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서론
1. 연구의 배경과 목적
2. 현지조사의 과정과 방법
1. 연구의 배경과 목적
몽골을 방문한 사람들 대부분은 드넓은 초원과 타이가 숲, 맑고 푸른 하늘과 그 빛을 담아내는 호수에 대한 인상을 경이로운 눈빛으로 이야기한다. 산업사회의 현대인들이 상실한 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몽골의 자연은 어쩌면 그 자체로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회복해야 할 동기를 부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본 연구의 출발점 역시 몽골의 청정한 자연에서 직접적으로 경험했던 매혹의 감정과 무관하지 않다. 낯설게 다가온 몽골의 자연은 필자로 하여금 전통적 유목문화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 그 안에서 나타나는 종교적 실천의 내용에 대해 관심 갖도록 자극한 한 배경이었다.
그러나 몽골의 자연이 이상적 환경상태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이미 사회주의 시기의 생산력 증대 과정에서 환경악화를 경험했고, 1990년대 이후 시장경제의 도입에 따라 유목 이동성의 위축과 가축구조의 변형, 난개발 등을 겪으면서 심각한 파괴가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몽골의 개방 이후 이 지역의 청정한 자연환경을 지키려는 국제적 노력이 생겨났고, 국제 환경단체들의 몽골 내 활동도 매우 활발하다. 하지만 몽골의 환경 보전을 위한 환경주의의 관심은 동일한 성격이 아니다. 현재 환경단체들의 관심은 크게 전통적 종교, 문화의 복원을 통한 환경보전 노력과, 저개발 상태를 지양함으로써 환경보전의 조건을 형성하려는 노력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 중에서 보다 현실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후자의 입장, 즉 '지속가능한 발전(sustainable development)'1) 담론이다. 지난 2000년 여름에 인터뷰했던 자연보호부 관리 쟌자도르지(Janjadorj)는 몽골 정부의 공식적 환경정책은 지속가능한 발전임을 명시하면서 환경을 희생시키는 개발은 결코 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2001년에 인터뷰한 '동부 초원 생명다양성 프로젝트'의 기획 실무자인 갈바트라크(Galbadrakh)2)도 지속가능한 발전이 다소 문제점이 있지만 경제적 발전의 불가피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이는 대부분의 국가들이 현대의 환경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환경담론 중에서 지속가능한 발전을 공식적 정책으로 채택해가고 있는 추세를 반영한다. 뒤늦게 세계 자본주의 질서에 합류한 몽골은 명목상으로는 환경과 경제의 균형있는 발전을 도모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경제적 발전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물론 지속가능한 발전은 경제가 생태학적 지속가능성에 의존한다고 밝힌 점에서는 기존의 성장제일주의보다 긍정적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지속가능한 발전 담론은 환경위기의 원인을 외적 차원에서 찾고 있는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그로브 화이트(Robin Grove-White)는 지속가능한 발전의 제안자들이 규제나 기술 혁신, 국제 협정, 경제적 수단의 적용 등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유는 환경위기의 원인을 외적, 물리적 차원에서 찾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3) 한편 지속가능한 발전의 의도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롤즈(Kate Rawles)는 지속가능한 발전에 대한 회의는 약속과 이행의 불일치 때문이 아니라 정부의 '의도'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즉 실제적으로는 경제성장을 중심으로 한다는 것이다.4) 해리스 존즈(Peter Harries-Jones)도 지역적, 국가적, 그리고 국제적 차원의 시장 행위 규제를 통해 지속가능한 발전을 획득한다는 브룬트란트(Brundland) 보고서의 주장은 생태학적이기보다는 경제논리적인 '모순어법'이라고 비판한다.5) 지속가능한 발전은 환경과 경제의 균형있는 발전이 아니라 결국 '경제를 위한 환경'의 의도에 지배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과 반성은 위기의 원인 진단과 해결에 대한 관점을 외적 차원에서 내적 차원으로, 경제에서 환경으로 이동시켜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을 갖는 이들은 환경 위기의 근본 원인이 자연을 이해하는 세계관의 결함에 있다고 주장한다. 대표적으로 린 화이트 2세(Lynn White Jr.)는 "자연을 지배하라"는 그리스도교 세계관의 근본 결함에서 환경위기가 비롯되었다는 주장으로 서구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6) 그리스도교 세계관을 그대로 계승한 서구적 세계관의 근본 결함은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는 것, 다시 말해 자연을 대상화, 사물화 하는 것이다. 인간과 분리된 자연은 성장과 개발의 자원이 되었고, 위기의 본질도 자원의 고갈을 의미하게 되었다. 지속가능한 발전의 한계도 결국은 이러한 내적 차원의 결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비판은 세계관을 무의미한 것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다. 위기의 원인이 잘못 방향지워진 세계관 때문이라면 그 해결 역시 세계관의 정정에서 찾아야 한다. 그리스도교 세계관을 문제삼은 화이트가 위기의 극복은 과학이나 제도적 변화가 아니라 세계관의 정정에서 찾아야 한다는 결자해지(結者解之)의 관점에서 프란치스코(Francisco of Assisi)를 생태계의 수호성인으로 재해석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해리스 존즈 역시 "지구의 생존은 자연에 대한 근본적 '이해의 변화'에 달려 있다"7)고 강조함으로써 내적 차원, 세계관의 정정을 위기 극복의 가장 중요한 전제로 제시한다.
이처럼 서구적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 반성을 모색하는 과정은 새로운 모델을 고안해내는 대신 이미 실재하고 있는 비서구사회의 친환경적 삶의 방식에 대한 관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 동안 미개한 원시사회로 폄하했던 '전통사회'가 실은 인간과 자연의 상호의존성에 입각해 이상적 환경상태를 구성하고 있음이 알려지면서 이제는 전통사회의 문화로부터 위기를 벗어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전통사회와의 조우와 배움의 과정은 현대 서구인들이 지닌 자연관의 문제점을 표출시켰다. 잉골드(Tim Ingold)는 그것을 '구(球, globe)'와 '권(圈, sphere)'의 인식론적 차이로 설명한다. 그는 현대 서구인들이 지구(The Earth)를 '구'로 보는 반면 원주민들은 '권'으로 본다고 주장한다. 구로 보는 것은 지구를 대상화하는 것이다. 이 경우 지구는 인간이 속해있는 공간이 아니라 우주 공간에서 촬영하듯 관조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서구적 인간은 지구의 '표면' 위에 서 있는 존재이다. 반면 권으로서의 지구는 그 중심에 있는 '나'를 둘러싼 환경이 되므로 인간은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존재로 남게 된다.8)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는 전혀 다른 환경상태를 구성하는 근본원인이다. 현대 서구인들이 자연에 '대한' 효과적 제어와 이용에 주력함으로써 자연을 식민화하고 대상화한 과정은 자연과 인간의 분리를 가져왔다. 인간과 분리된 자연은 조작과 이용의 대상일 뿐이다. 이러한 분리적 세계관의 견고함은 환경주의의 맥락에서도 자연의 대상화, 사물화가 존속되게 만들었다. 자연을 인간에 의해 구해져야 하는 대상으로 보는 관점이 그것을 대표한다. 리차드(Paul Richards)는 '구한다(save)'는 것은 '돌봄(care)'이나 보호'(protect)'를 의미하는 것으로 결국 누군가의 소유를 전제하는 개념이라고 지적한다.9) 구한다는 관점은 적극적인 환경보전의 노력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인식론적으로는 여전히 자연을 소유할 수 있는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전통사회 사람들은 자연 안의 구성원간의 상호의존성을 인식함으로써 청정한 환경을 구성해왔다. 대부분의 비서구 사회에서는 자연과 인간의 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전통적인 비서구사회는 인간에 상대되는 '자연(nature)'이라는 개념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이는 몽골의 언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내 아시아 지역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로 잘 알려져있는 험프리(Caroline Humphrey)는 외부인들이 흔히 '자연'으로 번역하는 몽골어 바이갈(Baigal)은 '존재의 상태', '사물이 있는 방식'이라는 의미의 바이달(baidal)과 밀접히 관련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바이갈은 살아있는 존재뿐만 아니라 살아있지 않은 대상들도 포함하고, 바이갈에서의 대상은 '신령'과 유사한 개념으로 여겨지며, 의례적 맥락에서는 흔히 에찐(ejin, master)과 같은 것으로 인격화되기도 한다.10) 이런 맥락에서 자연과 인간은 분리된 대상으로서 존재할 수 없다.
한편 자연과 인간의 불가분성에 대한 전통사회의 관점은 환경위기 극복 과정에서 문화가 지니는 적극적 의미를 보여준다. 대상화 과정에서 문화와 자연을 분리한 서구적 관념과는 달리 비서구 전통사회에서는 자연과 (인간의)문화를 대립적 영역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전통사회의 삶의 방식은 문화 바깥의 자연적 삶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을 이원론적으로 사유하지 않는 문화적 삶이다. 그러므로 환경보전의 노력은 문화를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반환경적 문화를 친환경적 문화로 변화시키는 것이 되어야 한다.
환경운동의 지형에서 문화의 의미를 긍정하는 것은 인간과 자연의 공존 가능성을 더욱 강화하는 실천적 결과를 가져온다. 자연과 공존하는 문화의 존재는 다른 문화에서 나타나는 파괴성이 인간의 삶에서 필연적 과정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환경위기는 문화적 맥락에서 반성해야 하는 주제이다. 문화와 환경의 분리를 반대한 잉골드는 "환경의 역사는 인간과 인간 이외의 모든 유기체들이 과거와 현재에 환경을 형성하는데 기여한 행동의 역사"11)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을 따른다면 몽골의 청정한 환경은 유목민들이 자연의 구성원들과 상호작용하고 행동해온 결과라는 것을 의미한다.
문화의 차이가 환경 상태의 차이를 수반한다는 자각은 친환경적 행동을 구현하는 전통사회의 문화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킨다. 그런 관심 중에서도 최근 환경주의의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 전통적 유목문화이다. 필자가 연구한 몽골은 수 천년동안 유목이 계속되고 있는 지역으로, 초원과 사막, 고산지대와 호수가 어우러진 청정한 환경상태를 지금껏 간직하고 있는 지역이다. 이런 환경 상태를 가능하게 한 것은 저생산성, 저소비성, 자연과의 순환적 관계성, 종교적 감각을 포함하는 총체적 삶의 양식으로서의 '문화'였다. 환경 상태를 결정하는 것이 문화라는 것은 몽골과 러시아의 부리야트, 중국의 내몽골의 환경 차이에서 알 수 있다. 세 지역은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어서 비슷한 기후, 생태 조건을 간직하고 있고, 역사적으로도 유사한 사회주의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부리야트와 내몽골이 상당한 환경파괴를 경험한 반면 몽골은 생명다양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차이는 몽골의 경우 사회주의 시기에도 친환경적 유목문화를 포기하지 않았던 점과 관련된다.
몽골 유목문화의 긍정적 환경 함의는 전통적 종교성과 결부되어 있다. 굴든(Clyde Goulden)은 이미 13세기 쿠빌라이 칸(Khubilai Khan)의 통치 때부터 환경보전을 위한 윤리가 법제화되었고, 18세기에는 여러 산악 지역을 보호구역으로 선포할 정도의 친환경적 태도는 종교적 차원과 결부된 것이었다고 평가한다. 즉 몽골인들이 자연환경에 대해 절대적 자부심을 갖고 환경 보호를 역설하는 것은 그것이 영적, 종교적 믿음의 핵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2) 이는 대개의 전통문화가 자연과의 영적, 종교적 연대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데이비스(Wade Davis)는 전통사회의 친환경적 문화가 지니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이러한 문화들은 세월과 관례를 통하여 형성된 지구와의 전통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는 땅에 대한 깊은 애착뿐 아니라, 훨씬 더 미묘한 직관 - 이 땅 자체가 인간의 자각에 의해 생명을 갖는다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산, 강과 숲은 단순히 인간드라마가 펼쳐지는 무대의 받침쯤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이들 사회에서 땅은 생명을 가진, 인간의 상상으로 포용하고, 변형될 역동적인 에너지이기 때문이다.13)
그녀가 주장한 전통적 자연관의 내용은 종교적 태도와 가장 유사하다. 이는 산업사회의 자연관을 반성하고 정정함에 있어서 종교적 자연관의 회복과 재건이 중요한 전제가 됨을 암시한다.
물론 종교적 자연관을 강조하는 것이 선택의 '유일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종교만이 환경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지속가능한 발전'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게 된다. 현재의 환경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하나의 부정적 주어(主語)를 다른 하나의 긍정적 주어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긍정적 주어들의 목록을 늘려 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이는 환경 보전의 수평적 연대에서 종교의 의미를 '조각보'의 부분으로 은유하는 것이다. 다만 종교가 '부분으로서' 수행하는 역할은 자연에 대한 영적 감수성을 복원하는 것, 위기의 근저에 위치한 욕망을 드러내고 제어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본질적'이다. 따라서 본 논문은 종교, 특히 샤머니즘이 몽골인들의 전통적 자연관을 어떻게 구성했는지를 밝히고, 대안적 환경담론 구성에서 종교적 자연관이 갖는 의미를 논의할 것이다.
이러한 논의의 과정은 한편으로는 환경운동의 중심이 여전히 과학기술과 법, 제도적 차원의 개선에 치우치는 면이 있는 현실에 대한 비판을 포함한다. 서구 사회의 일부 환경주의자들이 과학적, 제도적 방식이 아닌 종교적, 영성적 방식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있지만 이들은 아직 환경운동의 주류가 되고 있지 못하다. 오히려 세속화된 서구 사회에서 이들의 입장은 앞으로도 주변적 위치를 점할 가능성이 높다. 그만큼 현대의 환경운동은 여전히 과학적 권위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으며 한편으로는 종교적 기대를 '미신'으로 일축하는 분위기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일례로 이어리(Steven Yearley)는 대표적 환경단체인 그린피스(Green Peace)는 '유럽에서 가장 정교한 이동 실험실'을 갖추고 있다고 일컬어질 만큼 그 지도자들 대부분이 과학자들이라는 점에서 현대 환경운동은 종교, 문화적 차원보다는 과학기술을 더 중시하고 있다고 진단한다.14)
그러나 현대인이 배우려는 비서구 전통사회의 문화는 자연에 대한 종교적 감수성에 기반한 것이므로 그것을 배제한 수용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스프레낙(Charlene Spretnak)이 The Spiritual Dimension of Green Politics(1986)에서 환경주의를 종교적 기반의 운동으로 주장하면서 영성 없는 환경 정치학은 '빈껍질'에 불과하다고 단언했고,15) 근본생태학(Deep-Ecology)의 창시자로 평가받는 내스(Arne Naess)는 "생명의 모든 형태는 고유한 가치를 가지므로 자아실현의 권리, 삶과 개화의 권리를 가진다. 그러므로 도덕적 영역은 인간 種 넘어로 확대되어야 한다."16)고 주장했다. 이런 관점은 인간과 동물, 식물, 지상의 모든 생명체와 비활성적 요소들의 존재를 긍정하는 '생태학적 영성(ecological spirituality)'으로 수렴된다.
이처럼 생태학적 영성의 모색과 추구가 중요한 이유는 종교학자 길희성의 주장처럼 환경의 위기가 단지 물리적 환경만의 위기가 아니라 인간의 삶과 정신세계마저 파괴하는 심각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17) 카프라(Fritjof Capra) 역시 현대적 위기의 본질은 기계론적 세계관이 초래한 '감수성의 위기'18)이므로 그 위기의 극복은 생태친화적 감수성의 회복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하는 감수성은 인간과 우주가 완전히 합치하는 강렬한 생태론적, '종교적' 체험이다.19) 욕망에 지배되는 인간의 인식과 행동을 정정하고, 끝없는 소비의 편리 대신 자연 안의 다른 구성원들과 공존하는 불편을 감수하기 위해서는 종교적 자연관의 회복이 절실하다. 본 논문에서 다룰 몽골인들의 종교적 자연관은 그러한 필요성과 가능성에 대한 경험적 사례가 될 것이다.
종교적 자연관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것이 그것을 이상화, 절대화하는 것은 아니다. 본 논문에서 필자가 분석하는 또 하나의 주제는 사회주의 해체 이후 유입된 자본주의적 충격이 몽골인들의 자연관에 미치고 있는 영향이다. 전통적 유목문화의 종교적 자연관이 환경주의의 맥락에서 중요한 함의를 갖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거치면서 상당히 약화되고 있다. 실제로 유목문화의 중심 원리인 이동성이 시장경제 이후 위축되었고, 1956년 현재 22.6%였던 도시인구 비율이 사회주의 말기인 1989년에는 57.1%로 늘어날 만큼 집중화, 도시화가 가속화되고 있다.20) 이는 전통사회를 조화롭고 고착된 것으로 보는 '고전적 인류학'의 규범 대신 변화의 과정에 주목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의 중심에는 1990년대 이후 도입된 자본주의의 충격이 위치해 있다. 자본주의적 가치의 유입이 몽골 유목문화의 친환경적 종교성을 완전히 파괴한 것은 아니지만 심각히 위협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필자는 자본주의적 사회변동이 몽골인들의 삶과 종교, 환경에 미친 영향에 대한 심층적 분석도 논의 과정에 포함하고자 한다.
2. 현지조사의 과정과 방법
본 논문의 범위는 몽골의 전통적 유목문화의 친환경적 특성을 구성하는 종교적 자연관의 함의를 밝히고, 그것이 현재 진행중인 자본주의적 사회변동 과정에서 어떻게 적응 혹은 위축되고 있는지를 분석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필자는 관련 선행 연구들에 대한 문헌 자료 조사와 더불어 몽골 현지조사를 실시했다.
우선 사용한 문헌 자료들의 성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몽골의 불교와 샤머니즘에 대해서는 하이지히(Walther Heissig), 바우덴(Charles R. Bawden) 등의 선행 연구서들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들의 연구는 주로 사회주의 이전 시기의 문헌들을 재구성한 것이어서 현대의 종교 현상을 이해하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보다 최근의 종교 현상에 대한 험프리(Caroline Humphrey)의 인류학적 연구, 저널리스트의 벡커(Jasper Becker)의 취재기 등도 중요한 자료로 삼았다.
둘째, 몽골의 환경, 문화에 대해서는 험프리를 중심으로 한 내아시아 지역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서인 Culture and Environment in Inner Asia(1996)와 The End of Nomadism?(1999), 그리고 국제유목문화연구협회의 현대 유목민과 토지 사용에 대한 국제 심포지엄(2001) 자료집을 주로 사용했다. 이 문헌들은 최근의 몽골 환경과 경제, 문화의 다양한 측면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며, 특히 환경보전에 있어 전통적 종교성이 갖는 의미성을 현지조사를 토대로 보여줌으로써 필자의 연구 방향 설정에 큰 도움을 주었다.
셋째, 현대 몽골의 역사에 대해서는 사회주의 이후 새로운 시각에서 몽골의 역사를 쓰고 있는 몽골인 역사학자 바바르(B. Baabar)의 역사서와 사회주의 시기에 발표되었던 샌더스(Alan J.K. Sanders)의 역사서, 그리고 현대 몽골의 민족주의를 다룬 내몽골인 인류학자 불락(Uladyn E. Bulag)의 연구를 주로 참고했다. 필자는 이들의 선행연구에서 주로 종교와 관련된 현대사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
넷째, 그 외 본 논문의 문제의식과 관련된 종교학자, 인류학자, 철학자들의 환경주의 문헌들과 인터넷 문서들을 폭넓게 참고, 인용했다. 자연에 대한 인식과 실천의 문제를 다루는 환경주의의 쟁점들, 미시적 영역에 대한 구체적 기록들을 통해 환경과 종교의 상관성에 대한 이해의 틀을 형성했다.
몽골 현지조사는 2000년과 2001년 여름 각각 3주씩 두 차례에 걸쳐 실시했다. 2000년에는 아르항가이(Arkhangai) 아이막(aimag, 道) 나린텔 솜(sum, 郡)과 북부 헙스걸(Khovsgol) 아이막 차강 노르(Tsagaan Nuur, white lake) 솜에서 일반 유목민들과 샤먼들의 일상적 생활방식과 종교적 의미체계, 의례 과정을 폭넓게 조사했다. 2001년에는 수도인 울란바타르(Ulaanbaatar)에서 라마승, 샤먼, 도시의 젊은이, 그리고 유목민들이 시장경제라는 사회적 변동 과정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를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본 논문은 주로 2001년의 현지조사에서 얻어진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2001년의 현지조사는 처음부터 난항을 겪어야 했다. 몽골 종교 연구를 도와주기로 약속했던 체첸(Tsetsenbileg)이 같은 기간에 러시아로 떠났고, 한국에 유학 온 다크미드마(Dagmidmaa)가 소개시켜 준 몽골인도 사정이 좋지 않아 협력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이메일(e-mail)을 통해 교류했던 바트랄(Surenguin Badral)21)의 협조로 밧조릭(Baatjorig)22)을 안내자로 소개받았고, 또한 바트랄의 친구인 역사학자 도르치파금(Dorjpaagum)23)의 협조로 흑샤먼 잉흐자르갈(Inkhjaargal)24)과 만날 수 있었다. 이후 현지조사에서 잉흐자르갈을 통해 도시에서 활동하는 흑샤먼들을 만날 수 있었다.
현지조사의 첫 단계는 폭넓은 '비교'를 통해 사실에 접근하는 것이었다. 조사 초기에는 몽골 종교현상의 일반적 흐름에 대한 풍부한 정보를 얻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몽골인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불교의 다쉬 초이린(Dash Choiren)25), 간단(Gandan)26)사원에서는 일반 신자들과 라마승들을 집중적으로 인터뷰했고, 누흐트(Nuht) 산 앞의 게르(ger, 집)27) 촌을 지속적으로 방문하여 각 아이막에서 온 유목민들을 폭넓게 만났다.28) 심지어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몽골인들 마저도 조사 대상으로 삼은 경우도 있었다. 필자는 이들에게서 종교적 실천의 내용, 자연에 대한 이해, 사회적 변화에 대한 체감 정도를 집중적으로 비교 조사했다. 이러한 비교 방법은 정보의 사실성을 강화하고 논문의 문제의식을 선명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일례로 여러 아이막에서 온 유목민들 각각에 대한 비교 조사를 통해 사회주의 행정력이 쉽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의 종교적 차이를 파악할 수 있었다.
현지조사의 두 번째 단계는 초기 단계에서 만난 몽골인들 중에서 핵심 정보제공자(key informant)를 정해 반복적 만남을 시도한 것이었다. 이들과의 반복적 만남은 두 가지 측면에서 시도되었다. 하나는 다른 정보제공자들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자신들의 종교적 전통에 대한 상세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였고, 다른 하나는 진술의 맥락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 모호성을 드러내는 사람들의 경우였다. 전자의 경우는 종교적 자연관의 내용을 더 풍부히 파악하기 위해, 후자의 경우는 모호성으로 인한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다시 만날 필요가 있었다. 이 과정에서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언뜻 모순으로 비춰지는 진술도 그들의 생애사, 사회적 위치를 이해할 때 충분히 설명 가능한 것이라는 점이었다. 예를 들면 마치 인류학자 크라판자노(Vincent Crapanzano)의 민족지『투하미』(Tuhami)를 연상시킨 다기마(Dagimaa)29)는 두 번째 만남까지는 자신이 라마승이 되려는 동기를 꿈으로만 설명했다. 그러나 세 번째 만남을 통해 그녀의 종교적 동기가 불행한 개인사, 그리고 자본주의적 사회문화의 확산으로 인한 부정적 경험과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라마승이 되어야 한다는 꿈의 계시를 듣게 된 시기는 임신한 상태에서 남자와 헤어진 시점과 일치했던 것이다. 한편 유목민의 종교적 자연관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했던 간바트르(Ganbaatr)30)가 최근에 울란바타르로 이주했고, 따라서 그의 이야기는 만남의 시점에서 과거적인 것이었음을 알게 된 것도 울란바타르 외곽의 그의 집에서 세 번째 만났을 때에야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진술의 표면적 불일치와 모호함은 그들의 은폐 의도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외부자에게 들려주는 것에 적극적이었다.31) 그것은 다기마와 간바트르의 새로운 사실이 '알려졌을 때' 당황한 것은 그들이 아니라 필자였다는 사실에서 입증된다. 황샤먼인 쟘빈(Zambin)32)도 반복적 만남의 필요성을 부각시켰다. 불교학자 체데브(Dolgorun Tsedev)33)의 집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역사와 전설, 사적 감정을 뒤섞어서 이야기했고, 따라서 북부 지역 황샤먼들의 역사와 종교적 실천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어렵게 만들었다. 하지만 울란바타르 서부 변두리의 그의 집을 방문하여 다시 대화를 나눴을 때 첫 만남에서의 모호성은 상당 부분 사라졌다. 그 만남을 통해 흑샤먼 중심 지역인 헙스걸 아이막에서도 불교와 샤머니즘의 역사적 갈등이 실재했으며, 불교가 샤머니즘을 대체하기 위해 시도했던 다양한 실천의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 이는 타자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충분한 만남의 계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확인시킨 경험이었다. 또한 반복적 만남을 통해 얻어진 친밀성으로 인해 더 구체적 정보도 얻을 수 있었다.
현지조사의 세 번째 단계는 필자의 일방적 의도와 판단을 중지하고 타자의 자발적 진술을 우선적으로 경청하는 진정한 '대화'의 시도였다. 현지조사 중반에 이르렀을 때 타자의 의미체계가 필자의 질문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차원으로만 고정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긴 문장으로 옮길 수 있을 뿐 엄밀한 의미에서는 산술적 통계 조사와 다를 것이 없었으며 또한 타자의 경험세계의 맥락에서, 그들이 자신의 문화를 이해하고 있는 해석의 틀에 입각하는, 즉 타자의 관점으로 이해하려는 인류학적 연구 방법론의 기초를 위반하는 것이었다. 결국 접근하는 사람의 세계관과 관심사에 따라 타자를 왜곡할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반성 후 핵심 정보제공자중 한 명인 흑샤먼 허럭34)을 다시 만났을 때에는 일방적 질문 대신 대화적 과정을 시도했다. 다른 연구자들과도 많이 만난 적이 있는 그녀는 그런 방식을 어느 정도 낯설은 경험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처음에는 어디서부터, 무엇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난감해했지만 곧 중간 중간에 곰곰이 생각하면서 샤먼의 삶과 종교적 의미체계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필자에게도 전혀 새로운 경험이었다. 미리 준비한 질문 목록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던 샤먼의 삶을 접하면서 새로운 문제의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본 논문의 4장에서 중심적으로 다룰 엉거트(신령)와 자연의 관계에 대한 흑샤먼들의 관점 변화는 그녀의 자유로운 자기 진술에서 얻어진 주제였다. 한편 이 과정은 필자와 허럭 사이에 인간적 친밀감도 생겨나게 만들었다. 그녀는 아직 어머니 바이라의 49제가 끝나지 않은 상태임에도 필자를 자신의 집에 초대했다. 그녀와의 세 번째 만남에서 그녀의 가족과 어울릴 수 있었고, 함께 사진을 보며 즐거워했고 서로에 대한 기대감의 표현도 나눌 수 있었다. 기어츠는 발리인들 사이에서 자신이 보이지 않는 존재에서 최소한 '귀찮은 녀석'으로, 그리고 즐거운 '농담의 대상'으로 변화해가면서 타자의 의미체계에 접근하는 과정을 정밀하게 기술한바 있다.35) 타자와의 만남의 계기에서 진솔한 삶의 자세를 공유하는 대화의 과정은 그들에게는 중요한 것이지만 외부인들은 쉽게 간과할 수 있는 의미를 발견하게 한다.
이상의 현지조사는 "문화는 그들의 초상화를 위해 정지해 있지 않는다"36) 라는 대안적 인류학의 기본명제를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문헌자료에 나타난 몽골과 현지에서 직접 경험한 몽골의 차이, 개인 안의 자기모순과 의견 불일치는 그들이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임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사회주의적 세속화를 거쳐 자본주의적 세속화의 극단을 경험하고 있는 현재의 몽골 사회는 다쉬 초이린 사원의 젊은 라마승 알탄 쿠(Altan Khuu)37)의 "모든 것이 변하고 있다"는 한 마디로 요약된다. 현재 자본주의적 사회 변동은 몽골인들의 전통적 종교문화를 위협하고 있고, 환경에 대한 부정적 영향도 표출하고 있다. 따라서 본 논문의 각 장은 이러한 변화 속에서 갈등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비중 있게 다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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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계환경발전위원회 보고서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미래 세대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을 위태롭게 하지 않고 현 세대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발전"이라고 정의한다. 더 상세하게는 "자원이용, 투자방향, 기술적 발전의 방향 설정 그리고 제도적 변화가 모두 조화를 이루어 인류의 욕구와 열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현재와 미래의 잠재력을 모두 높여나가는 변화과정"이라고 설명한다. 세계환경발전위원회,『우리 공동의 미래』, 조형준, 홍성태 역(서울: 새물결, 1997), 75-78쪽.
2) 갈바트라크는 "동부 초원 생명다양성 프로젝트(The Eastern Steppe Biodiversity Project)"의 간부이다. 이 단체는 지구 환경 기금(GEF)의 지원을 받아 98년 12월에 시작해 7년 계획의 프로젝트를 진행중이다. 하는 일은 힝티 아이막, 도르너드 아이막, 수흐바타르 아이막의 초원을 보호하는 것이다. 구체적 목적은 자연보호구역 주변의 초원을 보호하는 것, 그 지역 사람들의 경제적 발전을 도모하는 것, 그리고 지역 행정조직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갈바크라크는 지역 주민들을 만나 그들의 생활수준을 높이도록 돕는 역할을 하고 있다.
3) Robin Grove-White, "Environmentalism: a new moral discourse for technological society?", Environmentalism-The View from Anthropology, Kay Milton(ed.)(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1993), pp, 19-20.
4) Kate Rawles, "Philosophy and the environmental movement", Spirit of the Environment - Religion, value and environmental concern, David E. Cooper and Joy A. Palmer(ed.)(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1998), pp. 132∼133.
5) Peter Harries-Jones, "Sustainable Anthropology : Ecology and Anthropology in the Furure", Contemporary Futures - Perspectives from Social Anthropology, Sandra Wallman(ed.)(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1992), pp. 158-159. 그는 다른 글에서도 경제논리에 입각할 경우 환경운동은 국가의 경제적 경쟁력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전개되어야 한다는 결론만을 초래한다고 지적한다. Peter Harries-Jones, "Between Science and Shamanism", Environmentalism, p. 52.
6) Lynn White, Jr., "The Historical Roots of Our Ecologic Crisis", Science(1967. 3), pp. 1203-1207. 신중섭, "생태론적 인간주의", 『기술 정보화 시대의 인간 문제』, 한국동양철학회 편(서울: 현암사, 1994), 87-94쪽. 재인용.
7) Harries-Jones, "Sustainable Anthropology: Ecology and Anthropology in the Furure", pp. 158-161.
8) Tim Ingold, "Globe and Spheres - The Topology of Environmentalism", Environmentalism, pp. 31-42.
9) Paul Richards, "Saving the Rain Forest? Contested futures in conservation", Contemporary Futures, p. 151
10) Caroline Humphrey and David Sneath, The End of Nomadism? : Society, State and the Environment in Inner Asia(Durham: Duke Univ. Press, 1999), pp. 2-3.
11) Tim Ingold, "Culture and the Perception of the Environment", Bush Base : Forest Farm : Culture, Environment and Development, Elisabeth Croll and David Parkin(ed.)(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1992), p. 50.
12) Barry Lewis, "Environmental studies offer a glimpse at a rare natural world", Academy of Natural Science, 1996. 11, http://www.acnastsci.org/erd/ea/mongol5.html
13) Wade Davis, "문화적 다양성의 소멸과 상상력의 위기", The Globe and Mail, 2000. 12. 28, http://www.greenreview.co.kr/greennews/WadeDavis.htm
14) Steven Yearley, "Standing in for Nature - The Practicalities of Environmental Organizastions", Environmentalism.
15) Tanya M. Luhrmann, "The Resurgence of Romanticism - Contemporary Neopaganism, Feminist Spirituality and the Divinity of Nature", Environmentalism, p. 223. 재인용.
16) David Kinsley, Ecology and Religion - Ecological Spirituality in Cross-Cultural Perspective(New Jersey: Prentice Hall, 1995), p. 184.
17) 길희성은 환경위기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자연과학적 세계관과 그 근저에 놓인 주객 대립적 사고 방식과 인간중심주의, 그로 인해 오는 자연의 비인간화와 인간의 탈자연화,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소외 못지않게 심각한 인간과 인간의 소외 현상은 물질적 풍요만큼이나 커다란 정신적 가난을 현대인에게 안겨주게 되었다. ... 환경 위기는 단순히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자연 생태계가 파괴되어 인간의 삶 자체가 위협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넘어서 현대인의 정신적 위기와 직결되어 있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 자연의 소생, 현대인의 정신적 공허의 극복, 종교의 부활은 동일한 문제의 상이한 측면이다." 길희성, "자연, 인간, 종교", 『환경과 종교』, 길희성 외(서울: 민음사, 1997), 14-15쪽.
18) Fritjof Capra, "지구를 살리는 새로운 선택",『신과학 산책』, 김재희 편역(서울 : 김영사, 1994), 18쪽.
19) 앞의 글, 38쪽.
20) Humphrey, The End of Nomadism?: Society, State and the Environment in Inner Asia(Durham: Duke Univ. Press, 1999), p. 200.
21) 외무부의 대외 상담역을 맡고 있는 그는 몽골의 전통적 종교와 문화를 외국인들에게 알리는 일에 적극적이다. 현지조사를 시작하기 직전에 큰 기대없이 그에게 이메일을 보낸 것이 의외의 협력을 얻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22) 밧조릭은 몽골과 한국이 수교한 직후 한국에 유학을 와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몽골로 돌아와서는 무역회사를 운영하다 지금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중이었다. 그는 종교를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샤먼을 만나거나 사원에 가면 종교적 행동양식을 익숙하게 표현했다.
23) 도르치파금은 고대 몽골제국 시대의 의복을 연구하는 학자였다. 바트랄과 함께 그녀의 연구실에 찾아갔을 때 그는 고대 의상을 복원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샤먼을 연구하려는 의도에 대해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지만, 필자가 샤머니즘에 어떤 편견이나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이야기하자 흑샤먼 잉흐자르갈(Inkhjaargal)을 소개해줬다.
24) 현지조사 과정에서 여러 샤먼들을 만나도록 도와준 잉흐자르갈은 헙스걸 아이막 출신의 샤먼이다. 그녀는 사회주의 시절 법대를 나와 국영 무역회사에서 일을 하다 사회주의 이후 샤먼 일을 시작했다. 그녀의 종교적 뿌리는 고향의 흑샤먼 전통이지만 종교적 혼합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었다.
25) 다쉬 초이린 사원은 30년대 후반에 폐쇄된 '동사원'(The East Temple) 터에 1990년에 현 주지 담바자프를 중심으로 세워졌다. 현재 110명의 라마승이 있고, 불교학교도 있다. 이 사원은 몽골 불교의 현대화를 대표하며 간단사와 경쟁 관계에 있다. 미래를 위한 준비에도 힘써 젊은 라마승들을 싱가폴, 미국, 중국, 인도, 한국 등지로 유학을 보내고 있고, 외국의 종교인들과 연대하여 세계평화를 위해서도 활동중이다.
26) 울란바타르의 대표적 사원인 간단사는 사회주의 시기인 1960년대부터 활동해왔고, 지금도 몽골 불교의 지도 사원이다. 라마승이 되려는 사람들은 소속 사원을 통해 간단사로 승적을 올려야 한다.
27) 게르는 전통적인 유목민의 주거 양식이다. 나무로 둥근 골조를 만들고 그 위에 펠트를 덮은 것으로 바람과 추위에 강하며, 무엇보다도 이동적 삶에 적합하다. 게르를 세우고 해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1시간에 불과하다. 몽골인들은 이 게르에 사는 것을 지금도 선호하여 울란바타르의 중심지에서도 게르를 찾아보는 것이 어렵지 않다. 바이싱(baisin, 고정적 건축물)을 짓고 사는 사람들도 대부분 마당에는 게르를 따로 만들어 생활하고 있기 때문이다.
28) 이 곳에는 몽골의 국가적 축제인 나담(Naadam) 때마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유목민들의 게르촌이 대규모로 형성된다.
29) 어렸을 때부터 병약한 몸으로 고생했던 다기마는 종교에 대한 관심이 많다. 그녀는 지금 라마승이 되기 위해 다쉬 초이린 사원에서 공부중이다. 그 이유는 꿈에 조상 라마승들과 부처님이 나타나 자신에게 라마승이 되라고 권유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현재 부동산 관계 신문사에서 일하고 있지만 조만간 인도로 유학을 갈 계획이다. 그녀는 유학을 다녀온 후 학교에서 종교를 가르치는 일을 하고 싶어한다.
30) 사회주의 시절부터 유목을 해온 간바트르는 북서부 자프항(Zavkhan) 아이막과 토브(T v) 아이막을 오가며 최근까지 유목생활을 해왔다. 하지만 딸이 울란바타르 대학의 사회학과에 입학해서, 울란바타르 남부 변두리 마을로 이사했다. 아직 도시에서의 직업을 얻지는 못했지만 목공일을 할 계획이다. 그는 독실한 불교신자이지만 샤머니즘 신앙도 함께 가지고 있다.
31) 내몽골인으로서 몽골을 연구한 불락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내부자는 그들의 문화를 자랑하기 위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외부자에게 말하는 것에 열성이다. 고립된 사람들의 경우 자신들의 문화를 세계에 소개해달라고 외국인 인류학자에게 간청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인류학자에게 협조하여 실로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기꺼이 제공하려고 한다." Uladyn E. Bulag, Nationalism and Hybridity in Mongolia(Oxford: Clarendon Press, 1998), p. 6. 실제로 현지에서 만났던 수십 명의 몽골인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대화에 개방적으로 임했다.
32) 불교학자 체데브와 동향 친구인 쟈빈은 헙스걸 아이막 출신의 황샤먼이다. 하지만 지금은 샤먼 일을 하지 않고 건물 관리인 일을 하면서 황샤먼 전통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그는 학자들이 흑샤먼 전통에만 관심 갖는 것에 대해 불만이다.
33) 체데브는 사회주의 시절 상하이에서 불교를 공부했고, 현재 자나바즈라(Janabajra) 불교대학 총장으로 일하고 있다. 이 대학은 일반 신자와 라마승이 되려는 지원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불교의 지도층인 그를 통해 간단사의 라마승들을 만날 수 있었으며, 불교의 현실적 문제점에 대한 다양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
34) 허럭은 영험하기로 소문났던 샤먼 수렌(S ren)의 손녀이며 바이라(Bayraa)의 딸이다. 그녀는 13살에 엉거트가 내려왔지만 샤먼이 되기 싫어 저항하다가 결국 19살에 '옷을 입었다.'(입무를 나타내는 샤먼들의 표현) 필자가 그녀를 만났을 때는 지난 6월에 어머니 바이라가 죽어 아직 49제가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녀는 도시의 네오 샤먼들에 대한 반감을 숨기지 않았으며, 흑샤먼 전통의 원류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35) Clifford Geertz, "심층놀이: 발리의 닭싸움에 관한 기록들", 『문화의 해석』, 문옥표 역(서울: 까치, 1998), 482-488쪽.
36) James Clifford, "Introduction : Partial Truth", Writing Culture - The Poetics and Politics of Ethnography, James Clifford and George E. Marcus(ed.)(Berkley, Los Angeles, London: Univ. of California Press, 1986), p. 10. 로살도도 과거의 인류학자들이 타자의 내적으로 동질적이고, 변화가 없는 문화를 그려냈던 것은 민족지적 수사에 의해 만들어진 몰시간성의 환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Renato Rosaldo,『문화와 진리』, 권숙인 역(서울: 아카넷, 2000), 71-90쪽.
37) '황금 소년'이라는 이름 뜻을 가진 알탄 쿠는 회계사 출신의 젊은 라마승이다. 그는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고 현대적 지식도 풍부하다. 구 세대 라마승들에 대해서는 종교적 지식과 열정의 부재를 이유로 불신하고 있다. 다쉬 초이린 사원을 방문했을 때에는 사무실에서 회계 업무를 보고 있었다.
제 2 장 몽골 종교의 역사와 현대적 변화
1. 사회주의 이전 종교의 역사
1) 몽골 샤머니즘의 기원과 특성
2) 불교의 전래와 확산
3) 민간신앙 차원의 종교 융합
2. 사회주의 시대의 종교
1) 종교 탄압의 전개과정과 성격
2) 사회주의 시기 종교적 실천의 지속
3. 자본주의 시대의 종교의 상품화
1) 불교의 재활성화와 현대적 문제
2) 도시의 샤먼들: 이주와 종교적 융합
하이지히(W. Heissig)는 몽골의 종교에 대한 종합적 소개서인 The Religions of Mongolia(1961)에서 그가 기술하는 종교는 "유물로서만 관찰될 뿐 더 이상 몽골에서 살아있지 않은 것"1)이라고 전제했다. 서양의 그리스도인들이 '악마들로 가득한 땅'이라 비난할 만큼 종교적 만신전을 이루었고 불과 3,4백년 동안에 티벳을 능가할 정도의 종교적 발전을 과시했던 몽골의 종교가 쇠락한 유물로 잊혀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주의 이후 불과 10여 년을 경과하고 있는 현재 몽골의 종교는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여주고 있다. 현지에서 만난 샤먼들의 일은 넘쳐났고, 평일에도 사원을 방문하는 신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죽어버렸다고 여겨지던 유물이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의 부흥을 가져오는 원인은 민족주의와의 관계, 사회주의 시기 억눌려 있던 종교성의 표출 등 여러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우선 민족주의와의 관계에서 살펴 보면 인류학자 불락(Uladyn E. Bulag)을 비롯한 많은 학자들은 몽골의 종교적 부흥을 민족주의와 연관지어 설명한다. 불락은 사회주의 이후 몽골의 정체성 정립 과정을 '몽골화(Mongolizing)'로 정의하면서 그 내용을 징기스 한에 대한 재평가, 불교를 새로운 민족주의의 주요한 구성요소로 고무하는 것, 오래 전에 사라진 샤머니즘을 활성화하는 것, 몽골식 유목을 재건하는 것으로 설명한다.2) 이는 몽골화 과정에서 전통의 담지자인 종교가 '상상된 공동체' 형성을 위한 효과적 자원으로 활용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3) 몽골의 불교가 사회주의 이념을 대체하며 새로운 도덕적 기준으로 자리잡았다는 베커(Jasper Becker)의 평가나,4) 민족주의와 종교가 혼합된 새로운 사회의식이 맑스주의를 대체했다는 저겐스마이어(Mark Juergensmeyer)의 분석도5) 현재 몽골의 민족주의와 종교가 공생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처럼 종교의 재활성화에 민족주의가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종교의 부흥이 단지 민족주의적 기획의 결과라고만 볼 수는 없다. 종교는 사회 변동을 단지 수동적으로만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사회주의의 역사적 경험으로 인해 종교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한다면 현재의 재활성화는 민족주의의 영향일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현지조사의 경험은 현재의 종교적 복원을 가능케 한 핵심적 원인이 대중의 종교적 기대라는 판단을 갖게 했다. 그것을 논증하기 위해 우선 몽골의 전통적 종교가 어떤 형태로 발전해왔는지를 개괄적으로 이해한 후 사회주의 시기의 경험에 대한 구체적 분석을 시도한다.
1. 사회주의 이전 종교의 역사
1) 몽골 샤머니즘의 기원과 특성
기독교, 불교, 이슬람 등 창시자와 신앙 집단의 구성 형태가 분명한 세계종교들도 각 지역에 선교된 이후에는 그 지역의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 따라 독특하게 발전한다. 그러므로 각 종교 현상에는 세계적 차원의 보편성과 지역적 특수성이 공존한다. 이 점에서는 창시자와 교리, 교단체계가 명확하지 않은 샤머니즘도 예외가 아니다. 시베리아의 타이가 지대에서 라틴 아메리카의 정글에 이르기까지 샤머니즘은 엑스타시(ecstasy)를 중심으로 하는 보편성을 갖는 한편 생태, 사회, 문화적 환경에 따라 그 형식과 내용을 달리하는 특수성도 포함한다.
그러나 샤머니즘의 특징은 보편성을 강조하는 세계종교들에 비해 지역적 맥락이 보다 강하게 나타나는 종교현상이라는 점이다. 물론 샤머니즘을 연구한 이들 중에도 샤머니즘의 보편성을 상정한 학자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엘리아데는 '고대적 접신술'이라는 보편적 개념을 사용했으며, 마이클 하너(Michael Harner)와 같은 네오 샤머니즘 학자들은 '핵심 샤머니즘(Core Shamanism)'이라는 추상화를 통해 샤머니즘의 보편성을 추구했다. 그러나 이들의 이론은 샤머니즘에서 두드러지는 지역성의 맥락을 결여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와 관련하여 비테브스키(Piers Vitebsky)는 샤머니즘은 교리, 교단, 경전도 없고, 권위있는 성직자도 없으므로 어떤 "주의(ism)"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6) 그러므로 몽골의 샤머니즘을 이해하려면 이 지역의 역사, 문화, 생태적 조건을 충분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
샤머니즘이 우세한 대개의 부족 사회는 자기 집단의 토템적 기원을 상정하거나 조상에 대한 종교적 숭배를 통해 존재의 연속성과 사회적 정체성을 공유한다. 몽골의 샤머니즘도 마찬가지이다. 하이지히는 몽골 샤머니즘을 혼합된(mixed) - 혹은 불교화된(Lamanized) - 샤머니즘과 조상숭배에서 기원한 '진정한 샤머니즘'(true shamanism)으로 구별한다. 그가 '진정한' 이라는 형용사를 사용한 것은 몽골 샤머니즘의 정수가 조상숭배와 관련된 것임을 의미한다. 특히 몽골 샤머니즘의 신앙 대상인 엉거트도 죽은 샤먼의 영혼이 발전한 것이라는 점에서 조상숭배의 맥락을 나타낸다.7) 이미 12, 13세기에 엉거트는 가축과 인간을 보호하는 가내신으로 섬겨졌다. 이 엉거트가 불교 신격으로 대체된 것은 불교가 몽골에 확산된 17세기에 이르러서였다.8) 그러나 불교의 유입에 따라 신격이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신격의 의미와 목적이 '보호'라는 차원을 탈피한 것은 아니었다.9)
이러한 조상 숭배, 엉거트 숭배와 관련된 몽골 샤머니즘의 첫 번째 특징은 자연에 대한 종교적 감각을 발전시켰다는 점이다. 몽골 샤머니즘에서 현저한 종교적 실천은 '높이'에 대한 숭배이다. '아시아샤먼협회'의 총무인 수흐바트(Sukhbaat)가 몽골 전체에 456개의 성산(聖山)이 있다고 소개했듯이 몽골인들은 크고 작은 산에 대한 경외감을 가지고 있다. 하이지히도 고대부터 몽골인들에게는 조상을 높은 곳에 매장하는 관습이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조상의 신령은 자연의 신격과 유사해지면서 더 강한 힘을 갖게 되었다고 설명했다.10) 즉 조상숭배와 관련된 높이에 대한 종교적 감각이 몽골인들의 종교적 자연관을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또한 샤먼의 영혼이 자연화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 엉거트 관념 역시 샤머니즘의 친환경적 종교성을 내포한다. 이러한 관념은 자연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유목문화에서 조상 신격과 자연 신격이 겹쳐지면서 자연에 보다 밀착한 종교적 세계관을 구성했음을 보여준다. 즉 조상에 대한 사유가 심미적 자연관의 구체적 실천으로 확장된 것이다. 카르피니(Plano Carpini)의 {몽골여행기}에는 그러한 발전의 사례가 기록되어 있다.
어거데이 칸은 자기의 영혼이 안녕을 얻기 위해 작은 숲을 자유로이 성장하도록 남겨두었다. 그리고 누구라도 이곳에서 나무를 자르거나 꺾는 일을 금지시켰다.11)
이는 몽골인들에게 숲은 조상의 영혼이 거주하는 공간일 뿐만 아니라 자신들도 죽은 후 돌아갈 공간으로 인식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거데이 칸이 특정한 숲의 벌목과 훼손을 금지한 것은, 자연을 해치는 것이 곧 자신의 영혼이 거주할 공간을 파괴하는 자해행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친환경적 종교성의 발전에 따라 유목민들은 자연을 함부로 대하는 대신 자연과 공존하는 삶의 방식을 지속시킬 수 있었다.
몽골 샤머니즘의 두 번째 특징은 조상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적 결속의 동기가 정치성이 강한 샤머니즘을 발전시켰다는 점이다. 종교사적으로 부족사회 단계를 지나 고대 국가 수립 이후에는 샤머니즘이 반중심적12) 혹은 주변화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비해 몽골의 샤먼들은 몽골제국 수립 이후에도 한동안 권력의 핵심에 위치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샤먼들이 정치적 권력을 누릴 수 있었던 배경은 유목문화의 분산성 때문이었다. 분산적 성격의 유목 생활에서는 자연의 돌발적 위기 상황이나 외부인들과의 경제적, 정치적 갈등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각각의 부족은 공통된 조상에 대한 숭배를 중심으로 정치적 결속을 발전시켜야 했다. 유목민들에게 씨족은 친족일 뿐만 아니라 군사집단이며 정치세력이었다. 이런 연대성을 이념적으로 지속하기 위해 시조의 탄생지를 성역화하고, 유목의 이동성과 분산성을 상쇄할 수 있는 신화적 고향으로서의 성스러운 산을 상징화했다. 이 과정에서 샤먼들은 하늘과 인간을 매개하는 중재자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집단의 결속을 주도하는 정치적 지도자의 면모도 갖추었다. 고대의 샤먼들은 초원의 귀족이었다는 하이지히의 해석13)은 대부분의 씨족 사회에서 샤먼과 족장이 동일시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 결과 고대 몽골의 샤머니즘은 사적 영역에 기반한 종교현상이라기보다는 고도의 조직적, 체계적 성격과 교회의 형식도 포함한 현상으로 발전했다. 하이지히는 몽골 샤머니즘의 조직적 성격의 사례로 16세기 후반에 라마승들의 선교에 대한 대응방침을 토의하는 샤먼들의 회의가 있었으며,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샤머니즘의 종교적 관념, 신격, 무가의 공통성이 존재했다는 것을 제시했다.14) 이는 샤머니즘에는 교회(조직)가 없다는 일반적 이론과는 달리 몽골의 샤먼들이 정치적, 종교적 차원 모두에서 교단적 세력화를 이루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샤먼들의 정치적 진출이 본격화된 시기는 12세기 징기스 한의 몽골제국 성립기였다. 당시 샤먼들은 초원의 정치세력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한 종교적 원천으로 하늘(Tngri)에 대한 종교적 관념을 제시했다. 수평적 공간 이동을 특징으로 하는 유목사회에서 정치적 통일을 달성하려면 수직적 초월의 관념이 필수적이었다.15) 샤머니즘의 푸른 하늘(Koke Tngri) 혹은 영원한 하늘(Monke Tngri)에 대한 종교적 관념은 초원의 유목민들을 통합하는 기능을 담당했다.16) 지고신(supreme God)의 관념은 일반적 샤머니즘에서는 '숨은 신'이나 '사라진 신'으로 존재하는 경우가 많지만 몽골 샤머니즘에서는 최고신 텡그리가 신적 위계의 정점에 위치한다. 이런 신관의 위계성은 안정된 정치체제 구성이 곤란했던 유목민들을 통합할 수 있는 이념적 자원이 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몽골비사}의 첫 부분은 징기스 한이 '천상에서 운명을 점지 받고 태어난'17) 이라는 기술로 시작한다. 그것은 징기스 한의 사적 배경을 하늘의 의지와 일치시킴으로써 그의 통치권을 정당화하는 종교적 표현이다. 특히 텝 텡그리(Teb-Tngri)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몽골의 대(大) 샤먼 커커츄(Kokochu)는 아직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위치에 있던 테무진에게 "하늘은 테무진에게 이 대지를 통치케 할 것이다"라는 신탁과 징기스 한이라는 칭호를 줌으로써 그의 통치권을 정당화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18) 이런 과정을 통해 몽골 고원을 통일한 징기스 한의 궁정에는 샤먼적 성격의 베키(Beki)들의 활동이 활발했다. 베키라는 칭호는 샤먼 중에서도 최고의 지위와 권위를 가진 인물에게만 부여된 것이었다. {몽골비사} 216절은 "베키로 추대되면 흰옷을 입고 백색 거세마를 타며 상석에 앉는다. 또 년월의 길일을 택하는 일을 주관한다"고 기술하고 있다.19) 이는 족장급 샤먼들이 제국의 궁정에서 통치에 관여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20) 하이지히에 따르면 대략 14세기까지 샤먼들이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21) 이러한 몽골 샤머니즘의 역사는 샤머니즘이 반드시 주변적이거나 반중심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몽골뿐만 아니라 시베리아와 동북아시아 유목민들의 샤머니즘은 국가권력과 밀접히 결합한 경우가 많았다. 험프리도 북아시아 샤머니즘의 특성은 특정한 사회의 건설 과정에서 권력에 관여한 것이라고 분석한다.22)
그러나 몽골 샤머니즘이 정치적 맥락을 강하게 포함했기 때문에 그만큼 정치적 역학관계의 변화에 따라 종교의 부침(浮沈) 또한 클 수밖에 없었다. 즉 몽골 제국의 해체는 궁정 샤머니즘, 정치적 샤머니즘의 쇠퇴를 가져왔고, 특히 제국의 붕괴 이후 몽골의 정치세력이 불교와 이해관계를 같이 함에 따라 샤머니즘의 위축이 가속화된 것이다. 그러나 샤머니즘이 정치적 역학관계에서 배제된 것은 샤머니즘의 지속을 가능하게 한 역설적 원인이 되었다. 중심에서 밀려난 샤머니즘 신앙은 몽골인들의 일상적 전통으로 스며들었고, 정치적 세력의 해체는 조직적 박해를 피할 수 있는 존재 방식이 되었던 것이다. 사회주의 시기 불교 교단은 심각한 파괴를 경험한 반면 샤머니즘적 신앙과 실천은 사적 믿음의 실천과 공적 전통의 영역에서 지속될 수 있었던 것도 파괴당할 체계가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래서 하이지히는 "불교가 현대(사회주의 시대)에 그 영향을 완전히 상실했다면, 샤머니즘은 모든 박해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형식으로서 지속되었다."23)고 평가한다.
역사적으로 몽골 샤머니즘의 가장 큰 변화는 불교와의 접촉과 박해, 융합의 과정이었다. 정치권력의 지원으로 불교가 확산된 이후 샤머니즘에 대한 박해가 본격화되자 많은 샤먼들은 불교의 신격도 모심으로써 종교적 생존을 도모했다. 이 과정에서 몽골 샤머니즘은 '황(黃)샤먼'과 '흑(黑)샤먼'으로 새롭게 분기(分岐)하기 시작했다. 황샤먼은 불교의 신격과 교리, 실천을 수용한 샤먼들이고, 흑샤먼은 주로 조상 신격, 자연 신격과 배타적으로 관계하면서 불교와 끝까지 대립한 샤먼들이다. 한편 주로 치유 기능을 담당하는 '백(白)샤먼'도 존재하지만 매우 극소수이므로 몽골의 샤머니즘은 크게 황샤먼 전통과 흑샤먼 전통으로 양분할 수 있다. 지역적으로는 황샤먼들이 대부분의 지역에서 활동한 반면, 흑샤먼들은 북부 타이가 숲 지대를 중심으로 활동해왔다. 현재도 몽골 샤먼들 대부분이 황샤먼이지만 점차 도시로 이주한 흑샤먼들의 저변도 넓어지고 있는 추세이다.
2) 불교24)의 전래와 확산25)
사회주의 이후 몽골의 불교는 빠른 속도로 복원되고 있다. 종교의 자유가 실제적으로 보장된 지 불과 10여년 만에 200개 이상의 사원이 복원되었고, 인구의 대다수가 불교 신앙으로 회귀했다. 1997년에서 1998년까지의 조사에 따르면 전체 몽골 인구 중 총 60%가 종교를 가지고 있으며 그중 92%가 불교, 4.5%는 기독교, 나머지는 이슬람과 샤머니즘 등이라고 한다.26) 따라서 현재 몽골을 대표하는 중심적 종교는 사회주의 이전과 마찬가지로 불교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몽골인들의 종교적 세계를 주도하는 불교가 본격적으로 전래된 시기에 대해 학자들은 보통 13세기의 1차 접촉과 16세기의 2차 접촉으로 구분한다. 13세기의 1차 접촉에 대한 문헌 자료는 매우 빈약해서, 현존하는 중국의 문헌 자료들을 통해 당시 몽골과 중국의 국경 지역 사람들 사이에서 불교 승려들의 활동이 있었다는 보고를 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왕실과 귀족 사이에서의 불교의 확산에 대해서는 구체적 자료들이 남아있다. 1253년 쿠빌라이 한(Khubilai Khan)은 티벳을 원정해 라마승들을 인질로 데려왔는데, 그 과정에서 불교의 체계적인 조직력과 이념적 통합 능력에 대한 정치적 관심이 생겨났다. 당시에는 티벳의 라마승들이 황제의 국가통치에 자문 역할을 수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주목할만한 활동을 보인 라마승은 사캬파(Sa skya-pa)의 팍파(Phags-pa, 1235-1280)였다. 그는 도교와의 논쟁에서 승리해 황제의 신임을 얻었고, 1269년에는 불교 경전들을 몽골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전의 번역과 출판, 국가권력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개종은 주로 귀족과 지배계급에 국한되었다. 따라서 몽골의 중국 지배가 끝난 1368년에 이르러서는 몽골인들 사이에서 불교의 실천이 쇠퇴하고 다시 몽골의 토착적 종교 관념과 샤머니즘에 주도권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본격적인 개종과 확산은 16세기의 2차 접촉 이후에 일어났다. 적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있던 투멧(Tumet)의 군주 알탄 칸(Altan Khan)은 불교를 이용해서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달성할 목적으로 1578년 커케 커타(Koke Kota)에서 티벳의 겔룩파(黃帽派, 格魯派, Dgelugs-pa)27) 지도자인 소드남가초(bSod nams rgya mtsho)와 정략적 협정을 맺었다. 당시 티벳에서 사캬파의 위협을 받고 있던 개혁세력 겔룩파의 승려인 소드남가초는 알탄 칸을 쿠빌라이 칸의 환생이라고 인정해줌으로써 칸 위(位)의 계승을 가능하게 했고, 알탄 칸은 그 답례로 소드남가초를 쫑카파(Tsong kha pa) 대제자의 3번째 환생이라고 인정해주고 '달라이 라마'라는 칭호를 주었다.
이때 대부분의 왕족과 귀족들이 먼저 불교로 개종했고, 알탄 칸의 지원을 받은 소드남가초는 몽골 샤먼의 '우상'을 제압하는 선언을 포교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당시 활약한 유명한 승려는 동부 몽골을 개종시킨 네이치 토인(Neicy Toyin, 1557-1653), 서부와 북부 몽골을 개종시킨 자야 판디타(Zaya Pandita) 등이었다. 샤머니즘을 불법화한 왕실은 불교로 개종한 사람들에게는 가축이나 물질적인 혜택을 주는 대신 샤머니즘을 계속 신앙하는 사람들로부터는 가축을 빼앗았다. 라마승들은 샤머니즘을 이단적 사이비 종교라고 비난하면서 엉거트 상을 파괴하고 피의 희생도 엄격히 금지시켰다.
이러한 불교의 확산은 대중의 종교적 실천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라마승들은 샤먼들의 저항을 억누르면서 점차 몽골인의 정신적 사상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샤먼의 엉거트들을 불교의 호법신(護法神)으로 개조하는 한편 샤머니즘과 관련된 각 지역의 신격들도 불교의 신격으로 통합했다. 또한 샤먼들의 치유, 예언, 연행의 기능도 흡수했고, 샤머니즘의 대표적 의례인 어워제도 라마승이 집례하기 시작했다. 말을 순장(殉葬)하던 풍습도 사라졌고, 수태차를 마시는 라마승들의 풍습이 유목민들에게도 확산되었다. 그 후 몽골인들은 불상에 공양을 바치고 경전을 암송하는 불교적 생활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16세기 이후 불교는 몽골 사회, 문화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도처에 불교 사원들이 건립되었고 라마승이 되는 남성들도 늘어났다. 그 때문에 20세기 초까지 몽골의 인구가 30만으로 감소할 정도였다. 이런 호조건 속에서 불교 사원은 중세 유럽의 수도원들처럼 문학, 과학, 특히 불교 철학의 요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처럼 불교가 민간 차원으로 확산된 것은 단지 정치적 맥락 때문만은 아니다. 정치적 역학관계가 종교의 확산과 쇠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실이지만, 외적 강제만으로는 불교의 종교성이 몽골인들의 삶에 내면화될 수 없었다. 몽골 고대사를 연구한 역사학자 박원길은 몽골인들이 티벳의 불교를 받아들인 이유 중 하나를 적막한 초원에서 생활하는 유목민들의 심리에 부합한 현란함과 밀교적(Tantric) 성격 때문이었다고 해석한다.28) 한편 티벳 불교는 깊은 깨달음의 체계와 대중을 위한 방편적 가르침을 동시에 추구했다는 점도 토착화를 가능하게 한 원인이었다. 그것은 깨달음을 통해 얻은 힘을 대중을 위해 사용하는 대승불교 본연의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라마승들이 자신들처럼 체계적 지식을 쌓기 어려운 유목민들에게는 기도 도르레(prayer wheel) 돌리기나 다라니(dharani) 암송 같은 실천하기 쉬운 종교적 헌신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은 불교의 방편적 가르침과 무관하지 않다.
한편 18세기의 만주 왕조도 불교를 후원한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청 왕조의 지원 하에 불경 번역과 사원 건립이 계속되었다. 특히 강희제의 지원으로 1718년에서 1720년까지 몽골 불경의 개정판을 간행했고, 완전한 판본들을 몽골의 전 사원에 제국의 선물로 증정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토착적 몽골 신화의 요소들이 국가적 불교 전례서에 합쳐지기도 했다. 이러한 정책적 지원의 결과 19세기에 이르러서는 내몽골 지역에 1200개, 오늘날의 몽골 지역(외몽골)에 700개 이상의 사원이 활동하게 되었다. 이런 종교적 활성화로 인해 당시 전체 몽골 인구의 약 3분의 1이 승려였고, 불교 사원은 독자적인 경제적 체계와 재산을 소유했을 뿐만 아니라 독립적인 행정, 정치적 조직도 가질 만큼 사회의 중심 세력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이러한 외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사상적 발전은 오히려 정체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몽골의 불교는 보다 직접적으로 민간신앙과 융합한 점에서 티벳의 불교와 다른 발전을 거쳤지만, 종교사상적 맥락에서는 별로 달라진 점이 없었다. 사상적으로는 여전히 티벳의 라마승들에게 의존적이었고, 19세기, 20세기 초에는 학문적으로 훈련되지 않은 라마승들도 무척 많아졌다.
20세기에 접어들어서는 세속적 정치 운동과 사회주의 이념에 의한 상황 변화로 인해 불교의 쇠퇴가 일어났다. 특히 1930년대 후반의 사회주의 세력의 혹독한 탄압을 거치면서 모든 사원이 문을 닫았고, 사회주의가 끝나기 전까지 전국에서 유일하게 간단사만이 합법적 사원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면서 불교 사원들이 다시 복원되기 시작했고, 종교 인구도 급격한 신장세를 보여주고 있다. 현재 몽골 불교를 대표하는 종파는 황모파이다. 홍모파 사원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동고비 지역과 울란바타르에 각각 하나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3) 민간신앙 차원의 종교 융합
16세기 이후의 정치적 경쟁과 갈등 과정에서 몽골의 샤머니즘이 약화되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샤머니즘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몽골인들이 불교로 개종한 이후에도 대중의 종교적 신앙은 샤머니즘적 맥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쉘파(Sherpa)족의 종교를 연구한 인류학자 오트너(Sherry B. Ortner)의 이론적 해석을 참고할 수 있다. 그녀는 쉘파 사회에서 샤머니즘이 쇠퇴한 원인은 종교적 권력기구인 불교 승단의 압력 때문이었지만 샤머니즘은 다른 형태로 계속 존재했다고 분석한다. 그 대표적 사례는 대중은 화신(化身)한 라마인 툴쿠(Tulku)를 일종의 향상된 샤먼(upgraded shaman)으로 이해했다는 점이다.29) 몽골의 샤머니즘 역시 정치적으로 약화되었을 뿐 민간신앙적 차원에서는 샤머니즘의 전통적 맥락을 잃지 않았다. 그것은 종교적 융합의 과정으로 전개되었다.
몽골의 샤머니즘과 불교는 상호 융합의 과정을 특징적으로 보여준다. 가다머(H. Gadamer)의 해석학에서 보듯 융합이란 일방적 흡수와 수용이 아닌 상호 변화를 의미한다. 샤머니즘과 불교는 서로의 종교적 내용과 형식에 영향 받으면서 각각의 종교성을 변화시켜왔다. 한편으로는 불교의 몽골 내 확산이 샤머니즘의 입지를 협소하게 만들었지만 민간신앙의 차원에서는 샤머니즘과 불교의 차이가 모호한 이유는 이러한 융합 과정 때문이다.
종교적 융합은 샤먼과 라마승의 직능상의 차이를 거의 없게 만들었다. 라마승들은 샤먼들처럼 점, 예언, 치유 의례를 실천했을 뿐만 아니라 자연 신격도 숭배 대상으로 삼았다. 심지어 엑스타시와 주술적 연행에서는 라마승들이 샤먼들보다 더 뛰어나기까지 했다. 그래서 하이지히는 라마승들이 샤먼들의 기능을 대체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30) 이런 현상은 현대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2000년 나린텔 솜에서 만난 라마승 세르릉은 샤먼이 행하는 종교적 직능도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마을 잔치가 벌어진 초원의 개울가에서 의뢰인 가정의 우환을 없애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그가 의뢰인들에게 준 처방은 입김을 불어넣은 사탕, 신령한 힘을 주입한 지폐 같은 것이었다. 2001년 울란바타르의 그의 집에서 만났을 때에도 새 집으로 이사한 의뢰인이 몇 시쯤에 집에 들어가야 하는지를 전화로 알려주고 나서 그를 축원하는 불경을 암송했다. 이런 현상은 대중이 샤먼으로부터 얻기 바라는 종교적 기대를 라마승들이 모두 담당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종교적 융합은 샤먼과 라마승들이 관계하는 신격의 성격 변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2000년 차강노르 솜에서 만난 늙은 라마승 바타르는 불교의 신격뿐 아니라 자연의 신격인 로스-사브다크와 교류하고 있었다. 그 지역은 자연 신격과의 결합이 강한 흑샤먼 전통이 지속되어온 곳이므로 그는 자연 신격도 숭배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샤먼들도 마찬가지이다. 16세기 이후 몽골의 샤먼들은 불교의 만신전(萬神殿)을 수용하면서 복잡한 신관을 발전시켰고, 불교의 우주관을 받아들였으며, 화려하고 현란한 티벳 불교 의례의 분위기도 도입했다. 그리고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황샤먼들처럼 불교의 신격을 숭배 대상으로 포함하는 경우도 있었다.31)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샤머니즘이 불교에 일방적으로 흡수된 것이 아님을 나타낸다. 박원길은 "어느 면에서는 몽골의 샤머니즘은 라마교(티벳불교)의 외형을 빌려 그대로 존속되어 갔다."32)고 분석한다. 불교와 샤머니즘의 융합은 한 쪽의 해체가 아니라 각각의 종교성을 풍부화시키는 형태로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와 샤머니즘의 종교적 융합이 가능했던 핵심적 이유는 우선 쥬코프스카야(Zhukovskaya)의 분석처럼 몽골에 들어온 불교는 티벳에서 이미 샤머니즘과 유사한 토착종교인 본(Bon)과 여러 세기에 걸쳐 경쟁하면서 점차 융합된 형태였기 때문이다.33) 또한 샤머니즘의 전통적 적응성도 융합의 한 원인이었다. 라마승들은 몽골인들의 게르에서 엉거트 상을 치우고 대신 마하칼라상을 모시게 했지만 가내신으로서의 엉거트 관념은 사라지지 않았다. 신앙의 상징이 달라졌을 뿐 신격에 대한 몽골인들의 전통적 믿음과 기대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것이 엉거트이든 마하칼라이든 가족의 보호와 목축의 안정을 기대하는 샤머니즘적 믿음은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34) 이는 몽골의 샤머니즘과 불교가 경쟁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은 두 종교 현상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종교적 삶을 지속해왔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민간신앙 차원의 종교성은 현대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불교와 사회주의의 억압을 연속적으로 겪으면서 샤머니즘은 주변적 위치로 밀려났지만 민간신앙의 차원에서는 샤머니즘적 신앙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민간신앙은 '제 3의 종교'가 아니라 샤머니즘적 신앙이 다양한 역사적 변화에 적응해온 전통이다. 지금도 가장 세속화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하늘과 땅, 조상들을 위해 술을 바치며, 여행중에 어워를 만나면 멈춰서서 세 바퀴를 돌며 돌을 던지는 전통을 실천하고 있다. 그래서 몽골 샤머니즘을 연구하는 사란게렐(Sarangerel)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모든 몽골인들은 어느 정도는 샤머니즘 신자"35)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2. 사회주의 시대의 종교
구(舊) 레닌 박물관 앞에서 흑샤먼 허럭을 기다리는 동안 잠시 시간을 내어 박물관을 둘러보았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는 슬로건이 새겨진 중앙 홀에 레닌의 대형 두상이 남아있었지만 박물관은 이제 각종 사무실과 식당으로 임대되어 제 기능을 잃고 있었고 아무도 그를 기념하지 않았다. 이런 모습은 사회주의 시절을 지배했던 몽골인민혁명당(MPRP)36)이 여전히 집권정당임에도 불구하고 몽골은 사회주의로부터 한참을 벗어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하이지히의 전제를 상기할 때 이제는 오히려 유물이 되어버린 사회주의는 몽골의 종교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던 것일까?
1) 종교 탄압의 전개과정과 성격
러시아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몽골 혁명세력은 1930년대 후반 초이발산(Choibalsan)의 주도로 혹독한 종교탄압을 시도했다. 그 배경은 민족주의 혁명으로 중국에서 독립한 몽골이 '사회주의 이외의 길'을 선택할 것을 우려한 소비에트 연합 지도자들의 의도와 관련된다. 레닌은 몽골 혁명가들의 과제는 외세에 대한 저항만이 아니라 봉건 영주와 종교에 대해서도 맞서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영향 받은 혁명세력 내 좌파는 불교 조직과 대중을 분리하기 위해 기존의 '후원자-고객 관계(hamjilga)'를 계급관계로 규정함으로써 불교를 혁명의 적으로 몰았다. 우파는 이런 입장을 거부하면서 당내 사상투쟁이 거세게 일어났다. 우파 지도자중 한 사람인 잠짜라노(Jamtsarano)는 불교는 원리상으로 공산주의에 대립하지 않으며 종교가 '인민의 아편'인 것은 러시아의 특수 상황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좌파는 라마승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중독시키고 인민을 잔인하게 착취한다고 선동했고, 결국 1928년 이후 코민테른 대표단의 지휘 아래 라마승을 체포하고 사원경제를 와해시키는 물리적 파괴를 전개했다. 이에 반발한 라마승들이 1930년에서 1932년까지 광범위한 무력 저항을 시도함으로써 몽골은 내란 상태에 돌입하게 되었다.37)
그러나 불교에 우호적인 긴든(Genden)이 당 비서와 수상으로 일시 집권하면서 30년대 중반까지 투옥되었던 라마승들이 석방되고 사원경제도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38) 하지만 스탈린의 지원을 받은 좌파의 공격으로 긴든이 실각한 후 '제 2의 스탈린'이라는 불리운 초이발산의 주도로 30년대 말에 강력한 탄압이 재개되었다. 탄압의 명분은 일본의 첩자와 반역자들을 숙청한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스탈린의 지도 하에 좌파 중심의 사회주의 권력을 안착시키려는 의도였다. 결국 좌파에 맞섰던 당내 우파 지식인, 민족주의자, 귀족, 라마승들이 대거 체포되어 처형당했고, 불교의 조직적 기반은 사실상 완전히 붕괴되었다.39)
불교에 대한 집중적 탄압은 표면적으로는 스탈린주의적 무신론에 입각한 이념적 성격으로 알려졌지만, 당시의 사회·경제적 역학관계를 분석할 때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샌더스(Alan J.K Sanders)는 1921년 혁명 당시 747개의 사원에 당시 남성인구의 40%를 차지하는 12만 명의 라마승이 있었고,40) 몽골 전체 가축의 17%를 점유할 정도로 사원경제의 규모가 컸다고 기술했다.41) 이는 혁명 과정에서 불교 집단이 사회주의 국가권력을 방해할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조직이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스탈린의 정세 인식에서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스탈린과 만난 긴든이 불교는 당과 국가보다 대중에게 더 영향을 미치므로 특별한 방식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스탈린은 "몽골에는 두 가지 권력이 나란히 존재한다. 긴든의 권력은 약하고 라마승들의 권력은 강하다" 라고 반박했다. 즉 스탈린은 1921년의 인민혁명 이후 10여년이 지나도록 소비에트식 사회주의가 안착되지 못한 결정적 원인을 불교의 존재 때문이라고 인식했던 것이다.42) 이런 분석은 탄압의 동기와 목적이 단지 이념적 무신론의 관철이 아니라 실제로는 정치적 세력 재편이었음을 나타낸다.
탄압의 성격이 정치적 동기였다는 것은 샤머니즘과 불교의 역사적 탄압 경험이 달랐다는 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만약 이념적 무신론이 탄압의 직접적 배경이었다면 공통적으로 '인민의 아편'인 불교와 샤머니즘은 동일한 탄압 과정을 겪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탄압의 강도와 성격에서 라마승과 샤먼의 경험에는 차이가 있었다. 샤먼 쟘빈은 탄압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샤먼들은 라마승들보다는 덜 탄압 받았다. 라마승이었던 내 아버지를 비롯해 많은 라마승들이 총살당한 반면 죽임 당한 샤먼은 없었다. 물론 샤먼들이 종교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끌려간 경우는 있었지만 라마승들처럼 총살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샤먼이 덜 탄압 받은 것은 당시 샤먼들은 정치적으로는 위협적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43) 샤먼들을 탄압한 이유도 불교의 경우와 달랐다. 쟘빈은 사람들이 샤먼의 의례에 대한 답례로 가축을 주었기 때문에 '사적소유'의 의심을 사 탄압 받았다고 설명했고, 허럭은 사람들의 오해와 고발이 탄압의 이유였다고 진술했다.
샤먼이었던 할머니(수렌)와 어머니(바이라)가 사회주의 때 힘들어했던 것은 정부의 금지 조치였다. 금지의 배경은 샤먼에 대한 '오해' 때문이었다. 샤먼은 누군가 안 좋은 일을 당하게 되면 그것을 반드시 말해야 하는 규칙이 있다. 그래서 죽을 사람에게는 "네가 죽게 될거다"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사람들은 샤먼이 저주해서 죽게 되었다고 고발하여 탄압 받은 것이다.44)
그러나 샤먼들이 라마승들보다 덜 탄압 받았다고 해서 그들의 공포가 약했다는 것은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교단이 없는 샤머니즘은 샤먼 자신이 탄압의 직접적 대상이 되기 때문에 공포의 체감이 더욱 강했을 것이다. 라마승들은 저항과 수난을 함께 할 조직이라도 있었지만 탄압을 전적으로 홀로 감당할 수밖에 없었던 샤먼들의 공포는 그 강도와 지속성에서 라마승들보다 더 심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종교 탄압의 역사적 경험은 지금까지도 몽골인들의 공포로 지속되고 있다. 2000년 차강 노르 솜에서 만난 늙은 라마승 바타르(Baatar, 74세)는 처음에는 심한 경계심 속에 당국의 '허가증'을 보여달라고 요구하면서 만남을 기피했다. 또한 자신의 신령에게 물어보고 대화에 응한 이후에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가 그 지역의 불교 사원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것은 아무에게나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비밀스런 이야기이다"라고 단서를 달았던 것은 탄압에 대한 공포의 기억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음을 반영한다.45) 이는 사회주의 해체 이후의 사회적 변화를 실감하지 못하는 변방 지역의 문화적 분위기를 나타내는 한편 그 공포의 지속성과 강도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준 사례였다. 험프리는 20세기의 잔혹한 사건들에 대한 사실적 공포가 몽골인들로 하여금 과거에 대해 기억하기를 원치 않게 하고 숨기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46) 공포의 집단적 기억은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며 사실보다 더욱 사실적이다. 실제로는 종교 탄압이 사회주의 초기에 일시적으로 행해진 정치적 사건이었다고 해도 종교적 억압의 공포는 사회주의 시기 내내 라마승과 샤먼들, 그리고 대중 사이에서 집단적으로 공유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공포의 지속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는 정부에 대한 종교적 직능자들의 태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몽골 현지에서 샤먼, 라마승들과 대화하면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대부분이 정부에 대해 어떤 불만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반감을 표시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정부에 대한 종교인들의 전형적 태도는 주로 청원적 성격일 뿐 정부 정책에 반기를 들거나 독자적인 정치적 결사를 추구하는 경우는 없었다.47) 다쉬 초이린 사원의 주지 담바자프는 종교와 정치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종교와 정치의 관계에 있어서, 종교는 정치 '밑에' 있다. 종교가 정치적으로 활동할 경우 분쟁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현재 '종교민주당'이라는 정당이 있지만 라마승들은 이 정당에 가입하지 않았다.
다소 원칙적인 진술로 들리는 "종교는 정치 밑에 있다", "종교와 정치는 별개의 것이다" 라는 주장의 이면에는 국가권력에 대한 공포가 존재한다. 즉 현재의 정부가 사회주의 시기처럼 종교에 심각한 위해를 끼칠 가능성이 없고 오히려 종교를 장려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라마승들은 정부와의 관계에서 상대적 저자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정치적 역학관계의 변화에 따라 종교적 실천이 심각하게 위협받았던 사회주의 시기의 공포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적 공포의 경험에 대한 역사적 분석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그것은 현지에서 만난 몽골인들 중에는 종교적 억압의 기억을 이야기하면서도 막상 자신들은 상당히 자유롭게 종교적 실천을 했다고 진술하는 이들이 많다는 점이다. 즉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공포의 기억과 사회주의 시기에도 종교적 실천이 지속되었다는 주장48)이 공존하는 것이다. 이는 사회주의가 완전한 '종교의 무덤'이 아니었음을 암시한다.
2) 사회주의 시기 종교적 실천의 지속
현지조사 전 과정을 함께 했던 밧조릭은 당원이나 관리의 경우 종교활동을 하다 발각되면 한직으로 전출 당하는 불이익을 받았지만, 민간인들이 라마승과 샤먼의 집을 찾아가는 것은 거의 통제받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현지에서 만난 다른 몽골인들도 대부분 공개적으로 종교활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종교를 떠나지는 않았다고 회고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 관련된 샌더스의 기록을 살펴보면 사회주의 시기에도 종교적 실천이 상당히 자유롭고 활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울란바타르에서는 전직 라마승의 집에서 열리는 기도회에 많은 신자들이 모였고, 어떤 라마승들은 수제품인 기도 도르레와 신상을 팔았으며, 도시 어디에서나 샤먼들이 선물이나 은, 현금과 음식을 받고 의례를 했다. 또한 유일한 사원인 간단사에는 쇠약한 노인들뿐만 아니라 어린이와 중년의 몽골인들도 많이 방문하여 질병과 불운을 피하기 위해 기도하고 절하며 제물을 바쳤고, 일요일과 차강 사르(음력 설) 같은 축일의 의례 때에는 군중들로 가득 찼다.49)
특히 종교를 탄압하지 않는다는 대외 정책 과시의 필요성 때문에 불교는 1960년대부터 형식적이나마 활동의 자유를 보장받았다. 비록 간단사 만을 합법적으로 인정했지만 불교는 사회주의 시대에도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1979년 달라이 라마의 몽골 방문시에 나타난 대중의 반응에서 알 수 있다.
중소분쟁이 치열하던 70년대에 친 소련정책을 추진하던 몽골은 중국에 정치적 타격을 입히고자 달라이 라마를 초대했다. 그런 정치적 목적에도 불구하고 몽골인들은 달라이 라마에 대한 종교적 기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소련의 저널리스트 신카레프(Shinkarev)는 당시 달라이 라마의 방문 취재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아침부터 천막에서 빠져 나온 사람들이 철로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강에서 물을 퍼다가 달라이 라마가 지나갈 길을 청소했고, 사원의 벽 앞에서는 흥분이 일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본 달라이 라마는 공산주의에도 불구하고 몽골에는 불교가 살아있다고 칭찬했다.50)
이처럼 민간 차원에서 종교적 실천이 지속되었던 이유로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우선 몽골 혁명 세력이 불교의 정치적, 경제적 기반을 와해시킨 이후로는 종교에 대해 공격적 태도를 취할 필요가 없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물론 종교에 대한 이념적 비판은 계속되었지만 그것은 일종의 '반종교 캠페인'의 성격이었지 30년대 후반처럼 가혹한 탄압을 시도한 것은 아니었다. 사회주의 시기에 몽골 유목문화를 연구한 소코레위츠(Zofia Sokolewicz)는 당시의 종교 문제를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무신론적 선전, 새로운 교육 체계, 사회주의 문화의 압력이 종교적 의례의 외적 표현을 방해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신앙과 종교의 문제는 각 개인의 사적 문제였다.51)
즉 행정당국의 공식적 차원에서는 종교의 활동을 금지했지만, 개인의 신앙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자유를 보장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는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 양상을 띠었다. 샌더스의 기록처럼 종교적 실천이 중앙정부가 소재한 울란바타르에서도 지속되었을 정도라면 주변부 지역에서는 더 자유로웠을 것이다. 간바트르는 고향인 쟈프칸 아이막에서 유목을 할 때 종교적 탄압을 거의 받지 않았다고 회고했고, 헙스걸 아이막 울란 울 출신의 흑샤먼 촐란바타르(Chuluunbaatar, 53세)52)도 그의 어머니가 13살때부터 81년간 샤먼일을 계속했다고 이야기했다. 불락이 "시장경제 이후 시골은 '참된' 몽골 문화의 원천을 가장 잘 지켜온 곳으로 대표되었다"53)고 분석하는 것은 종교적 실천이 주변부 지역에서는 더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이유들이 종교적 실천을 지속시킨 근본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설령 정부가 대중의 신앙을 사적 영역의 문제로 묵인했다 하더라도 30년대의 사건과 관련된 공포의 기억을 집단적으로 공유하고 있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종교적 실천을 하려면 실제적이든 상상적이든 어느 정도 사회적 불이익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개인적 신상의 위협을 예상하면서도 종교적 실천을 지속했다는 것은 몽골인들에게 종교적 기대의 원천이 고갈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험프리는 사회주의가 보다 강력했던 1960년대와 70년대 부리야트의 콜호즈에서도 종교적 의례를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은 사멸해가는 종교성의 '잔존'이 아니라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답하지 못하거나 은폐하는 현대적 문제들에 대한 실제적 응답이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비테브스키 역시 1988년에서 90년 사이의 에벤 족(Eveny) 필드워크시 당원이나 관리들 사이에서도 종교적 실천이 남아있는 것을 관찰했다. 그는 당 집회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유령을 만난 당원의 이야기를 들었으며, 완고한 스탈린주의자였던 한 사람도 스토브 불꽃에 보드카의 첫 잔을 바치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에벤족이 매우 '문명화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종교성이 남아있다는 것은 사실상 사회주의 체제가 인간의 종교성을 말살하지 못한 것이라고 분석했다.54) 이런 사례를 종합해 볼 때 종교적 신앙을 지속시킨 근본 원인은 사회주의가 인간의 종교적 기대를 제거할 수 없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유난히 정치적 격변이 잦았던 몽골의 역사가 몽골인들의 적응적(adaptive) 종교성을 발전시켰던 점도 종교적 실천을 지속시킬 수 있었던 한 배경이다. 정치적 역학관계의 변화에 따라 종교적 실천이 촉진되거나 위축되었던 경험은 오히려 종교적 신앙의 보존 능력을 배양했던 것이다. 불교가 샤머니즘 신앙의 상징을 불교 신상으로 대체하고, 러시아 짜르 군대가 니콜라스 성인상을 걸어놓게 했을 때 유목민들은 순교를 자청하는 대신 강제된 상징을 자신들의 종교적 신앙으로 재해석하는 것을 선택했다. 즉 신앙 대상의 외형만 달라졌을 뿐 전통적 신격(엉거트)에 대한 내적 믿음은 그대로 존속시켰던 것이다.55)
한편 종교적 실천의 형식과 내용을 전통으로 표방함으로써 외적 억압과 방해를 피할 수 있었던 것도 중요하다. 다음 장에서 자세히 다룰 주제인 종교와 전통의 불가분성은 몽골 종교의 특징이다. 필자가 만난 유목민들은 사회주의자들이 종교를 억압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전통에는 관용적이었다는 회고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외부자적 시각에서 분명히 종교적 실천이지만 그것을 전통이라고 해석할 경우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시기에도 성스러운 산에 들어가는 것을 금기시하고, 또 어워와 관련된 행동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전통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종교적 기대와 적응성, 그리고 전통과 종교의 불가분성이 사회주의라는 가장 혹독한 시련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믿음을 유지시킨 능력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현재 몽골에서 나타나고 있는 종교의 재활성화는 대중의 종교적 기대가 사회주의 시기에도 지속된 결과이며, 민족주의의 기획은 그러한 기대를 활용했다고 보는 것이 사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3. 자본주의 시대의 종교의 상품화
민족주의의 지원과 대중의 종교적 기대를 바탕으로 현재 몽골 종교는 외적 성장을 하고 있지만 내적 성숙을 수반하고 있지 못하다는 비판도 나타나고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은 자본주의적 가치가 점차 전통적 종교문화를 변형시키고 있다는 '종교의 상품화'에 대한 비판이다.
1) 불교의 재활성화와 현대적 문제
불교학자 체데브는 현재 불교 신자들의 종교적 실천에 나타나고 있는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자본주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종교적 지식'이 많았던 옛날의 신자들과는 달리 요즘 신자들은 복만 바라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불교는 '사업'이 아닌데도 말이다.
현지에서 만난 다른 라마승들 중에도 "현재 몽골 사람들은 돈만 바란다"고 비판하는 이들이 많았다. 즉 신자들에게 종교적 지식이 사라졌다는 비판의 공통점은 자본주의적 세속화에 따라 '돈'이 종교적 실천의 핵심 동기가 되는 '종교의 상품화'에 대한 우려인 것이다.
그러나 라마승들의 비판과는 달리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종교의 상품화를 가져오는 원인은 라마승들의 타락이라는 인식이 더 지배적이다. 불교 집안에서 자랐으면서도 종교 신앙을 갖지 않고 있는 간바트(Ganbhat, 27세)56)는 지금의 라마승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내 또래의 젊은이들은 종교에 관심이 없지만, 17, 18세 정도의 젊은이들은 오히려 라마승이 되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동기는 쉽게 돈을 벌고 싶어서이지 종교적 관심 때문은 아니다. 높은 실업률과 경제적 압박으로 곤경을 겪고 있는 몽골에서 라마승이 된다는 것은 돈을 버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생각해 보라. 라마승들은 사원에서 불경만 읽어줘도 돈을 벌 수 있지 않은가?
종교적 헌신의 열정보다는 경제적 동기로 라마승이 된다는 것은 비종교인들만의 비판이 아니다. 내부자라 할 수 있는 다쉬 초이린 사원의 젊은 라마승 알탄 쿠도 비슷한 맥락에서 비판했다. 그는 왜 라마승들이 존경받고 있지 못한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특히 50대 전후의 라마승들은 사회적 존경을 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회주의 때 세속의 일반인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다가, 자본주의가 되자 진지한 종교적 결단과 지식 없이 라마승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치하에서 공개적으로 활동했던 라마승들도 겔룩파의 독신서약을 파기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던 만큼, 전직 라마승들이 다른 직업을 가지고 세속적 삶을 살았다는 것 자체에 대한 사회적 반감은 발견하기 어려웠다. 라마승들에 대한 불신은 개인적 과거 때문이라기보다는 현재의 동기가 단지 경제적 목적이라는 의혹과 관련된 것이다.
필자가 만났던 한 사원의 주지는 사회주의 시절 아이막의 부지사까지 승진했다가, 자본주의로 바뀐 직후인 1992년에 울란바타르로 와서 사설 사원을 만든 라마승이었다. 그의 게르는 사원 경내에 있었고 함께 있는 라마승들은 출퇴근하며 그에게서 월급을 받고 있었다. 그는 사회주의 시대에 안정된 직업을 가지고 살다가 시장경제 이후 라마승이 된 경우를 대표했다. 사회주의 시대에도 종교적 신념을 굽히지 않은 극소수 라마승에 대해서는 존경심은 대부분의 몽골인들이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 외의 라마승들에 대한 몽골인들의 감정은 이중적이다. 비록 그들의 동기가 의심스럽다 해도 그들이 하는 일은 '좋은 일'이기 때문에 괜찮다는 의식과 세속화된 라마승의 삶은 자본주의적 욕망에 따른 것이므로 존경할 수 없다는 의식이 병존하는 것이다.
한편 알탄 쿠의 주장은 라마승의 자질, 특히 종교적 지식의 결여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그가 50대 전후의 라마승들을 비판한 것은 그들이 종교적 지식의 습득 과정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젊은 라마승의 경우 종교적 직능자의 길을 선택한 동기가 어떻든 체계적인 불교 공부를 하고 있는데 반해 50대 전후의 라마승들은 경제적 목적만을 가질 뿐 종교적 지식도 헌신의 자세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신자들은 젊은 라마승들에 대한 기대감을 표현하는 경우도 있었다. 투브 아이막에서 유목을 하고 있는 알탄체체크(43세)는 자기 마을의 젊은 라마승을 존경하는 이유를 그가 간단사에서 교육받은 라마승이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 그 라마승은 결혼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체계적 교육을 받았다는 것이 존경의 이유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라마승의 자질이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은 사회주의 시대의 종교적 억압이 초래한 부정적 산물이다. 종교적 직능자의 자질에 대한 내적, 외적 반성은 불교 내부의 인적 구조조정과 세대교체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그러나 종교적 정화의 요청은 아직 지배적 흐름은 아니다. 그것은 제도적 차원에서 종교의 상품화가 더욱 강력한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점과 관련된다.
제도적 차원에서 종교의 상품화를 부추기는 대표적 사례는 몽골 최대의 사원인 간단사의 '불경 읽기표'이다. 사원에서는 각각의 불경에 가격을 책정했고57) 신자들은 그것을 확인한 후 회계 사무를 보는 라마승에게 돈을 지불한다. 그러면 정해진 날에 라마승들이 그 불경을 읽어준다. 이런 현상에 대해 불교 신자들은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간바트르는 라마승들이 불경을 읽으려면 힘들테니 돈을 내는 것은 괜찮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거에는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자기가 낼 수 있을 만큼만 내면 되었는데 시장경제로 바뀌면서 액수가 정해진 가격표가 생긴 것은 옳지 않다고 비판했다. 간단사와 경쟁관계에 있는 다쉬 초이린 사원의 주지 담바쟈프도 그 점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간단사는 돈이 필요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지만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 사원도 활동을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하지만 돈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므로 불경읽기표에 가격을 책정하지 않았다. 물론 개인 신자들이 경제적 풍요를 바라는 것은 그들의 자유이지만 기복적 요구에 익숙해진 몽골인들의 마음에 문제가 생기고 있다.58)
즉 불경 읽기표는 대중의 종교적 실천을 획일적인 경제적 거래 관계로 환원시킴으로써 신앙행위에 있어서도 사회적 부의 불균형을 반영하게 되는 문제점을 갖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대의 몽골 불교가 당면한 또 하나의 문제는 현대적 상황에 부합하는 종교성을 창조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우선 불경 번역과 관련된 논란에서 찾아볼 수 있다.
2001년 여름에 현지조사를 하면서 현대 키릴어59)로 번역된 불경이 있는지를 조사해보았다. 그러나 사원에서 파는 불경은 모두 티벳어로 된 것들 뿐이었다. 간혹 키릴어로 되어 있는 일부 불경도 그 효과를 설명하는 것일 뿐 내용 전체를 번역한 것은 아니었다. 이처럼 불경 번역이 되고 있지 않는 현상에 대한 반응은 매우 복잡했다.
우선 대부분의 라마승들은 재정적 어려움 때문에 불경을 번역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의 재정지원을 받지 않으면서도 나날이 대형화되고 있는 사원 규모를 볼 때 단지 재정이 부족하다는 것이 원인의 전부라고 보기는 어렵다. 한편 다기마의 스승인 라마승은 "때가 되지 않았다" 라고 합리화하기도 했다. 즉 번역을 하더라도 어차피 대중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는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 왜냐하면 신자들 편에서도 스스로 불경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포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간바트르는 독실한 불교신자임에도 불경에 대한 지식은 거의 없었고, 불경을 현대어로 번역하더라도 자신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거실의 신단에 다른 종교적 상징들과 함께 정성들여 천으로 감아놓은 불경이 올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조부모 때부터 물려받은 불경이었는데 간바트르는 그 불경이 옷과 음식을 풍요롭게 만들어준다는 것만 알 뿐 그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는 불경을 읽어주는 라마승들이 그 효과를 말해줄 뿐 내용에 대해서는 설명해주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이런 현상은 라마승들의 종교적 지식과 대중의 종교적 지식에 차등성을 형성하고, 삶의 의미와 목적도 달라지게 한다. 필자가 간바트르에게 인생의 희망이 무엇인지 물어보았을 때 그는 "다음 생에 좋은 사람으로 윤회하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라고 대답했다. 불교 신자이면서 왜 해탈해 열반에 드는 것을 원하지 않느냐고 반문하니 "해탈을 하려면 깊이 공부하고 공덕을 많이 쌓아야 한다. 그것은 라마승들이나 가능하지 우리들은 불가능하다"라고 대답했다. 일반 신자들은 종교적 지식에서 소외됨으로써 구원의 기대조차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동성을 특징으로 하는 과거의 유목적 삶에서는 어느 정도 지식의 차등과 역할 분담이 불가피했다. 그러나 사회주의를 거치면서 몽골인들의 교육 수준이 높아졌고, 또한 대다수의 인구가 도시로 이주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중과의 지적 차이를 좁히기보다는 그 상태를 합리화하는 것은 불교의 현대화를 가로막는 한 요인이 되고 있다. 간바트는 왜 몽골의 젊은이들이 종교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젊은 사람들이 종교(불교)에 관심이 없는 이유는 불경이 현대 몽골어로 번역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불경은 티벳어를 아는 라마승들만이 읽고 이해할 수 있을 뿐, 티벳어를 모르는 신자들은 읽을 수도 없다. 반면 기독교는 이미 오래 전에 현대 몽골어로 성서를 번역해놓았다.
불경을 번역하지 않는 이유를 종교적 특권의 유지로 이해하는 그의 비판은 종교사적 시각에서 이해할 수 있다. 루터(Martin Luther)의 종교개혁 실천사항 중 하나가 라틴어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는 작업이었던 것은, 사제만이 성서를 읽을 수 있는 종교적 특권 주장에 대한 반발이었다. 간바트의 비판 역시 라마승들만이 불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함으로써 대중보다 우월한 종교적 지위를 누리려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라마승들이 대중의 불경 읽기를 중세 유럽의 사제들처럼 금지하는 것은 아니다. 이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던 대부분의 라마승들은 "읽을 수 있으면" 일반 신자들도 집에서 불경을 읽어도 좋다고 말했다. 그러나 티벳어를 습득하기 어려운 일반인들이 불경을 자유롭게 읽을 수는 없다. 이런 상황은 한편으로는 경제적 동기를 의심하게 한다. 사원의 수입과 라마승 개인의 수입원 중 하나는 불경을 읽어주면서 받는 돈이기 때문이다.
몽골인 학자 만달라(T. Mandala)는 불교의 현대화를 가로막고 있는 다양한 현상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불교도들은 오늘날 직면한 불교개혁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 불교도들은 어떤 설명도 없이 20세기 초와 같은 방식의 동화 같은 이야기와 낡은 가르침을 지금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더 많은 것을 알 필요가 있고, 모든 것의 이유를 발견하려고 한다.60)
대중의 삶에 의미 있는 가치관을 정립하기보다는 자본주의적 욕망의 기복주의를 독려함으로써 성장을 구가하고, 일반 신자와 종교적 지식을 공유하기보다는 지식의 독점으로 권위를 주장한다면 불교는 새로운 현대적 상황에 적응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정적 현상에 대한 비판과 우려가 이미 신자들 사이에서 확산되고 있고, 일부에서는 변화의 실제적 노력도 나타나고 있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일례로 불교 현대화를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다쉬 초이린 사원의 경우 평신도를 위한 도서실과 학교를 운영중이며, 라마승과 일반인의 종교적 일정을 통일시키기 위해 일요일에 정기 법회를 실시하는 것도 검토하고 있었다.
2) 도시의 샤먼들: 이주와 종교적 융합
자본주의의 영향을 받으면서 전통적 종교성을 위협받기로는 불교보다 샤머니즘이 더 심하다. 그 이유는 우선 불교와의 관계성과 지역적 편차에 따라 샤머니즘의 전통이 분화되어 합의된 전통을 구성할 수 없었기 때문이고, 또한 이미 사회주의 이전에 종교적 고유성을 상당 부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가 만난 샤먼들은 이러한 분석에 동의하지 않았다. 몽골 아시아샤먼협회61)의 샤먼 잉흐자르갈에게 현재 실천하고 있는 의례가 과거에 비해 달라진 점이 무엇인지 물어보니 "전혀 없다. 원래의 전통과 완전히 똑같다" 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샤먼 허럭은 협회의 샤먼들이 흑샤먼 전통을 왜곡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아시아샤먼협회의 신단에 있는 무복을 가리키며) 원래 샤먼은 자기 집에 무복을 두고 그것을 다른 곳으로 옮기면 안 되는데 저렇게 옮기면 전통을 잃게 된다. 나는 협회의 샤먼들을 인간적으로는 존경하지만, 샤먼으로서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전통적인 풍습을 버리고 있다.62)
몽골인 학자 마르하호도 북부 지역 중심의 흑샤먼들은 엉거트의 공간적 성격을 중시하여 일반적으로 굿을 할 때 입는 무복과 장신구 등을 집에서 외부로 가져 나가는 것을 금기시했다고 주장한 것을 고려할 때63) 아시아 샤먼협회의 샤먼들이 전통을 위반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는 현대 샤먼들이 대중의 자본주의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전통을 재발명 혹은 변형시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변형의 배경은 샤먼들의 도시 이주 현상이다.64) 전통적 샤머니즘의 특성 중 하나는 샤먼들이 사는 환경, 소규모 공동체와의 긴밀한 영적 결합이었다. 일상에서는 유목민이었던 샤먼들은 공동체의 다른 유목민들과 함께 초원과 숲을 돌아다니며 노동했고, 의례의 계기에만 종교적 직능자로서 복무했다.65) 그러므로 샤먼들이 자신의 환경과 공동체를 떠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 불교 신격을 수용한 황샤먼에 비해 자연과의 결합이 더 중요한 흑샤먼들에게 고향의 자연을 떠나 도시로 이주하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이주한 샤먼들이 겪는 의례상의 장애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난 해 12월에 울란바타르로 이주한 촐란바타르는 이주에 따른 의례상의 어려움을 간접적으로 인정한다.
고향에는 불교가 없었기 때문에 '벽'이 없지만 이곳 울란바타르에는 불교, 그리스도교 등 여러 종교가 있는데다가 '가짜 샤먼'들까지 있어 고향의 엉거트를 부를 때 무척 힘이 든다.66)
이주에 따른 흑샤먼의 장애를 가장 분명하게 입증하는 사례는 헙스걸 아이막 차강노르 솜 출신의 여성 샤먼 바이라의 죽음이다. 외국 학자들에게까지 영험하다고 소문났던 그녀는 울란바타르 이주 후 알콜중독에 시달리다 위 관련 질병으로 이번 해 6월에 사망했다. 그녀의 딸 허럭은 어머니의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할머니 수렌의 엉거트가 바이라 가족의 울란바타르 이주를 반대했다고 고백했다.
그래도 울란바타르로 이주하겠다고 고집하자 수렌의 엉거트는 그러면 2년만 살라고 명령했다. 만약 그 이상 살게 되면 힘들어진다고 했는데, 울란바타르가 어머니와 우리들에게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수렌의 예언대로 2년이 지나자 어머니와 동생들이 병에 걸렸다. 어머니는 다시 차강노르로 돌아가자고 했지만 동생들이 학교에 다니고 있어서 그럴 수 없었다.
이처럼 엉거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위협 당하면서까지 도시로 이주하는 이유는 도시가 더 많은 신자를 보장함으로써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게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샤먼으로서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이 소공동체, 자연과의 긴밀한 결합이 아니라 '종교적 시장과의 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도시로 이주한 샤먼들은 고향의 의뢰인들과는 전혀 다른 도시인들의 삶에 부응할 종교적 경험을 제공해야 한다. 이로 인한 변화를 대표하는 것은 종교적 융합의 강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종교적 융합은 몽골 종교사에서 세 가지 배경에서 형성되었다. 첫째는 12, 13세기 몽골 제국의 칸들이 상이한 문화적 전통의 제 민족을 통치하기 위해 실시한 종교적 관용정책의 결과로 제국 안에서 모든 종교가 자유롭게 활동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었던 경험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 몽골인들의 삶을 지배했던 샤머니즘은 선교적 종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16세기 이후 불교와 샤머니즘의 갈등과 함께 일어난 상호 융합의 경험이다. 초기에는 투시예투(Tusiyetu) 칸의 "교리의 요약을 성심으로 배우는 자에게는 말을 줄 것이며, 야만타카(Yamantaka) 다라니를 성심으로 암송하는 자에게는 소를 줄 것이다."라는 선언처럼 정치적 지원을 등에 업은 초기 선교사들의 샤머니즘 박해는 집중적이었다.67) 그러나 이러한 탄압이 샤머니즘적 종교성을 파괴한 것은 아니었다. 몽골에 전래된 불교가 이미 티벳의 토착 종교인 본(Bon)과 경쟁하면서 샤머니즘적 성격을 수용한 것이었기 때문이다.68) 셋째, 유목적 삶의 형식인 이동성은 한 곳에 정착해 특정한 종교공동체에 소속하기 어렵게 만든 것도 종교적 융합을 촉진하는 배경이었다. 즉 사원이 유목민들을 따라다닐 수 없었기 때문에 불교를 신앙하더라도 사원이 없는 곳에서는 샤머니즘적인 실천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불교, 샤머니즘의 다양한 믿음을 민간신앙의 전통에서 융합해 실천하는 실용적 종교성이 발달하게 되었다.
현지에서 만난 샤먼들이 각자의 혈연적, 종교적 계보와 상관없는 전통도 수용하고 있었던 것은 이러한 융합의 역사를 반영하는 것이다. 수미야(Sumya)69)는 스스로 백샤먼이라고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헙스걸 동편의 흑샤먼 롭스타이로부터 샤먼 의례를 배웠다. 물론 그녀는 롭스타이가 자신을 "발전시켜준 것일 뿐" 가르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종교적 계보가 융합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한편 잉흐자르갈이 "라마승도 아니고 샤먼도 아닌 사람"이라고 소개한 사란다와(Sarandawa)70)는 종교적 융합의 극단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불교의 황모파, 홍모파, 그리고 아시아샤먼협회의 자격증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지금 하고 있는 일륵(동물 희생)의례는 홍모파로부터 배웠고, 절륵(인간의 형상을 한 인형을 태워 나쁜 기운을 쫓아내는 것)은 황모파로부터, 동전을 가지고 점치는 방법은 스승 라마승으로부터 배웠다.71) 그녀는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에 대해 "나는 샤먼의 방법도 쓰고 라마승의 방법도 사용한다. 아마도 나는 홍모파와 황모파가 합해진 '라마승'일 것이다." 라고 다소 혼란스럽게 말했지만 직능상으로는 샤먼에 가까웠다. 그녀가 잉흐자르갈과 동업을 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샤먼들의 종교적 실천에 나타나고 있는 융합 현상은 라마승과의 관계에서도 심화되고 있다. 샤먼 잉흐자르갈과 함께 다쉬 푼레브 사원의 주지 간투무르를 방문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 한 중년 여성이 찾아왔다. 잠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던 간투무르는 잉흐자르갈에게 그녀를 소개시켜주었다. 사원에서 나온 후 잉흐자르갈은 "샤먼의 힘이 더 강하기 때문에 간투무르가 내게 그녀를 맡겼다"고 이야기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라마승이 자신의 의뢰인을 샤먼에게 인계한 것은 분명했다. 물론 이런 현상은 전통적으로 몽골의 불교와 샤머니즘이 민간신앙적 차원에서 융합되었기 때문에 새삼스러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는 지금까지도 불교와 갈등관계를 지속하고 있는 흑샤먼 전통의 잉흐자르갈이 라마승과 종교적 제휴를 하고 있다는 것은 새로운 현상이다.
흑샤먼들은 20세기 초까지도 라마승과 갈등했다. 특히 헙스걸 아이막의 다르 하드 지역의 샤먼들 사이에서는 불교에 대한 반감이 더욱 커서 샤먼들은 라마승을 증오하고 저주했고, 불경과 탱화는 진정한 것이 아니라 종이와 그림에 불과하다고 폄하했다.72) 종교에 대해 더 깊이 공부하고 싶다는 허럭에게 불교도 공부할 생각은 없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불교는 나와 맞지 않는다"라고 단언했다. 그 이유는 그녀가 여전히 흑샤먼 전통을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흑샤먼들이 라마승들과 실제적 제휴를 하고 있다는 것은 샤머니즘의 새로운 전개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楊海英은 현대의 샤먼 현상을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옛날에 붜(샤먼)들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일정한 지역의 특정집단 내에서만 그 역할을 했다. 그러나 현재는 세계관이 다른 사람들의 의뢰에 응하지 않으면 안되는 경우도 있고, 부탁받은 역할도 더 복잡해졌다. 따라서 전통적인 붜의 형식을 계승하면서도 독자적인 교의를 더한 새로운 타입의 붜도 나타나고 있다.73)
현재의 몽골 샤머니즘에 나타나고 있는 변화는 새로운 상황에 대한 적응의 결과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대중의 자본주의적 욕망을 종교적으로 지원하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다. 즉 과거 전통에 대한 기억과 복원보다는 소비사회의 욕망에 물들어 가는 대중에게 두려움과 매혹을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전통으로 끌어옴으로써 종교적 성장을 구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내부적 비판의 목소리 또한 점차 강해지고 있다. 샤먼 쟘빈은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지금 샤먼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진짜 엉거트를 불러낼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 흉내만 내고 있다. 엉거트는 장난감이 아니다. 엉거트, 로스-사브다크는 흉내만 내는 현대의 가짜 샤먼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허럭도 샤먼은 엉거트의 힘으로 사람을 '도와주는' 존재인 데 가짜 샤먼들은 엉거트를 부르지 못하면서 단지 사업의 일환으로 연기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래도 신자들의 믿음이 있다면 그 의례의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는 "가짜 샤먼들의 연기는 전혀 효과가 없다" 라고 단언했다. 물론 프랑스 인류학자로서 바이칼 호수 근처 부리야트 샤머니즘을 연구한 아마용(Robert N. Hamayon)은 샤머니즘 의례의 핵심은 신자들의 공동체가 공유하는 믿음이며, 샤먼의 행동은 문화적으로 정의되고 사회적으로 제도화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는 '가짜 샤먼'이라는 비판을 영적 진정성의 차원에서 다룰 수 없지만, 샤먼의 임무가 도움이 아닌 '사업'으로 바뀌었다는 허럭의 비판은 종교의 사회적 책임성을 회복하려는 노력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허럭 가족은 어머니 바이라의 49제를 마치고 울란바타르를 떠날 계획이라고 이야기했다. 비록 동생들의 교육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지는 못하고 에르데네(Erdenet)로 이사하지만, 몽골의 수도에서 겪었던 변화는 그녀의 삶에 상처만 남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10여 년의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샤머니즘 내부에서 도시의 삶에 대한 반성과 자본주의 문화에 대한 비판적 성찰도 나타나고 있는 현실은 몽골 샤머니즘이 자본주의적 가치에 완전히 함몰되지는 않을 것임을 예견케 한다.
도심의 한 공원에서 만난 어윰(76세)은 사회주의 시절 그녀의 부모가 어워를 돌며 '건강'을 기원했다고 회고했다. 당시의 유목민들이 돈이나 가축의 풍요보다 건강을 우선적으로 바랬던 까닭은 사적소유를 부정하는 사회적 조건에서 생산 증대는 개인에게 별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경제적 풍요가 삶의 중심 가치가 된 현재에는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은 욕망이 종교적 동기와 내용을 지배하는 경향이 점차 강해지고 있다.
현재 몽골의 종교는 사회주의적 세속화에 이어 자본주의적 세속화라는 근대성의 또 하나의 극단을 경험하고 있다. '종교의 상품화'는 자본주의적 가치가 전통적인 종교성을 압도하면서 나타난 부정적 현상이다. 이는 다음 장에서 다룰 종교적 재활성화와 환경 악화의 동시적 전개의 원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를 몽골만의 독특한 경험이라고 볼 수는 없다. 현재 신자유주의 질서에 영향 받지 않는 국가와 민족이 없는 것처럼 자본주의적 욕망의 반영으로부터 자유로운 종교도 없다. 또한 기복주의적 종교성의 부정적 영향은 다른 사회의 종교도 해결하고 있지 못하다. 그러므로 '종교의 상품화'를 비판하는 것이 몽골의 종교 현상을 특별히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명상과 깨달음, 자연과 인간의 공존과 연대성, 영적, 육체적 치유 등과 같은 종교적 다양성이 아직은 고르게 복원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은 몽골 종교의 미래를 제약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이러한 다양성 대신 자본주의적 욕망만으로 종교성을 채워갈 경우 전통적 종교는 위기를 맞게 되고, 그 의미체계가 지탱해온 자연과 인간의 공존도 위태롭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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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Walther Heissig, The Religions of Mongolia(London: Routledge & Kegan Paul, 1980), p. x.
2) Bulag, op. cit., pp. 18-19. 이처럼 고대적 전통과 종교가 민족주의의 지원을 받는 까닭은 몽골이 다민족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과 관련된다. 불락은 몽골 민족주의를 '위대한 몽골인'이라는 포함적 형식과 '할흐족(Halh)' 중심의 독점적 형식으로 분류한다. (ibid., p. 28.) 만약 후자의 형식이라면 할흐족만 포함하므로 국가적 결속은 불가능해진다. 그러므로 1206년 징기스 한에 의해 세워진 몽골국(Mongol Uls)이라는 국호를 1992년에 채택한 것은 '위대한 몽골인'이라는 이념으로 제 민족을 통합하려 했음을 의미한다. 참고로 몽골의 U.N 사무소에 따르면 전 인구의 86%가 할흐족이고, 7%가 카자흐족, 그 나머지는 부르야트, 다리강가, 바야드, 작친 등 소규모의 민족 집단이다. http://www.un-mongolia.mn/mongolia/intro.htm
3) 몽골 '녹색운동' 대표인 쟌도르지는 2001년 6월에 부르한 칼둔(Burkhan Kaldun) 산에서 열렸던 어워 의례에 현 바가반디 대통령을 비롯 정부 고위관리와 군 장성들이 모두 참석했다고 이야기했다. 그것은 현 몽골 정부가 종교를 통해 민족적 통합을 이루려 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4) Jasper Becker, The Lost Country - Mongolia Revealed(Great Britain: Sceptre, 1993), p. 57.
5) Mark Jurgensmeyer, The New Cold War? - Religious Nationalism Confronts the Secular State(Berkeley, Los Angeles, Oxford: Univ. of California Press, 1993), p. 115.
6) Piers Vitebsky, The Shaman(Boston: Little, Brown and Company, 1995), p. 11.
7) Heissig, op. cit., p. 14.
8) ibid., p. 7.
9) ibid., p. 12.
10) ibid., pp. 8-10.
11) 박원길, 『북방민족의 샤마니즘과 제사습속』(서울: 국립민속박물관, 1998), 476쪽. 재인용.
12) Piers Vitebsky, "From cosmology to environmentalism", Counterworks: Managing the Diversity of Knowledge, R. Fardon(ed.)(London: Routledge, 1995), p. 185.
13) Heissig, op. cit., p. 6.
14) Heissig, op. cit., p. 2
15) 험프리는 유목민들의 하늘 개념 - 천계로의 여행, 수직적 하늘 - 은 엘리아데처럼 원초적 샤머니즘의 근거로 볼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생겨난 것으로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Caroline Humphrey, "Shamanic Practices and the State in Northern Asia : Views from the Center and Periphery", Shamanism, History ane the State, Nicholas Thomas and Caroline Humphrey(ed.)(Michigan, 1996), pp. 194-197.
16) Heissig, op. cit., p. 6. 그러므로 고대 몽골인들에게는 정치적 행동과 종교적 의례가 일치했으며 하늘에 드리는 희생제의는 하늘의 의지와 군사적 승리, 통치권의 주장, 성공의 증거로 간주되었다. Humphrey, op. cit., p. 201.
17) D. Tserensodnom, 이선아 역, "{몽골비사}의 무속신화", 전북대인문학연구소, {동북아 샤머니즘 문화}(서울: 소명출판, 2000), p. 272.
18) 박원길, 앞의 책, 303-304쪽.
19) 앞의 책, 288-299쪽.
20) 이처럼 샤먼의 정치적 진출이 강력하다보니 유력한 샤먼들과 징기스 한 사이에 정치적 마찰도 생겨났다. 통일국가 형성기에 징기스 한을 도왔던 커커츄는 정치적 갈등 속에서 징기스 한의 동생이 권력을 얻을 것이라는 신탁을 내렸다. 그러자 징기스 한은 神·政 두 차원을 모두 장악하기 위해 커커츄를 살해하고 스스로 신의 대리자로 자처하게 된다.
21) Heissig, op. cit., p. 7.
22) Humphrey, op. cit., p. 223.
23) Heissig, op. cit., p. 45.
24) 외부에서는 흔히 몽골의 불교를 라마교라고 부르지만 몽골에는 라마교라는 말이 없다. 라마(lama)란 '스승'의 의미로 승려를 지칭하는 티벳어일 뿐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불교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25) 불교에 대해서는 하이지히의 The Religions of Mongolia의 3장과 4장, Walther Heissig, "Buddhism in Mongolia", Buddhism and Asian History, Joseph M. Kitagawa and Mark D. Cummings(ed.)(New York: Macmillan Publishing Company, 1989), pp. 189-191. 참조.
26) T. Mandala, "Religion in Modern Mongolia: has freedom brought stronger religious beliefs?", http://www.un-mongolia.mn/ger-mag/issue2/buddhism.htm
27) 15세기 초 쫑카파(Tsong kha pa)에 의해 창시된 겔룩파는 사캬파에 반발해 독신과 금욕주의, 사원 생활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적 불교운동이었다.
28) 박원길, 앞의 책, 345쪽.
29) Sherry B. Ortner, "The Case of the Disappearing Shamans, or No Individualism, No Relationalism", Selve in Time and Place : Identities, Experience and History in Nepal, Debra Skinner, Alfred Pach Ⅲ and Dorothy Holaand(ed.)(Rawman & Little Field, 1998), pp.259-260.
30) Heissig, op. cit., p. 39.
31) 울란바타르에서 만난 남성 샤먼 바얌바도르지(Bayambadorj)는 달라이 라마와 함께 찍은 사진을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는데, 그에게 티벳불교의 가르침과 체계는 그의 샤먼업에 어떠한 장애도 되지 않았다.
32) 박원길, 앞의 책, p.367.
33) Caroline Humphrey, "Theories of North Asian Shamanism", Soviet and Western Anthropology, Ernest Gellner(ed.)(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0), p. 249.
34) 험프리는 러시아의 지배 시기 부리야트 지역 몽골인들의 개종은 다분히 '표면적(superficial)'인 것이었다고 분석한다. 즉 정교회에 들어간 사람들도 교회를 가기보다는 여전히 샤먼을 찾아갔고, 니콜라스 성인의 그림은 농경의 생산성과 행운을 가져오는 옹곤(ongon)이었다는 것이다. Humphrey, op. cit., p. 251.
35) Sarangerel, Riding Windhorses: A Journey into the Heart of Mongolian Shamanism(Rochester, Vermont: Destiny Books, 2000), p. 145.
36) The Mongolia People's Revolutionary Party
37) 라마승들의 저항이 얼마나 격렬했는지는 몽골인민혁명당의 공식 역사 자료에 잘 나타난다. 반란군에 의해 45개의 협동조합, 33개 솜의 행정부가 파괴되었고 학교와 문화적 공간이 '약탈'당해 몽골 내 소통체계가 붕괴되었다고 한다. B. Baabar, History of Mongolia(Cambridge: White Horse Press, 1999), p. 316-317.
38) 긴든은 1933년에 종교적 신앙과 자기 재산을 라마승과 사원에 기부하는 것은 모든 당원의 개인적 관심사의 문제라고 하면서, 그 동안 사원에 불리하게 적용되었던 조세 제도를 개정하여 한동안 불교의 재활성화를 가져왔다. 그 결과 이 시기 동안 단지 1년만에 27,000명 이상의 남성이 다시 라마승이 되었다. ibid., pp. 322-323.
39) Bulag, op. cit., pp. 37-41. 1937년에서 1938년까지에만 무려 16,631명의 라마승들이 처형 당했고 771개의 사원 중 615개가 재로 변했으며 생존한 라마승들은 강제로 환속 당하거나 투옥되어 사실상 종교적 기반이 붕괴되었다. (ibid., p. 363.) 박해의 전 과정에 대해서는 ibid., pp. 356-378. 참조.
40) Alan J.K. Sanders, Mongolia - Politics, Economics and Society(Colorado: Lynne Rienner Publisher, 1987), p. 124. 남성들의 많은 비율이 라마승이었던 것은 종교적 헌신의 열정 때문이라기보다는 몽골의 군사력을 억제하기 위한 만주제국의 인구통제 정책의 결과였다. 만주족 지배자들은 출가한 라마승들의 가족에게는 경제적 혜택을 부여함으로써 남성들의 출가를 유도했고, 그 결과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몽골 인구는 30만으로까지 감소했다.
41) ibid., p. 89. 바바르도 비슷하게 14-15%였다고 기록한다. Babaar, op. cit., p. 307
42) ibid., 345.
43) 물론 몽골 샤머니즘의 지속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의견이 조금 다르다. 팰러스(P.S. Pallas)는 1801년에 이미 샤머니즘이 사라지고 있다고 간주한 반면, 린첸(Rintchen)은 1920년대까지 샤머니즘이 지속되었다고 주장했고, 또 디오세지(V. Dioszegi)는 1961년의 연구보고서에서 몽골, 북부와 북서부에서는 강하게 남아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다양한 견해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샤먼들은 고대 몽골제국 초기에만 정치적 힘을 가졌을 뿐 불교가 지배적 위치를 점한 이후부터는 이미 주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Charles R. Bawden, Confronting the Supernatural : Mongolian Traditional Ways and Means : Collected Papers(Wiesbaden: Harrassowitz Verlag, 1994), pp. 161-162.
44) 그녀는 할머니 수렌에게 실제로 그런 사례가 있었다고 회고했다. "하루는 수렌이 바슨자우의 집에 갔다가 그의 아이들이 놀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중 한 아이가 며칠 후 죽게 될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바슨자우에게 '네 아이가 죽게 되니 고쳐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는 그 말을 무시해버렸다. 며칠 후 바슨자우의 아이가 교통사고로 죽자 그는 수렌의 저주때문이라면서 경찰에 신고했다. 수렌은 굿을 하여 폭설이 내리게 해서 그녀를 잡으러 오는 경찰들의 길을 막아버렸다. 그후 바슨자우의 나머지 아이들도 병에 걸렸는데 병원에서는 병명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바슨자우가 수렌에게 와서 병을 고쳐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녀는 '왜 처음에 내 말을 안 듣고 고발했느냐? 너 때문에 내가 무척 어려워졌다. 고쳐줄 수 없다'고 거절했다. 하지만 바슨자우가 울면서 부탁을 해 결국 굿을 해 아이들의 병을 고쳐주었고 그는 샤머니즘 신자가 되었다."
45) 벡커도 비슷한 맥락에서 1991년 5월에 차강노르 솜에서 만난 샤먼 곰보후의 공포를 소개했다. 그가 의례를 부탁하자 샤먼은 허가를 받았는지 먼저 물었고 벡커는 "몽골의 많은 것이 변했다. 이제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라고 말함으로써 의례를 약속 받았다. 하지만 의례 전날 밤에 관리들이 샤먼의 집을 기웃거리자 불안해진 곰보후는 체포될 것을 두려워해 의례를 기피했다. 그는 벡커가 지역 행정조직의 책임자로부터 "무엇을 하든 그것은 당신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다. 지난 밤에 우리 관리들이 갔던 것은 호기심 때문이지 당신을 염탐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당신이 그 사람들을 돕고 싶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당신의 일이다."라는 증명서를 받아온 후에야 의례를 할 수 있었다. Becker, op. cit., pp. 164-173.
46) Caroline Humphrey, "Forward", in Bulag, op. cit., p. 6.
47) 물론 일부에서는 그리 성공적이지는 않지만 종교를 기반한 정당 활동이 있다. 1992년 6월 28일의 선거에는 몽골불교당(the Mongolian Buddhist Party)가 참여해 한 석도 얻지 못하는 패배를 경험했지만, 그 당을 이끌었던 바얀차간은 복드 한 시절의 정치구도를 복구할 것을 여전히 목적으로 삼고 있다. Mark Jurgensmeyer, op. cit., p. 123.
48) 글룩만은 "인구 조사 통계에 따르면 공산주의의 통치에도 불구하고 94%의 몽골인들이 불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라고 주장한다. Ron Gluckmann, "Can't We Chant", http://www.gluckmann.com/MongoBud.html, 2001.9.26.
49) Sanders, op. cit., p. 125.
50) ibid., pp. 126-127.
51) Zofia Sokolewicz, "Traditional Worldview in Contemporary Mongolia", Contemporary Nomadic and Pastoral Peoples : Asia and the North, Vinson H. Sutlive, Nathan Altshuler, Mario D. Zamora, (ed.)(Virginia: Dept. of Anthropology College of William and Mary, 1982), p. 130.
52) 흑샤먼 촐란바타르는 그의 아내 르학바에르겐(44세)와 함께 지난 해 12월에 울란바타르로 이주했다. 르학바에르겐도 샤먼의 딸이었지만 고향에서는 조무로서만 역할하다가 울란바타르로 이주한 이후 샤먼 잉흐자르갈을 통해 샤먼이 되었다. 그녀는 흑샤먼들이 통과해야 하는 마우스하프 3년 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옷을 입었다.' 그녀는 그것을 자신의 영험으로 주장했다.
53) Bulag, op. cit., p. 57.
54) Piers Vitebsky, "Landscape and self-determination among the Eveny-The political environment of Siberian reindeer herders today", Bush base: forest farm-Culture, environment and development, Elisabeth Croll and David Parkin(ed.)(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1992), p. 239.
55) Humphrey, "Theories of North Asian Shamanism", p. 251.
56) 필자가 인터넷의 한 몽골 커뮤니티를 통해 알게 된 간바트는 미국인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매니저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몽골의 각 지역의 기상, 토양, 문화 정보들을 수집하는 일을 하고 있다. 종교에는 관심이 없지만 사교를 목적으로 교회에 나가고 있었고, 필자 외에도 많은 외국인들과 교류하고 있었다. 그를 통해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하레 크리슈나 멤버인 락슈미도 만날 수 있었다.
57) 가장 비싼 것은 '알탄 간쪼르(금강경)'로 5천 투그릭(Tg)이나 되었다. 환율의 차이가 있지만 대개 몽골 '투그릭(Tg)'과 한국 '원'은 1:1의 비율이다. 몽골의 의사 한 달 월급이 약 100달러 정도이므로 5천 투그릭이라면 상당한 액수인 셈이다.
58) 물론 다쉬 초이린 사원도 경전을 읽어주면서 돈을 받고 있지만 가격을 책정하지 않았고 돈을 내지 않아도 신청한 경전을 읽어준다는 점에서 간단사와는 차이를 보였다.
59) 현재 몽골에서 사용되는 문자는 러시아 키릴어이다. 현대 사회주의 맥락에서 러시아에 가까웠던 몽골은 고대 몽골어 대신 1941년부터 현대 키릴어를 사용했다. 사회주의 이후 고대 몽골어를 복원하려는 시도가 있지만 이미 키릴어 사용에 익숙해진 문화를 바꾸는 것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60) T. Mandala, "Religion in Modern Mongolia : has freedom brought stronger religious beliefs?", Online magazine Ger, 1999.5.12, http://www.un-mongolia.mn/ger-mag/index.html
61) 울란바타르에서 활동 중인 다섯 명의 샤먼이 이 협회에 가입해 있다. 아시아샤먼협회는 조직을 확장하기 위해 고향에서 샤먼을 불러들이고 있고, 울란바타르의 다른 샤먼들도 설득하고 있었다.
62) 바이라와 허럭은 아시아샤먼협회의 가입 권유를 계속 받아왔지만 전통을 고수하기 위해 거절했다고 한다.
63) 데. 마르하호, 앞의 글, 45쪽.
64) 현지에서 만난 허럭, 잉흐자르갈, 촐란바타르, 르학바에르겐은 모두 헙스걸 아이막 출신의 흑샤먼들이었고, 수미야도 아르항가이 아이막 출신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90년대 이후 울란바타르로 이주해서 도시 샤먼의 삶을 살고 있었다.
65) 그러나 도시로의 이주 현상은 의례시에만 전문적 종교인으로 활동했던 전통적 샤먼을 사라지게 하는 대신, 잉여가치의 중심지가 된 도시에 적응하는 전업적 샤먼을 출현시키고 있다.
66) 그의 진술에도 불구하고 그와 그의 아내 르학바에르겐의 공동 신단에는 마하칼라 그림이 놓여 있었다. 그 이유는 르학바에르겐의 어머니가 불교신자였기 때문이었다. 이 점은 그의 주장의 신빙성을 감소시키는 것이었지만, 아무튼 이주 이후 의례상의 장애를 겪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67) Heissig, op. cit., p. 36.
68) ibid., p. 39. Mircea Eliade, 『샤머니즘 - 고대적 접신술』, 이윤기 역, (서울: 까치, 1996), 378쪽.
69) 수미야는 몽골 샤머니즘 연구자 사란게렐과 함께 골롬트 센터에 관여하고 있으며, 아시아 샤먼협회에도 회원으로 가입해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아르항가이 아이막 출신이며, 할흐족에서 유일한 백샤먼이라고 주장했다.
70) 사란다와는 사회주의 때 무역학을 전공했고 무역회사에서 일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일은 하지 않고 오직 치병활동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녀는 샤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샤먼협회에 소속해 있으며, 흑샤먼 잉흐자르갈과 종교적 의례를 실천하고 있다.
71) 또한 독학으로 연구한 자신만의 35가지 치료법이 있어 이제는 홍모파나 황모파에서도 자기에게 배우러 온다고 말했다.
72) Caroline Humphrey, "Chiefly and Shamanist Landscape", The Anthropology of Landscape, p. 157.
73) 楊海英, "천막에 나타난 우주관", 『초원의 대서사시-몽골유목문화』, 일본국립민족학박물관, 이평래 역(용인: 경기도박물관, 1999), 7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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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장, 종교적 자연관과 자본주의적 가치관의 충돌
1. 전통적 유목문화의 성격
1) 유목의 배경과 기본 구조
2) 유목문화의 종교적 함의
(1) 자연에 대한 유목적 지식의 종교적 성격
(2) 전통과 종교의 불가분성
3) 종교적 자연관의 실천
(1) 의례공동체로서의 초원의 자생적 사회조직
(2) 사적 영역에서의 실천: 자발적 가난의 종교성
2. 전통적 유목문화의 약화와 환경 변화
1) 유목구조의 자본주의적 변화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
2) 자본주의적 경쟁으로 인한 문화의 위기
데이비스는 인류 역사 대부분의 기간 동안 인간은 모두 유목민이었으므로 "우리는 유목사회에서 우리의 지난 모습을 본다"1)고 주장했다. 요컨대 유목은 현대인에게 완전히 낯선 경험은 아니라는 것이다. '노마드', '유목적 사유', '도시에서 유목하기', '전자 유목민' 같은 표현이 낯설지 않은 것은 산업문화에 지친 현대인들을 유목의 이미지가 매혹시키고 있음을 반영하는 현상이다.2)
근래에 유목문화에 대한 관심은 주로 환경 보전을 위한 논의 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다. 카브흐(Kh. Khavkh)는 유목문화의 지도원리를 "자연과 조화 속에 사는 것"3)이라고 정의하고, 엥흐툽신(Enkhtuvshin)외의 학자들도 "유목의 경제학적 원리는 동물-인간-초원의 상호작용과 관련된 것"4)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조화와 상호작용은 문화를 통해 전개되었다. 몽골인 학자 삼필덴뎁(H. Sampildendev)은 "자연에서 보고 싶은 모든 것은 집 밖에 나가기만 하면 볼 수 있는 몽골의 깨끗한 자연은 유목적 삶과 문화에 깊이 관련된 것"5)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현대 인류학자들이 지경(地境, landscape)을 '문화적 과정'6)으로 해석하는 것에 부합한다. 즉 몽골의 환경은 그 안에 살고 있는 인간과 자연의 제 요소가 함께 형성한 문화적 결과인 것이다.
1. 전통적 유목문화의 성격
1) 유목의 배경과 기본 구조
친환경적 가치를 풍부하게 포함하고 있는 몽골의 유목문화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심미적 태도나 자유롭고 낭만적인 삶의 방식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다. 유목민들의 친환경적 삶의 방식은 오히려 부정적 조건을 배경으로 생겨났다.
울란바타르의 '만바 다짠 병원'7)에서 만난 유목민 여성 스레트르(51세)8)는 병이 나아서 고향으로 돌아가면 "다른 일을 할 수 없으니 힘들더라도 유목을 계속하겠다. 내 아이들도 마찬가지이다" 라고 이야기했다. 물론 그녀의 진술은 높은 실업률과 생산구조의 차이로 인해 도시에서 일자리를 얻기 힘든 현실을 반영하고 있지만, 동시에 유목이 수월한 경제활동은 아니라는 것도 의미했다. 그녀 외에도 많은 유목민들이 공통적으로 진술하는 것은 유목이 보헤미안적 낭만과는 관계없는 고된 노동과 긴장의 연속이라는 것이었다.
유목의 힘겨움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선택한 것은 몽골의 척박한 기후, 생태조건 때문이다. 대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고원 지대인 몽골은 극단적인 대륙성 기후의 영향을 받아 겨울이 매우 길고 식물의 생장기간도 80일에서 100일에 불과하다. 강우량도 북부의 일부 지역만 연평균 500ml를 넘을 뿐 남부 고비 사막 지역의 경우 50ml 정도로 전반적으로 적다. 또한 대기 중 습도도 낮고 수자원도 부족한데다 연중 강한 바람이 불기 때문에 부식토도 부족하고 토지의 표층도 얕다. 연중 260일 정도가 맑은 날씨이지만 입사 광선의 양이 적고 기후의 연교차, 일교차는 극단적이다. 이러한 기후, 생태조건에 따라 초원에 서식하는 식물의 재생과 성장은 매우 더디다.9) 그 결과 전체 영토의 90%가 목축에 적합한 반면 농경이 가능한 토지는 1.1%에 불과하다.10) 더욱이 가축의 90%가 현재에도 자연 초지의 풀을 먹고 사는 생산방식이므로 초원의 황폐화를 가져오는 집중적 목축은 피해야 했다.11) 그러므로 몽골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경제활동은 유목이었다.
유목의 기본구조는 이동성이다. "유목은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광역적 이동을 중요한 행위로 하는 특이한 형태의 식량생산경제"12)라고 정의한 하자노프는, 몽골 유목민들이 여름에는 북쪽으로 겨울에는 남쪽으로 이동했던 거리가 무려 600킬로미터에 달했다고 설명했다.13) 이러한 광역적 이동이 수 천년 동안 지속되었기 때문에 특정 지역의 집중적 사용과 파괴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현재의 청정한 환경이 이러한 이동성의 결과라는 것은 험프리(Caroline Humphrey)와 스니스(David Sneath) 등의 내아시아 지역 비교 연구 사례에서 찾아볼 수 있다.14)
일례로 지역적으로 인접해 있는 러시아 치타 오블라스트(Chita Oblast) 지역의 기간트(Gigant) 집단농장과 몽골 도르노드(Dornod) 아이막의 다쉬발바르(Dalshbalbar) 솜은 건조한 기후, 평평한 초지를 공통적 특징으로 한다. 또한 양 지역에는 부리야트 족이 주로 살고 있다. 두 지역의 차이는 사회주의 시기의 정주화 정책의 실시 여부뿐이다. 정주화가 실시된 기간트 집단농장은 정착민의 집과 가축 우리를 건축하고 연료로 사용할 목재를 위한 과도한 벌목으로 삼림이 심각하게 파괴되었지만, 다쉬발바르 지역 유목민들은 지금도 게르에서 살고 연료도 동물의 배설물을 이용하기 때문에 삼림파괴의 위험성이 없었다.15) 이는 동일한 생태학적 조건이라 할지라도 이동성의 유지 여부에 따라 전혀 다른 환경상태를 가져온다는 것을 나타낸다.
물론 몽골 역시 1940년대 이후 소위 '적화계획'에 의한 집단화 과정을 경험했다. 그러나 몽골에서의 집단화는 주로 사적소유의 폐지와 관련된 것이었을 뿐 전통적 토지 사용 유형인 이동성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16) 현지에서 만난 유목민들은 몽골의 '콜호즈(kholhoz)'라 할 수 있는 '네그델(negdel)'이 유목 형태를 유지했다고 회고하는 경우가 많았다. 간바트르는 사회주의 시절 '파르티잔(당원)'이라는 네그델에서 일했는데 1년에 12회 내지 20회 정도 이동하는 유목을 계속했으며 그 범위도 수백 킬로미터에 달했다고 진술했다. 이는 사회주의 시기와 현재의 환경파괴를 초래한 직접적 원인은 집단화가 아니라 이동성의 쇠퇴임을 보여주는 사례였다.17)
몽골에서 유목이 지속된 것은 혹독한 자연조건에서 생존하기 위한 '생태학적 합리성'18)과 관련된 것이었다. 유목 이동성으로 인해 초원은 재생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고, 그것이 인간과 동물의 생존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지속시킨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종교적 자연관이었다.
2) 유목 문화의 종교적 함의
험프리와 스니스는 "초원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원시적 자연' 현상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유목적 목축의 오랜 실천의 산물이다"19)라고 주장했다. 이는 유목 이동성이 지속되었기 때문에 환경이 지속 가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동성 자체가 긍정적 환경 상태의 유일한 원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척박한 기후, 생태조건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다른 유목민과 물리적으로 충돌할 수도 있고, 더 많은 생산을 위해 자연의 재생력을 상회하는 가축구조를 형성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즉 인간은 이동하더라도 충분히 파괴적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험프리도 "내아시아 지역에서 환경 보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이동성만이 아니라 종교적 믿음"20)의 결과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몽골의 환경이 지금껏 청정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원인은 유목민들이 지속해온 종교문화에서 찾을 수 있다.
(1) 자연에 대한 유목적 지식의 종교적 성격
유목민들의 일상은 초원에 가축을 풀어놓고 하릴없이 앉아 권태로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다. 주요 정보제공자인 간바트르에게 홀로 가축을 돌볼 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물어보았더니 "가축을 어디로 데려갈까"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신과 인간에 대해 명상한다"라는 답을 기대했던 것에 비하면 실망스런 답변이었지만, 그 의미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변화무쌍한 기후 조건의 초원에서 생존하려면 식물 상태와 동물의 생리, 바람과 물의 흐름을 매우 민감하게 살피는 유목 지식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21)
그런데 이 유목 지식의 성격은 단지 자연을 제어하는 기술적 차원이라기보다는 종교적 차원에 가까운 것이었다. 유목민들은 초원과 동물에 대한 풍부하고 상세한 기술적 지식을 지녀도 한파와 가뭄 같은 재앙(zud)을 일으키는 변화무쌍한 자연을 길들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동물과 인간의 생존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 위협하기도 하는 자연에 대해 숭배와 두려움의 감정을 느꼈다. 이처럼 불가항력적인 자연의 힘을 체감하며 살아온 유목민들은 정주사회의 사람들이 자연을 제어하고 지배하는 기술적 지식을 발전시켜온 것과는 달리 자연과 조화하는 종교적 지혜를 발전시켜온 것이다.22)
유목 지식의 종교적 차원은 첫째, 자연현상을 신격과 관련된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전통적으로 몽골인들이 섬겨온 텡그리(Tngri, 하늘)에는 '하얀 천둥 텡그리'나 '비를 내리게 하는 텡그리'처럼 자연 현상과 관련된 신격이 포함되어 있고, 높은 산이나 강 같은 지역적 의미를 지닌 자연현상을 신격화한 텡그리들도 존재한다.23) 이처럼 자연 현상을 신적 사건으로 이해한 과거의 몽골인들은 천둥소리를 들으면 "하늘이 부르짖는다"고 두려워하면서 군사행동조차 멈출 정도였다.24) 몽골인 학자 둘람(S. Dulam)이 몽골인들은 "물질적 사물과 영적 관념, 혹은 객관과 주관 사이에 절대적 구분을 하지 않았다"25) 라고 해석하는 것도 유목민들에게 자연 현상은 단지 물리적 사건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둘째, 전통적 유목민들이 지녀온 동물에 대한 상세한 지식도 종교적 자연관을 포함하고 있다.26) 인간과 동물의 관계성에 대한 몽골인들의 사유는 신화에 원형적으로 나타난다. 신화 속의 동물은 세계의 창조에 협력했거나 씨족의 조상이며, 또한 인간과 동물은 모두 "중간 세계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살아있는 피조물"27)이므로 동물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동물에 대한 존중의 태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불가피하게 동물을 죽여야 할 때 하는 의례이다. 간바트르는 동물을 죽일 때 초를 밝혀 불경을 외우며 그 동물의 영혼이 다시 자신의 가축무리로 오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물론 이러한 태도가 동물 개체수의 실제적 감소에 대한 두려움을 종교적으로 극복하려는 이기적 욕망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28) 그러나 이 종교적 의례에서 표현하는 죄의식과 연민의 감정은 동물을 단지 자원으로 여겼다면 생겨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셋째, 유목민의 일상생활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종교적 의미를 띤 금기들이다. 만바 다짠 병원에서 만난 스레트르는 자신이 병을 얻은 이유를 "어느 곳인지는 모르지만 유목을 하면서 '들어가서는 안될 곳'을 들어갔기 때문인 것 같다" 라고 이야기했다. 물론 몽골인들 사이에서 실천되고 있는 자연과 관련된 금기들이 모두 종교적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는 생태학적 합리성을 반영한 것이 금기의 일반적 성격일 수 있다. 일례로 몽골 자연보호부 관리 잔쟈도르지가 소개한 "물이 흐르고 있는 강 뿐만 아니라 마른 개울에도 오물을 버리지 말라"는 금기는 비가 오면 다시 그곳으로 물이 흐를 것이라는 합리적 이유를 갖고 있다.29) 그러나 그러한 금기들이 시대를 초월해 지속적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은 솓놈다르갸(TH. Sodnomdargia)의 주장처럼 "금기들을 철학적, 종교적으로 이해했기 때문"30)이다. 예를 들면 몽골에서 만난 유목민들이 자주 언급했던 "이유 없이 땅을 파서는 안 된다" 라는 금기는 "우물을 만들 목적으로 만물의 어머니인 대지에 구멍을 파서는 안 된다"31)라는 금기에서처럼 대지에 대한 종교적 신앙을 포함함으로써 지속적 영향력을 갖게 된 것이다.
자연에 대한 지식의 양적 차원에서는 유목민들의 지식이 산업사회의 과학적 지식에 미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첨단 과학기술의 축적된 지식이야말로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는 핵심적 능력을 제공한다는 관점도 존재한다. 이는 비록 과학기술의 오·남용이 현재의 환경위기를 초래했다 할지라도 과학과 기술은 자연계를 더 깊이 연구하고 이해할 수 있는 잠재력을 마련해준다는 낙관을 반영한다.32) 대표적으로 〈환경과 개발에 관한 리우선언〉의 '원칙 9'는 다음과 같이 전망한다.
원칙 9: 각 국가는 과학적, 기술적 지식의 교환을 통하여 과학적 이해를 향상시키고 새롭고 혁신적인 기술을 포함한 기술의 개발, 적용, 존속, 전파 그리고 이전을 증진시킴으로써 지속가능한 개발을 위한 내재적 능력을 형성, 강화하도록 협력하여야 함.
이러한 관점은 인류에게 닥친 환경위기를 해결할 잠재력을 과학기술이 갖고 있다는 믿음의 소산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과학기술의 긍정적 잠재력이 발휘되도록 조정하는 것, 이른바 청정기술, 생태친화적 기술의 개발이 된다.
그러나 그로브 화이트는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기업, 정부, 연구협회에 책임을 지고 있으므로 그들의 태도는 필연적으로 선택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환기시킨다.33) '체제 밖의 과학자'들이 극소수 존재하지만 "기성 과학계는 반항하는 과학자 그 누구라도 그 경력을 파멸시킬 수 있는 충분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34)는 러브록(James Lovelock)의 비판도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체제 안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시사한다.35) 즉 과학기술 낙관론은 모든 것을 상품적 가치에 따라 결정하는 자본주의 구조에서 과학기술이 이윤창출을 위한 수단으로 종속되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비판적 시각에서 지식의 문제를 성찰해보면 종교적 관점과 결합해 있는 유목적 지식을 열등한 것이라고 볼 근거는 사라진다. 현대의 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아직도 '미신'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고 폄하되는 유목적 지식이야말로 청정한 환경을 실제로 보존하고 있는 반면, 자연을 분류하고 변형하고 제어하는 능력을 과시하는 과학적 지식은 오히려 환경악화를 초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전통과 종교의 불가분성
현대의 몽골인들도 매일 자연의 신들에게 음식을 바치고, 종교적 상징인 어워를 돌고, 자연신격인 로스-사브다크를 섬기는 행위를 한다. 그러나 현지에서 만난 몽골인들은 그런 행동을 종교가 아닌 '전통'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흥미로운 것은 샤먼이나 라마승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샤먼 잠빈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게르를 이동할 때 파헤쳤던 땅을 메꾸고 기도하는 것과 같은 의례는 꼭 샤머니즘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연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문화적 전통'이다.
이처럼 자연과 관련된 의례를 비종교적으로 해석하게 된 원인은 일차적으로는 사회주의의 영향일 것이다. 중국 신장(Xinjiang)의 도르지(Dorj)는 "나는 공산당원이어서 종교를 갖고 있지 않지만 우리의 '전통'에 따르면 사람들은 씨족과 솜 안의 서로를 알기 때문에 어워 의례에 참여한다"36) 라고 진술했다. 즉 종교적 헌신의 기대를 갖고 있지 않더라도 친환경적 분위기를 가져오는 자연 의례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몽골인들에게 '종교적', '비종교적' 태도를 구별하는 것은 무의미할 수 있다. 다쉬 초이린(Dash Choiren) 사원의 주지 담바자프(C. Dambajav)를 만났을 때 몽골인들은 종교적 성격을 갖고 있는 행위를 하면서도 그것을 전통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몽골의 불교는 전통과 결합하면서 발전했기 때문에 지금 몽골의 풍습을 종교와 별도로 볼 수 없다. 그러므로 몽골의 문화를 연구하려면 종교를 연구해야 하고, 종교를 연구하려면 문화를 연구해야 한다.
종교와 문화 혹은 전통이 하나로 결합해서 발전했다는 것은 종교적 기원을 가진 태도가 전통으로 스며들어 구별된 종교성을 나타내지 않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몽골에서는 종교를 배제하고 전통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자연에 대한 관점에서 더욱 분명히 나타난다. 담바자프가 "옛날부터 종교는 자연과 관련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하늘, 땅은 샤머니즘과 깊은 관련성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현재 지속되고 있는 자연 의례의 전통이 종교와 무관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종교가 문화와 결합되어 있는 것은 다른 전통사회의 경험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북방민족의 샤머니즘을 연구한 핀란드 인류학자 펜티카이넨(Juha Pentikainen)은 '종교'라는 서구적 개념을 북방민족의 맥락에 사용하려면 종교를 다른 삶의 영역으로 정의하는 서구적 개념보다 더 총체론적이고 개방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방에서 관찰되는 사람들의 '종교'는 교리적이기보다는 실용적인 것으로 '삶의 방식' 혹은 '마음의 철학'에 가깝다는 것이다.37) 이런 해석을 수용한다면 유목민들의 전통은 종교성과 분리된 세속적 현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종교성을 문화로 확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종교라는 관념은 아사드(Talal Asad)의 주장처럼 지극히 근대적, 서구적 관념일 뿐 전통사회 사람들에게는 종교라는 관념이 없었다. 몽골인 학자 만달라(T. Mandala)도 몽골인들의 종교적 이해는 전통문화와 관습 안에 깊이 배어있어 때때로 그것이 전통인지 종교인지 인식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고 지적한다.38) 이는 관념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제도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고대 몽골 제국을 여행한 라시드 알 딘(Rashid al-din)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몽골의 아이들에게 올바른 길로 인도하도록 도와주는 종교적 공동체나 신앙은 필요없다. 왜냐하면 부모가 아이들에게 씨족의 전승과 계보를 설명해주기 때문이다.39)
초원에서 평생을 보내야 했던 유목민들에게 가족은 학교이자 교회였다. 그러므로 자연과 신에 대한 태도를 배양하는 별도의 제도가 없더라도 자신의 전통을 배우고 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몽골인 학자 남질(T. Namjil)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세대를 거쳐 물려받는 몽골인들의 삶의 방식은 주로 가족 학교에서 가르쳐진 것이었다. 몽골 어린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땅과 가축을 사육하는 방법을 배우고, 타당한 이유 없이 땅을 파거나 나무나 식물을 베거나 파괴하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배웠다. 가족학교는 어떻게 고향과 자연을 사랑하고 보호해야 하는지를 가르쳤다.40)
즉 '종교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자연에 대한 몽골인들의 태도는 일상적 삶의 질서와 괴리된 다른 질서로 분리되지 않고 대대로 이어진 삶의 연속성, 전통적 문화 안에 존재했던 것이다. 자연과 인간의 호혜적 공존을 실천하게 하는 지혜의 토양은 별도의 종교적 교리와 체계가 아닌 유목적 삶 그 자체였다. 이런 맥락에서 유목민들이 자연에 대한 자신들의 사유와 실천을 전통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충분한 근거가 있다.
3) 종교적 자연관의 실천
(1) 의례공동체로서의 초원의 자생적 사회조직
현대의 생태주의는 환경 보전의 노력과 인간 사회의 공존 윤리를 분리하지 않으므로 환경위기의 원인은 타인을 지배하려는 욕망을 자연에 투사한 결과라고 본다.41) 이런 관점을 수용한다면 몽골의 자연환경이 지금껏 청정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사회적 공존 윤리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전통적 유목민들은 지배와 피지배의 대립보다는 사회적 공존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사실 땅이 넓고 인구가 희박하다는 것이 환경보전의 충분조건은 아니다. 한 인간이 파괴할 수 있는 영역은 그 한계가 정해져 있지 않으며, 특히 제한적 자연 조건에서 개인과 집단의 욕망을 제어하지 않았다면 초원은 약육강식의 살육장이 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지배의 욕망이 자연에 대해서도 실천되었다면 인간의 생존 근거 역시 황폐화되었을 것이다. 유목민들은 그러한 파괴성을 지양하는 공존의 윤리를 선택함으로써 삶의 지속을 가능하게 했다.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공존을 가능하게 한 문화는 초원의 자생적 사회조직인 호트 아일(khot ail)에서 전형적으로 찾아 볼 수 있다. 한 가구의 힘만으로 유목을 지속할 수 없는 거친 초원에서 유목민들은 호트 아일을 구성해 교대로 서로의 가축을 돌봤고 위급한 일에는 공동으로 대처했다.42) 그 영향력은 작은 행정 단위인 박(Bag, 里)의 관리들이 유목 이동과 같은 중요 안건에 있어서는 호트 아일의 지도자들과 상의하여 결정해야 할 정도였다.43) 또한 초원의 사회조직은 공존을 위한 다양한 문화적 규칙들도 만들어냈다. 에르데네바타르(B. Erdenebaatar)는 "이미 사용하고 있는 지역은 피할 것", "다른 유목민들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할 것", "최근에 다른 사람이 떠나간 자리는 피할 것" 등과 같은 규칙들은 종교적, 지적, 실천적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유목민이 지키지는 않았지만 위반할 경우 범죄행위로 간주할 만큼 강한 규제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44) 사회적 규칙이 종교적 성격을 갖는 것은 공존을 위한 사회적 약속의 파기를 신의 처벌을 초래하는 '죄'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원의 사회 조직이 외적인 유목 과정만을 위한 것이었다면 그 자체로는 결속력이 약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는데 기여한 것은 공동체의 상징적 결속을 강화하는 종교적 의례였다. 그것을 대표하는 것은 몽골인들에게 가장 대중적인 어워 의례이다. 몽골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어워는 보통 돌을 쌓고 그 가운데 나무 기둥을 세운 구조물이다. 몽골인들은 어워를 지날 때마다 여행의 안전과 개인적 행운을 위해 제물을 바친다. 이처럼 어워는 자연과 결부된 종교적 상징이지만 어워에서의 의례는 공동체의 결속을 종교적으로 강화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험프리가 보고한 것처럼 작은 가족이나 씨족 단위가 공동체의 어워를 소유하고 있는 것은45) 어워가 사회적 결속을 종교적으로 상징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유목적 생산주기와 맞물려 행해지는 어워 의례에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모두 참여한다. 이는 유목적 사회조직이 의례공동체의 성격도 포함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편 초원의 유목민들이 경험한 공존의 '정서적 차원'46)은 환대(hospitality) 의식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2001년 현지조사 중에 투브 아이막의 한 유목민 가정을 예고 없이 방문했는데도 가죽을 손질하고 있던 여인들은 일손을 놓고 게르 안으로 초대해 마유주와 유제품을 풍성하게 대접했다. 처음에는 서먹서먹한 대화가 오갔지만 이내 웃음 띤 얼굴로 대해주었고 그 가족의 청년은 말을 태워주며 장난을 걸만큼 금새 친근감을 표시해왔다. 이러한 환대는 어느 게르를 방문하더라도 마찬가지로 경험할 수 있었다. 몽골인들에게 가장 인상적인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간바트르에게 환대의 경험을 이야기했더니, 누가 오든 반갑게 게르 안으로 맞아 차와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 유목민의 전통이라고 설명했다. 몽골 문화에 대해 심층적으로 연구한 마이달과 츄르템은 이러한 환대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몽골인들은 몇 세기에 걸쳐서 이 손님 환대의 전통을 존중하고 있다. 유목민은 자기 자신이 언제 어느 때 눈보라로 잃어버린 말을 찾아 헤매고 몇 십, 몇 백 킬로미터를 여행해야 하는 여행자의 입장에 설 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행자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휴식과 안락함을 주며 때로는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 '말이나 낙타 혹은 식량'을 제공하는데, 이는 몽골이라는 험한 기후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목축민에게 있어서는 명예로운 일이다.47)
유목민들은 모두 나그네들이다. 우리가 만난 초원의 유목민들은 손님을 맞는 주인이었지만 또 어디에서인가는 그들도 나그네가 되어 다른 게르를 방문할 것이다. 이러한 호혜적 연대성에 기초한 유목적 삶은 황량한 초원을 방황하는 외로움의 염세적 과정이 아니라 세계를 집으로 확장하는 만남의 사건이다.
(2) 사적 영역에서의 실천: 자발적 가난의 종교성
밀튼(Kay Milton)은 환경 존중의 '이념'이 반드시 환경을 보호하는 '행동'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개인은 자연의 파괴를 안타까워하면서도 그 책임을 중앙정부 혹은 신적 차원으로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48) 유목민들의 지식이 종교적 기원을 가지고 있었다 해도 개인의 책임성이 수반되지 않았다면 자칫 이념적 차원에 머무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몽골의 자연 환경이 양호한 상태로 보전될 수 있었던 것은 유목민들이 종교적 자연관을 사적 영역에서도 실천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발적 가난이다.
유목민들의 게르를 방문하면 "현재의 우리의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가 소비하는 만큼 죄가 있는 것이다."49)라는 베리(Wendell Berry)의 성찰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생존을 위한 필수적 살림살이 외에는 거의 소유하고 있지 않은 그들의 삶은 인간의 삶에 필수적 소유는 과연 얼마나 될까 반성하게 한다. 전통적 주거 양식인 게르는 한 시간이면 세우고 해체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한 구조이고, 식량은 가축의 유제품으로 대부분 충당하며, 연료도 동물의 배설물을 건조하여 사용한다. 이러한 삶의 단순성과 소유의 최소화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삶에는 자연의 희생을 대가로 풍요를 누리는 파괴성은 자리잡기 어렵다.
이런 자발적 가난 역시 유목민 전통의 종교적 맥락을 포함한다. 몽골인들이 흔히 즐기는 일종의 삼행시 중 하나는 그 성격을 잘 보여준다.
지식은 지고의 보물이다.
자녀는 최고의 보물이다.
물질적인 것은 가장 낮은 보물이다.50)
유목민들이 물질적인 부와 자녀보다도 지고의 것으로 여겼던 지식은 혹독한 자연환경에서 생존하는 기술적 지식이 아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유목민들의 지식은 신에 대한 지식이며, 자연의 신성에 대한 종교적 감각이다. 그런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물질적 결핍을 비참으로 괴로워하지 않는 것이다.
소비사회에 익숙해진 외부인들은 유목민들의 가난을 '인간 이하의 삶'이라고 여기지만 사실 '가난'은 매우 상대적인 개념이다. 생존을 위협하는 절대적 빈곤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부정적 현상이지만 현재 주장되는 가난 개념은 한 지역의 문화 내적 정의라기보다는 국제적 금융자본의 평가 기준에 의한 외적 정의의 소산이다.51)
『오래된 미래』의 저자 노르베리-호지(Helena Norberg-Hodge)가 1975년에 처음으로 라다크를 방문했을 때에는 가난이라는 개념을 접할 수 없었다. 그녀가 헤미아 슈크파찬 마을을 방문해 노르부라는 청년에게 제일 가난한 집을 물었을 때 그는 "우리 마을에는 가난한 집이 없다" 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9년 후 다시 그곳을 방문한 그녀는 바로 그 청년이 관광객에게 "정말 우리 라다크를 도와주시면 좋겠어요. 우리는 너무나 가난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엿들었다.52) 점차 소비주의가 유입되고 '부유한' 방문자들과 접촉하면서 삶의 격차를 자각하게 되자 비로소 자신들의 삶을 비참한 가난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이는 가난이 그 문화 안에서가 아니라 외적 비교의 경험에 의해 인식된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이다.
두 차례의 현지조사에서 초원의 유목민들로부터는 가난에 대한 절망을 들어본 경험이 없다. 가난을 이야기한 몽골인은 수도인 울란바타르에서 미국인이 운영하는 회사에 다니는 간바트와, 외국에서 지원하는 환경단체에서 일하는 갈바트라크 뿐이었다. 간바트는 경제적 전망이 어두워 몽골인들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라고 걱정했고, 갈바트라크는 유목을 농경으로 대체하겠다는 정부의 정책에 회의하면서도 "초원의 유목민들은 전기도 없이 인간 이하의 삶을 살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53) 그러나 정작 초원에서 만난 유목민들은 적은 소유와 고단한 노동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가난을 비참해하기보다는 밝고 활기찬 삶을 누리고 있었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생존을 영위할 수 있는 가축과 잘 곳이 있고, 신과 이방인을 대접할 먹을거리가 있는 이들의 삶에는 비록 고단함이 배어 있었을지라도 가난의 비참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작스(Wolfgang Sachs)는 전통사회의 사람들이 궁핍에 시달리지 않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검소함은 소유의 광기로부터 자유로운 문화의 특성이다. 이러한 문화에서는 오직 작은 부분만을 시장에 의존할 뿐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대부분 생존유지 수준의 생산방식에 의해 충당된다. 우리의 눈에 이러한 문화 속의 사람들은 매우 빈약한 소유를 누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돈은 오직 주변적인 역할만을 하고 있는데다가, 소유라는 것은 오두막 한 채, 몇 개의 솥과 옷가지가 고작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통 누구에게나 들판과 강과 숲에 접근할 권리가 허용되고 있고, 다른 곳에서라면 현금을 지불해야만 얻을 수 있는 온갖 서비스가 친족관계나 공동체의 의무에 의해 보장되어 있다. 이른바 '저소득층'에 속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굶주리지 않는다. 54)
초원의 유목민들이 우리의 가진 것보다 덜 갖고 있다고 해서 그들의 삶이 비참한 것은 아니다. 유목민들이 가축 이외에는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은 자연의 모든 것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토지와 물과 숲을 공유하는 유목문화에서 근대적 가난의 비참은 자각되기 어려웠다. 만약 초원의 유목민들이 토지의 사적 소유를 주장했다면 다수 유목민들의 생존은 심각하게 위협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문화적으로 합의된 토지의 공유 개념에서 거주는 일시적 점유일 뿐 영속적 권리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없었다. 이러한 공유 개념은 현대에도, 심지어 울란바타르 같은 중심도시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2001년 여름 간바트와 함께 울란바타르 서부 지역을 방문했을 때 그곳 언덕에는 시골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의 게르와 판자집들이 즐비했다. 간바트는 그 집들은 모두 허가를 받지 않은 것이지만, 일단 집을 지으면 시에서 주소를 발급해준다고 설명했다. 유목민들에게는 토지의 소유 개념이 낯설기 때문에 정부도 아직까지는 묵인하고 있는 것이다.
유목민들의 가난을 비참으로 변형시키고 있는 것은 새로운 소비주의적 욕망이다. 많은 몽골인들이 풍요를 좇아 도시로 이주하고 있지만 그들 중에서 기대했던 풍요를 누리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오히려 도시의 삶은 초원에서는 자각하기 어려웠던 근대적 가난을 겪게 만들뿐이다. 간바트는 사회주의 시대를 "모두가 평등하게 가난했던 시대"라고 평가했지만, 지금의 자본주의가 20 대 80의 빈부차를 가져오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필자의 지적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자본주의는 '20'의 몽골인들에게 이전보다는 나은 삶의 질을 갖게 하겠지만 그 대가로 '80'의 가난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한 상황은 이미 몽골 사회에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몽골의 관리 바얀투멘(Bayant men)이 "과거에는 관리, 지식인, 목축민, 그리고 노동자의 네 계급이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사라졌다. 이제는 오직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만이 존재한다."55) 라고 비관하는 것은 그런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경제 성장을 중심으로 한 산업문명이 생태계의 파국을 초래하고 있다는 내·외적 비판에 직면한 정책 입안자들은 발전의 지체가 환경위기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는 역설을 통해 문제에 접근한다. 즉 가난이 환경 피해를 가중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선진 산업국의 과제는 저개발국들이 일정 수준의 경제적 안정 궤도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와야 하며, 그것을 위해 발전 전략을 포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경제적 발전이 인간의 풍요를 보장한다는 증거는 없다. 해리슨(David Harrison)은 "리우 이후 5년"이라는 글에서 빈곤과 싸우는 것이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기본조건이라고 언명했던 리우 회의 이후 오히려 세계의 빈곤은 더 심화되었다는 근거로 "1997년의 《인류발달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의 가난한 20%의 인구가 전 세계 소득의 1.1%를 차지하는데, 이는 1960년의 2.3%보다 오히려 악화되었다" 는 것을 지적한다.56)
인간이 스스로 풍요롭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삶의 질은 수치로 정해질 수 없다. 풍요의 적절한 계기마다 다시 새로이 궁핍을 자각하게 함으로써 소비를 확대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본질이다.57) 그러므로 소비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풍요를 누리기는 어렵다.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몽골인들이 기대하는 풍요는 유목민들의 상황을 개선하기보다는 더 심한 빈곤으로 몰아넣으면서 전통적 삶과 문화를 위협할 가능성이 높다.
2. 전통적 유목문화의 약화와 환경 변화
몽골이 시장경제에 편입했다는 것은 전지구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자본주의적 소비주의의 영향을 받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제 몽골인들은 삶의 질을 내적 전통이 아닌 'Star TV'로 상징되는 국제적 비교 경험 속에서 바라보게 된다. 울란바타르 시내에서는 비싼 요금에도 불구하고 휴대용 이동전화를 사용하는 몽골인들을 흔히 볼 수 있고, 도시의 젊은이들이 입고 있는 의상은 도쿄나 서울의 젊은이들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이런 현상은 외부와의 문화적 접촉이 활발하고 부 축적의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은 도시적 현상이지만, 자본주의적 소비 패턴으로의 변화는 시골의 유목민들에게서도 똑같이 나타나고 있다.58) 이제 유목민들의 생활에 있어서 중심 공간은 초원에서 시장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수 천년 동안 순응해온 초원의 생명순환체계 대신 끝없이 소비를 강제하는 시장경제사회에 적응해야 하므로 돈은 더 이상 주변적 가치가 아니라 삶의 중심이 되고 있다.
이런 변화는 전통적 유목구조와 종교문화를 심각히 위협하는 한편, 그것이 지탱해온 환경 상태도 악화시키고 있다. 물론 이러한 변화가 오직 자본주의 때문만은 아니다. 생산력 중심주의에 입각했던 사회주의 시대 역시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전통과 환경을 위태롭게 한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었다. 유목을 '원시적 생존 기술(Primitive Survival Technique)'로 폄하하였던 사회주의 지도자들은 이동하지 않으면서도 생산성을 증대시킬 수 있는 기술 개량을 추진함으로써 결국 초원의 훼손을 초래했다. 그러나 유목의 이동성 상실과 집중화 현상을 보다 강화하고 있는 직접적 원인은 시장경제라는 지적이 학자들에 의해 폭넓게 지지되고 있다.59) 즉 소비의 확대를 초래하는 자본주의의 부정적 영향이 근대화와 맞물린 환경악화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1) 유목구조의 자본주의적 변화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
현재 몽골에서 나타나고 있는 사회 경제적 변화에서 특징적인 것은 시장경제 이후 오히려 목축이 늘어났다는 점이다.60) 그것은 사회주의 시절 다른 생산과정에 합류했던 사람들이 '재유목화'에 참여한 결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골의 환경 상태가 더욱 악화되고 있는 것은 소위 재유목화 현상이 전통적 유목의 이동성, 가축 구조와 종교문화적 함의를 상당 부분 탈각한 채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경제 이후 재활성화되고 있는 목축의 특징은 전통적 이동성의 상실이다. 이는 목축을 위한 공간 선정 기준이 "추위와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 그곳에 자라고 있는 풀의 종류와 질, 지속적 공급성, 물, 질병의 원천이 있는가 여부"61)에서 시장이 얼마나 더 가까운가 하는 것으로 바뀌고 있는 것과 관련된다. 몽골의 열악한 교통조건62)에서 판매할 목축 생산품의 신선도를 유지하려면 불가피하게 도시와 큰 마을 주변으로 집중할 수밖에 없다.63) 이러한 집중화는 도시 주변의 초원이 수용할 수 있는 가축 수를 초과하게 함으로써 초원을 황폐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집중화를 초래하는 또 다른 원인은 수자원의 부족이다. 동부초원생명다양성 프로젝트의 간부인 갈바트라크는 사회주의 행정조직이 붕괴하면서 과거에 개발한 지하수를 관리하지 않게 되어 80%의 우물이 사용불능 상태가 되었다고 설명했다. 그 결과 남아있는 20%의 우물 주변으로 유목민들이 집중하여 그 주변의 초원마저 황폐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수자원의 오염도 나타나고 있다. 굴든(C. Goulden)을 비롯한 학자들은 가축수의 증대가 목초지의 풀을 고갈시키고, 그래서 강둑이 무너져 토사와 부영양물질이 물에 들어가고 있다고 보고한다. 청정하기로 소문난 헙스걸 호수의 지류마저도 과도한 목축 때문에 오염되고 있다. 과거에는 호수 주변에서는 과도한 목축을 금지했고, 유목민들 스스로도 해마다 다른 목초지에서 가축들이 풀을 뜯어먹게 할 뿐만 아니라 물탱크를 만들어 동물들이 강 옆에 가까이 가지 않아도 되게 했지만, 이제는 그런 전통이 사라져 환경악화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64)
한편 목축 집중화를 더욱 강제하는 원인은 경제적 빈부차이다. 당연히 초원이 황폐화될 것을 알면서도 특정 초지에 집중하는 이들은 대부분 트럭 같은 이동수단을 갖지 못한 가난한 유목민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집중은 빈곤을 더 악화시킬 뿐이다. 갈바트라크는 최근 겨울에 가축이 많이 죽은 이유는 추위 때문이 아니라 먹을 풀이 고갈되어 동물들이 겨울을 버틸 영양분을 비축하지 못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건초를 따로 준비하기 어려운 조건의 초원에 사는 동물들은 여름 내내 축적한 영양분으로 겨울의 추위와 굶주림을 버텨야 한다. 그러나 풀이 고갈된 초원에서 굶주려 야윈 동물들은 겨울의 추위를 이기지 못한 채 죽고 마는 것이다. 집중화가 빈곤을 낳고 빈곤이 다시 집중화를 초래하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현재 진행중인 목축의 또 하나의 특징은 전통적 가축 구조의 변화이다. 그 대표적 사례는 염소 개체수의 비약적 증가이다. 유목민들은 오랜 경험을 통해 몽골의 자연조건에 가장 적합한 소, 말, 염소, 양, 낙타의 '5대 가축' 중에서 전통적으로 양을 가장 많이 길렀고 염소를 가장 적게 길렀다. 염소의 수가 적었던 이유는 풀의 뿌리까지 먹어치우는 염소의 먹이 습관 때문이었다. 식물의 재생력이 낮은 초원에서 한 번 파괴된 초지는 쉽게 복원되지 않으므로 염소의 비율을 엄격히 억제해왔던 것이다. 이러한 부정적 습성에도 불구하고 염소를 일정 비율로 계속 길러온 까닭은 염소들이 좋은 풀을 찾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쟌도르지(Jandorj)65)는 이처럼 '할 수 없이' 기르는 것이어서 염소는 문화적으로도 경원시 되어 왔다고 설명했다.66) 그러나 근대화 이후 염소 털로 만든 캐시미어의 경제적 가치가 높아지면서 염소의 가치는 극적으로 변했다. 사회주의 시기부터 늘어나기 시작한 염소의 숫자는 시장경제 이후 더욱 증가하여 현재 몽골인들이 기르고 있는 5대 가축 중 염소의 수는 전체 가축의 33.7%로, 양 다음으로 가장 많은 가축이 되었다.67) 이처럼 비약적으로 늘어난 염소들은 초원의 풀을 고갈시키는 동시에 다른 가축에도 직접적 피해를 끼치고 있다. 간바트르는 그 피해 사례를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습성이 있는 염소들이 양떼를 이끌고 산으로 가기 때문에, 운동량이 많아진 양들의 지방질이 감소해 추운 겨울을 견디지 못하고 죽게 된다.
유목의 오랜 경험을 통해 형성된 합리적 가축구조가 시장경제로 인해 해체되면서 환경과 경제를 모두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목축구조의 변화와 기타 요인68)의 결합으로 인해 몽골의 환경은 나날이 악화되고 있다. 갈바트라크는 현재 총 유목 목초지의 70%에서 풀이 없어지고 있고, 가축들이 먹을 수 있는 풀은 5배 감소했으며 풀의 종류도 6가지가 멸종했다고 설명했다. 환경악화와 결부되어 나타나는 가축 피해를 유목 경제의 위기로 진단한 몽골정부는 21세기 초반까지 인구의 대다수를 도시로 이주시키는 한편 불안정한 유목경제를 농경으로 대체한다는 정책을 2001년 봄에 발표했다. 현지에서 만난 몽골인들은 관료들의 부패, 유목 이외의 대안적 직업군의 미형성 등을 이유로 정부 발표를 불신했지만 아무튼 정부는 유목의 집중화를 해소할 근본적 대책 마련보다는 유목의 포기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학자들도 몽골 정부는 목축민을 보호하려 하기보다는 국제적 무역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69) 결국 전통적 유목문화의 복원을 통한 환경 악화의 제어는 요원해지고 있는 것이다.
2) 자본주의적 경쟁으로 인한 문화의 위기
아직까지도 현상적으로는 몽골 정부의 환경정책은 모범적으로 보인다. 몽골 정부는 심각한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1995년 4월에〈생명다양성 보존 행동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그것은 국립공원을 현재의 국토 면적 11%에서 18%로 단기간에 확대하며, 장기적으로는 국립공원 혹은 보호구역을 전 국토 면적의 30%까지 확대한다는 정책이었다.70) 지난 해에 이어 다시 만난 몽골 자연보호부의 관리인 쟌자도르지(Janjadorj)는 이러한 정부의 환경정책은 지속가능한 발전의 입장을 충실히 따른 것으로, 투자유치와 구조변화의 노력에 의해 침해받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런 선언에도 불구하고 몽골의 환경 상태는 나아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초원이 황폐화되고 생물다양성이 위협받고 있다는 보고가 늘어나고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현재 몽골의 환경 위기가 물리적 자연만이 아니라 전통적 인간관계마저도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시장경제에 조응하는 유목구조의 변화가 유목민들의 삶을 자본주의적 경쟁관계로 바꾸고 있기 때문이다.71) 이러한 경쟁은 초원의 유목민들 사이에 사회적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유목민 여성 스레트르는 자기 가족이 직접적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니지만 가축을 많이 가진 '힘 센' 유목민들이 좋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고 진술했다. 협력과 공존의 전통적인 초원 문화가 약화되고 물리적 힘이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대해 에르데네바타르는 특정한 목초지에 가축수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것은 다른 목초지의 황폐화 혹은 사료나 물 공급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늘어나고 있는 불법 침해와 가축 절도의 결과 때문"이라고 진단하면서, 이런 현상은 "행정적 개입을 요청하는 심각한 사회,경제적,법적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72) 松原正毅도 "하나의 유목지에 복수의 유목집단이 집중 될 때 아직까지 그것을 조정할 사회조직이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진단한다.73)
이처럼 초원의 공존 윤리를 약화시키고 전통적 자연관을 위협하는 자본주의적 가치는 환경악화를 초래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험프리는 내 아시아 지역에 대한 연구의 결론에서 원주민의 전통문화가 위협받는 지역은 또한 생태학적 문제가 가장 심각한 지역이라고 주장한다. 그녀는 이 지역들에서 전통문화를 재형성하려는 의식적 운동과 과거를 부정하고 전통적 의례를 의심하는 태도 사이의 긴장이 나타나고 있고, 이 점에서 내 아시아 지역 전통문화의 미래는 불확실하다고 평가한다.74) 이는 문화의 위기가 다시 환경의 위기를 강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전통적 문화의 위협은 그 문화가 지탱해온 자연-인간의 호혜적 연대성을 약화시킨다.
이처럼 몽골에서는 소비주의적 가치와 전통적 종교문화의 가치가 갈등을 일으키고 있지만 아직 자본주의의 충격으로 인한 부정적 현상을 반성할 충분한 계기를 갖고 있지 못한 것 같다. 이런 현실에서 소비주의의 욕망을 제어할 종교적, 문화적 비판의식을 성숙시키지 못한다면 그만큼 삶의 가능성 또한 줄어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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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Wade Davis, 앞의 글.
2) 실제로 유목은 오스트레일리아와 아메리카를 제외하고는 세계 전 지역에 퍼졌던 현상이며 비록 2천만의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현재에도 유목민들이 대륙의 2/3를 차지하며 50여 개국 이상에서 유목을 하고 있다. A.M. Khazanov,『유목사회의 구조』, 김호동 역(서울: 지식산업사, 1990), 35쪽. B. Enkhutuvshin, M. Tumurjav, G. Chuluunbatar, "Nomads : Civilization, Culture and Development", International Symposium on Nomads and use of Pastures Today(Ulaanbaatar: International Institute for The Study of Nomadic Civilization, 2001), p. 5. 세계적으로 다양하게 존재하는 유목의 유형은 베드윈 혹은 낙타 유목민, 아프리카 유목민, 유럽과 아시아 유목민, 티벳 평원 유목민, 순록유목민, 해양유목민의 여섯 유형으로 구분된다.
3) Kh. Kavkh, "Combining Urbanization and Nomadic Economic Development", Nomads and use of Pastures Today, p. 105.
4) Enkhtuvshin, Tumurjav, Chuluunbaatar, op. cit., p. 5
5) H. Sampildendev, "Mongolian Custom of Worshipping Nature", Nomads and use of Pastures today, p. 119.
6) Eric Hirsh, "Landscape : Between Place and Space", The Anthropology of Landscape : Perspectives on Place and Space, Eric Hirsh and Michael O'Hanlon(ed.)(Oxford: Clarendon Press, 1995), pp. 1-30. 참조.
7) 울란바타르 동부지역에 있는 이곳은 공식적으로는 'Manba Datsan Clinic and Training Center for Traditional Mongolian Medicine'이라고 부르지만, 사원 기능을 겸하고 있다. 환자들은 먼저 라마승을 만나 불경을 듣고 점을 본 후에 의사들의 치료를 받는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스레트르를 포함해서 모두 다섯명이 입원중이었다.
8) 자프항 아이막에서 어려서부터 유목을 해온 그녀는 관절과 가슴이 아파 입원중이었다. 그녀가 불교 신앙을 갖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시부모는 불교 신앙을 이전부터 간직하고 있었다고 한다. 지난 해 겨울 한파로 가축 피해를 입었고, 최근 초원 상태가 계속 나빠지고 있다고 걱정했다.
9) 기후,생태 조건에 대해서는 주로 다음의 문헌들을 참조했다. Z. Batjargal, "Climate and Pastoralism", Nomads and use of Pastures Today, p. 159. B. Telenged, "Livestock Breeding in Mongolia Past and Present : The Advantages and Disadvantages of Traditional and Modern Animal Breeding Practices", Culture and Environment in Inner Asia, Caroline Humphrey and David Sneath(ed.)(Cambridge: The White Horse Press, 1996), p. 162. Bair O. Gomboev, "The Structure and Process of Land-use", Culture and Environmnet in Inner Asia, pp. 21-22.
10) Enkhutuvshin, Tumurjav, Chuluunbatar, op. cit., p. 13.
11) Telenged, op. cit., pp. 161-162.
12) Khazanov, 앞의 책, 51쪽.
13) 이러한 광역적 이동의 성격 때문에 2차 세계대전 이전의 몽골 행정단위인 호슌(Khoshun)은 남·북으로 길게 뻗친 타원형이었다. 앞의 책, 86-88쪽. 그리고 토지 이용 방식도 계절에 따라 거의 균등했다. 곰보예프는 몽골 북서부에 위치한 웁스(Uvs) 아이막 홉드(Huvd) 솜의 경우 토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목초지의 활용이 계절에 따라 남동쪽에서 북서쪽으로 4등분 되어있음을 보여준다. Gomboev, op. cit., Map.4. Pastoral land-use, Hovd sum, p. 39.
14) 이 장에서 중요한 자료로 사용하는 Culture and Environment in Inner Asia는 러시아, 중국, 몽골을 중심으로 한 내 아시아의 환경과 문화에 대한 종합적 연구 결과를 캐롤린 험프리와 데이빗 스니스가 편집한 인류학적 보고서이다. 이 연구의 초점은 환경에 대한 연구를 토착문화와 연결짓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환경의 위기와 문화의 위기를 동일시하여 토착 언어, 문화의 약화가 환경 파괴와 병행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험프리와 스니스의 The End of Nomadism?도 내아시아 지역의 경제와 환경, 종교, 문화를 폭넓게 비교 연구하고 있다.
15) 러시아 지역에서 정주화가 강하게 진전된 원인 중 하나는 가축종의 개량과 관련된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인공으로 개량한 가축들은 먼 거리를 이동하는데 부적합했기 때문에 겨울에 따뜻한 우리가 있어야 했고, 난방을 위한 연료, 목축민들의 고정적 처소를 위한 목재가 필요했던 것이다. (Humphrey and Sneath, The End of Nomadism?, pp. 10-12.) 곰보예프는 러시아의 노바야 자리야 마을도 사회주의 이전에는 1년에 200킬로미터 이상 이동하는 유목을 했지만, 현재에는 정주하여 초지의 황폐화가 극심하다고 보고한다. 정주한 목축민들은 가축을 먹일 풀의 부족으로 인해 건초를 수입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 지역의 가축 사육은 외부의 자원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이는 지역의 자연적 조건과 충돌하는 것이다. 반면 몽골은 98.2%가 자연 초지이고 현재도 이동 목축이 주요 요소이다. 물론 초지가 감소추세이기는 하지만 급격하지는 않다. 지금도 몽골의 가축 사육은 자연 현상에 높게 의존한다. Gomboev, op. cit., pp. 36-37.
16) 몽골에서의 집단화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 이유는 국가 계획에 맞추기 위해 질보다는 양을 추구하게 되었던 점, 그리고 집단화가 가져온 개인적 책임성의 결여 때문이었다. Telenged, op. cit., p. 176.
17) 험프리는 도시화 또한 환경파괴의 직접적 원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투바의 솔추르(Solchur)는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상대적으로 가장 도시화된 곳이지만 정주화를 경험하지 않았고, 또한 종교적 방식의 자연 보호를 실천하고 있어 환경 악화가 심하지 않았다. (Humphrey and Sneath, op. cit., p. 217.) 반면 중국의 하르간트 하르간트(Hargant), 칭겔 불락(Chinggel Bulag)의 경우 도시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가축 수도 많지 않았지만 이동성 쇠퇴에 따라 목초지의 황폐화가 나타났다. (ibid., p. 130.) 이런 사례는 더 많은 소유와 소비를 초래하는 정주 양식보다는 유목문화의 이동성이 내아시아 환경에 적합한 발전이라는 관점을 지지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험프리는 사회주의 시기 러시아와 중국의 사회학자들이 유목은 후진적이고 정주는 발전적이라고 주장했던 것은 이데올로기적 담론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ibid., p. 3.
18) ibid., p. 195.
19) Humphrey, Culture and Environment in Inner Asia, p. 2.
20) 일례로 투바의 호쉬 톨고이와 중국 신장의 소추르 지역은 도시화가 진전되고 인구 밀도도 높음에도 환경 악화가 심하지 않은 이유는 공동체의 모든 영역에서 식물과 야생동물을 보호하는 노력이 종교적 믿음과 의례에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Humphrey, The End of Nomadism? p. 214.) 또한 험프리는 몽골에서 양호한 환경이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연을 총체론적인 것으로 대하고 존중하는 종교적 가치, 특히 샤머니즘과 결합된 애니미즘적 신앙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Humphrey and Sneath, Culture and Environment in Inner Asia, pp. 7-8.
21) 삼필덴뎁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산다는 것은 재해를 예견하여 동물을 구하는 지식과 생활 풍습의 심층적 감각을 포함하며, 자연의 선물에 의존해서 살고 있는 유목민들이 사냥과 방목, 이주의 시기를 정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지식이 형성한 엄격한 규칙에 입각한다고 주장한다. (Sampildendev, op. cit., p. 119.) 현대에 재유목화한 유목민들이 자연재해로 가축을 잃고 심각한 빈곤에 빠지는 이유도 식물과 동물에 대한 전통적 유목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Dairiijav Dagvadorj, "Problems of Improving Persistence of Nomadic Life in Forthcoming Century", Nomads and use of Pastures Today, p. 162.
22) 학자들은 환경을 지배하는 기술 문명의 기원이 된 정주 사회와 달리 대지를 숭배하며 자연 생태계와 조화 속에 사는 것을 유목문화의 핵심이라고 평가한다. (Enkhutuvshin, Tumurjav, Chuluunbaatar, op. cit., p. 15.) 투데브도 정착민들이 대기를 오염시키고 토양과 땅을 침식하는 반면 유목민들은 자연의 맑은 물과 깨끗한 공기를 위해 자연을 숭배한다고 주장한다. (L. Tudev, "Migration and Settlement", Nomads and use of Pastures Today, p. 130.) 물론 정주 사회라 하더라도 곡물의 생장과 결부된 생태학적 순환에 기초한 전통적 농경 사회는 유목 사회의 자연 인식과 같은 맥락의 지식을 공유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정주 사회에서 전개된 근대화, 산업화는 농경 지역의 자족적 순환체계를 도시에 종속시켰다. 결국 농경 지역은 도시의 공업화를 지원하는 곡창이 되었고 농경민의 생존 또한 도시와의 관계성에 종속되어 독립성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농업 생산 계획과 과정을 시장이 조절하는 산업사회의 농경은 생태학적 순환보다는 교환가치를 중심으로 한다. 따라서 사업사회의 농경은 농약, 비료, 유전자 조작 등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생산증대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환경악화에 일조하는 것이다..
23) 텡그리는 하늘의 신격화한 것으로, 최고신인 '푸르고 영원한 하늘(K ke M nke Tngri)'을 정점으로 99가지의 하위 텡그리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 하위 텡그리들은 자연현상, 지경과 결부되어 각 지역에서 섬기는 텡그리들을 합하면 99가지보다 많다. Heissig, op. cit., pp. 47-59.
24) 박원길, 앞의 책, 320쪽. 이러한 인식은 현대에도 강하게 남아있다. 2000년 우리가 나린텔 솜을 떠난 후 오토바이를 타고 초원을 달리던 한 몽골인이 벼락을 맞은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자 지역의 유목민들은 한동안 그 사건을 둘러싸고, 하늘의 벌을 받게 된 그의 죄에 대해, 그리고 벼락을 맞았으면서도 살아남은 이유에 대한 다양한 종교적 해석을 하기 시작했다. 이는 기상학적 이해의 과학적 지식과 종교적 배경의 전통적 지식이 현대에도 병존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현상이다.
25) S. Dulam, "Humans, the Sky and Earth as symbolic spheres in Mongolia spiritual culture", 5th Conference of ISSR(Ulaan Baatar: 1999), p. 97.
26) Ts. Balkhaajav, "Contribution of Mongolian Herdsmen to Nomadic Civilization", Nomads and use of Pastures Today, pp. 125-126. 일례로 몽골어에는 유목생활과 관련하여 말의 털 색깔에 관한 방언이 300가지 이상이고, 말의 움직임에 관한 용어만 30가지 이상이며, 동물의 성격에 대한 것이 약 100가지, 동물의 기관 명은 약 400가지가 넘는다. D. 마이달·N. 츄르템,『몽고문화사』, 김구산 역(서울: 동문선, 1991), 139-140쪽.
27) Heissig, op. cit., p. 96.
28) 비테브스키는 이런 의례의 성격은 샤머니즘 특유의 '생명력의 제한성 관념'을 배경으로 한다고 주장한다. 동물의 영혼이 다시 자신들의 가축으로 돌아올 수도 있고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는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Vitebsky, The Shaman, p. 106.
29) 2000년 7월 20일 조사.
30) TH. Sodnomdargia, "Some Issues on Mongolian Way of Ecological Thinking", Nomads and use of Pastures Today, pp. 50-52.
31) Samphildendev, op. cit., pp. 120-121.
32) 세계환경발전위원회, 앞의 책, 29쪽.
33) Robin Grove-White, op. cit., p. 22.
34) James Lovelock, "과학의 녹색화", 『녹색평론』(서울: 녹색평론사, 1994년 3,4월호), 88쪽.
35) 러브록은 가이아 연구와 관련되어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만일 내가 대학에 있었더라면 나는 가이아에 관해 연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아무런 연구지원금이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지나치게 공상적이라고 간주되었을 것이다." James Lovelock, "가이아를 위하여", 『녹색평론선집』1, 김종철 편역(서울: 녹색평론사, 1993), 149쪽.
36) Humphrey, The The End of Nomadism?, p. 127.
37) Juha Pentikainen, "The values of nature in the mind of nothern man", Shamanism and Culture(Helsinki: Etnika Co., 1997), p. 75.
38) T. Mandala, "Religion in Modern Mongolia : has freedom brought stronger religious beliefs?", Online Megazine Ger, issues2, 5. 12. 1999, http://www.un-mongolia.mn/ger-mag/index.html
39) Rashid al-din, Sbornik leptopisei(集史), Vol. 1, bk. 2, Moscow-Leningrad, Izdatel'stvo Akademii Nauk SSSR, p.29., A.M. Khazanov, 김호동 역, 『유목사회의 구조』, 지식산업사 : 서울, 1990, 202쪽. 재인용.
40) T. Namjil, "Nomads-Children-Pature", IISNC(2000), 117∼118쪽.
41) 현대 생태여성주의(Eco-Feminism)의 기본 입장은 "인간에 대한 지배와 자연에 대한 지배는 문화적 이데올로기와 사회적 구조 양자에서 상호 관련되어 있다" 는 것이다. Rosemary Radford Ruether, Gaia and God : an ecofeminist theology of earth healing(Sanfransisco: Haper, 1992), p. 2.
42) Balkhaajav, op. cit., p. 126.
43) ibid., p. 161. 호트 아일의 영향력이 행정 조직에 비견할 정도였다는 것은 국가권력의 규제력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는 12,13세기의 통일국가 형성이 초원의 공존을 제도화한 측면도 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통일성이 약한 고대 씨족들을 징기스 한이 결속할 수 있었던 배경은 이웃과의 상업적 갈등과 함께 생태학적 위기의 결과였다는 모리스 로사비의 분석에서 잘 나타난다. Morris Rossabi, "Mongolia in the 1990s : from Commissars to Capitalist?", http://www.eurasianet.org/resources/mongolia/linls/rossabi.html 이러한 국가의 형성과 법,제도의 실천이 초원의 공존을 규제한 측면이 있지만, 정치,군사적 동원을 제외하고는 초원에 산개해 살았던 유목민들에게 국가의 행정력이 일상적으로 영향을 미치기는 어려웠다. 그러므로 호트 아일과 같은 자생적 사회조직의 역할이 컸던 것이다.
44) B. Erdenebaatar, "Pastoral Movement Patterns", Culture and Environment in Inner Asia, pp. 93-94.
45) Caroline Humphrey with Urgunge Onon, Shamans and Elders : Experience, Knowledge, and Power among the Daur Mongols(Oxford: Clarendon Press, 1996), p. 69. n. 46.
46) 프라이머베시는 "지성은 개인적 인간 존재에 속하고 감정은 가족, 부족, 종의 집단에 속한다. 감정은 지성보다 긴 역사와 근원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Anne Primavesi, "The Recovery of Wisdom : Gaia Theory and Environmnetal Policy", Spirit of the Environment, p. 82.) 그러므로 공존의 윤리가 초원에서 지속적으로 실천되었던 배경으로 공동체의 정서적 차원 역시 충분히 고려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47) D. 마이달·N. 츄르템, 앞의 책, p.158.
48) Kay Milton, "Nature and the Environment in Indigenous and Traditional Cultures", Spirit of the Environment, David E. Cooper and Joe A. Palmer(ed.)(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1998), pp. 87-88.
49) Wendell Berry, "나는 왜 컴퓨터를 안 살 것인가?", 『녹색평론 선집 1』169쪽.
50) http://www.mongoliatoday.com/issue/5/triads.html
51) 라흐네마(Majid Rahnema)는 가난이라는 담론은 하나의 신화, 특정한 문명의 인위적 발명물이라고 지적한다. 즉 세계은행이 1인당 평균 소득의 기준치 이하의 나라를 저개발국이라고 정의하면 과거에는 가난하다고 여기지 않았던 그 나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가난을 자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Majid Rahnema, "대안으로서의 가난", 『녹색평론』 20호(서울: 녹색평론사, 1995년 1,2월호), 128쪽.
52) Helena Norberg-Hodge, "위협받는 토착문화 - 라다크의 개발과 반개발", 『녹색평론선집』1, 225-226쪽.
53) 갈바트라크의 주장은 주로 전기나 미디어의 서비스로부터 소외되어있는 유목민들의 문화적 낙후성을 의미했다. 한 조사 자료는 몽골 유목민들의 빈곤에 대한 근거로 1997년 말에 목축을 하는 가구의 6.7%만이 전기와 텔레비전 세트를 소유하고 있었고, 40%가 라디오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A. Enkh-Amgalan, "Present Issues of Pastur Use", Nomads and use of Pastures Today, Ip. 27.
54) Wolfgang Sachs, "개발-파멸로 가는 길", 『녹색평론』8호(서울: 녹생평론사, 1993년 3,4월호), 101쪽.
55) Humphrey, The End of Nomadism?, p. 111.
56) David Harrison, "리우 회의 이후 5년", 『녹색평론』37호(서울: 녹색평론사, 1997년 11,12월호), 52쪽.
57) 라흐네마는 풍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이른바 풍요사회들이란 지금 지구의 생명 자체를 가장 위협하고 있는 사회들이며, 그들이 생산해내는 풍요는 동시에 새로운 가난을 창조해내고 있다. 세계 최부국인 미합중국은 그 시민의 3,000만 명이 빈곤선 밑에서 살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Rahnema, 앞의 책, 136쪽.
58) 몽골보다 더 급격한 경제적 변화를 겪고 있는 중국 한다가트의 한 여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10년, 20년전에는 우리는 옷과 신발을 스스로 만들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우리 아이들은 내가 만든 옷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전보다 더 많이 사게 된다." (Humphrey, op. cit., p. 203.) 즉 도시와 시골 모두 과거와는 다른 자본주의적 소비 구조에 합류하고 있는 것이다.
59) 일례로 일본인 학자 萩原守는 소련령 부리야트에서는 농업진단화와 정착화가 추진되었고, 중국령 내몽골에서는 인민공사에 의한 농경, 농업집단화가 초래되어 사막화, 염해(鹽害)를 초래했다고 분석하면서 몽골도 전후 국영농장을 설치하기는 했지만 과도한 농업개발은 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萩原守, "유목세계에서 엿 본 농경풍경",『초원의 대서사시 - 몽골 유목문화』, 일본국립민족학박물관, 이평래 역(용인: 경기도박물관, 1999), 121쪽.
60) 1990년에 몽골인의 74,710 가구가 가축을 길렀던 것에 비해 1997년에는 183,636 가구가 가축을 길렀다. Enkhtuvshin, op. cit., p. 12.
61) G. Erdenejav, "Theoretical Position and Methodological Aspects for the Optimisetion Uses of the Pasural Resources of Ecosystems in Mongolia", Nomads and use of Pastures Today, p. 173.
62) 2000년 여름, 차강 노르 솜을 가기 위해 헙스걸 아이막 므릉(M r n) 공항에 내렸을 때 며칠 전 비가 와서 길이 '없어졌다'고 해서 일정을 바꿔야 했다. 이처럼 몽골 대부분의 지역은 지금도 도로 사정이 매우 열악하다.
63) Humphrey and Sneath, op. cit., pp. 65-67. 물론 시골에도 시장이 형성되었지만, 그곳에서는 항상 같은 사람이 같은 생산물을 사고 팔기 때문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Maria Magdolna Tatar, "The Privatization of Nomad Pasture : The Hungarian and the Norwegian Experience", Nomads and use of Pastures Today, p. 157. 시장이 유목민들의 거주지로 도달하지 않기 때문에 유목민들이 도시로 집중하게 된다고 분석하는 멘드 오여는 이런 현상을 도시에 의한 유목민의 '새로운 착취'라고 주장한다. G. Mend-Ooyo, Mongolian Nomadic Civilization's Model in the 21 Century, Nomads and use of Pastures Today, p. 114.
64) C. Goulden, S. Chuluunkhyag, N. Densmaa, Ch. Javzan, "Nomadic Pasture Use Impacts on Aquatic Ecosystem", Nomads and Use of Pastures Today, pp. 34-35. UNDP의 1997년 투브 아이막의 여러 솜들에 대한 조사 결과에서도 솜의 중심지, 그리고 물이 나오는 지점이 점차 악화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A. Enkh-Amgalan, "Present Issues of Pasture Use", Nomads and Use of Pastures Today, p. 26.
65) 몽골 녹색운동(Green Movement) 회장인 쟌도르지는 정부의 환경정책에 매우 비판적이다. 그는 개발보다는 전통적 종교 문화의 복원을 중시한다. 경제적 문제도 환경교육 형태의 여행 상품 개발 등을 주장한다.
66) 그래서 축제 때 유목민들끼리 선물을 나누는 경우 염소는 품목에도 끼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67) M. Gunsendorj, "The quality of Mongolian open range beef and mutton", Nomads and use of Pasture Today, p. 205.
68) 시장경제로 전환한 이후 심화되고 있는 몽골의 환경 위기는 이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초원 파괴의 또 다른 중요 원인은 광산 개발과 도로 건설이다. 몽골의 주요 수입원중 하나인 금은 대부분 노천 금광 형태에서 얻어진다. 투브 아이막에서도 유목을 한 바 있는 간바트르는 외지인들이 초원을 파헤친 후 소방호스로 물을 뿌려 금을 추출하기 때문에 초원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최근에는 몽골을 중앙아시아와 중국, 러시아를 잇는 무역 요충로로 삼기 위한 대규모 도로공사가 계획중이다. 이에 대한 환경단체들의 반발이 거세지만 경제발전을 위한 사회적 간접자본의 형성이라는 점에서 그것을 막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69) Ralph Van Gelder, D. Shombodon, "Some Mechanism Interfering in Market Chains of the Mongolian Livestock Industries", Nomads and use of Pasture Today, p. 168.
70) Barry Lewis, op. cit.
72) Gomboev, op. cit., p. 53.
73) Erdenebaatar, op. cit., p. 108.
74) 松原正毅, "유목의 메시지", 『초원의 대서사시 - 몽골유목문화』, 일본국립민족학박물관, 이평래 역(용인: 경기도박물관, 1999), 20쪽.
74) Humphrey, op. cit., p. 305.
제 4 장 시장경제 이후 흑샤먼의 자연관 변화
1. 불교적 자연관과 샤머니즘의 관계
2. 샤머니즘적 자연관의 두 유형
1) 자연 안에 거주하는 신: 자연의 성화(聖化) 상징
2) 신 혹은 신령인 자연: 자연의 신화(神化) 상징
3. 시장경제 이후 흑샤먼 전통의 자연관 변화
1) 이주와 환경악화로 인한 전통적 자연관의 변화
2) 환경 보전에 미치는 종교의 영향에 대한 회의와 기대
몽골의 높고 푸른 하늘, 웅장한 산과 깊은 호수, 원환(圓環)을 그리며 끝없이 펼쳐지는 초원은 자연에 대한 종교적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환경에서 수 천년 동안 유목하며 살아온 몽골인들이 자연을 영적 존재들의 세계로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유목민들에게 하늘은 공간적 하늘(sky)이 아니라 최고신이자 만물의 창조자로서의 '푸르고 영원한 하늘(Koke Monke Tngri)'이었고, 땅은 '어머니(Etugen)'였으며, 대지와 숲, 호수와 산은 신의 힘에 의해 살아있는 신령한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인간은 "커다란 탯줄인 하늘"을 아버지로, "거대한 자궁인 대지"를 어머니로 하여 태어난 존재이므로, 인간의 삶은 우주적 생명의 차원을 살아가는 것이다.1) 이러한 믿음은 모든 자연을 살아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샤머니즘의 일반적 특징이다.
그러나 샤머니즘의 자연관은 이상적인 모델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역사적으로 불교와의 관계에 따라 다양한 변화를 겪었고,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이행과정에서도 자연에 대한 사유와 실천을 지속적으로 변화시켜왔기 때문이다. 이 장의 내용은 샤머니즘의 전통적 자연관이 자본주의의 충격에 의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도시에 이주한 흑샤먼들의 사례를 중심으로 분석하는 것이다.
1. 불교적 자연관과 샤머니즘의 관계
몽골인들의 자연관이 샤머니즘적 세계관에 입각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16세기 이후 현재까지 불교가 지배적 종교였으므로 몽골인들은 불교적 언어와 의례를 통해 자연을 인식하고 행동하는 데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험프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내아시아의 문화는 공간과 이동의 자유를 내포하는 이동적 목축과 밀접히 관련되며, 모든 생명 형식에 대해 존중하고 개인적 집단적 영성의 육성과 결합된 불교와 관련된다. 2)
그러나 몽골에 들어온 불교가 이미 티벳에서 샤머니즘적 본(Bon)교와 교섭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몽골 선교 초기의 정치적 갈등을 제외하고는 민간차원에서는 종교적 융합을 이룬 결과 두 종교의 자연관이 대립적인 것은 아니다. 2001년 여름에 만난 라마승 세르릉은 최근에 빈번히 발생하는 자연재해(zud)의 원인 중 하나는 "로스-사브다크의 허락을 받지 않고 나무를 베기 때문에 백발노인(Tsaghan Ebugen)3)이 벌을 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한번은 내 친구 세 명이 시골을 여행하던 중 로스의 허락을 받지 않고 성스러운 나무를 베어 불을 피웠다. 그러자 다음날 한 친구의 가축이 다 죽어버렸고, 다른 한 친구의 아들은 피부병에 걸렸으며, 나머지 한 친구는 암으로 죽었다. 이처럼 화가 난 로스를 달래려면 허락 없이 벤 나무에게 용서를 빌고 불경을 외면서 우유와 종이에 싼 모래를 바쳐야 한다.
이런 해석과 의례는 다른 라마승들도 마찬가지였는데, 그것은 샤먼들의 해석과 대부분 일치하며, 자연과 관련된 의례의 성격도 불경을 읽고 읽지 않고의 차이만 있을 뿐 상당히 유사했다.
물론 몽골인들의 자연관 형성에 있어 불교의 독특한 영향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우선 의례의 차원에서는 몽골인들의 자연 의례 중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어워제를 라마승이 주도하고 있다.
이 어워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다. 바우덴(Charles R. Bawden)은 어워가 명대 이후 불교의 영향으로 생겨났다는 고토(T. Goto)의 설과, 어워 숭배는 자연의 신령에 대한 믿음과 같은 종교의 원시적 단계의 산물이라는 운크릭(W.A. Unkrig)의 설을 소개했고,4) 이에 대해 하이지히는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 땅의 주인과 보호 신령들을 위해 어워가 세워졌다는 자료를 소개함으로써 후자의 설을 지지한다.5) 역사 문헌과 학자들의 의견을 종합하면 어워의 기원은 불교 이전의 애니미즘, 샤머니즘과 결합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불교의 확산 이후 어워 의례가 불교적 변형을 겪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그러한 변형의 핵심은 제물의 변화이다. 바우덴은 18세기의 라마승 메르겐 디얀치(Mergen Diyanci)의 글에 어워 의례시 피의 희생을 금지하는 주장이 담겨 있음을 소개했고,6) 하이지히도 16세기 알탄 칸과 달라이 라마의 결탁 이후 어워 의례에서의 피의 희생을 금지하고 떡이나 유제품을 제물로 삼았다고 지적했다.7) 이는 동물성 단백질을 주 영양원으로 하는 유목문화에서 커다란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 때문에 바우덴은 몽골 종교에서 불교와 샤머니즘의 요소를 구분하는 것은 어렵지만 어워의례의 경우 불교의 일반적 범위에 포함된다고 분석한다.8)
한편 불교적 생명관은 자연에 대한 연민을 몽골인들의 의식에 깊이 스며들게 했다. 간단사에서 만난 가슨츠릉9)은 평소 자기의 부와 건강, 행운보다는 모든 동물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며, 불가피하게 가축을 죽일 때는 '졸(초)'을 밝혀 다음 생에 '사람으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이는 다른 유목민들이 동물을 죽일 때 그 동물이 다시 자신의 가축 무리로 돌아오게 해달라는 기도와는 다른 내용이었다. 일반적 유목민들의 기도가 동물 개체수의 감소에 대한 불안을 상상적으로 극복하려는 경제적 거래를 의례화한 것인데 비해 그의 기도는 의례의 경제 논리를 위반할 만큼 생명에 대한 불교적 자비와 연민을 깊이 드러냈다.10)
가슨츠릉의 종교적 태도는 불교적 생명윤리의 깊이를 보여준다. 패인(Roger Payne)은 고래 사냥에 대한 비판에서 인간이 아무리 고통 없이 고래를 죽이는 방법을 고안해낸다 해도 고래의 생명을 빼앗는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도덕적으로 '덜' 잘못된 행동을 한다는 것이 곧 정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고통없이 죽인다는 도덕적 정당화는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11) 이처럼 철저한 생명존중의 윤리를 불가피하게 육류를 취해야만 하는 유목민들의 삶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가슨츠릉의 신앙이 보여주는 예외성은 생명에 대한 불교적 자비의 진지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한편 불교의 '공덕' 개념도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전향적 태도를 형성하는데 기여하는 측면이 있다. 다쉬 초이린 사원의 주지 담바쟈프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불교는 동물을 죽이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과 같이 악을 피하고 좋은 일을 하도록 교육하는 도덕적 가르침을 준다. 이런 것은 법의 영역이 아니라 종교의 영역에 속한다. 현세에 좋은 일을 하면 다음 생에 더 좋게 태어난다는 불교의 입장을 젊은 사람들도 가지고 있다. 즉 불교에서 말하는 공덕의 세계관은 올바른 행동을 하게 만드는 힘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진술은 공덕의 동기가 사회윤리적 실천을 결과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동물의 살생이나 자연의 훼손을 최소화하는 환경윤리적 차원도 포함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몽골인들이 자연을 오염시키는 것을 자연의 물리적 훼손의 잘못으로 보기보다는 신의 분노를 가져오는 종교적 '죄'의 맥락으로 이해하는 것은 이러한 공덕의 세계관을 통해 강화되었다.
이처럼 어워 의례의 생명존중적 변형, 동물을 비롯한 만물에 대한 연대감과 존중, 공덕의 환경윤리적 맥락의 불교적 세계관은 유목민들의 종교적 자연관을 심화하는데 기여해왔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적 자연관이 몽골인들의 샤머니즘적 자연관을 완전히 대체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현대의 라마승들도 몽골인들의 자연관에 있어서는 샤머니즘이 보다 중심적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담바자프는 2001년 6월에 힝티 아이막의 부르한 칼둔산에서 있었던 어워 의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 산의 세 어워중 제일 정상의 어워는 샤머니즘 식으로 가운데와 아래 어워는 불교식으로 했다. 그 이유는 샤먼이 하늘, 산, 자연에 더 가깝다고 여긴 징기스 한이 가장 높은 곳에서 샤먼이 의례를 하게 한 전통 때문이다.
샤먼이 자연에 더 가깝다는 인식은 일반 유목민들도 마찬가지였다. 간바트르는 독실한 불교신자임에도 로스-사브다크의 화를 진정시키기 위해 울란바타르에 사는 헙스걸 출신 샤먼을 데려다 의례를 했다. 왜 라마승을 부르지 않았는가 물어보니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로스-사브다크를 샤먼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라마승들은 그저 자연을 사랑하라고 말만 하는 반면 샤먼은 신령의 분노를 풀 수 있는 힘이 있다.
이처럼 종교적 차이와 신앙의 유·무에 상관없이 샤머니즘이 자연과 더 밀접하다는 인식은 몽골인들 사이에서 문화적 합의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몽골인들은 현대에도 여전히 샤머니즘적 체계를 통해 자연을 인식하고 행동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2. 샤머니즘적 자연관의 두 유형
대지의 여신은 자연 안에 있으며 자연이다.
She is in nature and she is nature.12)
몽골인들의 자연관을 구성하는 중심적 의미체계는 샤머니즘과 관련된 것이다. 그러나 몽골 샤머니즘의 자연관을 단일한 구조로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몽골 샤머니즘이 불교와의 관계, 생태학적 지경의 편차 등에 따라 흑샤먼, 황샤먼, 백샤먼 전통으로 다양한 변형을 이루며 발전했기 때문이다.13) 필자는 이러한 역사적 변형, 지역적 편차를 고려하면서 몽골 샤머니즘의 전통적 자연관을 두 가지 차원에서 해석한다. 첫째는 라마승, 샤먼들이 일반적으로 공유하는 것으로, 신들이 대지에 '거주'한다는 관점이고, 둘째는 주로 몽골 북부 흑샤먼 전통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자연의 제 요소를 신으로 이해하는 관점이다.
1) 자연 안에 거주하는 신: 자연의 성화(聖化) 상징
전통적으로 몽골인들은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들이 가시적, 물리적 공간에 거주한다고 믿어왔다. 이러한 믿음은 어워, 게르, 엉거트의 거주지 등 유목민들이 접하는 공간을 성화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자연을 신의 거주지로 여기는 첫 번째 상징은 몽골인들이 "지역 신의 거주 장소이자 신들의 모임 장소"14)로 여기는 어워이다. 어워는 산꼭대기, 길가, 초원, 숲, 도심의 언덕 등 있을 만한 모든 곳에서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신성시되는 어워들은 대부분 높은 산정(山頂)에 위치한 것들이다.15) 산정은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이므로 하늘(텡그리)과 대지(에튀겐)가 만나는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종교적 상징성을 갖는다. 몽골인들이 산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대신 '아름다운(qayirqan)', '성스러운(bogda)', '높은(ondur)' 같은 완곡한 형용사로 찬미하는 것은 이러한 믿음과 관련되어 있다.16) 이처럼 신성시되는 산정 어워가 있는 영역 안에서는 동물과, 나무, 풀, 심지어 돌 하나까지 종교적 경외감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믿음은 현대에도 강하게 남아있다. 간바트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고향 자프항(Zavkhan) 아이막의 오트공 텡그리(Otgon tengri)산에서는 사냥과 벌목은 물론 그 산이 있는 방향으로 용변을 볼 수도 없었다. 더 신성시된 부르한 칼둔 산은 사회주의 때에도 벌목과 출입을 금할 정도였다.
이처럼 어워를 신들의 거주지로 여기는 믿음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침해를 제어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세속화된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성산을 함부로 출입할 수 없었다는 것은 몽골인들에게 신들의 집인 어워의 의미가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하지만 이 어워 신앙은 제한적인 측면도 포함하고 있다. 우선 성역의 제도적 구별은 그 이외의 공간에 대해서는 오염의 상대적 계기를 허용할 수도 있다. 이는 어워 의례가 정치체제에 의해 위로부터 강제된 면이 있다는 점과 관련된다. 즉 부르한 칼둔 산 등 중요한 성산의 지정과 어워 설립은 권력의 정당성과 권역 주장을 담은 씨족 샤머니즘의 산물이다. 이에 대해 험프리는 '족장의 지경'은 부계 중심성과 결부되며 대지 안의 힘은 왕과 전사로 인격화되었다고 분석한다.17) 이러한 위계성과 부계 중심성 때문에 어워 의례는 권력의 배타적 담지자인 남성만의 의례로 지속되었다. 여성들은 현재까지도 의례에서 배제될 뿐만 아니라 출입조차 금지 당하는 경우도 많다. 실제로 투브 아이막에서 유목을 하는 알탄체체크(43세)의 두 딸은 고향의 하야르 항 산에서 라마승들과 남성들이 자주 어워 의례를 하지만 여성들은 참여할 수 없다고 진술했다. 이러한 의례의 위계성과 배타성은 금기의 타율성을 초래하므로 자연에 대한 자발적 인식과 행동을 제약할 수도 있는 것이다.
신이 자연 안에 거주한다는 두 번째 상징은 유목민들의 일상적 주거공간인 '게르'18)와 관련된다. 어워와는 달리 성(聖)·속(俗)의 물리적 경계가 없는 게르의 종교적 의미는 일상의 공간을 우주의 중심이자 하나의 소우주로 성화하는 것에서 극대화된다. 게르의 한가운데에 있는 화덕(Gal Golomt)은 '영원한 하늘'의 딸인 골롬토(Golomt Eej)가 사는 공간이며, 연기가 빠져나가는 구멍인 토노(tono)는 천계로 들어가는 입구이고, 화덕을 둘러싼 기둥은 세계수(世界樹)에 해당한다.19) 이러한 공간 성화는 신들이 게르에 함께 산다는 믿음에 기초한다.20) 그래서 각 가정에는 신을 위한 공간을 가장 신성시하는 북향에 마련해 놓고 있다.21) 물론 불교의 영향으로 대부분 마하칼라(Mahakala)22)같은 불교 신격들을 모시고 있지만, 신들이 자신들의 일상적 공간에 공존하고 있다는 믿음은 전통적 샤머니즘의 가내신 신앙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게르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상 생활을 종교적 행위로 이해하게 할 뿐만 아니라, 남성 중심의 어워 의례와는 달리 가내 활동의 주체인 여성들의 의례적 지위를 보장한다. 여성들은 우주의 중심인 게르의 부엌과 조리용품을 더럽히는 것은 영원한 하늘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여겨 늘 깨끗이 하고, 매일 게르 주변을 돌면서 '차강 이데'23)를 동서남북 네 방향의 신들에게 세 번씩 뿌린다.24)
일상적 주거 공간을 신들이 함께 사는 집이자 세계의 중심으로 인식하는 것은 산업화된 사회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세계의 중심 상징과 유사하다. 그러나 그 집이 물리적 공간 위에서 이동한다는 것, 다시 말해 세계의 중심이 움직인다는 것은 유목문화의 이동성을 반영한 독특한 종교적 관념이다. 이런 상징은 성의 영역을 무한히 확장하여 자연의 성화가 고정된 '저곳'에서만이 아니라 늘 움직이는 유목적 공간인 '이곳'에서도 이루어지게 한다. 이러한 종교적 관념의 친환경적 함의는 초원의 재생력이 현저히 낮은 몽골의 기후, 생태조건에서 언젠가 다시 돌아올 '이곳'을 보전하게 만드는 생태학적 합리성을 구현했다는 점이다.
샤머니즘적 자연 인식에서 신이 자연 안에 거주한다는 관점을 가장 강하게 나타내는 세 번째 상징체계는 엉거트(ongghot, 신령)의 생성에 대한 믿음이다. 샤머니즘을 신앙하는 몽골인들은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영혼이 같은 종(種)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 믿음에서 예외가 되는 것은 죽은 샤먼의 영혼이다. 샤먼의 영혼은 죽어서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고 엉거트가 된다.25) 흑샤먼 허럭은 그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샤먼이 죽으면 무덤을 만들고, 7일 후에 숲에 아사르(asar)26)를 만들어 샤먼이 생전에 사용하던 무구들을 가져다 놓는다. 그러면 3년 후에 샤먼의 혼이 엉거트가 되어 돌아온다.
조상 샤먼 엉거트의 힘을 중요한 원천으로 하는 흑샤먼들은 엉거트의 주거지를 엉거트가 살아 생전 샤먼이었을 때의 고향으로 생각하고, 엉거트를 모신 고향의 숲을 매우 신성한 공간으로 여긴다.27) 그래서 울란바타르에 이주한 이후에도 바이라와 허럭은 가을마다 고향의 숲에 가서 조상 엉거트들을 위한 개인적 의례를 했다. 허럭은 그것을 "차강 사르(음력 설)때 부모를 찾아뵙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간 영혼의 자연화를 상징하는 엉거트의 숲은 샤머니즘 신자들로 하여금 두려움의 감정을 갖게 만드는 공간이다. 허럭은 "고향 차강노르의 조상 샤먼들의 엉거트가 있는 신성한 숲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으며, 만약 나쁜 마음을 가지고 들어갈 경우 커다란 해를 입게 된다"고 이야기했다. 이런 믿음은 엉거트에 대한 두려움과 존경의 감정을 갖고 있는 일반 신자나 유목민들로 하여금 엉거트의 집인 특정 공간에 대한 침해를 금기시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지난 해 차강 노르의 바트카(Badka)28)를 방문했을 때, 그녀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이유로 어머니 수렌의 엉거트가 있는 숲에 일행 모두가 가는 것을 거부했다. 이러한 경외감의 조성은 엉거트의 공간을 함부로 출입해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 지금껏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어워와 게르, 엉거트의 집과 관련된 종교적 믿음은 자연이 신의 거주지이므로 그 안에 사는 생명체를 함부로 해칠 수 없다는 관점을 발전시켰다. 자연을 성화하는 이러한 믿음은 몽골의 자연환경을 청정한 상태로 지속시키는데 적극적으로 기여했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자칫 자연을 대상화할 수 있는 한계도 가지고 있다. 즉 자연이 신의 집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라면, 그 안에 신이 없거나 혹은 빠져나갈 경우 자연은 하나의 생태학적 적소(適所, niche)처럼 의미 없는 물리적 공간으로 변질될 수도 있는 것이다.
2) 신 혹은 신령인 자연: 자연의 신화(神化) 상징
자연을 신으로 보는 인식은 몽골인들의 대지(자연) 이해의 모체인 에튀겐 관념에서 기원한다. 전통적으로 몽골인들은 대지를 '대지 어머니(etugen eke)'로 부르며 숭배했다.29) 이외에도 대지를 여신의 몸으로 상징하는 것은 민간신화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30) 특히 여성 샤먼을 묘사하는 몽골어 '오드강(udgan)'이 '에튀겐(etugen, 地母神)'에서 파생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샤머니즘 전통은 지모신 전통의 영향을 강하게 포함하고 있다.31) 홉스골 호수 서편의 주민들은 오늘날까지도 여성의 자궁을 "우테게"라고 부르며, 몽골인들은 흙으로 만든 가축 우리를 "어터크"라고 부르며, 항가이 산맥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를 "오트공 텡그리"라고 부르고 있다.32) 국가의 영향력이 지배적이었던 19세기 몽골의 중심부에서는 에튀겐 신앙이 위축되었던 반면 샤머니즘이 활발했던 지역에서는 동물의 다산과 양육을 보장하는 신으로 여전히 숭배되었다는 것은 에튀겐 신앙과 샤머니즘의 밀접성을 입증하는 것이다.33)
그러나 현대인들은 대지의 모성(母性)을 인식하면서도 에튀겐에 대해 다소 추상적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에튀겐이 추상적 하늘에 대비되는 추상적 대지를 상징한 것이므로 구체적 일상에서는 어느 정도 거리감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에튀겐의 함의를 가지면서도 몽골인들의 일상과 밀접한 가장 대중적인 자연 신격은 '로스(luus, 水神)-사브다크(sa bdag, 地神)'이다.
이 신격은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두 신을 의미하지만 몽골인들은 로스-사브다크라는 하나의 관념으로 이해한다. 물론 로스나 사브다크라고 한 신격만을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의미상으로 구별하는 것은 아니고 모두 '로스-사브다크'를 뜻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마르하호는 "대지와 물이 분리될 수 없다는 믿음 때문에 두 신격을 하나로 부르는 것"34)이라고 설명한다. 한편 로스-사브다크의 신명이 티벳어이고 라마승들도 섬기지만 이 신격은 샤머니즘적 성격을 갖고 있다. 마르하호는 몽골 북부 지역에서 로스-사브다크 신앙이 기원했다고 주장하고, 푸렙(O. Purev)도 북부 지역인 헙스걸 아이막에서 로스에게 제사를 올렸던 것을 기록하면서 그 기원을 샤머니즘에 두고 있다.35)
그런데 이 로스-사브다크는 자연 안에 거주하는 신을 상징한다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왜냐하면 몽골인들은 로스-사브다크를 말할 때 어떤 공간'의' 신격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간바트르는 로스-사브다크에 대한 자신의 종교적 행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무를 구할 때도 먼저 로스-사브다크에게 기도하고 부탁한 후 베어온다. 그때는 "날이 너무 추우니까 나무가 필요합니다. 나를 따뜻하게 해주세요" 라고 말한 후 하닥을 어워에 메어준다. 로스-사브다크가 사나운 지역에서는 나무에다 '옴마니팟메옴'이라고 쓴다.
그의 진술은 로스-사브다크가 어떤 지역을 점유하며 그 안에 사는 신격임을 암시한다. 다시 말해 로스가 물에 살고 사브다크가 마른 땅에 집을 짓고 산다는 관념도 존재하므로 로스-사브다크가 자연의 신성을 상징하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두 가지 차원에서 논의할 수 있다. 하나는 자연 신격에 대한 종교적 믿음의 의미를 분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몽골 샤머니즘이 태동한 북부의 지역적 전통을 재해석하는 것이다.
우선 몽골인들이 "그 산에는 사나운 사브다크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물리적 산과 사브다크라는 신격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다. 샤머니즘의 사유에서 신령(spirit)은 때로 현상의 본질(essence)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나아 보인다고 주장하는 비테브스키의 해석36)을 수용할 경우, 샤머니즘의 자연 신격이 갖는 성격은 외재적 신이 자연 안에 위치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연 공간 혹은 사물 자체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샤머니즘적 표현에서 '그 산의 사브다크'는 '그 산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믿음은『몽골비사』에 기록된 징기스 한의 기도를 통해 알 수 있다.
부르한 칼둔 산을 통해 한낱 쓰레기일수도 있는 나의 생명이 보호되었다. 나는 커다란 고통을 경험했다. 매일 아침 나는 제물을 바치며 부르한 칼둔 산을 섬긴다. 매일 나는 그에게 기도할 것이다. 나의 아이들과 후손들에게도 이것을 지키게 할 것이다.37)
물론 산(그)에게 기도한다는 말이 그 안의 신들에게 기도한다는 말을 관용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다우르 족이나 몽골, 부리야트에서 산을 에찐(ejin, 주인), 항(khan, 왕)이라고 부르는 것은 "산을 지배하는 신령에 대한 관념이 아니라 장엄한 산의 영속성에 대한 관념"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의 힘을 산이나 절벽 등과 분리된 현상으로 상상하지 않는다.38) 하르바(Uno Harva)도 핀우그릭 어족(Finno-Ugric)에 포함되는 민족들의 물의 신격에 대한 논문에서 명사 aba 혹은 but-aba(Water Mother)는 "살아있는 물에 대한 의례적 명칭"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더 나아가 aba라는 명칭은 소유자로서의 신령을 결코 의미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39) 그러므로 로스-사브다크를 숭배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신인 자연을 향해 기도하고 예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자연을 신 혹은 신의 몸으로 믿어온 것이 주로 북부 지역에서 기원한 흑샤먼 전통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몽골의 북부는 고대 몽골족이 태동한 발원지이자 몽골 샤머니즘의 원형을 구성한 지역이다. 이 지역은 울창한 타이가 숲과 거대한 산악으로 구성되어 있어 고대부터 부르한 칼둔, 한-헨티, 항가이항 산 등에 대한 종교적 숭배가 발달했다. 이러한 자연환경에서 샤먼 계보를 이어온 흑샤먼들은 불교의 신격을 수용한 황샤먼들과 달리 불교와 끝까지 대립하며 자연 신격에 대한 전통적 믿음을 심화시켜왔다. 현재에도 이곳 출신의 흑샤먼들은 자연 엉거트들과의 관계를 절대시한다.40) 그것은 흑샤먼들의 가장 중요한 힘의 원천은 자연이기 때문이다. 울란바타르에 이주한지 얼마 되지 않은 헙스걸 아이막 출신의 남성 샤먼 촐란바타르는 자신의 신단에 특이하게 생긴 돌을 올려놓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저 흰 돌은 부리야트 샤먼이 준 바이칼 호수의 돌이고, 그 옆에 이상하게 생긴 빛나는 돌은 이번 일식 때 봄보트에 갔다가 나하고 '맞는' 돌이라고 느껴서 가져온 것이다. 나는 자연과 관계하고 자연으로부터 힘을 얻기 때문에 그 돌들을 신단에 올려놓았다. (작은 상자에서 개 모양으로 생긴 돌을 하나 보여주면서) 이 돌은 타르박(동굴토끼)의 굴을 파다 발견한 것이다. 이것 역시 내게 힘을 준다.
그가 자연의 사물을 종교적 힘의 원천으로 믿는 것은 북부 흑샤먼 전통의 친환경적 특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 때문에 지금도 헙스걸 출신의 샤먼들은 정기적으로 고향의 자연에 가서 자신의 영적 능력을 신장하기 위한 개인적 의례를 하고 있다. 그러므로 샤먼이나 일반적 몽골인들은 대개 "흑샤먼들이 자연을 잘 알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물론 북부 지역에 흑샤먼 전통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헙스걸 아이막 출신의 황샤먼 쟘빈은 헙스걸 호수 동편의 다인 데르흐 샤머니즘(황샤먼)은 불교와 '합해졌으나' 서편의 다르 하드 샤머니즘(흑샤먼)은 불교와 적대적 관계를 지속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한편으로는 이 지역에서도 황샤먼 전통이 강하게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부 지역의 장엄한 자연환경에서 형성된 종교적 전통은 자연 신격에 대한 믿음과 숭배를 공유해왔다. 2000년 차강 노르 솜 인근에서 만난 라마승 바타르(Baatar)는 '허가증' 문제로 필자 일행과의 만남을 거부하며 실랑이를 벌이다 갑자기 초원으로 나갔다. 그를 따라 나가니 화를 내며 돌아가라고 손짓했다. 그는 뒤에 외부인을 만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자신이 섬기는 초원의 '자연 신격'에게 물어본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불교 라마승조차도 지역의 자연 신격과 밀접히 교류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이 지역의 자연 숭배 전통이 강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이러한 전통에 따라 북부의 헙스걸 아이막 타이가 지대 사람들은 로스-사브다크를 인간과 동물의 형상으로 묘사했다. 토양은 가죽, 흙과 돌 및 식물의 뿌리는 육체, 힘줄, 혈관을 구성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불가피하게 땅을 팔 경우 로스-사브다크의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해 흙을 메꾸는 '치료의례'를 행했다.41) 이런 전통은 현대에도 발견할 수 있었다. 필자가 유목민 간바트르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누흐트 산기슭에 기둥을 세워 말을 묶어두고 있었다. 그는 기둥을 세울 구멍을 파는 자리에 우유와 쌀을 놓고 사브다크에게 기도했고, 떠날 때는 그곳에 다시 풀이 나오게 해달라고 기도할 예정이었다. 물론 이런 의례는 땅을 빌려준 신에게 감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과정이 외과적 치료행위와 흡사하다는 점은 땅을 신 혹은 신의 몸으로 상상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상과 같은 흑샤먼 전통의 자연관이 갖는 생태학적 함의는 '인간-자연' 관계를 '주체-객체'가 아닌 '주체-주체', 즉 상호의존적 관계로 상징하는 것이다. 즉 감정을 가지고 있고, 아픔을 느끼며, 인간에게 공과를 물을 수 있는 주체로서 신(자연)을 감각할 때 자연은 인간이 돌보아야 할 - 신의 집이기 때문에, 혹은 더 많은 사용을 위해 - 객체가 아니라 공존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흑샤먼들의 관점에서는 자연을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거나, '인간이 자연을 구한다'는 관점은 존재하기 어렵다.
버드 데이빗(Nurit Bird-David)은 인간-자연 관계의 은유를 분석하면서, 전통적인 서구적 관점은 자연과 인간을 대립적인 것으로 보아왔다고 지적한다. 특히 '주체-객체' 틀의 서구적 관점은 인간이 자연을 사용하고, 조절하고, 소유하고, 지배하고, 관리하고, 더 최근에는 돌보는 대상으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전통사회의 관점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인격적 관계의 다양한 형태로 상호작용하는 '주체-주체' 틀 안에서 보는 것이며, 전통사회의 사람들은 이러한 관점을 통해 자연을 존중하는 깊은 지식을 공유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42)
땅을 어머니로, 자연의 제 요소를 신으로 인식하는 믿음은 다른 전통사회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종교적 자연관이다. 몽골 흑샤먼들의 전통적 자연관이나, 북미의 추장 시애틀이 땅을 어머니로 상징했던 것, 혹은 라틴 아메리카의 코기족 사제들이 산업사회 사람들의 개발을 어머니에 대한 살해행위로 간주하며 비판한 것은43) 자연과 신의 생존 기반을 일치시켜 자연에 대한 침해를 보다 강하게 제어하는 친환경적 태도를 나타낸다.
3. 시장경제 이후 흑샤먼 전통의 자연관 변화
다쉬 초이린 사원에서 만난 젊은 라마승 알탄쿠는 "모든 것이 변했다"고 비관했다. 그는 자본주의로 인해 몽골의 전통적 종교와 문화가 심각히 왜곡되어 불교나 샤머니즘이 지속해온 자연에 대한 경외감마저 위협받고 있다고 우려했다. 그의 우려처럼 자본주의적 욕망에 근거한 새로운 종교성의 대두는 자연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졌던 흑샤먼 전통에도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1) 이주와 환경악화로 인한 전통적 자연관의 변화
샤먼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하던 중 허럭은 "어릴 때 나이트클럽에 갔다가 엉거트로부터 심한 꾸지람을 들었다"고 웃으며 말했다. 이처럼 엉거트는 샤먼들의 생각과 행동, 일상의 모든 요소에 개입하는 영적 실재이므로 엉거트와의 단절은 샤먼 기능의 상실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엉거트와의 단절은 자연과의 단절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 차강노르 지역의 흑샤먼인 곰부후(Gombuhu)는 사회주의 시절 므릉과 울란바타르까지 끌려가 투옥되었던 경험이 있다. 그녀의 딸은 그것을 '자연으로부터의 격리'라는 끔찍한 고통이었다고 설명했다.44) 이는 자연 공간으로부터의 분리, 신격으로부터의 분리를 동일한 위기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엉거트와의 교감과 접촉이 불가능한 도시에서는 흑샤먼들은 정상적 삶을 살기 어렵다는 것을 암시한다. 특히 불교의 영향으로부터 독립적인 흑샤먼들의 경우 엉거트와의 관계는 더욱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몽골이 시장경제로 전환하면서 자연과 엉거트를 동일시했던 흑샤먼들의 관점도 '자연 안의 신'이라는 관점으로 서서히 변형되고 있다. 그 이유는 우선 샤먼들이 고향을 떠나 울란바타르로 이주하고 있다는 현실 때문이다. 현지에서 만난 잉흐자르갈, 허럭, 촐란바타르, 르학바에르겐은 모두 북부 헙스걸 아이막 출신의 흑샤먼들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비록 경제적 동기에 의해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울란바타르로 이주했지만 그들은 지금도 고향의 엉거트와만 관계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잉흐자르갈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흑샤먼들은 울란바타르 지역의 엉거트들에 대해서는 모른다. 그러므로 울란바타르에서 의례를 할 때에는 먼저 고향의 엉거트를 불러 현재 위치한 지역의 엉거트나 사브다크가 무엇인지를 물어본 후 굿을 한다.
이주 후에도 배타적으로 고향의 엉거트와만 관계하는 이유는 대중의 기대 때문이다. 몽골인들은 샤먼 중에서도 흑샤먼들이 "강하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잉흐자르갈도 시장경제 이후 초기에는 황샤먼들과의 경쟁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들도 흑샤먼의 영험함을 인정해 더 이상의 갈등은 없다고 주장했다. 흑샤먼들의 힘이 강하다는 일반적 인식은 그들의 종교적 전통이 사회주의에도 훼손되지 않고 지금껏 유지되었다는 것에 대한 기대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대와 믿음이 한편으로는 전통적 흑샤먼들의 종교적 의미체계를 혼란에 빠뜨리는 원인이 되고 있다. 엉거트가 자연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전통적 믿음은 흑샤먼의 이주를 엉거트의 권역으로부터 벗어나는 현상으로 해석하게 한다. 그러므로 대중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아직도 고향의 엉거트와만 관계한다고 주장하는 흑샤먼들은 이주 후에도 종교적 힘의 원천이 약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할 필요가 있으므로 불가피하게 기존의 엉거트 관념을 변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대표적 변화는 샤먼이 공간적 이주를 하더라도 의례의 순간에는 고향의 엉거트가 울란바타르로 쉽게 올 수 있다는 새로운 설명체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잉흐자르갈은 고향의 엉거트가 울란바타르까지 올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엉거트는 700 킬로미터의 거리 정도는 4분이면 올 수 있다"고 주장했고, 허럭도 날씨가 좋지 않을 경우 힘들다는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고향의 엉거트를 부르는데 별 어려움이 없다고 주장했다. 물론 흑샤먼 전통에서도 엉거트가 이동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지만 그것은 엉거트 자신의 권역 안에서의 근거리 이동이었지 지금처럼 그 이동이 광역화된 적은 없었다. 이런 새로운 해석들은 결과적으로 엉거트를 지경으로부터 분리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그러나 흑샤먼들의 자연관을 변형시키는 보다 근본적 원인은 환경악화의 현실이다. 흑샤먼들의 전통적 신관, 자연관에 입각해서 자연과 엉거트를 동일시할 경우 자연의 파괴는 신격의 파괴를 의미하게 된다. 그렇다면 결국 샤먼으로서 활동할 수 있는 종교적 힘의 원천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례는 인도 소라(Sora)족의 전통적 샤머니즘이 급격히 쇠퇴한 이유에 대한 비테브스키의 해석을 상기시킨다. 그는 조상의 신령(Sonum)이 지경을 구성하는 제 요소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는 소라족의 믿음은, 지경을 구성하는 제 요소가 시장을 통해 팔려나가는 상황에서 결국 신령도 팔려버린 것으로 믿게 만든 근거가 되었다고 해석한다. 즉 샤머니즘을 유지시킬 종교적 의미체계가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45) 그러므로 먼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면 자연의 파괴에도 불구하고 엉거트는 힘을 잃지 않는다는 재해석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잉흐자르갈은 자연이 파괴되면 엉거트도 죽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 강하게 저항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산에 큰 불이 나도 엉거트가 있는 신성한 나무 주변에는 불이 옮겨 붙지 않는다. 자연에 대한 오염과 파괴가 엉거트를 화나게 할 수 있지만 엉거트를 죽게 할 수는 없다. 엉거트는 절대 죽지 않는다.
어쩌면 "엉거트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그녀의 저항은 흑샤먼들의 전통적 자연관이 직면한 불안을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직까지는 엉거트 스스로 자기 '집'을 적극적으로 지킬 수 있다는 믿음을 유지하고 있지만, 엉거트의 적극적 방어에도 불구하고 지경이 물리적으로 파괴되고 있는 현실은 엉거트와 자연의 분리를 새로운 설명체계로 형성할 가능성이 높다.
흑샤먼 전통에서 오염은 물리적 자연의 훼손 이상의 심각한 의미를 갖는다. 우선 샤먼들은 오염을 종교적 '죄'의 의미로 인식하므로 일상생활에서 청결함을 강조한다. 허럭의 할머니인 흑샤먼 수렌은 가축을 키워도 깨끗한 것으로, 일을 해도 젖을 짜는 일처럼 깨끗한 일만 했으며 먼지 나는 곳에는 절대 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더러운 물, 더러운 것을 만지면 그것이 자기를 더럽힌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허럭은 엉거트가 샤먼으로 하여금 늘 깨끗하고 성실히 살 것을 요구하고, 만약 그렇지 않으면 엉거트는 떠나버린다고 진술했다.46) 즉 오염은 엉거트의 실망과 분노를 초래하고 그 결과는 관계의 단절, 곧 샤먼으로서의 존재 이유를 상실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오염에 대한 관념은 자연과 엉거트의 불가분성도 암시한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사례는 허럭이 들려준 할머니 수렌의 일화이다.
수렌이 죽기 2년 전 어느날 코담배통을 잃어버린 그녀의 동생 삼보즈가 그것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수렌은 저녁에 굿을 하여 엉거트를 보내 코담배 통을 찾게 했다. 엉거트는 금새 코담배 통을 찾았지만 개 한 마리가 그 자리에 오줌을 쌌기 때문에 가져올 수 없었다. 엉거트는 더러운 자리에 갈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하닥으로 표시하고 돌아와 수렌에게 그곳을 알려주었다. 다음날 아침 엉거트가 가르쳐준대로 찾아가니 하닥이 놓인 자리에 코담배 통이 있었다. 그는 수렌에게 돌아와 감사하며 암말 한 마리를 주었다.
"엉거트는 더러운 자리에 갈 수 없다"는 관념은 엉거트가 오염된 자연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이런 믿음을 신-자연 동일성에 적용하여 현재의 환경 파괴를 이해할 경우 신은 무력하게 죽거나 쫓겨난다는 결론만이 남게 된다. 즉 기존의 흑샤먼 전통이 지녔던 전통적 신관, 자연관의 담지체인 엉거트가 환경위기의 시대에는 무력한 존재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흑샤먼들로 하여금 신격의 무력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전통적 자연관을 지속하는 것을 점점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 흑샤먼들은 자연으로부터 자유로운 엉거트의 불멸성과 전능성을 포함하는 재해석을 선택함으로써 종교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것이다.
비테브스키는 종교가 생태 환경과 밀접히 관련되는 경우에는 환경이나 삶의 양식에서의 변화가 반드시 종교의 구조나 행동의 변화를 수반한다고 지적했다.47) 흑샤먼들이 시장경제의 영향 속에 자연이 곧 신이라는 관점을 변형시키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적 사회변화에 흑샤먼들이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그 변화가 환경 악화를 방조할 가능성도 포함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흑샤먼들은 아직 자기 전통에 대한 재정립을 이루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자본주의의 상당한 충격을 받고 있기 때문에 종교적 생존을 위한 전통의 변형에 더욱 몰두하는지도 모른다. 흑샤먼들은 종교적 정체성을 지속하기 위해 지경과 분리된 신격을 고안하는 것이다.
이제 종교적 지속과 생존을 위해 샤머니즘의 근거는 자연과 소규모 공동체에서 자본과 도시로 변형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소비사회의 확산으로 인한 환경파괴가 샤먼도 엉거트도 저항하기에는 버거울 만큼 강력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엉거트 없이는 삶을 지탱할 수 없다는 종교적 절박성이 생태학적 파국을 예감하면서도 종교의 지속을 위해 전통적 자연관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것이 환경 파괴적 소비사회의 얼굴이다.
2) 환경 보전에 미치는 종교의 영향에 대한 회의와 기대
몽골은 아직도 상대적으로 청정한 자연 환경을 유지하고 있지만 1990년대 이후 시장경제에 편입하면서 심각한 환경 위기가 보고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몽골 종교의 전통적 자연관이 위기 극복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다. 또한 환경위기의 근본적 해결은 자연에 대한 종교적 감수성의 회복과 의례의 재건에서 출발한다고 할 때 몽골의 샤머니즘과 불교가 자본주의에 신속히 적응하고 있는 점은 비관을 부추긴다.
현지에서 만난 몽골인들 중에도 종교가 생태학적 파국을 막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회의하는 이들이 많았다. 자연에 대한 종교적 태도를 인상적으로 보여주었던 간바트르 마저도 "사람들에게 자비로운 마음을 갖게 한다는 면에서 종교의 영향이 있을 수 있지만 환경 악화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다"고 비관했고, 대표적 환경단체중 하나인 '동부 초원 생명다양성 프로젝트'의 간부 갈바트라크 역시 종교는 근본적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회의했다.
몽골인들이 자연 의례를 하는 것은 자연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복을 위한 것이다. 물론 성스러운 공간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환경보전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실제 그런 지역 대부분이 환경단체가 보호하려는 곳과 일치하지만 우리가 보호하려는 모든 곳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이런 회의는 시장경제에 편입된 이후 확산된 소비주의의 욕망을 종교도 제어할 수 없다는 인식에서 나오는 것이다. 종교인들마저도 샤머니즘과 불교의 친환경적 자연관이 '종교의 상품화'에 밀려 사라져버렸다고 우려하는 실정이다. 이처럼 몽골의 불교와 샤머니즘이 자본주의적 욕망에 점점 더 종속 되어간다면 환경 보전을 위한 종교의 대안적 의미성은 그만큼 약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을 수반한다. 비록 아직까지는 주류적 흐름이 아니지만 자본주의적 충격에 대한 반성과 실천의 노력도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그 흐름의 중심에는 전통적 종교성을 의식적으로 복원하려는 노력이 위치해 있다. '몽골 녹색운동'48) 회장인 쟌도르지(Jandorj)는 사회주의때 중단되었던 국가차원의 어워제가 복드 항(Bogd Khan)산에서 1995년에 재개되었을 때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복드 항에서 어워제를 하기 위해 총리가 그 주변지역을 청소할 것을 지시했지만 자발적으로 나서는 사람들이 없어 곤란에 빠졌다. 사회주의 때는 강제적으로 그런 일을 시킬 수 있었지만 민주화 이후 그런 강제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라마승들과 72세에서 86세 사이의 노인들 140여명이 모여 3일 동안 그 산을 청소했다. 종교가 제도적인 법과 행정지침보다도 실제 행동에 더 영향을 미친 것이다.
또한 몽골인들은 현재의 환경위기를 종교적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도 종교의 의미있는 기여를 기대하게 하는 요인이다. 아시아샤먼협회의 총무인 수흐바트는 최근 몽골을 위협하고 있는 자연재해를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지금 샤먼들은 자연환경의 변화와 파괴에 대해 심각히 우려하고 있다. 자연 환경이 점점 안 좋아져 강이 더러워지고 풀이 없어지면 엉거트들이 화를 내고 벌을 줄 것이다. 아니 그 벌은 이미 시작되었다. 최근 몽골에서 일어나고 있는 한파와 화재, 가뭄 등의 재해는 엉거트들이 주는 벌이다.49)
같은 맥락에서 종교적 태도가 환경 악화를 막는 실천적 결과를 가져온다는 인류학적 보고들도 존재한다. 곰보예프(B. O. Gomboev)는 몽골과 인접한 러시아령 부리야트 지역 바르구찐(Barguzin) 마을의 환경실태를 조사하면서 여타의 초지가 파괴된 반면 유일하게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는 곳은 '성스러운 돌'이 가까이 있어서 방목을 제한한 곳이라고 보고했다.50)
김성례는 시베리아 유목민들을 연구하면서 유목민들의 의례와 사회생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온 샤머니즘적 세계관과 자연관, 영혼관은 전통의 잔재가 아니라 현재의 문제에 대한 현실적 대응이라고 주장했다.51) 마찬가지로 몽골인들의 종교적 자연관의 실천적 의미 역시 결코 과거적인 것이 아니다. 한편에서는 종교의 상품화에 따른 환경악화의 방조가 나타나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오히려 전통적 종교성을 복원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도 동시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마찬가지로 몽골의 종교인들 역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그들은 개발에 저항하는 '환경운동가'가 될 수도 있고 파괴에 앞장서는 자본가들을 축복해주는 '개발의 종교적 후원자'가 될 수도 있다. 그 가능성 중에 무엇이 현실의 주도성을 획득할 것인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몽골의 환경과 문화의 미래를 결정하는데에는 종교가 중요한 의미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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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ulam, op. cit., pp. 96-98.
2) Humphrey, The End of Nomadism? p. 303.
3) 다산과 창조력, 대지와 물의 주인, Heissig, op. cit., pp. 76-81.
4) Bawden, op. cit., pp. 1-2.
5) Heissig, op. cit., pp. 103-104.
6) Bawden, op. cit., p. 19.
7) Heissig, op. cit., pp. 26-27.
8) Bawden, op. cit., p. 19.
9) 68세의 노인 가슨츠릉은 셀렝게 아이막에서 형수와 함께 나담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울란바타르를 방문중이었다. 그는 어머니와 인생의 후원자인 한 라마승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시대에도 독실한 불교 신앙을 지켜왔다.
10) 의례와 경제적 재생산의 관계에 대해서는 김성례, "시베리아·극동 소수 유목민의 전통문화와 현대적 변화",『러시아연구』2(서울: 대륙연구소, 1995.6), 193-198쪽. 참조.
11) Roger Payne, "Is whaling justifiable on ethical and moral grounds?", in Whale and Dolphin Conservation Society, Why Whales?, Bath : WDCS, 1991, p. 22, Nielis Einarsson, "All animals are equal but some are cetaceans - Conservation and culture conflict", Environmentalism, p. 78. 재인용.
12) Tanya M. Luhrmann, "The resurgence of romanticism - Contemporary neopaganism, feminist spirituality and the divinity of nature", Environmentalism, p. 224.
13) 비테브스키는 시베리아와 몽골의 샤먼의 유형을 세계의 내재적 힘 - 인간, 동물, 물, 바람 등 - 에 참여하는 샤먼들과 종족의 재생산에 종사하는 씨족 샤먼으로 분류한다. 전자의 특징은 트랜스, 변신, 천계여행인 반면 후자는 기도와 제사에 집중한다. 그는 이를 흑샤먼과 백샤먼의 전형적 특징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Vitebsky, The Shaman, p. 35.) 하지만 현지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몽골인들은 불교와 습합된 샤먼들을 황샤먼으로, 습합되지 않은 샤먼을 흑샤먼으로 분류한다. 이들이 샤먼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주로 치료를 담당하는 백샤먼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14) Heissig, op. cit., p. 104.
15) 어워는 위용이 있는 곳, 높은 곳, 산이 연속된 곳, 식물과 물이 풍부한 곳에 선별해 세워졌다. 유명한 산(부르한 칼둔 산, 항가이항, 멍항, 제트히 항 등)에 하나같이 "항(Khan)"이라는 칭호가 붙는다. 데. 마르하호, "몽골 샤머니즘의 초원제에 대하여",『몽골과 한국 민속의 비교 심포지엄』(서울: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원 민속학 연구소, 2000), 122-123쪽.
16) Heissig, op. cit., pp. 101-102. 이러한 몽골인들의 신앙은 '산악신앙'이라고도 알려질 만큼 현대에도 산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박원길,『북방민족의 샤마니즘과 제사습속』(서울: 국립민속박물관, 1998), 384쪽.
17) Humphrey, "Chiefly and Shamanist Landscapes in Mongolia", p. 136.
18) 게르(ger, 집)는 종교적 의미 이전에 환경에 대한 긍정적 주거양식이다. 한 시간이면 세우고 해체할 수 있는 게르는 유목의 특성을 담아낸 것으로 소유의 최소화라는 생태학적 덕목을 표현한다.
19) Sarangerel, Riding Windhorse - A Journey into the Heart of Mongolian Shamansim(Rochester, Vermont: Destiny Books, 2000), pp. 9-11.
20) 일례로 몽골인들은 콴 키사가 텡그리(Qan Kisa a Tngri)가 항상 문 앞에 살고 있다고 믿었다. Heissig, op. cit., p. 59.
21) Sarangerel, op. cit.
22) 몽골인들이 대중적으로 섬기는 마하칼라는 힌두신 쉬바(Siva)를 불교적으로 변형한 신격이다. Heissig, op. cit., p. 25.
23) '하얀 음식'의 뜻으로 우유와 차 등을 의미한다.
24) 차찰(Tsatsal), 혹은 사촐리(Sachuli)라고 부르는 이 의례에서 남쪽을 향해 뿌리는 것은 불에 대한 것이며, 동쪽을 향해 뿌리는 것은 하늘에 대한 것이며, 서쪽을 향해 뿌리는 것은 물에 대해서, 북쪽을 향해 뿌리는 것은 조상에 대한 것이다. 박원길, 앞의 책, 53쪽.
25) 포프는 "오래전에 죽은 샤먼의 영혼은 산과 강 호수와 시내 숲의 보호 신령인 엉거트가 된다"는 샤머니즘적 믿음에 대해 소개했다. N. N. Poppe, Letopisi Khorinskikh Buryat(Leningrad: Trudy Institut Vostokovedeniya Akademii Nauk, No 9, 1935), p. 95. Heissig, op. cit., p. 14. 재인용.
26) 아사르는 나무로 만든 엉거트의 집.
27) 데 마르하호, "초원의 엉거트에게 올리는 제사의식", 『몽골과 학국 민속의 비교 심포지엄』, 38쪽.
28) 바트카는 수렌의 딸이자 바이라의 이복 언니이다. 그녀는 전업적 샤먼은 아니지만 엉거트를 불러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29) Heissig, op. cit., p. 102.
30) 아들을 잃은 에멕테이 보르항(여신)이 슬픔에 빠져 흘린 눈물이 강이 되어 흐르자, 여행을 방해당한 다른 보르항이 그녀를 산으로 바꿔 버렸다. 그래서 산에서 자라는 식물과 나무는 에멕테이 보르항의 머리카락이고, 물과 강은 그녀의 눈물이라고 여긴다.체렌소드놈,『몽골 민간 신화』, 이평래 역(서울: 대원사, 2001), 29쪽.
31) 어트거니 푸레브, "몽골 무교의 전반적 성격", 『몽골과 한국 민속의 비교 심포지엄』, 5-6쪽. Sarangerel, op. cit, pp. 24-25.
32) 데 마르하호, 앞의 글, 122쪽.
33) Humphrey, "Chiefly and Shamanist Landscape", p. 149.
34) 마르하호, 앞의 글, 127쪽.
35) 마르하호, 앞의 글, 129쪽.
36) Piers Vitebsky, The Shaman, p. 12.
37) Heissig, op. cit., p. 103. 전설에 의하면 징기스 한이 적인 메르키드(Merkid)에게 쫓겨 목숨이 위태로웠을 때, 부르한 칼둔 산에 숨어들어 생명을 건졌다고 한다. Humphrey, "Chiefly and Shamanist Landscapes", p. 159. 또한 이 산에 징기스 한의 무덤이 있다는 설도 있어 몽골인들 사이에서 특히 신성시되어왔다. ibid., p. 152.
38) Caroline Humphrey with Urgunge Onon, Shamans and Elders - Experience, Knowledge, and Power among the Daur Mongols(Oxford: Clarendon Press, 1996), pp. 88-89.
39) Uno Harva, Die Wassergottheiten der finnish-ugrischen V lker,(Helsingfors: Suomalais-ugrilaisen seuran, Toimituksia 32, 1913), p, 121. Lotte Motz, The Faces of the Goddess(New York and Oxford: Oxford Univ. Press, 1997), p. 48. 재인용.
40) 실제로 현지에서 만난 흑샤먼들이 섬기는 신격에는 구체적 자연과 관계된 엉거트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지난해 차강 노르 남단에서 만난 남성 샤먼 발지르(Baljir)가 섬기는 20 종류의 엉거트 중 반은 동물이나, 특정한 산과 결부된 자연 신격들이었다. 그리고 헙스걸에서 도시로 이주해온 잉흐자르갈, 촐란바타르, 허럭 등의 샤먼들도 고향의 성스러운 자연 엉거트들을 중요하게 섬기고 있었다.
41) 데. 마르하호, 앞의 글, 126쪽.
42) Nurit Bird-David, "Tribal metaphorization of human-nature relatedness - A comparative analysis", Environmentalism, p. 121.
43) "지금 그들이 어머니를 죽이고 있다. 아우들(서구인들),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약탈 뿐이다." Alan Ereira, "이대로 가면 세상이 곧 죽을 것이다.", 『녹색평론선집』1, 34쪽.
44) Becker, op. cit., pp. 172-173.
45) Vitebsky, "From Cosmology to Environment", pp. 185-187.
46) 오염에 대한 사고는 다른 샤먼 전통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백샤먼인 수미야도 그녀의 엉거트들은 더러움을 극도로 싫어해서 늘 집 안팎을 깨끗이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47) Vitebsky, The Shaman, pp. 34-37
48) 몽골 녹색운동(Green Movement)은 환경 위기 극복을 위한 운동에 있어 종교적 가치를 중시하고 있다. 쟌도르지는 몽골인의 자연에 대한 태도는 샤머니즘, 불교, 전통으로 이어온 것이고, 그것을 후손에게 물려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녹색운동의 목적은 자연을 어머니로 생각하던 마음을 되살리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국가 차원의 어워제를 라마승, 샤먼들과 연대해 주도하고 있다.
49) 이런 해석은 라마승들도 공유하고 있는 것이었다. 불교학자 체데브는 환경악화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과거에는 라마승들이 로스-사브다크에게 의례를 했고, 오트공 텡그리에게는 주기적으로 매우 성대한 의례를 했다. 사회주의 70여 년 동안은 그런 의례를 하지 못했다가 이제 다시 의례를 하기는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주로 개인적 목적으로 의례를 하니까 로스-사브다크가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들이 다투고 나쁜 말을 하는 것도 우주의 변화에 영향을 미치고 환경을 점점 나빠지게 하는 원인이다."
50) B. Gomboev, op. cit., pp. 133-134. 험프리는 이런 사례는 몽골을 비롯한 내아시아 생태환경의 보전이 종교적 가치와 결합되어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면서 전통적 문화와 종교가 위축되는 곳은 반드시 환경적 문제를 안게 된다고 해석했다. Humphrey, Culture and Environment in Inner Asia, pp. 7-8.
51) 김성례, 앞의 글, 212쪽.
제 5 장 결론
몽골 종교문화의 현재 상황은 전통적 종교성의 긍정적 함의를 복원하려는 의식적 노력과 자본주의적 가치에 편승하려는 욕구 사이에 긴장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외적으로는 사회주의 이후 전통 종교의 의미체계와 의례를 상당 부분 회복했지만, 내적으로는 자본주의의 충격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시간적 계기의 부족으로 인해 부정적 현상에 대한 반성을 본격화하고 있지 못한 상황이다. 종교의 사회적 건강성의 지표는 그 사회의 부정적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실천이다. 그러므로 종교적 직능자들과 신자들이 자본주의적 욕망에 예속된 종교의 상품화에 치우친다면 몽골의 종교는 '타락'이라는 새로운 위기 국면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한편 본 논문의 주제인 환경주의의 맥락에서는 자본주의적 가치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친환경적 종교성이 약화되고 있고 오히려 환경 파괴를 방조하는 사례도 적잖이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하게 된다. 본론에서 다루었던 유목문화의 종교적 자연관은 초원의 힘겨운 유목생활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지속 가능하게 한 기초였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현재의 환경 위기에 대한 비관을 초래하는 근거가 될 수도 있다. 종교적 자연관의 긍정적 함의가 청정한 환경상태를 가져왔다는 관점은 그 전통적 종교성의 약화가 환경 위기를 강화할 것이라는 관점과 동일한 기반을 갖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자본주의적 가치가 자연에 대한 종교적 감수성과 자발적 가난의 문화를 파괴한다면, 그리고 불교와 샤머니즘 신자들이 그 파괴 과정에 맞서는 대신 순응을 선택한다면 몽골 환경의 '역사'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 가능성이 높다. 이런 해석은 환경주의에 있어서 종교가 갖는 대안적 의미성이 현실에서는 매우 유약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 않은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몽골 유목문화의 종교적 자연관이 자본주의적 가치에 의해 심각히 위협받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자본주의 '구조'의 파괴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만약 그렇다면 환경 위기의 본질은 다시 외적 구조의 차원에서 찾아야 한다는 문제제기도 충분히 생겨날 수 있다. 즉 종교의 상품화는 자본주의 구조가 전통적인 종교적 의미체계를 쉽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종교는 환경 위기의 극복과 인간의 삶을 개선하는데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사회 구조의 변혁 없이는 의식 개혁이 있을 수 없다"1)는 북친(Murray Bookchin)의 기본관점을 상기시킨다. 그는 "자본주의는 사회와 자연계에 대한 절대적인 부정이므로 '유일한'(필자의 강조) 선택은 자본주의를 파괴하는 것"2)이고 예속과 종속화만을 초래하는 종교는 선택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환경주의에서 구조의 문제는 중요하다. 반환경적 구조를 친환경적 구조로 바꾸는 것은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회복하는데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조의 중요성이 북친처럼 구조를 유일하고 본질적인 원인이자 해결의 실마리로 삼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것은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여전히 외적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북친이 사회적 위계 생성의 원인으로 제시한 '우두머리(bigman)' 관념도 결국은 인간의 욕망과 무관하지 않다. 인간의 탐욕이 자연의 파괴를 초래하고 그것이 다시 욕망하는 인간을 파괴하는 것이 현대 환경 위기의 본질이다. 따라서 환경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욕망을 제어하는 종교적 자연관의 재건은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 구조의 압박이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현실을 비판하고 초월하는 종교적 차원의 의미는 사라지지 않는다. 몽골 자본주의의 상징인 울란바타르에서 라마승과 샤먼, 그리고 일반 신자들을 만났을 때 자본주의적 경향으로 흐르고 있는 종교성을 관찰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몽골 종교의 현실과 자본주의적 사회문화에 대한 비판의식을 형성해가고 있는 움직임도 접할 수 있었다. 그것은 몽골의 종교적 직능자들과 신자들이 아무런 저항 없이 자본주의적 구조에 함몰되어가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물론 그들은 현재의 몽골 종교를 주도하는 위치에 서 있지 못하며 앞으로도 그렇게 되기는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점 때문에 그들의 노력을 무의미한 것이라고 비관할 필요는 없다. 현실에서 무력한 것, 혹은 인간 실존의 지평에서 이미 사라졌거나 지금 사라지고 있는 것들의 의미를 부정한다면 인간 삶의 가능성은 더욱 협소해질 수밖에 없다.
환경 위기를 극복함에 있어서 종교적 자연관의 재건이 본질적 대안이라는 것은 그것이 사회적 권력관계에서 현상 상태, 기존 구조보다 강하거나 대등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 때문이 아니다. 대안성은 위기의 근본 원인을 자각하게 만들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동기를 부여하는 형성적 능력이다. 비록 그 현실이 미약하다 할지라도 종교의 상품화, 제도화, 고착화를 극복해 가는 창조적 소수자들에 의해 몽골 불교와 샤머니즘의 '현실적 대응'으로서의 긍정적 함의는 지속될 것이며,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실천하는 친환경적 종교성도 의미를 잃지 않을 것이다.
몽골의 초원을 찾아갔을 때, 나무 한 그루 없음에도 초원은 생명의 이미지로 충만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멀리서는 무표정해 보였던 초원은 온갖 생명의 터전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그 초원이 최근 몇 년 동안 화재와 가뭄과 한파로 상처 입었던 어머니 대지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이처럼 죽어버린 듯한 초원이 다시 때를 만나면 천지에 꽃을 피워내고 인간과 동물을 먹여 살리는 어머니의 몸으로 화하듯이, 몽골 유목민들의 종교적 자연관도 인간이 결코 잃어서는 안 되는 상호의존적 가치를 깨닫게 하는 힘으로 살아 있다. 이제 남는 것은 '낯선'땅에서 유목하는 그들이, 인간과 자연의 구성원들이 함께 구성해 온 몽골 환경의 역사가, 과학기술혁명의 성채에서 살아가는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로살도(Renato Rosaldo)는 문화는 경계가 뚜렷하며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가정은 깨어졌으며, 원주민들은 더 이상 인류학자들이 사는 세계와 완전히 분리된 세계에 거주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3) 문화간의 '통약불가능성'은 이제 사실이 아니다. 2000년 몽골의 북부 변방인 차강 노르에서 만난 샤먼 발지르(Baljir, 41세)4)는 당시 미 국무장관인 올브라이트(M. Albright)를 화제로 이야기했고, 2001년 누흐트 산의 언덕에서 만난 간바트르는 "아인쉬타인(A. Einstein)도 불교는 과학의 기본이라고 이야기했다"는 말로 자신의 불교 신앙의 의미를 설명했다. 이는 소위 '오지'에 사는 사람들도 세계의 변화를 읽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사례였다. 이제는 내부자의 의미체계가 자문화의 전통과 역사, 언어,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문화간 경계를 가로지르며 새로운 이해를 형성하고 있다. 세계화 시대의 문화적 상황은 몽골인들의 삶의 방식이 다른 문화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도 변화시킬 수 있음을 의미한다. 즉 세계화 과정에서 자본주의의 외부적 충격이 몽골인의 의미체계를 위협하고 있듯이 역으로 그들이 사유하고 살아가는 방식이 우리의 사유와 실천을 정정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타자는 더 이상 동질적 대상이 아니며, 외부의 연구자 또한 고정불변의 위치에서 '거리두기'를 하며 타자를 관망하는 자아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필자는 자본주의적 가치에 영향을 받고 있는 몽골의 종교에 대해 가치중립적 위치에서 기술하지 않았다. 그것은 고전적 인류학의 관점에서는 위험스런 방식이지만, 필자의 우려와 회의, 기대의 목소리가 타자를 왜곡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종교가 인간과 세계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포함하지 않을 때 타락하듯이, 인문학 역시 비판적 시야와 윤리적 위치를 벗어날 때 모든 것을 조화로운 상태로 합리화하여 결국 신자유주의 질서의 세계화를 묵인 내지 방조하게 된다. 그러므로 필자는 자본주의적 가치의 유입이 가져오는 파괴성에 대한 윤리적 비판을 담아내고자 했으며, 그러한 비판이 외부자의 안타까움만이 아니라 내부자들 안에서도 공감을 얻어내고 있는 것임을 제시하고자 했다. 또한 이러한 주제 의식은 필자 자신의 변화도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낯설음'과 '낯익음'의 전도 과정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몽골인들의 종교적 세계를 글로 풀어내는 노동에 지쳐가던 어느 날 밤 문득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 날 내내 한 번도 흙을 밟고 걸어본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기억의 시계를 세밀히 돌려 가며 아침부터 걸었던 길을 되밟았지만 콘크리트 바닥과 아스팔트 길 만이 이어질 뿐이었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런 날이 몇 주 동안 계속되었다는 것이었다. 자연에 대한 종교적 감각을 논하는 삶의 자리는 그렇게 자연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었다. 그것을 자각한 순간 도시의 삶이 낯설어졌고, '스스로 그러한' 자연을 막힘 없이 드러내는 몽골의 하늘, 초원, 산, 호수, 강이 낯익게 다가왔다. 산업사회의 이기(利器) 없이는 하루도 견디지 못할 것 같은 필자의 삶이 낯설어졌고, 자연 안에서 신과 더불어 자유로운 몽골인들의 삶이 낯익은 현실로 다가왔다. 이제는 낯익은 세계, 낯익은 사람들이 묻는다. "당신들의 소유는 우리의 존재보다 행복한가?" 그 질문을 듣게 하고 대답을 찾게 하는 것이 변화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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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urray Bookchin, 『사회생태주의란 무엇인가』, 박홍규 역(서울: 민음사, 1998), 278쪽.
2) 앞의책, 121쪽.
3) Rosaldo, 앞의 책, 93쪽.
4) 발지르는 전직 군인 출신으로 6년전에 샤먼이 되었다. 그는 조상의 엉거트와 자연의 엉거트를 반반씩 섬기고 있었고, 필자 일행을 위해 밤새도록 진행되었던 굿에서는 지역의 엉거트 셋을 불러냈다. 그의 연행은 흑샤먼의 변신 모티프를 인상적으로 보여주었다. 하지만 굿이 끝난 후 그는 타이가 숲의 고립된 전통 샤먼이 아니라 세계의 흐름과 변화를 읽고 있는 현대적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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