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독당한 최초의 모더니스트 李箱
「오감도 제1호」에서「날개」까지
1933년 늦여름 어둑어둑해질 무렵. 백단화(白短靴)에 평생 빗질 한 번 해본 적 없는 듯한 봉두난발, 짙은 갈색 나비넥타이, 구레나룻에 얼굴빛이 양인(洋人)처럼 창백한 사나이 하나와 중산모를 쓴 곱추로 키가 여느 사람의 반밖에 되지 않는 꼽추, 키가 훌쩍 큰 또 다른 사나이, 이렇게 셋이서 종로를 걸어간다.
“어디 곡마단 패가 들어왔나 본데.”
“아냐. 활동사진 변사 일행이야.”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 기묘한 일행을 보고 한 마디씩 던진다. 백구두의 사나이가 갖고 있던 막대기를 들어 공연히 휘휘 돌려댄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카카카……!” 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스스로 생각해도 저를 포함한 일행의 몰골이 우스꽝스러운 까닭이다. 얼마 전 그들이 백천온천에 갔을 때도 경성에서 곡마단 패가 왔다고 애들이 뒤를 졸졸 따라다닌 바 있다. 이 세 사람 가운데 백단화를 신은 구레나룻의 사나이가 바로 이상(李箱, 1910~1937)이고, 중산모를 쓴 꼽추는 화가 구본웅이다.
스물일곱 나이로 요절한 천재 작가 이상. “한국 현대시 최고의 실험적 모더니스트이자 한국 시사 최고의 아방가르드 시인”1)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상은 어두운 식민지 시대에 돌출한 모던보이다. 그의 등장 자체가 한국 현대문학 사상 최고의 스캔들이다. 알쏭달쏭한 아라비아 숫자와 기하학 기호의 난무, 건축과 의학 전문용어의 남용, 주문(呪文)과도 같은 해독 불능의 구문으로 이루어진 시들. 자의식 과잉의 인물, 도저한 퇴폐적 소재 차용, 띄어쓰기 거부, 위트와 패러독스로 점철된 국한문 혼용 소설들. 그의 모더니즘 문학과 비일상적 기행(奇行)은 이 스캔들의 원소를 이룬다.
시제일호(詩第一號)
13인의아해(兒孩)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 「오감도」, <조선중앙일보>(1934. 7. 24.~8. 8.)
1934년 7월 어느 날, 신문이 배포된 지 채 몇 시간도 되지 않아 <조선중앙일보사>에는 빗발치는 항의와 문의 전화가 쇄도한다. 이미 문단 일각에는 괴팍하고 상식에 벗어난 문제아로 알려졌지만 일반 독자에게는 그 이름조차 생소한 이상이「오감도」를 발표한 직후의 반응이다. 이상은 1931년 7월에서 9월에 걸쳐 『조선과 건축』에「이상한 가역반응(可逆反應)」 외 5편과 일어로 된「오감도」 8편, 그리고「3차각 설계도」 등을 통해 우리 문학 사상 최초로 이성과 의지를 무시한 자동기술법, 숫자와 기하학 기호의 삽입, 난해한 한자와 일어의 사용, 띄어쓰기의 무시 등을 감행한 시들을 선보여 기성 문인들에게 당혹감을 안겨준 바 있다.
그러나 이때까지 그의 작품은 주로 문학잡지가 아니라 한정된 독자를 가진 건축 잡지나 종교 잡지에 발표된 것이어서 크게 눈길을 끌거나 지은이의 이름을 널리 알리지는 못한다. <조선중앙일보>의 학예ㆍ문예부장이던 이태준의 발탁으로 활자 세례를 받은 오감도 연작은 예정된 30회의 반밖에 싣지 못하고 8월 8일 자 신문을 끝으로 15회 만에 중단되고 만다. 「오감도」가 나가는 동안 안주머니에 사표를 넣고 다니던 이태준은 이 사태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이상의「오감도」는 처음부터 말썽이었어. 원고가 공장으로 내려가자 문선부에서 ‘오감도(烏瞰圖)’가 ‘조감도(鳥瞰圖)’의 오자가 아니냐고 물어왔어. 오감도란 말은 사전에도 나오지 않고 듣도 보도 못한 글자라는 것이야. 겨우 설득해서 조판을 교정부로 넘겼더니, 또 거기서 문제가 생겼어. 나중에 편집국장에까지 진정이 들어갔지만 결국 시는 나갔어. 그다음부터 또 문제였어. “무슨 미친놈의 잠꼬대냐.”, “무슨 개수작이냐.”, “당장 신문사에 가서 오감도의 원고 뭉치를 불살라야 한다.”, “이상이란 작자를 죽여야 한다.”…… 신문사에 격렬한 독자 투고와 항의들이 빗발쳐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지.”
당대를 훨씬 앞지른 ‘첨단’, 도저한 정신 분열적 언어의 파행에 독자들은 이토록 거부감을 나타낸다. 당대 사람들의 의식과 정서로는 수용 불가능했던 시「오감도」. 그러나 당대 사람들에게 모독당한 그의 시는 뒷날 구태의 한국문학과는 차별화된 새로운 모더니즘 문학의 진경을 펼쳐 보인 ‘앞선 문학’으로, 한국 현대 문학사에서 불멸의 자리에 각인되며, 후학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준다. 뒷날 시인 이승훈은 이상에게서 “반리얼리즘적 태도, 실존의 현기, 추상성, 자아에 대한 회의”를 배웠다고 고백한다.
「오감도」제1호에 나오는 ‘13인의 아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상 문학 연구자들은 이에 대한 온갖 해석을 내놓는다. “최후의 만찬에 합석한 기독 이하 13인”, “위기에 당면한 인류”, “해체된 기아의 분신”, “이상 자신의 기호”, “인간 역사의 한계성”, “일제하의 13도”, “언어도단의 세계”, “시인의 공포가 아해의 불안으로 투사”…… 그러나 어떤 해석도 시대에 대한 반동 지향의 자의식에서 솟구쳐 나온 ‘13인의 아해’의 상징성을 다 풀어내지 못한다. 21세기 문턱에 이른 현재까지도 이상은 온전히 이해되지 않은 아방가르드이며, ‘첨단’이다.
1910년대 중반 스위스·독일·프랑스에서 일체의 전통과 기성 가치를 부정, 파괴하고자 한 다다이즘(Dadaism), 이어서 1920년대 중반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학을 바탕으로 브르통(Breton, Andre)에 의해 시도된, 기성 윤리와 역사 및 현실 통념을 거부하고 주관적 내면세계를 심리적으로 분석하는 기법을 차용한 초현실주의(Sur-realism). 이 두 가지 이론은 일본에 먼저 알려졌는데, 1924년 고한용이 우리나라에도 소개한 바 있다. 그러나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는 일본에서조차 불온시 된 탓으로 우리나라에 좀처럼 뿌리를 내리지 못하다가 1930년대에 들어 건축 기사 출신의 한 젊은이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도된 것이다. 이상의 시는 현대인의 절망과 불안 심리를 형상화한 것으로 높이 평가되고 찬사도 받지만, 기존 언어 체계와 질서에 익숙하던 일부 문인과 일반 독자에게는 문학에 대한 커다란 모독처럼 여겨진 것 또한 사실이다.
본디 이상은 강릉 김씨이고, 이름은 해경(海卿)이다. 그는 우리나라가 일본에 강제 병합되던 해인 1910년 음력 8월 20일 서울 사직동에서 태어난다. 아버지는 구한말 궁내부 활판소에서 일하다가 손가락 셋이 잘리고서 이발소를 차린 김연창(金演昌)이다. 해경은 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다. 네 살이 되던 해 그는 총독부 상공과 기술관으로 있던 백부 김연필(金演弼)의 양자로 들어간다.
이렇게 백부의 양자가 된 것은 해경이 태어날 무렵부터 급격히 기운 가세 때문이다. 백부는 어린 해경에게 엄격하면서도 자애로운 부성애를 베풀지만, 백모는 이와 달리 증오와 소외를 맛보게 한다. “오빠는 세 살 때, 웃는 큰어머니를 보고 무서워했대요. 그렇다고 울거나 하는 일은 없고 슬금슬금 문밖으로 숨었대요.” 누이동생 김옥희가 전하는 말이다. 그의 어린 시절은 여느 아이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지나치게 흰 얼굴 때문에 동네 아낙네들이 “흰둥이, 흰둥이!” 하고 부른 것 정도가 얘깃거리랄까.
해경은 여덟 살 때 인왕산 밑에 있던 신명학교에 들어간다. 당시만 해도 취학 적령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아서 입학생 중에는 스무 살짜리 젊은이도 끼어 있었다고 한다. 교과목은 조선어·일본어·산수·지리·수신·체조·도화·습자로 짜여 있었는데, 해경은 지리(地理)와 도화(圖畵)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지만 체조는 몹시 싫어했다고 한다. 다음은 백모가 전하는 말이다. “그 애는 그림에 빠져 있기 일쑤였어요. 길가에 버려진 화투 목단 열 끗짜리를 똑같이 그려내서 사람들을 놀래기도 했지요. 내가 환쟁이는 상놈이라고 막무가내로 혼내고 말려도 소용이 없었어요. 그 애는 혼자 있을 때면 늘 무언가를 그리곤 했어요.” 해경의 그림 소질은 화가 고희동이 미술 교사로 있던 보성고보에 다니면서 꽃을 피우게 된다.
보성은 도상봉, 이종우, 장발, 고유섭 같은 화가들을 배출한 학교다. 그런데 해경이 처음부터 보성에 진학한 것은 아니다. 먼저 다니던 동광학교가 문을 닫으면서 단체로 편입하게 된 학교가 보성고보인 것이다. 보성 시절에도 그는 여전히 체조를 싫어하고, 그림을 그릴 때만 마치 “강신(降神)한 것처럼” 눈빛이 번쩍거린다. 보성의 미술 친화적 환경 덕분에 그의 재능은 이윽고 빛을 보게 된다. 보성고보 교내 미술 전람회에서「풍경」으로 1등상을 차지하는 것이다. 몇 해 뒤 해경은 조선 미술 전람회에「자화상」을 내놓아 입선하기도 한다.
의탁하고 있던 백부의 가세마저 기울자 해경은 학교에서 현미빵을 팔며 고학을 한다. 보성고보를 졸업한 그는 진로 문제로 고민에 빠진다. 그가 식민지 건축 기술자 양성을 위해 세워진 경성고등공업학교(서울공대의 전신)에 들어간 것은 백부의 소망 때문이다. 백부는 그를 설득한다. “해경아, 앞으로 너는 건축과를 가야 한다. 나도 병들고 네 아비도 늙고 가난하지 않으냐. 적선동(해경의 친가)은 식량이 떨어질 때도 많은 모양이더라. 세태가 아무리 바뀌어도 기술자는 배는 곯지 않는단다. 그러니 가난한 환쟁이는 안 돼.” 이상이「오감도」, 「삼차각 설계도」,「건축 무한 육면각체」등 건축과 깊은 관련을 지닌 표제어를 자주 쓰고, 아라비아 숫자와 기하학 기호 등을 시어로 차용하고 수식(數式)보다 난해한 시들을 쓰게 된 것은 바로 이 고등공업 시절의 영향이다.
이상이 경성고공 건축과를 나왔다는 사실은 잘 알려졌지만, ‘건축가’로서의 그를 다룬 글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문인이기에 앞서 이상은 일본강점기의 건축 기술 전문 인력 양성소이던 경성고공 건축과를 거친 직업 건축가다. 이상은 일본인 학생들을 제치고 건축과를 수석 졸업했으며, 졸업 작품으로「수상 경찰서 겸 소방서 설계안」을 냈고, 폐병이 깊어지며 현장 근무가 힘들어진 1933년 말까지 조선총독부의 직원으로서 공사를 직접 감독·지휘한다. 그러나 이상이 지은 건물이나 설계도면은 남아 있는 게 하나도 없다. 하지만 건축은 분명히 그의 삶을 떠받친 한쪽 기반이며, 그의 문학의 촉매 인자이자 발생론적 근거다.
이상의 내면에서 현실 도피나 자살을 추구하는 병적인 심리가 언제부터 꿈틀거린 것인지 알 길은 없으나 고등공업 시절에 이미 증상이 나타난다. 이런 부분은 건축이나 그림이 아니라 문학을 통해 표출되기 시작한다. 이 무렵의 소설「12월 12일」,「휴업과 사정」과 시「선에 관한 각서」등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이상의 이와 같은 이상 심리가 드러난다. 특히 이상의 작품치고는 기법 면에서 평이하지만, 운명처럼 허무주의 늪에 빠지는 인간형을 그려낸 소설 「12월 12일」의 서문에서, 그는 몹시 강렬한 자살 충동에 시달리고 있으며, 이런 충동을 극복하기 위해 문학을 할 것이라는 ‘무서운 기록’4)을 남기게 된다.
이상의 시가 최초로 활자화된 것은 1931년의 일이다. 1929년 3월 경성고공 졸업과 함께 월급 55원을 받는 조선총독부 건축과 기사로 들어간 해경은 같은 해 12월 건축학지인『조선과 건축』의 표지 도안 현상 모집에 1등과 3등으로 뽑힌다. 바로 이『조선과 건축』 1931년 7월호에「이상한 가역 반응」 등을 발표한 것이다. 해경이 이상이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한 데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김해경이라는 오빠의 이름이 이상으로 바뀐 것은 1932년부터예요. 건축 공사장 노동자들이 ‘이상’이라고 잘못 호칭한 데서 비롯된 것이지요.” 누이동생 김옥희의 말이다. 이상이라는 이름은 총독부 건축 기사 시절 공사장 노동자들이 일본식 발음으로 ‘긴상(金樣)’이라고 해야 할 것을 ‘이상(李樣)’이라고 잘못 부른 데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1929년의 경성고공 졸업 앨범에 이상이라는 필명이 나온다. 따라서 이상이라는 이름은 고공 시절 건축 공사장에 실습하러 갔을 때 노동자가 해경을 이 씨로 알고 잘못 부른 데서 비롯된 듯하다.
1933년 이상은 백부의 양자로 들어간 지 23년 만에 가족과 합치게 되나 불과 보름을 견디지 못한다. 그는 백부의 유산으로 청진동 조선광무소 건물 1층을 전세 내어 ‘제비’ 다방을 개업하고, 백천 온천 여행 중에 만난 술집 여급 출신 금홍을 불러들여 마담으로 앉힌다. 아울러 두 사람은 동거를 시작하는데, 이때 금홍은 겨우 스물한 살이었고, 금홍의 눈에 마흔이 넘은 것으로 비치던 이상은 알고 보면 스물세 살이었다. 이상은 어느 글에서 “나는 추호의 틀림없는 만 25세 11개월의 홍안 미소년(紅顔美少年)이다. 그렇건만 나는 노옹(老翁)이다.”라고 쓴다. 찰나적인 행복감에 젖은 이상은 “우리 내외는 참 사랑했다. 금홍이와 나는 서로 지나간 일은 묻지 않기로 하였다. 과거라야 내 과거가 무엇 있을 까닭이 없고 말하자면 내가 금홍이의 과거를 묻지 않기로 한 약속이나 다름없다.”고도 쓴다. ‘제비’는 당대의 일급 문인이던 이태준ㆍ박태원ㆍ김기림ㆍ정인택ㆍ윤태영ㆍ조용만 등이 즐겨 찾는다.
그러나 ‘제비’ 다방의 경영은 여의치 않았고, 금홍은 외간 남자들과 바람을 피우곤 한다. 이상은 “나는 금홍이의 오락을 도우려고 가끔 P군의 집에 가 잤다.”고 털어놓기도 한다. 여기서 ‘P군’은 아마도 박태원을 이를 터. 금홍의 문란한 남자관계를 방임하던 이상은 때로 금홍의 난폭한 손찌검에 몸을 내맡긴 채 자학을 꾀한다. 어느 날 금홍이 때 묻은 버선을 윗목에 팽개쳐놓고 나가버리고, ‘제비’ 다방은 두 해 만인 1935년 9월 문을 닫는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는 연애까지 유쾌하오.”로 시작되는 소설「날개」는 바로 금홍과의 동거 체험에서 건져낸 작품이다.
1933년 이상은 정지용의 주선으로 《가톨릭 청년》 7월호에 시「꽃나무」와「이런 시」를, 10월호에「거울」을 발표한다. 김기림, 이태준, 박태원 같은 문인과 어울리게 된 그는 1934년 초 ‘구인회’에 가입한다. 그는 곧 구인회 회지인 《시와 소설》의 편집에 관여할 뿐 아니라, 구인회 회원인 박태원의 신문 연재소설「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에 ‘하융(河戎)’이라는 이름으로 삽화를 그리기도 하는 등 글과 그림에 걸쳐 솜씨를 발휘한다. 같은 해 여름, 그는 <조선중앙일보>에 시「오감도」를 발표해 물의를 일으키며 문제 작가로 떠오르게 된다. 이후에도 《중앙》에「소영위제(素榮爲題)」, 《신여성》《월간매신》《신동아》 등에「혈서삼태(血書三態)」와「산책의 가을」등 파격적인 내용과 언어를 실험하는 작품을 잇달아 내놓는다.
이상은 자신의 작품만큼이나 여느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파행적 단면을 보인다. 처음에는 다방 ‘제비’의 얼굴마담으로 금홍을 앉혀놓고, 문우들이 일명 ‘도스토옙스키의 방’이라고 하던, ‘제비’에 딸린 골방에 틀어박혀 술만 마시거나 수염과 머리도 깎지 않은 채 거리를 쏘다니더니, 나중에는 드러내놓고 매춘을 하는 금홍을 멀거니 지켜보기도 한다. 이처럼 피학성을 띤 극도의 자기 폐쇄성은 소설「지주회시(蜘蛛會豕)」에 이어「날개」,「실화」,「봉별기(逢別記)」 등에서 거푸 나타난다.
특히 일인칭 독백으로 시작되는「날개」 속의 ‘나’는 바로 작가 이상 자신으로, 철저하게 고립된 자아와 내면의 고독을 의식의 흐름에 따라 해부하고 있다. 주인공 ‘나’는 아무런 의욕도 없이 골방 속에 틀어박혀, 아내의 화장품 냄새를 맡아보거나 돋보기로 화장지를 태우면서 하루하루를 무기력하고 권태롭게 보낸다. 한편, 이런 남편이 자신의 매춘 행위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한 아내는 그를 ‘볕 안 드는 방’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려고 아스피린을 주는 척하며 수면제를 주기 시작한다. 아내가 하는 짓을 나무랄 뜻이 따로 없는 ‘나’는 아내와 연애 또는 아스피린과 아달린 등을 연구하거나, 자신이 자는 동안 아내가 무슨 짓을 했을까 궁금하게 여기며 공상을 일삼는다. 그러던 중 ‘나’는 문득, 날개가 돋아 현실 세계를 박차고 단 한 번만이라도 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1935년 가을 ‘제비’의 문을 닫은 이후 이상은 인사동에서 ‘카페 쓰루’, 종로 1가에서 다방 ‘69’ ‘무기’ ‘맥’ 등을 열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금홍이 떠나고 얼마 뒤 이상은 다시 여급 출신의 권순옥과 사귀게 된다. 그러나 권순옥을 연모하며 괴로워하던 친구 정인택이 음독자살을 기도하다가 미수에 그치는 일이 생기자, 이상은 권순옥과 정인택을 맺어주고 두 사람의 행복까지 빌어준다.
거듭된 경영 실패, 쇠잔한 몸, 연애의 후유증 등으로 말미암은 고독이 극에 이르자, 이상은 뒤늦게 ‘구인회’에 가입하며 절친한 사이가 된 김유정에게 같이 자살하자는 제안까지 한다. 그는 셋방을 전전하다가 방세를 내지 못해 쫓겨나기도 하면서, 청소부로 일하던 동생의 봉급으로 가까스로 생계를 꾸려나간다. 그러던 중 1935년 말, 화가 구본웅의 추천으로 구본웅의 아버지가 경영하던 <창문사>에서 문예 담당으로 일하게 되어 그나마 형편이 조금 풀린다. 그런데 이상은 여기서 구본웅의 배다른 누이동생 변동림을 만나게 된다. 금홍이나 권순옥과는 달리 이화여전을 나온 평범한 성격의 변동림과도 이상은 무슨 절차라도 되는 양 동거부터 한다. 얼마 뒤 두 사람은 신흥사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황금정(지금의 을지로)에 셋방을 얻어 신혼살림을 차린다.
이때부터 이상은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글쓰기에 매달려 1935년「정식」,「지비(紙碑)」,「산촌 여정」, 1936년「작가의 호소」,「지비 1, 2, 3」,「이단」,「서망율도(西望栗島)」, 「조춘점묘(早春點描)」,「가외가전(街外街傳)」,「여상(女像)」,「명경(明鏡)」,「지주회시」, 「약수」,「에피그램」,「매상(妹像)」,「행복」,「위독」,「봉별기」,「동해(童骸)」,「황소와 도깨비」,「19세기식」등 일일이 꼽기 어려울 만큼 많은 작품을 쏟아낸다. 그러나 결혼한 지 석 달 만인 1936년 10월, 이상은 모든 것을 뒤로하고 일본으로 간다.
고서점들이 늘어선 거리 쪽에 하숙을 정한 이상은 도쿄에서「종생기」,「권태」,「슬픈 이야기」,「환상기」,「실락원」,「실화」,「동경」등을 써낸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도쿄에 환멸을 느끼고 서울에 있는 친구들에게 이런 심경을 편지로 알리기도 한다. 한동안 그는 초현실주의 색채를 보이던 유학생 그룹 《삼사문학》의 동인들과 어울리며 그나마 위안과 자극을 받게 된다. 이상은 알고 보면 김기림과 함께 프랑스로 가겠다는 꿈을 안고 일본 땅에 발을 디딘 것이다. 그러나 이상은 그의 간절한 문학적 열망과는 달리 점점 악화하는 결핵, 여전히 따라다니는 서울의 가족에 대한 부채감과 생계 부담에 부대끼며 몸과 마음이 극도로 피로에 찌들게 된다.
이듬해 2월 12일 이상은 일본 경찰에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검거되고, 얼마 뒤 폐결핵의 악화로 병상에 눕는다. 뒷날 화가 김환기의 아내가 되어 변동림이 아니라 김향안으로 살기도 한 동림이 소식을 듣고 급히 도쿄로 간다. 1937년 4월 17일 새벽 4시, 변동림의 품에 안긴 채, 한국문학의 돌연변이였으며 이단아였던 이상은 황음(荒淫)과 일탈(逸脫)의 기행으로 얼룩진 스물일곱 해에 걸친 삶을 접는다.
“멜론이 먹고 싶소” 요절 천재 작가 이상의 입에서 흘러나온 마지막 말이다.
생전의 이상에게 ‘우리가 가진 가장 뛰어난 근대파 시인’이라고 갈채를 보낸 바 있는 김기림은 그의 죽음에 대해 “제 스스로 혈관을 따서「시대의 서(書)」를 쓴 이상의 죽음이 한국문학을 50년 후퇴시켰다.”며 크게 슬퍼한다. 김기림은 뒷날 자신의 시집『바다와 나비』 속에「우리들이 가졌던 황홀한 천재, 이상의 애도시」와 ‘이상의 영전에 바침’이라는 부제를 단「주피터의 추방」이라는 시를 끼워 넣는다. 이상의 요절은 김기림뿐 아니라 박태원과 최재서 등 그를 아끼던 많은 사람을 안타깝게 만든다. 이상은 20세기 한국 문학사에서 명멸한 숱한 인물 가운데 가장 문제적 인물이며, 그의 연작시「오감도」는 한국 현대 문학사 1백년 동안 나온 작품 가운데 가장 문제적 작품이다. 이상 문학은 그 자체로 20세기 한국 문학사에 내장된 최고의 형이상학적 스캔들이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이상(李箱) - 모독당한 최초의 모더니스트 (장석주, 『나는 문학이다』, 2009. 9.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