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7월 혁명(1830년)
당시의 국왕 샤를 10세는 프랑스 혁명의 단두대에서 사라진 루이 16세의 동생으로서, 1824년 루이 18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입헌정치를 인정하지 않고, 구제도(舊制度)에로의 복귀를 원하여 극단적인 반동정책(反動政策)을 실시하였다. 이에 대하여 부르주아와 세력을 중심으로 한 국민의 반대는 높아졌고, 20년대 후반의 경제위기로 국민의 불만은 더욱 증대되었다. 29년 성립된 폴리냐크내각(內閣)은 반동정책을 한층 더 강화하였으나, 반대세력은 30년 5월 총선거에서 하원에 대량 진출하였다. 이에 샤를 10세는 의회를 해산시키고, 7월 선거를 실시하였으나 또다시 반정부세력이 다수를 점하였다. 결국 왕은 당시 알제리 진출에 성공한 여세를 몰아 강압수단을 취하고, 1830년 7월 25일 소위 7월 칙령을 발표하였다. 그것은 출판 자유의 정지, 하원의 해산, 선거자격의 제한 등을 포함하고 있어, 혁명의 기폭제(起爆劑)가 되었다. 26일 자유주의 저널리즘은 공공연히 반항할 것을 호소하여, 27일 소(小)부르주아 •기능공 •노동자 •학생 등 파리의 민중은 바리케이드를 치기 시작하였고 곧 군대와 충돌이 시작되었다.
28일 바리케이드의 수가 늘어가고 종래 금지되었던 삼색기(三色旗)가 나부꼈으며, 시가전은 격화되었다. 군은 알제리에 파견되어 있었기 때문에 병력이 모자랐고 탄약보급이 불충분하였으며 복잡한 시가지에서는 행동이 제약되고, 배반자가 나오는 등 형세는 점차로 정부측에 불리하게 되어갔다. 29일 민중은 왕궁으로 침입하였고, 시가전은 정부측의 패배로 끝났다. 이 혁명의 나날(27∼29일)을 ‘영광의 3일간’이라 부른다. 바리케이드로 싸웠던 민중과 그 지도자 가운데에는 공화주의자도 있었으나 입헌왕정파의 자유주의 부르주아 세력은 오를레앙가(家)의 루이 필리프를 추대하여 민중운동을 교묘하게 수습하였다. 샤를 10세는 7월 칙령의 철회 및 내각교체로서 타협을 시도하였으나 거절당하고 8월 2일 손자 보르도공(公)에게 양위하고,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부르봉 왕조의 존속은 허용되지 않았고, 8월 7일 하원은 공위(空位)를 선언하고 루이 필리프를 왕위에 앉혔다. 9일 새로운 왕은 이를 수락, 새로운 헌장을 지킬 것을 맹세하였다. 이리하여 루이 필리프 1세하에서 7월왕정이 성립되었고, 혁명은 보수적인 입헌왕정(立憲王政)을 자유주의적인 입헌왕정으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프랑스혁명 이래의 대(大)부르주아 지배체제를 정비하였다.
7월 혁명은 유럽의 각 국에 영향을 미쳐서 각 국에서는 혁명 운동이 발생하게 되는데,먼저 1831년에 벨기에(Bergie)의 독립이 이루어지게 된다. 당시 벨기에는 비인 회의의 영향으로 네덜란드에 통합되어 있었는데 구교로서 농업국인 벨기에와 신교이고 상업국인 네덜란드 사이에서 대립이 생기게 된다. 1830년 8월 브뤼셀의 한 극장에서 폭동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독립 운동이 시작되는데 10월에 독립 선언을 하고 1831년 1월에 런던 국제 회의에서 독립을 승인하였는데 영세 중립국의 성격을 지녔다.
벨기에의 뒤를 이어 펄란드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등지에서 독립 운동이 일어났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 하였고 1832년 영국에서는 '혁명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그것은 제 1차 선거법 개정(Reform Bill, *ACT는 통과된 법을 말함.)이었는데 이 개정은 오랫동안 상원에 의해 부결되는등 많은 논의를 거쳤으므로 Bill이라 칭한다. 두산 백과 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