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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쇄가 불러온 전쟁들. 트로이, 스파르타, 태평양 전쟁

작성자이윤배|작성시간26.06.09|조회수37 목록 댓글 0

봉쇄가 불러온 전쟁들. 트로이, 스파르타, 태평양 전쟁

 

유성운

 

- 고대부터 현대까지, 반복되는 자원 봉쇄와 전쟁
- 트로이 전쟁, 현실은 ‘국제 무역망 확보 전쟁’
- 일본제국을 멈춘 미국 석유, 진주만 공습의 원인
- 반복되는 갈등, 한국은 새 길을 찾아야 할 때

공급망 봉쇄는 경제 갈등을 빚고 그 해결은 전쟁으로 귀착된다. 유성운 필자는 트로이 전쟁, 펠로폰네소스 전쟁, 태평양 전쟁을 예로 들어 함부로 남의 목줄 잡는 것의 위험성을 지적한다. 기후변화도 마찬가지다. 전쟁을 만들거나 승자를 바꿔치기하곤 했다. 

그리스 트로이 전쟁의 이유는 아름다운 미인 헬레나를 둘러싸고 빚어진 게 아니었다. 청동기 시대에 진입하며 그리스는 북방산 주석이 필요했고 트로이는 그 길목(Choke Point)을 쥐고 있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에는 스파르타가 아테네의 식량 공급망을 봉쇄해서 이겼다.

후발 제국주의 국가로 태평양의 챔피언을 노리던 일본은 미국이 석유 공급망을 차단하자 결국 전쟁으로 치달았다. 이번 중동 전쟁 또한 표면상으로 이란의 석유 수출망을 차단하며 커졌지만 결국 비전비화(非戰非和), 사실상 종전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희토류를 중국에 의지해야 하는 미국의 속사정이 전쟁의 지속성을 떨어뜨렸다.  [편집자 주]

호르무즈 해협 통행 현황 // 사진=연합뉴스

반복되는 역사, ‘봉쇄와 전쟁’

중동 전쟁. 2월 말 이란 최고지도자 알리 호세인 하메네이가 사망했을 때만 해도 금방 끝날 줄 알았다. 베네수엘라 니콜라스 마두로가 생포됐을 때처럼 48시간 안에, 길어도 일주일 안에는 종료될 줄 알았다.

미국·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이 어느덧 3개월째로 접어들고 있다. 전쟁이 이렇게 장기간 이어질 줄도 몰랐지만, 그 여파가 이렇게 커질지 몰랐다.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막으면서 중동에서 원유를 나르던 선박들도 발이 묶였다. 전 세계, 특히 중동의 원유 의존도가 높은 한국과 일본은 큰 타격을 입게 됐다.

내가 거주하는 도쿄에서는 연일 에너지 위기에 대한 경고음이 나오고 있다. 당장 5월 말부터는 과자 봉지도 흑백으로 나올 예정이다. 나프타 부족 때문이다. 뭐든 부족하기 전까진 그 가치를 잘 모르는데, 컬러 잉크 만드는 데 원유(제품)가 들어간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됐다. 과자 봉지뿐 아니라 식품을 담는 플라스틱 용기 생산도 어려워질 거라고 한다.

공급망 봉쇄-경제 갈등-전쟁은 인류 역사에서 익숙한 레퍼토리이다.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이 만든 질서 때문에 수십 년간 잊고 살았을 뿐이다. 역사는 봉쇄와 전쟁을 거치며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곤 했다. 그렇다면, 공급망 봉쇄-경제 갈등-전쟁의 가장 오래된 시작은 무엇일까. 아주 약간의 상상을 더할 수 있다면, 나는 그 유명한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를 꼽겠다.

3000여 년 전, 국제 무역망이 가동하다

역사에서 주로 ‘트로이 전쟁’이라 부르는 전쟁은, 당시 지중해 세계를 둘러싼 거대 세력의 충돌이었다.

호메로스는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전쟁 원인을 한 여인으로 지목했다. 그리스 도시 연맹과 트로이는 헬레나를 차지하기 위해 갈등했고, 결국 전쟁이 터졌다고 말이다. 그럴 리가 있나 싶다. 이 전쟁은 10년간 지속됐다고 한다. 화장품도 변변치 않던 시기였다. 헬레나가 정말 미인이었다 해도, 무려 10년이나 전쟁을 유지할 만큼 내내 아름답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전쟁을 이끌었던 그리스 장군들, 아가멤논이나 아킬레우스 같은 지도자들이 아무리 강력했다고 해도(아니면 단순했다고 해도) 그 정도 명분으로는 10년이나 전쟁을 끌고 갈 수는 없다.

당장 3개월 동안 전쟁으로도 고전하고 있는 미국 대통령을 보라. 지지율 하락 때문에 고심하는 중이다. 트로이 역시 여성 한 명 때문에 10년이나 포위된 채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전쟁으로 겪는 고통이 현대 미국보다 크면 컸지, 적지는 않았을 테니.

헬레나라는 미녀는 어디까지나 은유적 존재다. 미녀로 비유된 건 무엇이었을까. '무역 공급망'이다. 당시 지중해 세력들을 군침 흘리게 만든 매력적인 무역로였다.

트로이에서 아킬레우스가 헥토르와 결투하던 때,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목마’를 만들던 때를 청동기 시대라고 부른다. 이름에 이유가 있다. 이때 가장 중요한 생산품은 청동이었다. 그리스, 이집트, 중국, 그리고 한반도까지, 유라시아 대륙 각지의 문명은 경쟁적으로 청동기를 만들어냈다.

트로이 전쟁 당시는 청동기 시대였다. 이때 가장 중요한 생산품은 청동이었다. 사진은 코린토스 헬멧의 복제품 // 사진=Pixabay

지금도 박물관에 가면 그리스 문명이 남긴 청동 유물들을 트럭 몇 대 분량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청동은 쉽게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 원료가 제한적이었다. 청동은 구리와 주석을 섞어서 만드는데, 주석이 문제였다. 구리는 유라시아 어딜 가도 흔했지만, 주석 산지는 매우 드물었다.

특히 그리스가 그랬다. 가장 풍부한 청동기 유산을 남긴 그리스지만, 역설적으로 그들 주변엔 주석 산지가 없었다. 그리스는 청동기를 쓰기 위해서 주석 전량을 수입해야 했다. 마치 반도체 강국인 한국과 일본이 희토류를 전량 수입하는 모습과 똑같다.

청동기 시대 초반 지중해 문명은 대부분 아프가니스탄에서 주석을 캐냈다. 아프가니스탄(산지)에서 출발해 이란고원→미탄니 왕국(중개지)→히타이트(소비자 겸 통로)를 거쳐 그리스(최종 소비 지역)로 도달하는 경로였다. 3,000여 년 전, 그렇게 먼 경로에서 재료를 조달했다고? 정말 그랬다. 국제 교역망이 수천 년 전에도 작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보다 더 불안했다. 지금도 저 경로를 통한 원료 수급이 불안한데, 3,000여 년 전 기술력으로는 오죽했으랴. 기술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란은 치안이 불안했고, 주석 무역 경로인 미탄니와 히타이트는 경쟁하는 사이였다.

트로이 전쟁의 ‘진짜 원인’

그리스는 더 안정적인 주석 공급망을 구해야 했다. 결국 북방에서 경로를 새로 뚫었는데, 바로 유럽 주석 산지인 보헤미아에서 다뉴브강-흑해-지중해로 이어지는 유통망이었다. 이 지역엔 미탄니나 히타이트 같은 강국도 없었기 때문에 보다 안심할 수 있었다. 이 길목을 지키는 도시가 있었는데, 바로 트로이였다.

이 시기 지도를 보면 트로이(현 튀르키예 차낙칼레 주)는 지중해와 흑해를 잇는 다르다넬스 해협 입구에 딱 붙어 있다. 트로이는 다뉴브강과 흑해를 거쳐 들어오는 ‘주석 공급 밸브’를 쉽게 막을 수 있었다. 그리스인은 이 교역로를 통해 주석 말고도 다양한 물품을 실어 날랐다. 흑해 일대는 밀(식량)과 금(사치재) 등 중요한 교역품도 얻을 수 있는 '알짜' 교역로였다.

트로이가 이 해협을 막는다면 그리스는 군사적, 경제적 목줄을 잡힐 수밖에 없었다. 당시 교역망에서 트로이가 갑이었고, 그리스가 을이었던 셈이다. 게다가 그리스 상선들이 흑해로 가기 위해 지나가야 하는 다르다넬스 해협은 만만한 뱃길이 아니었다. 해류가 빠르고 북풍이 강하게 부는 곳이었다. 그리스 선박들은 날씨가 궂을 땐 어김없이 트로이에서 대기해야 했다.

트로이가 바보가 아니고서야 이 이점을 누리지 않을 리 없다. 트로이 발굴 등에 참여했던 학자들은 여러 유적 위치나 규모 등을 고려할 때, 트로이가 그리스 상선들에 항구 이용료나 '통행세'를 매겼을 거로 추정한다.

지중해와 흑해를 잇는 공급망은 이후에도 중요했다. 사진은 흑해의 모습 // 사진=Unsplash

그리스에 트로이는 글로벌 공급망 병목 지점(Choke Point)을 쥐고 흔드는 눈엣가시였고, 향후 지중해 패권을 위해서 넘어야 할 상대였다. 그리스 연합군은 주석 공급망과 알짜 무역로를 위해 조직된 군대인 셈이다. 그렇게 보면, 그리스는 설령 아킬레우스 같은 영웅을 잃더라도 반드시 이겨야 했다.

그리스 연합의 포위망에도 트로이가 무려 10년이나 버텼다는 것을 보면, 트로이 역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던 것 같다. 도시가 그만큼 규모도 크고, 비축된 물자도 충분했으리라. 전쟁이 장기간 이어지면 승리하더라도 대가가 만만치 않다. 물자가 전쟁에 몰리며 불거지는 국내 물자 부족, 인플레이션, 징집으로 인한 노동력 부족, 여론 악화 등이다. 그리스 연합도 그랬다.

그리스 연합군 사령관이었던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은 귀국 후 곧 사망했다.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와 그의 정부 아이기스토스가 그를 살해했기 때문이다. 장기간 전쟁으로 그만큼 국내 정치 리더십이 약해진 걸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도 마찬가지다. 트로이의 목마를 고안한 천재적 지략가이기도 했지만, 그는 20년 동안이나 고국으로 귀국하지 못한 채 지중해 이곳저곳을 떠돌게 된다. 호메로스는 이를 신들의 방해로 인한 방황으로 그렸지만, 트로이에서 이타카까지의 뱃길은 당시 지중해에서 아주 익숙한 루트였다. 그렇다면 오디세우스가 귀국에 어려움을 겪었던 건 역시 국내 정치 상황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해협 봉쇄, 지중해 패권을 결정하다

참고로 지중해와 흑해를 잇는 공급망은 이후에도 중요했다. 그리스 세계에 큰 영향을 준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 지중해 패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도 마찬가지였다.

30여 년 지지부진하게 지속된 이 전쟁을 끝낸 것은 스파르타의 보스포루스·다르다넬스 해협 봉쇄였다. 아테네는 식량 수급을 흑해 곡물 수입에 의존했기 때문에 스파르타가 흑해로 이어지는 다르다넬스 해협을 장악하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아테네는 즉시 함대를 동원해 흑해 곡물 공급망을 되찾으러 갔는데, 스파르타의 장군 리산드로스가 이끄는 함대는 다가오는 아테나 함대를 한 전투로 궤멸시켰다. 역사에서 아이고스포타모이 전투라고 기록된 이 전투로 아테네의 패권이 끝났다. 식량 공급망도 차단되고, 해군도 사라진 아테네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스파르타에 백기 항복을 했다.

사람들은 진주만 공습을 두고 흔히 일본 군국주의의 광기로만 설명하지만, 그 뒷면에는 트로이 그리스인들을 떨게 했던 것과 똑같은 '공급망 공포'가 있었다. 사진= Unsplash

진주만 공습 뒤편, 일제를 멈춘 석유

공급망 차단이 빚어낸 역사의 레퍼토리는 동아시아도 예외가 아니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 해군이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공습했다.

사람들은 진주만 공습을 두고 흔히 일본 군국주의의 광기로만 설명하지만, 그 뒷면에는 트로이 그리스인들을 떨게 했던 것과 똑같은 '공급망 공포'가 있었다. 1941년 당시 일본은 산업과 군사력 운용에 필수적인 자원, 석유 80% 이상을 미국에서 수입하고 있었다. 고무·철강·공작기계 등 핵심 자원 수입 의존도 역시 비슷한 수준이었다.

문제는 그 ‘큰손’ 미국이 일본의 중국·인도차이나 침공에 제동을 걸었다는 점이다. 1941년 7~8월, 미국·영국·중국·네덜란드 네 나라가 차례로 대일 자산 동결과 석유 수출 전면 금지 조치를 취했다. 일본은 이를 네 나라의 머리글자를 따 'ABCD 포위망'이라 불렀다. 미국은 자국 석유 수출 봉쇄를 넘어, 네덜란드령 동인도(현 인도네시아)의 석유까지 차단했다. 일본이 우회할 통로를 원천 봉쇄한 것이다. 트로이가 다르다넬스 해협의 밸브를 잠갔던 것과 똑같은 방식의, 한층 더 정교한 공급망 봉쇄였다.

당시 일본의 비축유는 약 2년 치였다. 시간이 갈수록 협상은 불리해지고, 산업과 군대는 멈출 예정이었다. 일본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미국 요구대로 중국에서 철수하고 굴복하느냐, 아니면 동남아 자원 지대를 무력으로 확보해 공급망을 자력으로 뚫어내느냐. 일본 군부가 택한 길은 후자였다. 진주만 기습은 동남아 진공 작전을 보호하기 위해 미국 태평양 함대를 먼저 무력화하기 위해 벌인 시도였다. 그리스가 주석 공급망을 위해 트로이를 공격했듯, 일본은 석유 공급망을 위해 진주만을 공격한 셈이다.

결과는 잘 알려진 대로다. 4년 뒤 일본은 두 발의 원자폭탄을 맞고 무조건 항복했다. 공급망을 무력으로 뚫겠다는 도박은 일본 본토를 잿더미로 만든 후 끝났다. 더 흥미로운 것은 패배 과정이다. 미군 잠수함은 전쟁 내내 일본행 유조선과 수송선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어렵게 동남아 유전을 확보했지만, 그 석유를 본토로 가져올 수 없었다. 공급망 차단을 넘기 위해 시작한 전쟁이었지만, 결국 다른 방식의 공급망 차단으로 무너진 것이다.

전쟁 아닌 다른 답을 찾을 때

호르무즈가 잠긴 2026년 봄이다. 고대 트로이의 함락과 근대 진주만의 화염은 공급망을 둘러싸고 일어졌다. 지금 밸브를 누가 쥐고 있는가, 그리고 그 밸브가 잠겼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고대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은 전쟁에서 답을 찾았다. 우리는 다른 답을 찾을 때다.

《예술로 보는 기후 이야기》// 사진=메디치미디어

 


필자 유성운은  중앙일보·JTBC의 도쿄 총국장을 맡고 있다. 고려대 한국사학과에서 공부하고 동 대학원 기후환경학과 석사 과정을 밟았으며, 영국 SOAS(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에서 연수했다.

역사 해석이 취미이자 특기다. 공인된 역사, 그 배경에 있는 기후변화, 교역조건의 변동 등이 전쟁과 평화, 몰락과 번영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며 최근 이런 이야기를 묶어《 예술로 보는 기후 이야기》를 펴냈다. 다른 저서로 《사림, 조선의 586》, 《한국사는 없다》 등이 있으며, 공저로 《대한민국 부동산 부의 역사》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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