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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家산책

천재 시인 백석의 최후

작성자갈대의 영혼|작성시간16.01.17|조회수394 목록 댓글 0

 

천재 시인 백석의 최후

카테고리 : 좋은 문학 | 작성자 : harrison

 

 천재 시인 백석이 1950년대에 쓴 시 비평문 등 글 4편이 새로 발견됐습니다. 이번에 발견된 시 비평문은 현재까지 알려진 백석의 유일한 시 비평문입니다. 비평문에서 백석은 동시와 문학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습니다. 그는 “어린이들의 세계와 관계된 시어는 단순 소박 순진해야 하며 맑아서 밑이 환히 꿰뚫려 보이고, 다치면(건드리면) 쨍 소리가 나는 그런 말이어야 할 것”이라며 “문학은 우주, 자연과 인간사회의 아름답고 깊고 먼 것들을 감동 속에 사색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1957년 백석은 ‘부르주아 문학’이라는 비난과 함께 사실상 당의 취조를 받았고 1958년 겨울 삼수갑산(三水甲山)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오지인 함경남도 삼수군에 ‘현지파견’ 명목의 유배를 갑니다. 백석은 1995년까지 생존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세상을 뜰 때까지 삼수군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기온이 뚝 떨어져 코 끝이 맵싸하고 서울 청계천 걷는 어깨들이 잔뜩 움츠려있습니다. 추위에 실려 백석 시인이 생각납니다. 위 사진은 1980년대 중반 北에서 찍은 백석 시인 가족사진입니다. 아마 백석 시인이 70대 중반일 무렵으로 여겨집니다. 오른쪽 아래가 백석이며 옆이 부인 이윤희 씨. 뒤는 둘째 아들 중축 씨와 막내딸. 70대의 노구이지만 꼿꼿한 풍모는 여전하십니다.

 

인민복에 손마디 굵은 두 주먹을 무릎위에 얹고 온유한 낯빛으로 카메라를 주시하는 그의 시선은 지식인의 한 전형 그대로 입니다. 한때 이목구비 훤칠하고 ‘고흐의 보리밭’ 같은 헤어스타일로 조선 최고 ‘모던보이’로 회자됐던 백석의 젊은 시절 모습이 중첩됩니다. 토속적 시심을 토착어에 가득 실어 밤하늘 은하수처럼 흐르던 그의 서정성. 북의 획일주의 문학 구도 속에서 여의치 않았을 것입니다.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해지고 애잔해집니다.

 

 

분단 이후 백석의 시 세계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습니다. 20세기 전반 조선반도 최고의 엘리트이자 모더니스트였던 선생은 우리민족 고유의 언어를 가장 풍부하게 구사한 최고의 시인입니다. 백석의 시편들은 향토성이 넘쳐났으나 단아했고 자유스러웠습니다. 얽매임이 없었고 인위적인 恨을 담지 않았습니다. 매우 현대적이었고 민족 자존감이 묻어났습니다.

 

1990년대 들어 한국 문단의 본격적 재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남과 북이 시인 관련 정보를 자유롭게 공유한다면 그의 인생 후반기 문학적 발자취는 또 다른 문학의 보고로 다가올 것입니다.

 

#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 백석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잠풍 날씨가 너무나 좋은 탓이고
가난한 동무가 새 구두를 신고 지나간 탓이고
언제나 꼭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운 사람을 사랑하는 탓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또 내 많지 못한 월급이 얼마나 고마운 탓이고
이렇게 젊은 나이로 코밑수염도 길러보는 탓이고
그리고 어느 가난한 집 부엌으로 달재 생선을 진장에
꼿꼿이 지진 것은 맛도 있다는 말이 자꾸 들려오는 탓이다.

……………………………………………..
·잠풍 날씨 : 잔잔한 바람이 부는 날씨
·달재 : `달강어’의 방언(평북, 함남). 바닷물고기
·진장 : `진간장’의 준말
. 1938년 5월 발표

 

젊은 백석 시인이 바람 불어 기분 좋은 거리를 걷고 있습니다. 간섭받지 않아 홀로 휘파람이 절로 나옵니다. 가난한 친구가 새 구두를 신고 나타나니 함께 신이 납니다. 넥타이 매고 일할 수 있고 쥐꼬리만한 월급은 그나마 큰 위안입니다. 마음은 풍류가 넘쳐 멋쟁이 모습 절로 배여 있습니다. 콧수염 길러보고 헤어스타일도 한 맵시 합니다. 마음속에 꼭꼭 숨겨놓은 연인이 살아 숨쉬니 행복합니다.

 

부엌서 음식 만들기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시인은 음식 재료 하나, 그 내음새 하나, 거기에 깃든 이야기 하나 마다 시를 새겨놓습니다. 거대담론 보다 일상의 행복에 더 눈길을 주었던 백석은 일제 강점기 초라한 시대에도 민족어의 품격을 지켜내었습니다.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 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서해바다를 건넌 구름이 갯가 포구에 눈을 뿌립니다. 도시에 지친 마음, 상처받은 심사가 하루쯤 남몰래 잠입하고 싶은 곳. 하얀 눈 나리는 마음 속 외딴 포구. 깊은 밤 몇 남지 않은 가로등 불빛도 흰 눈발에 가려 처연합니다. 겨울 바다 눈발은 활개 치듯 푸드득거리다 차디찬 바다 속 으로 스며듭니다.

 

雪 國
일찌기 백석이 펼쳐놓은 우리들의 설국은 이렇게 숨겨져 있습니다.  분단에 의해 묻혀졌던 천재시인 백석. 북쪽 지역서 활동했다는 이유로 그는 한동안 금지된 이름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1990년대 이후 알려졌습니다. 1912년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태어난 백석은 월북시인도 아니고 납북시인도 아닙니다. 어쩌면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을 지킨 ‘재북시인’ 입니다. 1963년께 사망한 것으로 잘못 알려졌으나  1995년 84세로 돌아가셨습니다. 

 

위 시는 백석의 작품 중 우리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시로 스물일곱 살 때 발표되었습니다. 함흥 영생고보의 영어교사였던 백석은 시인이면서 조선일보 기자, 번역가, 해방 후에는 민족 지도자 고당 조만식 선생의 통역 비서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백석의 시들은 발표 때부터 문단의 화제를 모았는데 1930~40년대 당시 문단의 형식주의 엄숙주의를 탈피했습니다. 평안도 사투리를 그대로 차용한 솔직담백한 시풍은 현대적 서정시의 전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당대 최고의 엘리트이자 모더니스트였던 백석의 시편들은 식민지 시절의 암울함에다 외래사조에 겉멋 든 시들과 확연히 차별화되었습니다. 그 풍부한 고유 한국어의 세계는 지금으로선 읽기가 난해하지만 이슬방울 같은 서정이 뚝뚝 흘러내립니다. 향토적 토속 언어로 독보적인 시적 영토를 확보합니다.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에는 한국어로 구축한 ‘시적 설국(雪國)’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흰 눈, 하얀 밤, 하얀 산골, 폭설로 지붕이 덮힌 작은 마가리(오두막), 하얀 망토를 두르고 나타날 것 같은 나의 여인 나타샤, 나와 나타샤 둘만의 곡진한 사랑. 그 사랑은 현실서 이루어지지 못해 애닯습니다. 이 애련(哀戀)을 훤히 다 알고 있는 순종의 흰 당나귀. “응앙응앙”소리는 당나귀의 울음소리라기보다는 새하얀 세레나데지요.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린다” 애써 큰소리는 쳐보지만 슬픈 나르시시즘, 자기 위안의 한 자락입니다. 본시 사랑의 도피란 이런 취중의 작심과 자기연민 속에서 출렁거리지요. 빛바랜 한지 그림 한 편 같은 노릇노릇한 향수. ‘백석시인 마을에 내리는 흰 눈’에 갇혀보고 싶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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