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그 짐멜(1858~1918)의 생애
미국에서 그의 영향은 각별히 강했다. 짐멜의 친한 친구이자 후원자는 막스 베버였다.
게오르크 짐멜은 독일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이다. 그는 문화철학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형식적 사회학과 문화 사회학의 창시자이다. 짐멜은 철학적으로는 삶의 철학과 신칸트학파의 전통에 속해 있었다.
그는 1858년 3월 1일 독일제국의 수도인 베를린에서 한 상인 집안의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서 1918년 9월 26일에 대학 교수로 봉직하던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세상을 떠났다. 짐멜의 부모는 유대인이었다. 아버지는 일찍이 유대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 그의 어머니 역시 어린 시절에 개신교로 개종했다. 짐멜은 어머니를 따라서 개신교의 세례를 받았으나 제1차 세계대전 때 교회에서 탈퇴했다. 이는 세계관적으로 구속되지 않으려는 그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유대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짐멜의 삶은 곳곳에서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짐멜의 아버지는 베를린에서 초콜릿 거래 회사를 설립했으나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에 회사를 잘 경영할 수 없었으며, 가족의 삶도 넉넉할 수 없었다. 짐멜이 아직 성년이 되기 전인 1874년에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가족의 친구이던 음악 출판업자 율리우스 프리드랜더가 그의 후견인이 되었다. 그는 나중에 짐멜을 입양하여 재산을 물려주었다. 그 덕분에 짐멜은 계속되는 불운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 세계에서 생존할 수 있었다.
베를린의 한 김나지움(독일의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대학자격 시험(아비투어)을 치룬 후 그는 베를린 대학에서 역사학, 민족 심리학, 철학, 예술사 및 고대 이탈리아어를 공부했다. 그는 1881년 박사학위를 하고 1884년에 베를린 대학 철학부에서 교수자격 취득 시험(하빌리타치온)을 취득하게 되는데, 박사학위 취득과정과 마찬가지로 이 과정도 순탄치 못했다고 한다. 대학교수 자격을 취득한 이후 1885년 1월에 ‘윤리적 이상이 논리적 이상 및 미학적 이상과 갖는 관계에 대하여’라는 공개 취임강연과 더불어 베를린 대학 철학부에서 사강사로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그는 다양한 분야에 걸쳐 왕성하게 책과 글을 썼으며 그의 강의는 수많은 청중을 끌어 모으고 매료시켰다. 그는 이러한 사실 때문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받았다고 한다. 그 결과 비정상적으로 오랫동안 사강사 직위에 머물러 있었다. 1898년에 베를린 대학 철학부는 프로이센 왕국 교육부에 짐멜을 부교수로 승진시켜줄 것을 건의했으나 그가 유대인이라는 사실과 아카데미 세계에서 아웃사이더라는 사실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2년 후에 프로이센 왕국 교육부는 베를린 대학의 두 번째 건의를 받아들여 그를 부교수로 승진시켰다. 그러나 전혀 보수도 없고 아무런 권리도 주장할 수 없는 자리였다고 한다. 정교수가 된 것은 그로부터 14년 후인 1914년의 일이었고, 이 때 짐멜은 이미 56세였고, 세상을 떠나기 불과 4년 전이었다.
그는 1890년에 화가이자 작가였던 게르투르트 키넬과 결혼해서 슬하에 한스 오이겐이라는 외아들을 두었다. 부인인 게르트루트 짐멜은 철학적 저술가로서 활동했다. 남편보다 20년 더 오래 살았으며, 1922년에는 예술과 관련된 짐멜의 글을 모아서『예술철학에 대하여: 철학적 및 에술철학적 논총』이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베를린에 있었던 그들의 집은 정신적 교류의 장소가 되었는데, 거기서 예컨대 라이너 마리아 릴케, 에드문트 후설, 하인리히 리케르트, 막스 베버가 만났다. 그는 1908년 막스 베버의 추천에도 불구하고 역사가 디트리히 쉐퍼의 반유대적 추천서 때문에 하이델베르크 대학 임용을 거부당했다. 짐멜의 영향은 그의 전공들을 훨씬 뛰어 넘었다. 그의 영향은 후대의 지식인들에게 찾아볼 수 있다. 독일에서 게오르크 루카치, 마르틴 부버, 막스 셀러, 칼 만하임이 있으며, 더 나아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구성원들도 있다. 그리고 젊은 에른스트 블로흐와도 지적인 친분이 있었다.
그는 페르디난트 퇴니스, 막스 베버, 베러너 좀바르트와 함께 1909년에 독일 사회학회를 창설했다. 그는 미국 사회학 잡지(American Journal of Sociology)의 공동 편집자이자 기고자였으며(종교에 대한 그의 상대주의적 태도와 유대인 출신, 그의 국제적인 성향, 그의 학문적 스타일 때문에 독일에서 큰 인정을 받지 못한 반면, 미국에서 그의 영향은 각별히 강했다) 뒤르깽의 사회학 연보(Annee sociologique )의 공동 기고자이며 르네 웜이 창건한 국제 사회학 협회(Institut Internationale de Sociologie. )의 일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