영견이며, 자는 노직이요, 호는 중재이다. 고려 충렬왕 19년(1293)에 괴산 송평에서 출생하고 공의 나이 9세에 사온사동정을 거쳐 충숙왕 2년(1315)문과에 올라 예문관검열을 역임하였다. 무진(1328)에 중국 원나라 과거에 올라 장사랑심양등로군민총관지부사의칙명을 제수 받았으며, 고려조의 벼슬은 광정대부 정당문학 밀직사사 예문관 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에 이르렀다. 추증된 시호는 문정공이다. 병술(1346)12월14일 원나라 조정에 있을 때 졸 하였는데 제(帝)가 태의(太醫)를 보내어 환후를 살펴보게 했다. 수는 54이다. 후에 송도성내로 장지를 옮겼는데 시속에 따라 봉분하지 아니하였다. 여지승람록에 공이 순창 인물이라 했고, 또한 정인지의려사본전과 권근의동현사약에도 공의 사적이 실려있으며, 유고가 동문선에도 나타나있다. 배는 정경부인 라주진씨이다. 9세의 휘는 (1319~1385)이요, 예의판서,판도판서를 역임 하였으며, 성근명량좌리공신중대광순성군에봉해졌다. 추증된 시호는 양도공이다. 공이 부친을 따라 원나라에 갔었는데 부친의 병환이 위독할 때 손가락을 불태워 약에 타고 지성으로 기도하니 부친의 명이 끊어 졌다가 다시 소생 했으므로 인하여 사람들이 소지공이라 일컬었다. 배는 정경부인 봉산이씨이고, 묘는 실전했다. 9세의 휘는 (1324~1402)이요, 자는 진사며, 호는 피세정이다. 고려조 말년에 진사에 합격하고 임신(1392)혁명으로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어머니를 모시고 괴산 송평에 둔적하여 두문 은거하고 일편단심 망국 고려를 연모하며 종신토록 불사이군의 충절을 굳게지켰다. 이때 머무른 정자의 현판을 피세정이라 하고 이를 자호로 삼았다. 배는 단인강화황씨이며, 묘는 미상이다. 10세의 휘는 이요(휘봉의자.1357~1416)사마시에 급제하고 문과에 올라 임천군사를 역임했다. 혁세 후 관직을 사퇴하고 군주에 대한 충성을 지키기 위해 수양산(서산)에 숨어 고사리 캐먹다 굶어 죽은 중국의 고사 백이숙제를 본 받아 서산으로 자호 삼아 은둔하였으니 바로 서산별서이다. 공조전서광주목사등 관직을 제수 했으나 모두 사양하고 끝까지 충절과 지조를 굳게지켰다. 유명으로 제수한 관호를 묘표에 쓰지 말라고 하였으며, 이로부터 양주 일현을 서산이라 일컬었다. 배는 숙인 동복오씨이며, 묘는 양주 일현(서산)에있다. 묘는 한때 온능안에 들어가 실전 상태였으나 임금 행차 앞에서 읍소하고(여주장하)지극한 정성으로 위토를 마련하는 등(가주중삼)숭조목족 정신의 발로로 10세 이상 선조 묘소중 유일하게 보존되었다. 10세의 휘는 이요(휘신의자)성균진사이며, 배는 단인 광주반씨이다.

조상은 나의 근본이다. 고로 조상을 우러러 받드는 것은 후손된자의 마땅한 도리이다. 그러나 우리 문중은 시조부터 10세까지의 산소를 실전 하였으나 중시조 이하 3대(8,9,10세)만 제단을 마련하여 향사를 받들고 시조로부터 7세까지 궐사 하여왔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해온 대종회장 태동(성종)과 대종손 근호(평택)가 발의하여 현조경배단을 조성하고 합동 제례하기로 뜻을 모았으니 이는 우리 문중 천년사의 빛나는 획기적인 쾌거이며 제례 문화의 혁신이요 숭조상문의 귀감이다. 순창조씨의 후예들이여 영광과 번영이영원 무궁하라.

서기 2012년 임진 10월 1일

순창조씨 26세 행정 덕선 근찬

 

 

4,淳昌趙氏 顯祖敬拜壇 誌石(位牌)

始祖 戶長 淳昌趙公 子長 神位

二世 戶長 淳昌趙公 先賢 神位

三世 甫尹 淳昌趙公 溫 神位

四世 甫尹 淳昌趙公 元軾 神位

五世 檢校衛大將軍 淳昌趙公 仁平 神位

六世 門下侍郞平章事 淳昌趙公 光明 神位

配 貞敬夫人 淳昌薛氏 神位

七世 左右衛大護軍 淳昌趙公 文琔 神位

配 貞夫人 丹陽李氏 神位

八世 藝文館大提學 淳昌趙公 廉 神位

配 貞敬夫人 羅州陳氏 神位

九世 禮儀判書, 版圖判書 淳昌趙公 縫 神位

配 貞敬夫人 鳳山李氏 神位

九世 國子進士 淳昌趙公 紳 神位

配 端人 江華黃氏 神位

十世 林川郡事 淳昌趙公 璥 神位

配 淑人同福吳氏 神位

十世 成均進士 淳昌趙公 珉 神位

配 端人 光州潘氏 神位

< 壬坐 丙向 >

 

 

5,淳昌趙氏 世居之鄕碑 銘

순창조씨는 始祖 趙子長이고 고려초 淳昌의 戶長을 지내고 代를 이어 승계하여 오다가 고려 명종 七年(1177) 五世 仁平이 계룡산의 도적 亡伊와 亡所伊를 토평한 일등 공신으로 檢校衛 大將軍에 오르면서 현성으로 등장하였다. 이때부터 향리를 떠나서 벼슬길에 올라 六世 光明은 門下侍郞平章事를 역임하고 七世 文琔은 左右衛 大護軍에 이르고 八世 文貞公의 휘 廉은 藝文館 大提學 上護軍등을 지내시고 九世 淳城君 휘 縫은 禮儀 및 版圖判書를 거쳐 開城府尹 上護軍등을 역임하며 세계를 이어왔다. 槐山 松坪은 七世 文琔이 西紀1280年을 전후해서 자리 잡은 이래 七百여년간 二十四代에 걸쳐 世居 하여 오면서 우리 門中을 확실한 벌족으로 기틀을 잡은 八世 文貞公이 탄생하신(1293)곳이며 한편 九世 避世翁 휘 神은 고려가 망하자 이마을로 낙향하여 정자를 세워 避世亭이라 현판과 자호하고 일편단심 망국 고려를 연모하며 종신토록 伯夷叔齋의 西山之節을 본받은 충절의 고장이다. 동리 한가운데는 우리 先祖께서 심고 代대로 가꾸어온 수령 七百年의 은행나무가 우뚝 솟아 옛부터 동리 이름을 은행정이라 불러 오고 오른쪽 鶴嶺에는 文貞公의 신도비와 文貞公, 淳城君, 避世翁, 十世 進士公등 三代의 단산소가 가지런히 자리하며 뒷동산에는 十一世 司正公, 十二世 東萊公, 十三世 進士公, 十四世 松齋公, 十五世 參判公등 五代에 걸친 묘소가 위로부터 차례로 배열되어있다. 또한 五馬山 기슭에는 避世翁의 不事二君 之忠과 松齋公의 不正之朝엔 不仕之節操가 서린 六百年 역사의 避世亭과 초야의 몸으로 국난극복에 한몸을 초로와 같이 던져 나라 구하는데 앞장서 공신의 자리에 오른 九世 紳 十二世 悰 十五世 服과 胖 十六世 德恭,德容 十七世 杞등 일곱분 충신의 위패와 현판을 모신 七忠祠가 자리하여 이 고장 忠孝 교육의 장이되고 있다. 우리는 이와같이 祖上으로부터 물려받은 빛나는 전통과 소중한 문화유산을 기리고 더욱 빛나게 가꾸는 것이 後孫들의 도리이건만 변천하는 시대적 조류에따라 고향마저 점점 잊혀져가기에 世居地의 약사를 碑에 새기어 여기에 세운다.

淳昌趙氏 大宗會長 趙德善 글 을 짓 고

二十六世(행정) 趙孝善 돌을 희사하며

西木 金永洙 글 을 쓰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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