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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무즈 사태가 드러낸 석유화학 산업의 존재감과 위기

작성자이윤배|작성시간26.06.18|조회수48 목록 댓글 0

호르무즈 사태가 드러낸 석유화학 산업의 존재감과 위기

 

이충재 한국투자증권 에너지·석유화학 애널리스트작성일 2026-06-16 (화) 00:00의견 0

ⓒChatGPT, 생성형 이미지

 

이란 전쟁에 따른 호르무즈 해협 봉쇄 사태가 장기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5월 14~15일 열린 미국과 중국의 정상회담에서도 원론적인 이야기만 오갔을 뿐이다. 사태가 80일을 넘기고 있지만 평화적인 해결 방안을 찾지 못한 채 시간이 흐르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일상생활의 변화가 거의 없다. 우리나라 정유·석유화학 산업은 생산 물량의 절반 이상을 수출할 정도로 세계적인 규모이며, 산업이 잘 구축되어 있다 보니 외부 충격을 산업 단계에서 흡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들의 상황은 우리와 크게 다르다. 인도는 LPG 수요의 70%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인도는 중동과 가깝다. 수입 LPG 90%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다. 현재 인도는 LPG 부족으로 가정에서 요리를 하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베트남에서는 유일한 나프타 크래커(NCC)인 롱손석유화학(LSP)이 가동을 무기한 중단했다. 농업용 필름과 식품 포장재 등 일상에 가까운 제품의 공급에 차질이 생기고 있다.

 

봉쇄 장기화가 새벽 배송에도 영향 미치는 이유

 

우리나라 석유화학 업체들은 석유에서 분리된 나프타와 LPG를 원료로 쓴다. NCC에 투입된 나프타는 섭씨 800도가 넘는 고온에서 분해되어, 올레핀(에틸렌·프로필렌·부타디엔)과 아로마틱(벤젠·톨루엔·자일렌)이라 부르는 기초유분이 된다. 이 기초유분이 후속 공정을 거치며 우리 일상을 지탱하는 최종 제품의 소재가 된다. 크게 합성수지(폴리에틸렌, 폴리프로필렌 등), 합성섬유(폴리에스터, 나일론 등), 합성고무(BR, SBR, 라텍스 등)로 분류된다.

 

호르무즈 봉쇄 장기화로 석유화학에 별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이 산업이 다른 제조업과 어떻게 다르고,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는지 알게 됐다. NCC는 한번 멈추면 다시 돌리는 데 최소 열흘이 걸린다. 공정이 처음부터 끝까지 파이프로 맞물려 있고, 앞 공정에서 나온 중간 제품이 후공정의 핵심 원료가 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특정 지점의 생산 차질은 공정 전체로 번진다. NCC 가동 차질이 플라스틱 부족을 넘어 탄산음료 생산이나 온라인 쇼핑 업체들의 식자재 새벽 배송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 한국무역협회 무역통계(K-stat), Uncomtrade, USGS

 

NCC가 만들어내는 제품의 분포를 따라가다 보면, 이 산업이 일상의 어느 지점까지 닿아 있는지 알 수 있다. 가장 눈에 띄는 영역은 최근 언론에서 자주 다뤄진 품목들이다. 종량제 쓰레기봉투, 식품 포장재, 의료용 주사기, 농업용 비닐, 일회용 용기 같은 것들이다. 이번 사태에서 가장 먼저 공급 차질이 거론된 에틸렌과 프로필렌이 이 제품들의 원료다. 코로나 시기에 익숙해진 KF94 마스크의 필터, 부직포, 일회용 위생용품, 기저귀의 흡수재 역시 프로필렌을 원료로 하는 폴리프로필렌(PP) 제품이다. 합성고무에서 출발하는 자동차 타이어, 운동화 밑창, 의료용 장갑도 부타디엔을 원료로 한다.

 

자동차 한 대에 석유화학제품 비중 15~20% 달해

 

자동차로 시선을 옮기면 NCC의 영향이 한층 두드러진다. 부타디엔은 스티렌과 결합해 SBR(스티렌-부타디엔 고무)이 되거나, 단독으로 BR(폴리부타디엔 고무)로 중합되어 타이어의 핵심 원료가 된다. 우리나라에는 세계적 수준의 합성고무 업체가 있다. 이를 바탕으로 타이어 산업이 성장했다. 차량 경량화 흐름 속에서 플라스틱은 금속을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 프로필렌에서 출발한 폴리프로필렌은 범퍼·대시보드·도어 트림의 핵심 소재다. 폴리우레탄은 좌석의 승차감을 높이고, 연료 탱크는 폴리에틸렌(HDPE), 전선 피복은 PVC가 담당한다. 자동차 외장 도장에 쓰이는 페인트와 접착제, 와이퍼의 합성고무까지. 자동차 한 대에 들어가는 플라스틱과 합성고무 등 석유화학 제품의 비중은 무게 기준으로 15~20%에 이른다.

 

아로마틱 계열(벤젠고리 구조를 가진 기초유분, 미량일 때 향긋한 냄새를 풍김)로 시선을 옮기면 또 다른 일상이 드러난다. 벤젠은 스티렌 모노머(SM)로 전환되고, SM은 폴리스티렌(PS)과 ABS의 원료가 된다. ABS는 TV 외장, 냉장고 내장재, 세탁기 드럼, 청소기 본체, 스마트폰 케이스에 두루 쓰이는 가전 외장재의 표준 소재다. 폴리스티렌을 발포시킨 EPS(발포 폴리스티렌)는 건물 단열재의 핵심 소재이자 신선식품 운송용 스티로폼 상자의 원료다. 벤젠 계열에서 한 단계 더 들어간 폴리카보네이트(PC)는 스마트폰과 노트북 케이스, 안경 렌즈, LED 조명 커버, 자동차 헤드램프에 들어간다. 자일렌은 정제 공정을 거쳐 파라자일렌(PX)으로 전환된 뒤 PTA(고순도 테레프탈산)이 된다. PTA는 앞서 언급한 MEG와 결합해 폴리에스터 섬유와 PET 수지를 만든다.

 

생활 곳곳에 숨어 있는 석유화학 산업의 연결고리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도 석유화학 산업이 깊이 들어가 있다. 세제와 샴푸에서 거품을 만들고 오염 물질을 분리하는 계면활성제는 에틸렌을 원료로 생산된다. 에틸렌이 산화되어 에틸렌 옥사이드(EO)로 전환되고, EO의 70% 이상이 모노에틸렌글리콜(MEG) 생산에 사용된다. MEG는 폴리에스터 섬유, PET병, 부동액의 주요 원료다. 패스트 패션 업체 등장으로 값싸게 구입할 수 있는 폴리에스터 셔츠, 마트의 음료수 PET병, 욕실의 샴푸가 모두 한 공정에서 원료로 생산된다.

 

ⓒ 《석유화학으로 만드는 세상》, 한국석유화학공업협회, 2009, 재편집

 

한 단계 더 들어가면, 흔히 떠올리지 못하는 연결고리가 나타난다. EO, EG를 만드는 공정에서는 부산물로 고순도 이산화탄소가 발생한다. 이산화탄소는 산업용 가스 업체로 넘어가 액화 탄산과 드라이아이스로 가공된다. 이산화탄소(액화탄산/드라이아이스)는 날이 더워질수록 소비가 늘어나는 탄산음료의 탄산이 된다. 생맥주의 탄산 충전, 반도체 세정용 가스도 이산화탄소다. 드라이아이스는 코로나19 이후 급격히 성장한 식자재 새벽 배송과 냉동식품 온라인 구매에 필수적인 냉장재로 쓰인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냉동식품이 담긴 스티로폼 상자 또한 석유화학 제품이다. 티셔츠와 PET병을 만드는 공정에서 나오는 부산물이 음료산업과 신선식품 운송업의 기반이 된다. NCC 가동 차질이 음료산업과 새벽 배송 물류망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얘기다.

 

구조조정 화두 속 한국 석유화학 산업의 미래는

 

이번 호르무즈 봉쇄 사태가 있기 몇 주 전까지 우리 석유화학 산업의 핵심 화두는 구조조정이었다. 이번 사태가 과거에 비해 무겁게 다가오는 것은 우리나라 석유화학 산업을 둘러싼 지난 20년 동안 누적된 환경 변화도 작용했다. 2000년대 중반,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걸프 산유국들은 자국 천연가스에서 나오는 에탄을 원료로 하는 대규모 에탄 분해 시설(ECC)을 잇달아 가동시켰고, 그동안 태워버리던 사실상 원료 비용이 ‘0’인 에탄으로 에틸렌을 뽑아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에는 미국의 셰일 에너지 혁명으로 북미 지역에서 에탄 크래커가 대규모로 건설되었다. 셰일 가스에서 뽑은 저렴한 에탄을 무기로 다우, 셰브론필립스 등이 텍사스, 루이지애나 등에 에탄 크래커를 줄지어 세웠다. 2010년대 중후반부터는 중국이 본격적으로 석유화학 자급화 정책을 폈다. 우리나라의 중국 수출 물량도 빠르게 줄어들었다.

 

지난 20여 년의 시간 동안 가격 경쟁력에서 밀리고, 최근에는 구조조정 압박까지 받고 있는 우리 석유화학 산업이 사상 초유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 사태로 글로벌 공급망의 마지막 보루 역할을 하고 있다.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코로나19 때처럼 위기가 닥치니 우리는 소중함을 알게 됐다. 코로나19 때의 마스크, 1회용 검진 키트 등 눈에 띄는 곳부터 자동차 부품, 가전 외장재, 잘 보이지 않는 계면활성제, 탄산음료, 새벽 배송까지.

 

ⓒ 《석유화학으로 만드는 세상》, 한국석유화학공업협회, 2009, 재편집

 

우리나라 석유화학 산업의 촘촘한 공급망은 위기가 닥쳤을 때 존재감을 드러낸다. 호르무즈 해협이라는 좁은 통로 하나가 막혔을 때 그 충격이 산업 전반과 일상 곳곳으로 번지는 과정은 우리 생활이 어떤 산업들 위에서 굴러가고 있는지를 다시 들여다보게 한다. 사태가 끝난 후에도 우리나라 석유화학 산업의 세계적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 이 원고는 월간 <과학과기술> 6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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