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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술이야기

무념무상(無念無想)

작성자김수로왕|작성시간08.05.28|조회수119 목록 댓글 0

24) 無念無想(무념무상) 1

사(萬事)에 응(應)한다>고 하였던 것이다.

있다고 생각 하는 것은 없고, 없다고 생각 하는 것은 있다. 없다는 것의 차이는 고목사회(枯木死灰)-외형은 마른나무와 같고, 마음은 죽은 재 와 같아, 생기가 없고 의욕이 없는 사람의 비유-와 같으며, 있다는 것의 차이는 餓鬼(아귀)畜生(축생)과 다르지 않는 마음인 것이다. 이러한 유무(有無)의 경계(境界)를 떠나, 생사(生死)의 갈림길을 벗어 난다는 것은, 의외로 초연(超然)하게 함으로서 인욕(人慾)을 해탈(解脫)하여, 이로운 칼로서 베는 것을 만들어 내어, 맹화(猛火)에 태우고, 깊은 물에 빠지고, 한랭(寒冷)과 얼음이 얼도록 하는 일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것이 참다운 마음 이다.

이러한 마음은, 사망(邪妄)-간사하고 망령된-한 마음은 물론, 어떠하게 던 생각을 무느 떠린다. 실지로 영묘한 빛을 보지 못하고, 잡념이 없는 잔잔한 止水(지수)의 개운하지 않는 것으로서, 지금껏 어떠한 물건에도 반영(反映)되지 않은 것으로서, 자기자신이 적을 친다는 마음이 없이 또 적을 공격한다는 마음도 가지지 아니하고, 天地(천지)萬物(만물)의 모양에 안연(安然)不動(부동)의 本體(본체)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거리낌이 없는 本體(본체)는, 어떠한 일에도 오염되지 아니하고는 만들어 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 전에 모양을 나타나게 하는 자는, 금방 이것에 비추게 되어 남아 있지 않거나 또 이것이 경과 하여 떠난 후에는, 조금도 이러한 痕迹(흔적)을 주의 할 필요도 없고, 마치 닦아 내어 버리는 것과 같이 된다.

빛나고 밝은 달 태두리 중천에 걸려 있을때, 맑은 등잔이 홀로 물에 스미어 있을때는, 반드시 거림자가 투영 되게 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수월(水月)의 위(位)인 것이다. 적에게 마음 을 만들어 내게 하는 것은, 나자신의 밝은 본체(本體)에 비치어 맟추게 된다는 것은 모두가 동일 하다.

마음을 明鏡止水(명경지수)와 같이 만들었 거나, 마음을 정지 하여 있다는 것은 물론이며, 이게 다 無念無想(무념무상)과 같이 익숙해 지도록 바깥으로부터 익혀 두지 않으면 않된다.

劍道(검도)와 禪(선)의 관계는, 이러한 점이 존재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多年(다년)간의 鍛鍊(단련)의 結果(결과)에 쫓아, 이러한 心境(심경)에 도달 함으로서, 自得(자득)할 수가 있게 되는, 참으로 검도계의 極致(극치)인 것이다. 精神(정신)이 이러한 지경에 까지 도달하게 함으로서, 시작되는 기술도 역시 神髓(신수)를 얻게 되어 있다.

高野(다까노) 선생은 자기의 검도서인 <劍道(검도)>에 無念無想(무념무상)의 묘용(妙用)을 다음 삼항(三項)으로 槪說(개설) 해 두었다.

一. 나자신 심신의 힘 쓰임은 무애자재(無碍自在)가 極(극)에 달해야 한다.

二. 적의 動靜(동정)이 거울(鏡)에 비치는 것과 같이 밝게 보여야 한다.

三. 내 동작의 확립을 적이 엿볼수 있게 당당 하게 만들어 내어야 한다.

적을 대할때는 生死(생사)를 잊고, 너와나 彼我(피아)를 잊어, 妄心(망심)을 떠나 明鏡(명경)의 本體(본체)에 歸依(귀의)한다는 것은, 能(능)히 萬事(만사)에 應接(응접) 함으로서, 變轉(변전)된 極意(극의)의 妙技(묘기)를 發揮(발휘) 할 수가 있게 된다. 적에게 따르므로서 이길수 있다는 것을 배워 둔다는 것은, 無念無想(무념무상)에서부터 적에게 틈이 존재 하는 것이 라면 즉시 이것에 편승하여 勝(승)을 만들어 내어야 한다. 치는 마음도 없고, 처 온다는 마음도 없이, 적을 알고 나를 알므로서, 옆에서 보고 알아 처 나간다는 것이다. 所謂(소위) 視(시)하면서 배알하고, 聽(청)하면서 받아 들이고, 먹으면서 이 味(미)를 알게 되는 것과 같이, 어떠한 일의 注意(주의)를 끌어 마음을 停止(정지)하게 하는 내력 때문이다. 한가지 일을 주의하게 되면 딴 여러 가지 일들에도 충분하게 주의를 떨칠수가 있게 된다는, 心理(심리)상의 原則(원칙)을 말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음에 어떤 일도 아닌 明鏡(명경)으로서, 능히 萬物(만물)을 비추어 줄수가 있다는 것이다.

아직도 色(색)이 나타난다는 것은, 모양에서 출발하지 않는 사이에, 능히 적의 마음을 洞察(통찰)하여 얻는 다는 것은, 내가 마음의 無念無想(무념무상) 같은 것 때문이다. 暗夜(암야)-캄캄한 밤-에 霜(상)-서리-을 듣는다고 배운 것은, 이러한 妙境(묘경)도 있다는 것이다.

안(內)에 있는 것을 생각(思)해 본다는 것은, 반드시 밖으로(外)로도 나타 나기 때문이다. 無念無想(무념무상), 오로지 적이 하는데 따라서 轉化(전화)한다는 것은, 적은 쫓아가 엿보면서 알려고 하는것을 만들어 내지 않기 때문이다. 所謂(소위) 들어가는 자취도 없이, 나가는 모양도 없이, 九天(구천)上(상), 九天(구천)下(하)에 出入(출입) 하는것 같이, 이러한 無念無想(무념무상)의 境界(경계)에는 소리(聲)도 없고, 香(향)도 없으며, 鬼神(귀신)이 엿보게(窺) 만들어 내는 것도, 狐狸(호리)-사람을 속이고 나쁜짓을 하는 사람-에 호리게 되는 일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 間(간)纔(재)-겨우 들어갈수 있는 틈-에 狐擬(호의)猶豫(유예)-깊히 의심하여 망설이고 꾸물거림-의 마음을 만들어 낼 때는, 적의 도봉(刀鋒)에 금세 나 자신의 신체를 裁斷(재단)하게 되는 것이다. 宇野金太郞은 항상 일격에 다라나는 쥐를 박살 내었다. 뛰어 다라나는(飛走) 刹那(찰나) 호의심(狐疑心)을 꽂지 않고, 목검의 한방으로 쥐의 머리를 처 버리는 것이다.

대체로 劍(검)을 공부 하면서 이러한 경계에 이른자는, 되돌아 오는 체세가 어떠 하던간에 또는 격자(擊刺)의 득실(得失)을 묻지 아니 한다. 모두를 수득(修得) 한다는 것은 臨機應變(임기응변), 劍(검)에 나타나 있는 것을 모아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보통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자기자신의 이름을 불러 낼 때에는, 순수하고 성실 정직한 마음으로 즉각 큰소리로 <네>하고 대답을 크게 하여야 되는 것이다. 사람은 항상 이러한 마음을 마음에 두고, 悠悠自適(유유자적), 生死(생사)情慾(정욕)에 시달리는 일이 아닐 때는, 이바람을 자기의 우상(優尙)에 이러한일을 이루게 하여, 반드시 高遠(고원)崇尙(숭상)의 績(적)을 밝혀 드러내지 않으면 않된다.

宋의 祖元禪師께서는 元兵에게 斬首(참수) 당할때에, 泰然自若(태연자약), 乾坤(건곤)無地(무지)卓孤笻(탁고공)의 一喝(일갈)에 의하여, 원병은 칼을 거두고 돌아가 버렸다는 일화가 있다.

또 山岡鐵舟가 술회 하기를, 千軍(천군)萬(만)馬(마)사이를 왕래 하면서 공을 다툴때, 모두가 다 이러한 妙用(묘용)이 나타 난다. 사람은 물론이지만 鳥獸(조수)들도 感應(감응) 하기 때문이다. 맹인 모씨가 琵琶(비파)를 공부 하기 위하여 京都(경도)에 갔는데, 쫓아가 檢閱(검열)관을 배알 하였다. 그렇게 하여 통과 하였었는데, 귀로에 또 하고네(箱根)를 통과 하는데 그곳에 다수의 랑인이 모여 있는 것이다. 검열을 받으면 죽기 아니면 살기로서 지금과 같은 자유 스러운 통과가 아니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고비 였다. 그러나 요기를 내어 비파를 꺼내어 한곡 쏘았다. 이것은 음색이 랑랑하고 묘절한 신들린 연주였다. 모든 랑인은 혹하여 희색이 감도는 가운데 경청 하는 것이였다, 끝에가서는 해를 가하겠다는 사람도 없이 모두가 뿔뿔이 해여저 무사 통과 하였다.

옛날사람들의 仁者(인자)에는 적이 따라 붙을수가 없고, 생사를 밖으로 내어 보내어 無心(무심)無慾(무욕)으로서 투쟁하는 사람도 없이, 적도 만들지 않으며, 猛獸(맹수)도 感喜(감희) 하였던 것이다. 오호 無念無想(무념무상)의 德(덕)이 이처럼 偉大(위대)할 줄이야.

 

25) 無念無想(무념무상) 2

무안류(無眼流)를 開設(개설)하신 始祖(시조), 反町無格 이라는 선생은, 여러나라를 돌아 다니며 수행하는 도중에 산속(山間)을 통과 하기에 이르러, 鷄澗(계간)에서 하나의 외나무 다리를 건너가게 되었다. 이다리를 건너 가는 것은 다리자체가 흔들 거리여, 발밑을 보게되면 천길의 낭떠러지 이며, 물은 격랑에 파도치면서 바위에 부딭치고 하니 건너는 것을 躊躇(주저)하게 되지 않을수가 없다. 때마침 한사람의 盲人(맹인)이 왔다. 어떻게 하는 가 보고 있노라니, 맹인은 다리의 기슭옆에 게다(나막신)를 벗어 버리고, 이것을 지팡이에 매달아 허리띠에 찬후에 다리를 대하여, 마치 포도밭에서 포도를 따는 것 보다 더 쉽게 유유히 다리를 건너가는 것이 였다. 끝까지 지켜 보고난후 무격(無格)은 모든 것에 마음의 눈이 뜨이는 자는, 마음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고 恐怖(공포)의 念(념)이 안에 충만해 젔을때는 건너 가지를 못하게 되는 것이다. 눈이 없는 자는 타의 움직임의 힘을 쓸 필요가 없기 때문에, 虛心坦懷(허심탄회)하게 담력을 양성하여 만들어 낼수가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도 역시 맹인과 같이 건너 갈 것이라고, 결심 함으로서 건너가서,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끝에 가서는 한가지의 流(류)를 공부하여 무안류(無眼流)라고 이름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所謂(소위) 無念無想(무념무상)의 느낌을 얻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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