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보우르
1720년 사보이 공국의 왕가가 사르데냐 섬을 얻은 후 국명을 사르데냐 왕국으로 정했다. 샤르데냐 왕국의 카보우르는 국내 정치를 안정시키고 국력을 강화한 후 1859년 프랑스 나폴레옹 3세 à 의 지원을 약속받아 오스트리아에 대하여 통일 전쟁을 일으켰다. 이후 이탈리아는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전쟁을 틈타 베네치아를 합치고, 프로이센 · 프랑스 전쟁을 이용하여 교황령을 점령함으로써 통일이 일단락되었다. 통일의 중핵이 되어 1814년 제노바를 합병하고, 1859년 롬바르디아 지역을, 1860년 이탈리아 반도 중부 및 남부의 여러 나라들을 병합하였으나, 그 대가로 니스 및 사보이 지역을 프랑스에 할양하였다. 1861년 사르데냐 왕국은 이탈리아 왕국이 되었다.
니스를 프랑스에 양도한 카보우르의 조치는 주세페 가리발디와 날카로운 충돌을 불러일으켰다. 니스는 대중적 영웅 주세페 가리발디의 출생지였기 때문이다. 알프스 쪽 방어벽을 넘겨줌으로써 생긴 손실을 보충하려면 교황을 희생시켜 중부 이탈리아와 양(兩)시칠리아 왕국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카보우르는 평온한 유럽에 너무 자주 파문을 일으키는 유럽 외교의 말썽꾼으로 간주되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의 지지를 받기는 했지만 이제는 그런 일을 주도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카보우르가 마지못해 활동을 멈춤으로써 발생한 교착상태를 해결한 것은 가리발디였다. 그는 유명한 천인대(千人隊)를 이끌고 시칠리아로 가서 남부 이탈리아의 부르봉 지배권력을 파괴했다. 피에몬테의 카보우르의 과감한 외교정책은 '붉은 셔츠의 영웅'으로 불린 가리발디가 이룩한 군사적 업적에 의해 일시적으로 퇴색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점은 이제 처음으로 온건한 군주제 이탈리아와 혁명적 공화제 이탈리아의 대립적 구도가 처음으로 가시화된 데 있었다. 분열의 위험은 가리발디의 관용과 양식, 그리고 카보우르의 외교적 책략 덕분에 피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에 대해서는 가리발디의 공격에 대항해 교황령의 마지막 영토를 수호하는 자로서, 그리고 유럽에 대해서는 과격한 혁명에 대항하여 법과 질서를 옹호하는 자로서 입장을 세운 카보우르는 '두 세계의 영웅'을 저지하고 2개의 이탈리아를 하나의 통일된 왕국으로 합치기 위해 마르셰와 움브리아를 가로질러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휘하의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수도를 설정하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카보우르는 로마만이 새로운 국가의 수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구상은 그의 일생을 통해 가장 까다로운 문제에 직면하게 만들었다. 즉 일단 로마가 이탈리아의 수도가 되면 가톨릭의 우두머리인 교황의 지위를 어떻게 하느냐는 문제였다. 카보우르는 진심으로 교회와 국가의 분리이념을 받아들여 교황청과의 협상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는 교회의 자유가 세속적 권세를 포기하고 로마를 이탈리아 국가에 양도하는 것을 의미하더라도 이것이야말로 세계 혁신의 지렛대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완전히 영적인 교회와 교황권이야말로 인류를 부활시킬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 제안에 대한 피우스 9세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카보우르는 10년 동안의 열정적이고 쉼 없는 활동을 통해 한 국가를 탄생시킨 뒤, '자유국가의 자유교회'라는 공식을 열렬히 추진하던 중 중병에 걸려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