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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버트런드 러셀 (Bertrand Russell; 1872~1970)

작성자창해|작성시간12.05.17|조회수494 목록 댓글 0

버트런드 러셀 (Bertrand Russell ; 1872~1970)의 생애

 러셀은 수학과 분석 철학(물음의 근간을 이루는 언어를 논리적으로 명료히함으로써 그 물음에 대답하는 철학의 형태)에 기초를 놓은 저작들로 이름을 떨치고 현재까지도 영미철학에 강력한 영향을 주고 있는 수학자, 논리학자이자 철학자였다. 또한 그는 도덕 이론가, 정치적 행동가, 교육 개혁자이자, 일반인들에게 너무 전문적이라고 생각되었던 과학 개념들을 재능있는 필치로 대중화시켰던 사상가였다.   

그는 세살 때 양친을 여의고, 조부인 존 러셀 경(전직 수상이자 자유주의자)의 집에 살면서 훌륭한 개인 교사들에게 교육을 받았다. 정치적으로는 자유주의적이지만, 종교적으로 보수적이고, 엄격하며 다소 케케묵은 가풍속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고 그 나이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 거의 접촉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이러한 양육 환경에 대한 반항이 그의 삶의 많은 부분에 영향을 주었던 것같다. 그는 조부의 종교를 거부했으며, 생애에 걸쳐 종교란 낡고, 전통적이고 재단적이며, 미신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청소년기의 러셀은 내성적이어서 심지어 삶을 증오해 자살까지 생각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하지만 수학을   알고 싶어서 자살 충동을 거두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러셀의 자유주의적 교육 이론은 격식으로 가득한 그 자신의 교육에 대한 거부였으며 그의 윤리적인 저작(특히 성에 대한 그의 견해)은 그러한 교육 내용에 대한 거부였다.

1890년에서 1895년까지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과 철학을 전공하였다. 한편 짧은 기간동안 외교관 생활을 하기도 하였고, 베를린에서 독일 사회민주주의에 관해 개인적으로 연구하기도 했다. 그 이후에 러셀은 대학 교수의 생활로 들어서게 된다. 그는 또한 하버드, 옥스퍼드, 런던, 베이징,시카고, 로스엔젤레스 등의 대학에 초청 교수로 있었으며, 1911년 이래로 왕실 학회 회원으로 있었다. 성과 결혼, 교육, 종교 문제에 관해서 매우 진보적인 의견을 발표한 것이 화근이 되어 뉴욕 시립대학의 교수에 취임하지 못하기도 했다.

그는 매우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졌으며 그 업적도 풍부하다. 많은 학술 강연과 출판 활동, 그리고 학문적 작업들을 통해서 논리학, 수학, 이론물리학, 윤리학, 인식론, 철학사, 무신론, 교육학, 현대사, 사회이론 등 여러 주제들을 다루었다. 그는 50권이 넘는 책들과 500편 이상의 출판물을 발표했다 1950년에 휴머니즘과 사상의 자유라는 점에서 다방면에 걸친 뛰어난 작품을 썼다는 이유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1951년에는 영국 문화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는 세계 1차 대전을 일종의 대중의 광기라고 보았으며 1918년에는 평화주의 활동으로 인해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다. 그는 1965년까지 영국 노동당의 당원이었고, 한때 사회주의를 옹호했다. 세계 2차 대전 후에 그는 핵무기 감축을 지원하고 베트남 전쟁에 항거하는 운동을 이끈 지도자였다. 1931년에 그는 두번째 아내와 함께(그는 네번 결혼하고 세번 이혼했다) 실험적인 진보 학교를 창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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