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자유 게시판

스리랑카 고대도시 <시기리야> 여행

작성자靑 山|작성시간17.10.12|조회수281 목록 댓글 0
 

 

 

 

 

 

世界의 놀라운風景

 

(41)  Sri Lanka 의  古代都市 Siginya

시기리야는 스리랑카 중부에 있는 높이 180미터의 화강암 바위 인

'사자 의 산'을 뜻하는 말로, 형상이 사자와 비슷하며

암괴의 서쪽 중복에 뛰어난 벽화가 있어 유명하다.

역사적으로는 부왕 다토세나를 죽이고스스로 왕이 된

카사파 1세 (477∼495)가 동생 무갈란의 보복이 무섭고 두려워

시기리야 바위산에 산아래로는 주변에 성곽과 해자를 설치하고

산 기슭 동쪽과 서쪽에는 정원과 담장으로 둘러싸인 시가지를 세우고

넓이가 약 2ha인 평평한 정상에는 좁은 계단과 길들로 연결된

요새화된 왕궁을 7년 동안 건설한다.

그러나 11년 뒤 동생 무갈란의 공격으로 카사파왕은 전쟁에서 패하고

종국에는 자살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된다

바위산 정상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거대한 사자 입 부분에서부터

시작되는데 회랑과 계단에 오르면 산 중턱에는 날카로운 발톱을 지닌

사자 앞 발조각상의 성문유적이 남아있다.

특히 바위산 암벽에는 천상의 여자들이 그려진 유명한 암벽화가 남아있다.

산 아래로는 연못과 리조트, 마을들과 숲, 그리고 사원들이

뛰어 난 경관을 연출하며 시원하게 펼쳐진다 .

 1982년 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여 행 - - 해설, 편집 / 靑山 한재서 - 여행은, 탐험, 체험, 신비로움, 여유로움... 그리고 문명과 자연.. 야생이 공존하는 곳,을 보러갑니다. 인도양의 진주, 실론티의 나라 스리랑카로 정하고 떠났습니다. 우선 스리랑카 하면 떠오르는 막연한 이미지는 그리 부유하지 않은 나라 , 예전 개그프로에서 "사장님 나빠요" 를 외쳤던 블랑카, 인도 밑에 섬나라 정도...로 알았습니다. 하지만 스리랑카가 가지고 있는 매력은 참으로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이번 여행에서 느꼈습니다. 여행하면 자유여행이 어떨가.! 자유여행 목적지를 정하기 전에 여행할 나라의 조건으로 한국관광객이 많지 않은 곳, 을 찾았습니다. 중국관광객이 많지 않은 곳(이건 절대 필수 조건 - 넘 시끄러워서,,,) 때묻지 않은 자연과 야생이 있는 곳, 열대우림의 기후, 시설 좋은 리조트, 불안하지 않은 치안, 이국적 풍경, 깊이 있는 역사와 문화... 등을 고려하며 찾고 있을 때 여행을 같이 다니는 동료로부터 스리랑카 유적지를 돌아보자고 메일이 왔습니다. 첨부된 스리랑카 유적지<시기리야>사진을 보고 저기 가보야 겠다 생각하고 간곳이 스리랑카 입니다. 스리랑카 여행을 계획하시는 분들에게 작은 도움이나마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포스팅을 해보겠습니다. 스리랑카는 치안 좋은 편입니다. 예전에 내전이 있었지만 지금은 종식되어 괜찮다고 합니다. 그래도 북부지역은 안 가는 게 좋다고 하네요. 어두운 밤이라든지 한적한 곳..​ 기타 주의 사항을 꼭 유의하세요! 스리랑카는 비자가 있어야 입국이 허용됩니다. 인터넷으로 쉽게 발급 가능합니다. 그리고 스리랑카공항인 콜롬보공항에서도 발급이 가능하나 미리 발급받아놔야 줄을 서서 기다리는 시간 낭비를 안 하게 됩니다. 자유여행을 생각하시는 분들께,,, 스리랑카 사람들 친절합니다. 기본적으로 영어도 무리 없이 구사합니다. 기본 회화 정도만 해도 여행에는 무리 없고요. 여자분들끼리 자유여행을 가신다면... 무조건 조심!!! 그건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겠지만요. 환전은 우리나라에서 달러로 바꾼 후 스리랑카 콜롬보공항에서 루피로 환전하면 됩니다. 물가... 결코 싸지 않아요. 거의 우리나라 수준이라 보시면 됩니다. 우리나라 돈 10,000원이 대략 스리랑카 돈 1,000루피 정도 되는데요. 예를 들어... 마트에서 음료수 하나 50~100루피. 우리나라 돈 500원~1,000원 정도 됩니다. 그리고 스리랑카는 팁문화가 있습니다. 가벼운 사례 정도는 잊지 마시길... 그럼 스리랑카로 출발하겠습니다. 이륙 전 인천공항 9시간가까이 비행하여 스리랑카 콜롬보공항에 도착... 음... 공항에서부터 살짝,,, 특유의 커리향이 나는군요^^;;; 스리랑카 화폐단위는 루피.. 공항에서 달러를 루피로 환전했습니다. 스리랑카에서 첫 번째 여행지로 정한 담불라로 가기 위해 대중교통을 이용했는데.. 우선 공항에서 담불라로 가는 버스터미널까지 이 나라의 대표 교통수단 툭툭이(삼발이 자동차)을 타고 갔습니다. 이 삼발이 자동차는 캄보디아 앙콜사원 관광시에도 삼발이 자동차를 이용합니다.베트남에도 삼발이 자동차가 있습니다. 이 툭툭아저씨 이마가 좀 무섭게 나왔네요~ (공항 → 콜롬보 버스터미널 - 1,300루피= 한국 돈 대략 13,000원) 담불라행 버스 티켓 2인(콜롬보 → 담불라 - 522루피 = 한국 돈 대략 5,000원) 툭툭 아저씨의 도움으로 많이 기다리지 않고 15번 버스 탑승.했습니다. 처음에는 뻐스에 승객이 별로 없었으나... 뻐스가 증거장을 지날때마다 내리는 사람은 없고 갈수록 꾸역꾸역 타기만 합니다. 2시간 반 정도 만원버스를 타고 정신없이 가니 휴게소 도착... 정말 힘들었어요. 복잡 만원뻐스,,, 휴게소에서 500ml 생수 구입( 50루피) 에어컨 없는 덜컹거리는 버스로 5시간을 이동하여 담불라도착하니 기진맥진 다운상태입니다. 스리랑카 여행 중 제일 힘든기억ㅡㅡ 담불라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마침 손님 기다리던 툭툭을 타고 미리 예약해둔 칸달라마호텔로 이동하였습니다.이동비 (800루피) 버스 트렁크에 실어둔 캐리어를 깜박하고 버스에서 내려 툭툭을 타려는 순간... "아차! 캐리어!" 소리치고,,, "마이빽 버스 스탑" 을 외치니 툭툭기사가 알아듣고 무서운 속도로 톡톡이 버스 추격전 끝에 캐리어를 찾았음. 이 툭툭기사 엄청 친절했음. 그래서 담불라에 있는 내내 이동할 때마다 이 툭툭 기사와 동행했습니다. 드뎌 가보고 싶었던 칸달라마호텔 도착... 피로가 한순간에 풀림. 호텔로비전경 칸달라마호텔은 죽기 전에 가봐야 하는 세계건축물 100 대 1 에 꼽히고 세계 3대 친환경 호텔이라 하는 유명한 건축물입니다. 아시아 최고의 건축가라 불리는 스리랑카의 제프리바와가 설계한 호텔로 담불라정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문화유산인< 시기리야>에서 가깝고 호텔 바로 앞에는 야생의 칸달라마호수가 있습니다. 호텔 외벽엔 덩굴이 휘감아 있고 건물 내부 곳곳 암벽과 바위가 있습니다. 자연훼손을 최소화해 야생동물의 이동을 막지 않고 자연채광을 이용해서 조명을 켜지 않아도 밝으며 자연과 동화되어 어우러지도록 건축한 내외부는 힐링의 휴식장소로는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여기서 중간 설명을 줄이고 <시리기야> 로 가봅니다. 이 사진 한 장 때문에 비행기를 타고 떠났습니다 # 이 사진을 보니<시리니야>궁금해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여행 갑시다, 스리랑카.” 함께 여행하러 다니는 친구 에게서 메일이 왔다. 스리랑카? 아직 가보지 못한 나라니 당연히 가고는 싶었다. 그런데 꼭 가야하는 걸까, 고민스러웠다. 고민하며 첨부된 자료를 보는데, 이 사진이 있었다. 스리랑카를 지배했던 고대 왕조의 도시, 하늘에 떠있는 성, 시기리야였다. 광활한 밀림 평원 속에 갑자기 우뚝 솟은 거대한 바위. 그리고 그 위에 지은 궁전. 사진으로 보니 실로 멋졌다. 말이 필요 없어 보였다. 그래서 사진 자료들을 뒤졌다. 멋졌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저 절벽 위에 건물터가 있는 것을 보니 저 위로 올라갔다는 이야기. 그런데 어떻게? 그리고 도대체 왜 저런 곳에? 시기리야란 저곳이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바로 답 메일을 보냈다. “갑시다, 스리랑카.” # “잠깐 창밖을 보십시오. 저기가 시기리얍니다.”  스리랑카에서 두번째 날, 호텔을 떠나 어느 정도 달리던 중간에 가이드가 창밖에 시기리야를 가리켰다. 울울창창한 열대의 숲 위로 바위산이 솟아올라 있었다. 우리나라 마이산을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굵고 높게 우뚝 솟았으되, 그 위는 평평했다. 과연 묘한 산이었다. ‘저 산이 성채란 말이지.’ 이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니 더욱 궁금해졌다. 그리고 얼마 더 지나 버스는 시기리야 입구에 도착했다. 입구에서 바위 성채까지는 고대 왕조가 꾸민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물과 테라스의 정원을 지나 산을 향해 가는 길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이제 건물은 사라지고 터와 흔적만 남았지만, 그래서 더 좋았다. 1500년 넘는 오래된 정원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성채로 가는 정원길은 성채 못잖게 그윽한 분위기가 좋았다. 위에서 보면 이런 모습이다. 자료 사진 한 컷.찍었다. 그리고 시기리야의 바위는 코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기묘한 성채는 5세기께, 싱할라왕조의 카샤파 1세란 왕이 지었다. 시기리야란 이름은 ‘사자 바위’란 뜻. 사자의 모습을 한 저 높은 절벽 위에 왕은 굳이 궁전을 올려세웠다. 해발 370미터밖에 되지 않지만 사방이 낭떠러지이고, 주변에 아무런 높은 봉우리가 없어 그야말로 전망대 같은 궁전이 탄생했다. 바라보면서도 궁금했다. 저렇게 깎아지른 절벽을 올라가는 궁전이라니. 궁금함과 진입부의 아름다운 정원의 흥취가 묘하게 섞이면서 성을 향해 걸어갔고, 사자의 성은 점점 더 나를 압도하며 다가왔다. 제법 긴 평지 정원을 지나니 이제 본격적으로 시기리야의 유적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연석 암반에 다듬은 돌, 그리고 벽돌이 섞이면서 만들어내는 세월의 풍경이 매력적이었다. 습한 기후 때문에 벽돌에는 연두색 이끼들이 가득했다. 돌과 이끼가 어울리는 모습, 벽돌이 만들어내는 패턴은 언제나 매혹적이다. 그리고 곧바로 벽처럼 오르막 길이 시작됐다. 기암괴석들 사이로 난 계단길 위로 시기리야가 있다. # 계단, 또 계단 그리고 그 위에 펼쳐지는 광경들 계단이 계속 이어지지만 생각보다 전혀 힘들지는 않았다. 기대감이 컸고, 주변으로 보이는 모습들이 멋졌던 탓이었다. 빽빽한 나무 숲 사이로 떨어지는 빛, 그리고 정성껏 쌓은 건축의 흔적들…. 길은 계속 지그재그로 커브를 틀며 위로, 위로 향한다. 갑자기 도중 나타나는 거대한 바위 문. 사람 궁둥짝을 닮은 저 쌍바위 사이를 지나니 본격적인 시기리야의 입구가 시작된다. 자연 지형에 맞게 낸 길이었겠지만, 궁금증을 계속 유발시키도록 연출한 듯 시기리야로 가는 길은 흥미로웠다. 이끼 낀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드디어 시기리야의 거대한 사자봉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이것이었구나. 실제로 보니 실감이 났다. 자연이 만들어낸 스펙터클이 눈을 압도해왔다. 앞서 가던 이들은 아슬아슬한 철제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오른쪽 가장자리로 사람들이 보인다. 그 난간 다음에는 갈색 벽이 이어진다. 저 벽을 지나면 다시 그 위로 보이는 수직 나선형 계단으로 올라가야 한다. 아직 저 아슬아슬한 계단을 오르지도 않았건만 벌써 아찔할 정도다. 자, 드디어 바위 절벽이다. 직접 마주보니 더욱 아찔했다. 이런데다 길을 내서 꼭대기에 궁전을 짓다니, ‘이거 제대로 미친 거 아냐?’ 란 말이 절로 튀어나온다. 이제 나도 나선형 계단을 오를 차례. 저 계단 위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 바로 이 시기리야 최고의 보물이 있다. 그 보물이란, 고대의 그림이다. 바위산 암벽에 고대인이 그린 프레스코화다. 아름다운 여인을 그린 미인도인데, 1500년 전의 그림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다. 바위벽 중간에 움푹 패인 공간이 나오고, 그 안에 그림 속 여인 22명이 남아있다. 한때 그림은 500여명에 이르렀지만 지워지고, 이들만이 남았다고 한다. 1500년 전 그림인데 얼마 전에 그린 듯 생생한 것, 이게 시기리야 프레스코화의 미스터리다. 이 그림이 지금껏 생생하게 남아있을 수 있는 까닭은 그림을 그리는 단계가 무척 복잡하고 과학적이었기 때문이다. 먼저, 바위벽에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림판을 만든다. 바위 표면에 섬유질을 섞은 점토를 바르고, 그 위에 석회와 모래를 섞어 다시 바른다. 그리고 그 위에 또다시 꿀을 섞은 석회로 매끈하게 덮는다. 이런 3단계를 거쳐야 그림판이 완성된다. 그 다음에는 물감을 만들 차례. 각종 식물과 꽃, 잎, 나무 즙을 섞어 안료를 만든다. 이런 정성 덕분에 저 그림은 1500년 세월을 살아남아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추앙받고 있다. 벽에 매달려 그림을 보았으면, 다시 정상으로 갈 차례. 뱅글뱅글 나선형 계단을 다시 내려와 절벽 난간길로 나아간다. 절벽 중간에서 내려다보는 평원의 모습은 장관이다. 이 평원 가운데 솟아오른 이 붉은 편마암 산이 더욱 신기한 이유다. 걸어온 입구 정원이 어느새 까마득하게 아래에 있다. 자연이 만들어낸 모습을 잠시 감상한 뒤, 위로 향한다. 정상까지는 아직 절반도 오지 못했다. 지금은 잠시 철제 난간 대신 제대로 만든 길이어서 조금 나은 편. 그러나 이것도 옛날 사람들에 견주면 호강하며 오르는 길이다. 원래 이 바위산 계단은 모두 대나무였다고 한다. 얼마나 아슬아슬했을까. 지금의 철제 계단은 식민지 시절 영국인들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 저 옆구리 길을 따라 졸졸졸 올라가면, 드디어 정상? 아니다. 꼭 절반을 지나왔다. 이제 중간 지점이 눈앞에 나타난다. # 사자의 발톱을 지나 머리 위로  옆구리 길 마지막에는 갑자기 너른 선반 같은 평지가 있다. 시기리야 사자산의 정식 입구 지점이다. 거대한 바위산은 앞쪽에 너른 로비처럼 입구를 만들 공간이 있었다. 사자 모양의 바위에 사자 조각을 새겼다. 그래서 이런 풍경이 펼쳐진다. 내 카메라론 광각의 한계가 있어 자료 사진으로,,,아쉽다. 붉은 바위 덩어리 아래로 거대한 사자 발톱이 보인다. 저 위로 올라가면 사자의 입에 해당하는 꼭대기 궁전터다. 그리고 계단의 각도는 더욱 아슬아슬하게만 보인다. 여기서부터 다시 저 위로 올라가면 진짜 정상이다. 나무 그늘에 앉아 쏟아지는 땀을 잠시 식히며 앞으로 올라갈 계단을 바라본다. 사람이란 참 지독한 존재들이란 것을 새삼 깨닫는다. 올라가는 우리도 이렇게 힘이 드는데, 저 계단을 만든 이들은 어떠했을까. 얼마나 많은 이들이 다치고 죽었을까. 그런 죽음을 강요한 왕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1500년 뒤, 그 죽음을 딛고 올라가는 우리는 뭔가…. 상념에서 벗어나 다시 계단을 오른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위를 올려다본다. 아찔하다. 눈의 위치가 높아질수록 전망도 더 시원해진다. 덥디 더운 스리랑카의 풍경. 이 더운 곳에서 이 높은 성을 짓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다시 한번 실감한다. 올라가는 길을 위에서 찍은 항공사진 한 컷. 저 위로 올라가야 한다. 오르기 시작하니 생각보다 빨리 정상에 다다른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자, 정말 정상이다. 갑자기 넓은 평지다. 궁궐은 사라졌고, 터는 의구하다. 한때 500명의 궁녀를 거느리고 살았던 왕가의 자리다. 건물이 사라져서 더욱 세월을 느끼게 하는 곳. 시원한 산들바람에 몸을 식히며, 시야 전체로 펼쳐지는 푸른 숲의 바다를 본다. 신선이 따로 없다. 정상에 오른 방문객들은 모두 감탄하며 저마다 편한 자리에 앉아 하염없이 자연을 응시한다. 몇 시간이고, 하루 종일이고 앉아있고만 싶어진다. 왕실만 감상하던 풍경은 이제 모두의 것이다. # 왕은 미쳤던 것일까? 이런 곳에 성을 짓다니 시기리야를 보면 누구나 이곳을 떠올릴 것이다. 이스라엘의 저 유명한 유적지, 마사다 요새다. 주변이 숲이 아니라 건조한 황야란 점만 빼면 마사다와 시기리야는 똑 닮았다. 평원 위로 홀로 솟은 천혜의 요새, 난공불락의 공중 도시란 점이다. 그러나 저 마사다와 이 시기리야는 다르다.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간 이유가. 마사다는 전쟁이란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택한 곳이었다. 서기 70년경, 유대인들은 로마에 결사항전을 해야 했다. 그래서 해발 430여 미터인 저 절벽 위 요새로 올라가 로마제국의 대군에 저항했다. 특별한 지형 덕분에 세계 최강 로마군도 저 요새는 쉽게 함락하지 못했다. 2년 넘게 저곳에서 로마군에 포위된 채 버텼다. 그러나 로마는 집요했다. 아예 토목공사에 착수했다. 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을 직접 만들어 공격에 나섰다. 그토록 치열하게 버텼건만 마사다의 요새는 결국 함락된다. 그리고 함락 직전, 성채 안에 있던 이들은 집단 자결을 하는 것으로 저항을 마치고 저 세상에서의 영원을 믿으며 삶을 마쳤다. 기록에 따르면 무려 967명이었다고 한다. 카샤파 왕이 시기리야를 지었던 것은 저항을 위한 특별한 요새로서의 마사다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 황당할 정도로 확실한 요새 속으로 그가 나라를 이끌고 들어갔던 것은 그 개인의 욕망과 불안과 공포 때문이었다. 어찌보면 광기와도 같은. 전설같은 역사에 따르면 카샤파 왕은 다투세나 왕의 장남으로, 그 밑에 배다른 동생인 목갈라나 왕자가 있었다고 한다. 장남 카사퍄는 어머니가 평민이었고, 목갈리나는 어머니가 왕족이었다. 출신 성분이 동생에 뒤지기 때문에 카샤파는 왕위를 동생이 물려받을지 모른다는 불안에 살아야 했다. 그래서 그는 결심하고 만다. 권력을 위해서는 늘 골육상쟁이 벌어지는 법. 그는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다. 깜짝 놀란 동생 목갈리나는 바다 건너 인도로 도망친다. 이제 확실한 왕이 되었건만, 그럼에도 카샤파의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언제 동생이 돌아와 자신을 공격할지 모른다는 새로운 공포가 그를 휘감았다. 그래서 그는 저 시기리야의 사자산 위로 올라갔다. 난공불락의 성을 만들어 왕의 자리를 지키려는 것이었다. 사자산은 원래 수도승들이 도를 닦던 곳. 그 천혜의 요새는 그래서 갑자기 왕가의 보금자리가 된다. 그러나 운명이란 자기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가 걱정했던 대로 망명했던 동생은 10여년 뒤 마침내 세력을 규합해 형에게 복수를 하러 쳐들어온다. 요새에 있기만 해도 버틸 수 있었겠지만 카샤파는 분노에 불타 직접 동생을 물리치러 전장에 나선다. 그리고 전세가 위기에 빠져 홀로 도망치는 신세가 된다. 자신을 죽이러 오는 동생의 군대를 앞에 두고 왕은 단검으로 스스로 목을 찔러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카샤파가 죽고 난 뒤 시기리야 요새는 다시 왕실에서 수도승의 수도처로 되돌아갔다. 허망하고 부질없는 운명의 요새였다. 그 역사는 겨우 20년을 채우지 못했을 정도로 짧았다. 그리고 점점 잊혀진 곳이 되어버렸다. 오랜 세월 밀림 속에서 방치되었던 사자의 요새는 훗날 영국인들에게 발견되며 비로소 그 존재가 다시 세상에 알려졌다. # 시기리야에서 떠올리게 되는 그 나라,와 고구려  시기리야는 천륜을 거스르고 왕위에 오른 왕의 집착과 광기의 소산이다. 영원불멸의 요새, 절대 함락되지 않는 건축을 꿈꿨지만 그 어떤 건축보다도 빨리 수명을 다한 건축이었다. 건축에서 영원이란 없다는 것을 지금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듯한 그런 곳이다. 그런 점에서 시기리야는 마사다보다 바로 이곳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위 사진 저 깎아지른 산봉우리는 중국 랴오닝성에 있는 `오녀산성’이란 곳이다. 자연적인 요새여서 천혜의 요새가 된 곳이란 점, 그리고 마사다처럼 저항군의 성채가 아니라 한 나라의 정식 성이 된 곳이란 점에서 시기리야와 거의 흡사하다. 해발 820미터 높이에 절벽 지형만 200미터에 이르는 그야말로 요새로 만들라고 생긴듯한 곳이다. 그리고 저 오녀산성은 중국 땅에 있지만 뜻밖에도 우리 역사의 현장이다. 바로 고구려의 첫번째 도읍으로 추정된다. 졸본성이 저곳이었으리라고 여겨지고 있다. 이제는 중국 땅이 되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역사 유적이자 명승지다. 왕은, 그리고 왕국은 때론 과한 욕심에 빠지곤 한다. 절대 침공하지 못할 왕성을 만들면 왕국이 유지될 것이란.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결코 그런 꿈은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되풀이해 보여줘 왔다. 안으로 들어가면 안전은 하겠지만, 그 스스로 나아갈 길을 잃는다. 유지는 하되, 성장은 할 수 없게 된다. 고구려는 저 오녀산성에서 개국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37년, 북부여 왕자 주몽은 이곳에 성을 쌓고 고구려를 세웠다. 그러니 저 성은 고구려 개국도성이었을 것이다. 주몽은, 그리고 그의 새 나라 고구려 사람들은 왕국을 열며 영원한 제국을 꿈꿨을 것이다. 그래서 절대 적들이 정복 못할 저 천연의 요새를 골랐으리라. 그러나 세상은 소통하고 열려야 오히려 더 번영하는 법. 결국, 고구려는 저 안에만 있어서는 세상의 진정한 지배자가 되지 못함을 깨달았던 모양이다. 고구려는 오래 지나지 않아 새로운 도읍으로 옮기고, 그 뒤에서야 비로소 동북아의 대제국으로 번영의 길을 걷는다. 평지로 나오면 위험에도 노출되지만, 동시에 더 넓게 뻗어나갈 기회를 얻는다. 만약 고구려가 저 산꼭대기 위에서 자기네들끼리만 오래오래 살겠다고 버텼으면 훗날의 그 큰 나라가 되었을까. 그런 점에서 시기리야와 오녀산성은 역사의 흥망 법칙과 인간의 본성, 그리고 자연과 건축의 관계에 대한 변함없는 진리를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사진 한 장에 반해 간 저 열대의 남쪽나라 시기리야는 고구려를, 전쟁을, 역사를 떠올리는 계기가 됐다. 평소 생각하기 어려운 이런 거대하고 근본적인 문제들을 새삼 생각해보는 것 , 그것이 여행의 매력일 것이다. 그러나 부작용도 크다. 시기리야에 간 탓에 아직 가보지 못한 마사다와, 오녀산성을 더욱 갈망하게 됐다. 큰일이다. 년륜은 자꾸 지나가고,,, 궁금한곳은 더 많아지고,,,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