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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상 당선작

푸른 적막 / 유계자 / 2025년 평사리문학대상 수상작

작성자수천/윤명수&짝꿍|작성시간26.01.27|조회수62 목록 댓글 0

2025년 평사리문학대상 수상작

 

푸른 적막

유계자

 

몇 섬의 적막을 부려놓은 푸른색 칠이 벗겨진

철제 대문 안에 수상한 그림자들이 들락거렸다

달이 뜨는 날이면 분내가 진동하고

마당에서 굴뚝까지 조붓한 것들이 흘러 다녔다

반달무늬 문고리는 장단을 맞추고

시렁에 올려놓은 가재도구들이 들썩

장독대마다 들여놓은 이끼는

곧 꽃의 일가를 새로 이룰 기세다

노동을 벗어놓은 장화는 마루 밑에서 수년째 몸을 쉬는데

예고 없이 들이닥친 한 사람을 보고

메꽃이 아침부터 불어대던 나팔을 떨어뜨린다

눈치 빠른 것들은 서둘러 대문을 빠져나가고

밤새 비틀거리던 달맞이꽃 바랭이 개망초

칡넝쿨까지 부스스 몸을 일으킨다

잘 차려입은 나비들도 선머슴 같은 호박벌도 줄행랑이다

발소리에 납작 엎드려 발발 떠는 것들

예초기를 메고 스위치를 넣자

금세 흙이 튀고 풀의 냄새가 잘려나간다

새 소리까지 베어지고 나서야

텅 빈 아궁이만 느린 하품을 다물지 못한다

대문 앞 산목련 한그루가 걸어놓은 조등은 꺼진 지 오래

빈 마당을 내려다보는 늙은 감나무

부러진 어깨에 멧비둘기 걸터앉아

구국 꾹꾹 이 집의 내력을 쪼아대고 있었다

 

유계자 시인

2016년《애지》신인상 등단, 시집『오래오래오래』, 『목도리를 풀지 않아도 저무는 저녁』, 『물마중』이 있음,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2022년 중소출판사 풀판콘텐츠 선정, 웅진문학상, 애지문학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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