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와 배경
토머스 홉스는 1588년 스페인 무적 함대가 영국 해안에 출몰하던 공포 분위기 속에서 4월 5일 잉글랜드 남서부의 맘즈베리 근교에 있는 한 작은 마을에서 시골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스페인 함대의 침공 소식에 놀라 그의 어머니는 그를 조산했다고 한다. “내 어머니는 나와 공포 이렇게 쌍둥이를 낳았다.”고 후에 자서전에서 고백하고 있다. 그는 고향에서 학교를 다닌 후 맘즈베리의 한 사립학교에서 고전어를 배웠다. 그는 일찍이 이상 성격을 지닌 아버지와 결별하고 유복한 숙부의 후원으로 15세 때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하여 고전어와 스콜라 철학을 전공하였다. 고전어 연구의 결과는 그의 문학적 작업의 최초의 성과인 그리스 역사가 투키디데스의 『펠레폰네소스 전쟁사』의 번역(1629년 발간)이었다. 이와 같이 권력 정치에 대한 훌륭한 해설서에 몰입한 것이 홉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고찰해 불 만한 가치가 있다.
1608년 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후에 데본셔 백작이 된 카벤디쉬 남작의 집에서 가정교사로 일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그는 얼마 동안 프랜시스 베이컨의 개인 비서로 일하기도 했다. 베이컨은 처음으로 과학은 실제상의 성과를 낳기 위해 이용되어야 할 귀납적 학문이란 것을 설득력 있게 제창한 사람이다. 그는 몇 차례의 짧은 기간을 제외하면 거의 수십 년 동안 카벤디쉬 가문을 위해 일한다. 그는 자신이 가르치던 남작의 아들과 함께 외국 여행길에 오른다. 1629년에서 1634년에 걸친 여행에서 그는 당대 학계의 뛰어난 인물들과 교류할 기회를 얻게 되는데 이들은 그의 자연과학 연구를 촉진시키고 그의 철학 사상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이탈리아에서 그는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만나고 프랑스에서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데카르트(15%-1650), 수학자인 메르센느(1588-1648), 철학자이자 자연과학자인 피에르 가생디(1592-1655) 등과 교류한다. 이 시기에 그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수학자 유클리드(B.C.,3oo년경)의 『기하학 원론』을 읽게 되는데 이것은 그의 학문과 사상에 길잡이 역할을 하게 된다. 기하학적 증명에 깊은 감명을 받은 홉스는 단지 기하학적 사상뿐 아니라 모든 사상이 공리적 체계로 표현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도달하였다.
홉스는 처녀작 『법학 요론』을 쓰고 국왕의 절대 주권을 옹호하여 왕당파의 환영을 받았으나, 의회파의 미움을 산 그는 1640년 정치적 분규를 피해 파리로 망명하여 그 후 이 곳에서 11년간 머무른다. 여기에서 그는 후에 국왕이 될 찰스 2세에게 2년간 수학을 가르친다. 1642년 그는 3권으로 계획된 그의 주저 <철학 원리>의 제 3부에 해당하는 국가에 관한 이론인 『시민론』을 발표한다. 크롬웰 통치하의 영국으로 돌아 오기 직전 그의 유명한 저서 『리바이어던』(1651)이 발표된다. 이것은 영어권 정치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저술들 중 하나로 인정받고 그 이후 몇 년간 홉스는 자신의 주저의 제1부와 제2부인 『물체론』(1655)과 『인간론』 (1658)을 저술한다. 1666년년 왕정복고가 이뤄지자 찰스 2세는 그에게 연금을 주고 궁정 출입을 허용했다. 1668년 탈고된 『비히모스』는 그가 경험한 시대의 역사를 분석적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출판 금지 처분을 받아 1889년에야 간행된다. 죽기 직전 그는 호메로스(B.C. 700년경)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영어로 번역한다. 그는 1679년 12월 4일 하드워에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