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키
초록 노트를 꺼내 놓고
한 줄도 적지 못했다
손글씨는 없고
빈 페이지 한 장
그런데도
가만히 앉아
오솔길 하나를 걸었다
새소리 곁에 머물고
바람소리에 귀 기울이며
꽃들의 유혹 앞에서
몇 번이고 걸음을 늦추었다
기억하지 않은 문장
스쳐갈 문장이어도
행복한 순간의 숨이 되어
내 안을 지나갔다
남겨지지 않았다고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자라난 것은
문장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바람을 맞으면서도
저마다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들
그 틈에서
나는 오늘도
남들이 보지 못한 작은 빛 하나를
주머니에 넣고 돌아왔다
무명이라 불러도 좋다
들꽃이 이름을 알리려
피는 것은 아니니까
가만히 웃어 본다
재야의 고수라며
혼자 거짓말도 해보고
그 거짓말마저 즐거운 저녁
어쩌면
시를 쓴다는 것은
세상이 키워 주지 못한 만큼
마음의 키를
조금씩 키워 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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