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노트
보고 또 봐도 신기한 식물이다.
꽃을 피우는 일도 쉽지 않겠지만, 열매를 맺는 일은 더욱 쉽지 않은가 보다.
꽃이 진 자리에는 기대했던 열매 대신 공허만 남아 있다.
검게 남은 자욱은 지나간 시간을 말해 주고, 그 모습을 바라보다 보니 세상살이와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에게는 결실이 있고, 누구에게는 없다.
같은 계절을 지나도 결과는 다르다.
그래서일까. 이왕이면 열매이고 싶다는 마음도 생긴다.
그런데 가만히 바라보니 열매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다.
푸르름이다.
꽃은 졌어도 잎은 더욱 짙어지고 있다. 오히려 지금이 푸르름의 절정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잎들은 아무 말 없이 숨을 쉬고 있다.
문득 푸르름은 청춘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꽃이 설렘의 시절이라면 푸르름은 한창 살아가는 시절이다.
그리고 열매는 다음 세대를 향한 약속인지도 모른다.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계절.
한때 소나기라는 일기예보가 있듯,
내 인생에도 비라는 단어는 자주 등장하겠지.
오늘은 맑음.
오후 한때 비.
매우 긴 가뭄.
매우 긴 장마.
삶의 날씨는 늘 바뀐다.
예전에는 맑은 날만 원했지만 이제는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어느 날씨이든 잘 살아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
비를 피하는 사람보다 비를 견디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할미 고개도 이제 시작일까.
세월은 어느새 뒤를 돌아보게 하지만, 식물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꽃이 없어도 살아 있고, 열매가 없어도 푸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잎이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초록은 앞서 희망을 말해준다.
편안한 시선.
그리고 안정감.
초록은 조용히 말한다.
아직 괜찮다고.
오늘도 잎은 숨을 쉬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