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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사이렌의 침묵]에 나타난 신화적 요소 - 한석종

작성자배알|작성시간02.04.12|조회수828 목록 댓글 0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 {사이렌의 침묵} Das Schweigender Sirenen에 나타난 신화적 요소

한 석 종 (경북대학교)


Ⅰ. 서 론


1.1 신화와 카프카 문학

본 논문은 카프카의 단편 속에 나타난 신화 즉 신화적 요소의 내용과 의미를 다루고자 한다. 그 내용과 의미란 옛날부터 전래되어온 신화가 카프카 작품 속에 어떻게 수용되었고 작가가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변용시켰는지 밝히는 일이다. 이 사실을 밝히기 전에 우리는 우선 두 가지 큰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그 첫째가 신화적인 것의 개념 즉 신화가 무엇인지 규명되어져야 하고 둘째로 카프카 자신은 물론 수수께끼 같은 그의 문학작품이 분석되어져야 한다. 이 두가지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그리고 이 논문이 다루어야할 범위를 위해서 다음과 같은 전제가 필요하다.

카프카 작품에 나타난 신화적 요소는 두 종류로 구별되어서 검토되어져야 한다. 그리스 신화에 속하는 작품과 유태인 신화 및 구약성서에 속하는 신화다. 첫째 경우에 속하는 작품으로 {사이렌의 침묵}Das Schweigen der Sirenen,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포세이돈}Poseidon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내용이 난해하고 위에 열거한 것들 보다 내용이 좀 긴 작품인 {사냥꾼 그라쿠스}Der J ger Gracchus도 그리스 신화적 요소들을 지니고 있으므로 첫째 분류에 속한다. 단순한 신화적인 범위를 넘어서서 실제의 고대 이야기를 카프카가 개작한 것까지 고려한다면 {새로운 변호사}Der neue Advokat도 여기에 소속시킬 수 있다.

두 번째 분류에서는 유태인의 신화와 구약 성서적 신화에 속하는 작품인데 여기에 작품을 편입시키는 것은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이 영역에 속하는 단편은 {법 앞에서}Vor dem Gesetz, {황제의 밀사}Eine kaiserliche Botschaft, {도시 문장}Stadtwappen 등으로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카프카 작품 세계를 살펴보면 그러한 신화적 요소가 단지 위에 언급된 단편 몇 작품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장편소설 {소송}Der Proze 과 {성}Das Schloss이 그러한 신화적인 것에 대한 암시를 내포하고 있다. 신화적인 양상은 확실히 카프카 전 작품에 나타나고 있는 요소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나 카프카는 신화적인 것을 끊임없이 전 작품에 등장시키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주고 있다.

왜냐하면 위에 언급된 {법 앞에서} 작품은 장편소설 {소송}의 한 구성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의 개개의 작품이 제시하는 내용을 뛰어 넘어 그의 문학 전체의 연관관계에서 볼 때 신화적인 것이 카프카의 전체 문학 세계 속에서 재발견되는 과정이 강하게 진행되리라 믿는다. 이렇게 해서 수많은 작은 소품Fragment들이 모티브와 주제를 통해서 단편 {만리장성 축조시}Beim Bau der chinesischen Mauer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여기에 첨가되어야 할 것이 카프카의 잠언Aphorismus들이다. 이것들도 같은 주제를 내용으로 하고 있으며 역시 신화와 관계된 작품들이다. 이와 같이 카프카의 전 작품세계에 연관된 신화적 요소를 연구하는 것은 다루기 어려운 문제이지만 누군가가 다루어야할 과제로 남기고 여기서는 [사이렌의 침묵]에 나타난 그리스 신화의 문제에 한정해서 밝히고자 한다.


1.2 신화의 개념과 그 변천

그리스에서 유래한 神話Mythos의 의미는 말Wort 또는 이야기Erz hlung를 뜻한다. 신화는 神들G tter이나 神적인 존재, 영웅 그리고 魔性D mon에 대해 보고하거나 또는 이야기한다. 아주 태고 시대나 역사이전 시대의 사건들에 대해서도 신화가 이야기 해주고 있다. 신화는 동화처럼 고대에 대해 전해주면서 그것은 설명할 수 없는 것, 수수께끼 같은 것, 비밀스럽고 불합리한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일반적인 것과 구별되는 특이한 것을 담고 있다.

이러한 특이한 것이 오랜 시간이 경과되면서 인간의 기억 속에 남게되고 널리 알려져 왔으며 앞으로 계속해서 인간에게 기록 또는 이야기로 전해져 남게 될 것이다. 신화는 시간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3차원적 시간개념을 하나로 묶고 있으므로 신화의 비밀스러운 성격이 강조된다. 신화의 개념에 대한 다양한 해석 가운데 몇 개의 중요한 관점을 살펴본다면 첫째로 신화라는 말과 로고스Logos와의 관계가 될 것이고 그 다음이 신화와 종교적 의미가 되며 마지막으로 신화와 문학과의 관계에 대한 관심이다.

쟝 드 브리에Jan de Vries는 신화를 우화적인 신들의 이야기로 정의하고 그 예로서 호머Homer와 헤시오드Hesiod의 이야기들을 꼽고 있다. 그는 진실된 이야기를 의미하는 로고스 개념과 신화의 개념을 상호모순된 것으로 파악하며 언급하고 있다. 신화가 진실된 사실을 취급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허구적 산물인지 확인하기가 그렇게 쉽지 않다. 시간이 지날수록 말의 의미가 변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화는 항상 허구화된 비진실된 이야기를 의미했던 것이 아니라 신의 존재와 그들의 행위를 실제로 믿을 수 있었던 옛날에는 신화가 진실된 사건을 서술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로고스는 생각된, 의미 깊은, 증명된 것으로서의 말을 뜻하는 반면에 신화는 사실을 보고하는 말이다. 그러나 신화의 개념은 시간이 지날수록 진실에 대한 요구가 희박해졌고 신화가 서술하는 이야기들은 점점 믿을 수 없고 환상적으로 느껴지게 된다. 신화는 점점 허구적으로 창작해낸, 문학적인 요소가 개념의 주된 요소가 되었고 사실 보고라는 본래의 의도는 미약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아마 Platon의 책임으로 여겨진다. 그는 모든 신화는 작가에 의해 쓰여진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도 이런 맥락에서 마찬가지다. 그는 신화를 문학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파악하고 있으며, 그의 [詩學]Poetik에서도 신화는 극예술Dramatische Kunst의 중요한 요소로 설명되어지고 있다. 이렇게 해서 이미 고대에서도 모든 소설과 단편들, 동화 그리고 유사한 기이한 이야기들을 신화적이라고 불러왔던 것이다. 그러면 옛날에 인간의 삶을 규정했던 진짜 신화는 어떤 것인가? 랑케 그라베R.Ranke-Graves는 "祭祀行事를 서술하는 짧은 글을 진짜 신화로"정의하고 있다. 여기에는 서술적인 표현의 요소뿐만 아니라 동시에 종교적 의미의 요소도 포함되고 있다.

원시민족의 祭祀와 숭배행위에는 항상 종교적 배경이 있다. 諸神들과 영웅들에 대한 순수한 문학적 서술은 선사시대 인간들의 神話信仰과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브리에는 儀式行爲를 창조적으로 반복되어온 태초의 행위로 간주하며 여기서 종교적 예배행사의 의미가 神話信仰과 결부된다는 것이다. 태고 시대의 신화는 세계상을 나타냈는데 모든 총체성 속에서 좋은 세계뿐만 아니라 나쁜 세계도 의미했다. "실제로 살아 있는 모든 것의 二重的 의미가" 신화속에 처음부터 포함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그것을 믿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원시민족들이 祭祀 행위를 통해서 표현하려고 했던 세상을 그들은 설명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연현상을 이해할수 없었고, 그래서 그들은 이런 실제적인 사실에 神的인-神話的인 이름을 붙였다. 이러한 행위 속에서 일종의 상징이 발견된다. 상징은 대상을 분명히 표현할 수 없고 초감각적으로 느끼게 한다. 카알 케레니이Karl Kerenyi는 신화의 상징적 성격 외에 또한 원인적 성격을 규명하고 있다. 그것에 따르면 신화는 세계설명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설명한다. 신화에 사용된 모든 요소들은 비유적인 것과 의미 그리고 음악성이다. 신화는 "思考 내지 생활 형식"의 서술로서 각 민족에게는 실제로 의미가 있으며 그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신화를 규명하기 위해서 어떠한 설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그 근거가 밝혀져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세계의 근원으로 되돌아 가야한다는 것이다.

이 근원성과 神的인 것이 神話가 지녀야할 요소라고 케레니이가 주장하고 있다. 신화의 다양성을 통해서 우리는 많은 현상들을 발견할 수 있다. 신화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기 때문에 서로 틀리는 민족들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 속에서 신화를 찾아볼 수 있는가하면 다른 한편으로 그것들은 수백년이 흐르는 동안 비슷한 변화형태로 다시 태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신화 창조자나 예술가들의 공헌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변화된 형태로 나타난 신화들이 도대체 지금까지 현대를 위해서 그리고 오늘날의 인간들을 위해서 과연 의미를 갖고 있는지 문제가 제기되어져야 한다. 여기에 대해서 에르네스토 그라시Ernessto Grassi는 이 두 개의 개념이 태도와 행위에 있어서 분리되지 않았던 시대가 있었으며 종교적 요소가 선사시대의 전체적 사회생활의 중요한 사실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종교적 현실로서의 신화는 모든 예술적 소설들과 우화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라시는 나아가서 신화를 우주 생성적인 것, 질서를 이루는 것, 불변하는 것 그리고 항상 현재적이고 동시에 영원한 것으로 정의했고 그것은 이러한 방법으로 "인간 존재의 영원히 현존하는 모든 요소들"을 나타낸다. 물론 이러한 해석에는 자연현상의 시간적, 공간적 개념이 배제되어 있다. [시학] 이후 신화가 문학의 중요한 요소가 됨으로써 신화 역시 종교적 의미에서 벗어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진다. 다시 말해서 [詩學]에서 신화와 종교의 결별이 완성된다. 신화는 예술적 표현으로서 종교성을 상실하게 된다. 동시에 신화는 허구화되고 현실의 반대가 되면서 예술과 신화의 연결고리가 마련된다. 발터 오또Walter F. Otto는 고대신화는 문학의 내부에서 계속 생존한다는 의견이다. "문학은 아직도 신화적으로 이야기하고", 문학은 신화적 형상을 계속해가고, 신화는 창작술을 매개로 다사 꽃피게 된 것이다.

여기에 대해 반대되는 의견은 이러하다. 신화는 인간의 사고가 깨어나기 전의 선사시대에 이국적인 문화의 소산이기 때문에 표시하는 내용과 대상이 일상적인 차원을 뛰어넘는 현상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참된 신화와 접촉을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화를 믿기 위해서 우리 자신이 많이 계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한 바인리히H.Weinrich는 나아가서 신화를 정의하기 위해서 과거와 현대의 차이점을 서술의 어법에서 찾으려고 한 것이다. 즉 현대는 공간에, 과거는 결정적 순간에 그 중점을 두고 있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 신화 역시 다른 장르에 등장하게 되었고 신화의 전체 역사는 탈신화의 과정을 겪게 되고 높은 의미의 신화는 오늘날의 인간에게는 더 생각될 수 없는 대상이 된다. 신화적 요소의 감퇴는 로고스가 져야 한다. 로고스가 신화를 추방했다.

오늘날 고대신화의 의미는 파괴되었고, 현대인간은 신화의 길을 잃어버렸고 그 길은 방향을 상실했다. 그것에 대한 책임은 계몽Aufkl rung이 져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사람들은 이것에 대한 원인을 인식Erkenntnis에서 찾고 있다. 신화의 세계는 비일상적인 것, 비일반적인 것에 안주한다. 작가 헤르만 브로흐Hermann Broch는 학문은 신화적 체험을 허용하지 않으며 특히 학문적 실증주의가 그 대표적 예라고 주장한다. 학문 또는 인식, 계몽 또는 로고스는 항상 진보적 사고인데 고대 신화를 사라지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신화적 의미와 관계가 있는 다양한 이미지를 찾을 수 있다. 파우스트Faust, 나폴레옹Napoleon 또는 돈 주앙Don Juan과 같은 역사적 인물들도 신화적으로 표시되고 있다.

인간의 이념이나 그 존재의 알레고리가 과거에서나 미래에서 신화를 의미할 수도 있다. 그 예를 들자면 "황금시대의 신화", "실락원의 신화" 등과 같은 것이다. 프리츠 샬크Fritz Schalk의 주장에 의하면 신화-종교적 의식과 언어와의 근원적 통일이 깨어졌고, 전설의 후광Der Nimbus des Legend ren이 최종적으로 파괴되었지만 신화라는 단어는 끊임없이 일간신문 지상에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신화는 계획에 따라 생산되고 인위적 산물이 된 것이다. 신화의 근원적 의미를 내포한 요소들 다시 말해서 근원성과 관계된 신화적 요소는 지나오는 사이에 잊혀지거나 탈락되어서 그 개념을 알 수 없는 것으로 의미가 변했고 오늘날에도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신화개념 발전에 대한 견해를 암시적으로 밝혀준 오토 후버Otto Huber는 신화적인 것의 의미가치를 낡은 것의 쇠퇴와 새로운 것의 확대 속에서 찾고 있다. 신화의 미력은 알려져 있지 않은 세계로부터 나타나는 것이라 하겠는데 그 속에서 질서와 혼돈의 변증법이 일어난다. 다시 헤르만 브로흐Hermann Broch의 견해를 살펴보면 그는 종교적인 것, 우주적인 것, 그리고 총체적인 것 속에서 신화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를 찾고 있다. 그러나 그는 태고의 신화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고 문학적인 것을 통해서 신화적인 것의 변천을 추적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신화는 문학의 原形으로 정의되고 그 原形 속에 우주창조론 즉 인간과 세계에 대한 모든 지식이 내포되어 있다. 그는 시대를 초월한 신화적인 것을 요구하며 삶의 근원으로 거슬러 갈 수 있는 새로운 신화를 희망한다. 그러나 오늘날 학문이 신화를 추방한 것이다. 철학도 종교도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 낼 수 없으며 신화의 힘은 실증주의에서 소멸된 것이다. 그러나 문학만이 신화에 대한 동경을 실현시킬 수 있다. 마르틴 뤼드케W.Martin L dke 역시 탈신화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문학으로 보고 있다. 그에 의하면 신화는 참된 사실을 이야기하는 말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신화는 이미 문학에 근접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참된 사실을 서술하면서 설명하는 것이 또한 문학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철학과 종교는 한때 신화창조에 영향을 주었으나 오늘날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문학이 그 과제를 떠맡을 수 있는 것이다. 신화는 대답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어떤 해답도 줄 수 없으며 스스로 문제를 제기한다. 이야기로 전래되어온 진짜 신화적 사건들이 변천되기 시작하면서 그 자리에 문학이 들어선 것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신화는 신(神)이나 영웅의 존재에 대한 우화적 소설로서 더 많이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고대 문학들은 이미지에 따라 신화를 재구성하였다. 신화는 기본 특징이 유지된 채 여러 문학 장르에 등장하게 된다. 이 경우 우리는 호머의 유명한 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디세]Illias und Odyssee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의 테마 역시 작가가 스스로 창작한 것이 아니고 이미 존재했었던 영웅노래와 신화의 모음으로서 집대성된 것이다.

개개의 신화가 취급되면서 어떤 것은 작가 자신의 작품으로 개작된 것도 있다. 시대는 고대를 모범으로 삼았고 단순히 문학에 한정되지 않고 조각, 음악, 미술에 도입된 신화적 소재를 작가 자신의 작품으로 발전시킨 것도 있다. 신화는 전체적으로 학문적으로 연구되고 분석되어 왔다. 그 결과로 수백년이 지나면서 개개의 신화는 본래의 의미로 더 이상 해석되어질 수 없었고 또 개작되어 왔으므로 "탈신화"의 문제가 등장한 것이다. 탈신화의 과정은 다음과 같은 결과를 가져왔다. 신화의 개념의 변천에 따라 고대 신화를 찾는 소리가 점점 높아져 갔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고대와 결부된 새로운 신화 작품에 대한 동경이 점점 커지고 있다.

문학과 연관해서 이 경우에 해당되는 인물이 브로흐이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토마스 만Thomas Mann, 나아가서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의 작품들은 충분히 신화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조이스는 그의 작품 율리시즈Ulysses에서 오디세Odyssee로 되돌아가는 동기를 마련한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다. 비록 신화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것이 조이스 作品 이외의 어떤 곳에서도 그렇게 예술적으로 작품화된 곳이 없지만, 그러나 그것은 현대문학에 등장한 일반적인 작풍(作風)으로 간주되고 있는 실정이다. 토마스 만의 소설에서처럼 성경의 주제가 재생되는 것은 신화가 오늘날 문학 속에 다시 등장하게 되는 생생한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회귀에 불과하다. 옛날 형식에 되돌아가는 것이지 결코 새로운 신화를 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새로운 신화의 구현은 카프카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다. 브로흐는 카프카 문학의 예언적 성격을 평가한 것이다. 그의 작품은 새로운 우주 창조론의 예감, 새로운 神統譜Theogonie의 예감을 주고 있다. 비록 구체적인 작품이 예시되지 않았지만 브로흐는 카프카의 전 작품에 걸쳐서 이러한 요소를 인정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1.3 그리스 신화와 카프카 문학

카프카 문학에 등장하는 그리스 신화의 내용에는 본래의 신화내용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확인될 수 있다. 카프카는 전래된, 고대의 소재들을 개작해서 재구성했다. 전래된 신화의 재구성은 결코 카프카의 창작이 아니다. 이미 고대 이래로 작가들이 상당히 자유롭게 신화의 소재를 취급해왔다. 이것은 신화의 개방구조, 말하자면 신화의 탄력성에 의해 가능했던 것이다. 만약 신화가 발생 후 곧 변화되거나 훼손된다면 그 신화의 본래 내용과 형식은 물론 기 기능을 더 이상 파악할 수 없게 된다. 동시에 신화는 시간적 초월성을 나타내기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 그 것이 존속되기 위해서는 신화를 다루는 작가가 소속된 시대와 그때 그때의 현실개념과 일치되어야 한다. 신화의 활성화, 즉 그것을 회상하고 표현하는 것은 작가의 과제에 속한다.

작가가 생존하는 시대, 그가 글을 쓰는 시대를 위해서 그렇다. 이러한 의미에서 과거와 현재의 일치가 요구된다. 이런 문제에 대해 카프카는 어떠했는가? 카프카는 신화의 종교적, 문학적 진리요구가 역사적으로 한정되어 있음을 인식했기 때문에 신화를 비롯한 전통적인 전래와 단절한 것이다. 그는 신화를 더 이상 시대를 초월한 것으로 보지 않았으며, 신화가 자체의 근원적인 것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역사적 영향 속에서 훼손되었으므로 신화의 새로운 텍스트의 가능성을 인정한 것이다. 카프카의 신화적 작품은 자신의 고유한, 현재의 위치로부터 활성화된 것이다. 작가는 한편으로는 현대에 있어서 신화의 변화된 의미요구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하려고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탈신화의 방법으로서 역시 자기 고유의 문학을 만들려고 한다.

노르베르트 라트Norbert Rath에 의하면 카프카는 신화를 "바로 잡는다"(berichtigen)고 하겠다. 그리고 그는 신화를 상이한 요소로부터 새로이 결합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카프카는 "신화는 현대로 세련된 변신을, 현대는 신화로 세련된 변신"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기교를 통해서 작가는 새로우면서 동시에 차별적인 통찰력으로서 일상생활을 관찰하고 동시에 현대 시점에서 전설적인 고대세계로 시선을 향한다. 베다 알레만Beda Allemann은 싱징주의의 많은 현대 작가들 중에서 신화적인 소재를 변화 또는 개선해서 이용한 작가들을 들었는데 릴케Rilke, 호프만슈탈Hofmannstahl,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앙드레 지드Andre Gide등을 들 수 있다.

히벨H.Hiebel의 지적처럼 카프카의 신화개작은 "신화비평" 행위였으며 그 내용은 과격한 신화비평의 성격을 띄고 있다. "반복의 법칙과 빠져 나올 수 없는 운명의 법칙"이 과거의 신화의 특징에 속한다. 그러나 신화는 제압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은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카프카는 신화의 유혹에 쫓아가지 않고, 그것을 낯설게 느끼고, 개작하고, 바로잡고, 탈신화시키고, 새로운 해석을 붙이고, 문제화시키고 활성화시킨다. 카프카 방식이라고 불려진 바와 같이 항상 새로운 어떤 것이 창조되어진다. 카프카는 신화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세계의 근원적인 것, 理性 이전의 것Vorrationales을 "최고의 합리적이고 최고로 깨어 있는 시대"에서 재발견하자는 것이다. 카프카의 비유세계에는 신화의 모든 본질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삶의 총체적 문제, 脫時間性, 강력한 운명적인 폭력, 이중적 표현 그리고 비합리적인 운명의 힘 등이다. 현대 작가들은 새로운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미 알고 있는 기존의 것을 변조한다. 칼 하인츠 핑어후트Karl Heinz Fingerhut는 주장하기를 이 경우에 본래의 작품은 결코 해체되어서는 안되고 형식은 보존되고 오히려 현대 작가들의 독창성이 생겨나야 한다는 것이다. 독창성은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의 긴장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결국 작가는 자신의 고유한 독창성을 나타내기 위해서 오래된 것과 알고 있는 것에 부딪치게 된다. 카프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카프카는 기존의 소재와 모티브를 대부분 부정적인 것으로 도치시키는 기법을 사용한다. 그래서 그는 자기 이전에 이미 개작되어 왔던 전설, 영웅전 그리고 신화 등을 문학의 소재로 선택할 때 이러한 소재들이 간직한 진실은 변용되고, 진실의 내용이 종종 아이러니하게 혼란스럽게 되어버린다.


2. [사이렌의 침묵]Das Schweigen der Sirenen에 나타난 신화의 변형


2.1 탈신화-반영웅의 등장

이 작품은 1917년 10월 23일 제목 없이 소위 제 3의 4절지 공책에 기록되어 있으며 카프카는 이 작품에서 호머의 [오디세]Odyssee의 제 12번째 노래의 에피소드를 내용으로 삼고 있다. 호머는 오디세와 그 일행들이 항해중 길을 잃었다가 女마법사 키르케Kirke의 섬에 당도하게 되었는데 그녀가 오디세우스Odysseus에게 다가올 위험에 대해 경고하는 것을 보고하고 있다. 사이렌Sirenen은 잘 알다시피 아름다운 칭송의 노래로 그녀들의 섬을 지나가는 사람을 유혹해서 결국 그들을 파멸시키는 존재들이다. 희랍의 국민신앙에 의하면 사이렌은 죽은 영혼들에 속한다. 이 영혼들은 피를 먹음으로써 그들의 존재를 보존하게 되어 있다.

신화의 전설에 의하면 사이렌의 외형은 인간의 머리를 지니고 있는 거대한 새(鳥)다. 호머에 와서 노래의 요소가 비로소 이들 존재들에게 주입된 것이다. 호머는 유혹의 수단인 그들의 아름다운 노래기술과 마적인 파괴력을 결부시켜 놓은 것이다. 오디세우스는 키르케로부터 경고를 받는다. 그가 사이렌 섬을 지날 때 그의 부하들에게 귀를 틀어막도록 명령하고 자신은 돛대에 밧줄로 묶게 했으나 귀는 막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병사들은 노를 젓고 아무 것도 듣지 못하고 배는 사이렌 섬을 통과하게 되며, 단지 오디세우스만이 노래를 엿들을 수가 있었다. 그가 돛대에 묶여 있는 한 그에게 어떤 위험도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위험은 그에게는 괴로운 자기 향락이 된다. 사이렌은 오디세우스의 영웅담을 노래로 불렀고, 트로이 전쟁에서 죽은 그의 친구들에 대해 노래했으며, 그의 가족과 고향에 대해 노래했고, 뿐만 아니라 사이렌은 그가 그렇게 마음속으로 회상하고 동경했던 체험과 소망을 다시 노래로 불렀다. 그러나 배는 섬을 지나게 되고 노래는 멀리 사라졌다. 위험은 물러가고 오디세우스는 다시 의식을 찾게 된다. 리하르트 베르텔스만Richard Bertelsmann은 사이렌의 신화는 이미 호머에게 있어서도 분명치 않았고 카프카 작품에서도 역시 석연치 않은 점이 등장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사이렌의 신화적 유래는 호머가 어떤 방법으로도 설명하지 않았고, 그들이 단순히 그곳에 있었고 오디세우스는 그들과 마주 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오디세우스는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의식적으로 위험을 찾는다. 그는 곧바로 섬쪽으로 배를 저어가도록 했고 사이렌을 피해서 둘러갈 수 있는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神과 같이 전지전능한 신화적 이야기의 본질이 한 사람에게 패배당한 것, 즉 꾀에 넘어간 사실에서 역시 의혹이 생긴다. 비록 꾀를 쓰는 아이디어가 오디세우스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키르케로부터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카프카 역시 이 이야기에 의혹을 가졌을 것이다.

오디세의 사이렌의 에피소드에 관한 그의 단편이 남겨놓은 것이 많지 않기 때문에 의혹은 그대로 남아 있다. [사이렌의 침묵]이라는 작품 제목은 작가 자신이 붙인 것이 아니라 그의 친구 막스 브로트Max Brod에 의해 붙여진 것이다. 이 제목은 내용에 맞게 잘 선택된 것 같다. 그러나 이 사이렌의 침묵은 작품 속에서 여러 형태로 등장한다. 사이렌의 침묵에 대한 생각 하나만해도 원 작품의 작가와 카프카 사이에 거리가 존재한다. 신화적 본질을 극복하기 위해서 카프카는 어떻게 호머의 [오디세]의 에피소드를 다루었는가?

우선 호머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여 마법사 키르케가 등장하는 앞 이야기를 카프카는 중요치 않게 간단히 취급하고 있다. 키르케는 오디세우스에게 사이렌을 조심할 것을 경고하고 또한 다른 많은 위험에 대해서도 경고한다. 그녀는 간교한 술책을 가르쳐준 충고자다. 키르케가 없었다면 오디세우스와 그의 동료들이 살아남을 기회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카프카의 소설에서는 키르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되지 않는다. 여기서는 오디세우스가 키르케의 神과 같은 힘에 의존할 수가 없고 오직 홀로 대처할 수밖에 없다. 카프카는 모험적 이야기를 우화적 주석으로 바꾼다. 나겔B. Nagel은 이것을 비유화(譬喩話) Parabel로 해석하고 핑어후트는 비유Gleichnis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면 카프카적 성격을 띄고 있는 서술기법을 살펴보자.

話者는 허구세계를 전개시키고 그 다음에 따라오게 되는 증거력Beweis을 요구하면서 소설을 시작한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이러한 증거는 요구를 상실하게 되고 끝에 가서는 결국 완전히 없어진다. 이렇게 카프카의 소설은 감축Reduktion의 소설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미 요구했던 주장이 단계적으로 없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신화 바로잡기는 카프카의 경우에는 '증거'로 그 기능이 전환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불충분한, 대단히 어린애 같은 천진난만한 미숙한 수단이 보호의 수단으로 봉사할 수 있다는 증거를 말한다. 여기서 언급된 어린애 같은 천진난만한 미숙한 수단Kindischen Mitteln이 문제의 발단이 된다. 오디세우스는 보호받기 위해서 왁스로 귀를 틀어막았을 뿐만 아니라 돛대에 자신의 몸을 붙들어 묶도록 한다. 그 다음 이야기에 의하면 사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사이렌의 노래에 대항하기는 역부족이라고 한다. "사이렌의 노래는 모든 것을 뚫고 들리게 되며 유혹된 자의 격정이 사슬과 돛대 정도는 문제없이 부셔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은 그 정도는 어차피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단지 오디세우스만이 자기의 수단방법을 100퍼센트 믿고 "천진난만한 기쁨으로 사이렌을 향해 항해했다."

호머의 오디세우스와는 다르게 카프카의 인물은 사이렌의 소리를 전혀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는 처음부터 위험에 관해 전혀 개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영웅이지만 탈영웅화된 것이다. 그의 보호수단이 "Mittelchen"과 같이 축소형으로 표시된 것은 증거를 얻어내는 조치의 미숙함das Kindische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작중인물의 소박한 성격이 드러나게 된다. 이와 같이 카프카의 작품은 호머의 그것과 구별된다. 이러한 차이점의 절정은 다음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카프카 작품에서는 주인공이 완전한 안전을 위해서 두가지 보호전략을 이용한다. 호머의 작품에는 두가지 수단이 두 그룹에 분배되어서 동료들은 귀를 막고 행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고 노를 저었다. 오디세우스는 노래를 들었으나 몸을 돛대에 묶었다. 그러나 카프카의 주인공은 두가지 보호수단을 다 수용한다.

보호수단의 또 다른 비교를 살펴보자. 호머에서는 오디세우스가 밧줄로 돛대에 묶였지만 카프카의 주인공은 돛대에 쇠사슬로 묶였다.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도대체 누가 이 과제를 수행했느냐 하는 것이다. 카프카의 작품에는 키르케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노 젓는 병사나 동료들에 대해서도 거의 언급이 없다. 이것이 또한 호머의 작품과 다른 차이점이며 특징이다. 호머는 우화를 만들고 이야기하고 보급하는데 반해, 카프카는 꼭 필요한 것에만 집중한다. 베다 알레만의 의견대로 카프카는 "사건의 단순화"로 자신을 호머와 대조시키고 있다. 카프카의 오디세우스는 그가 이용한 보호수단에 대해 계속해서 맹목적인 믿음을 가진다. 그는 인물의 순진함을 보여준다. 작품에서 보여주듯이 이 수단은 본래 도움이 되지 않는 방법이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다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는 순진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아무 것도 모르며 경솔하다. 다른 말로 그는 완전히 반영웅Anti-Held이다. 오디세의 모험욕이 강한 영웅과는 반대로 카프카의 영웅(사실은 반영웅임)은 호머의 그것과는 아이러니하게 상당한 거리가 있다. 오디세우스는 맹목적으로 그의 수단을 믿으면서 위험을 그의 생각에서 몰아내었다. 나우만D. Naumann이 이것을 "신화 극복의 시작"이라고 말한 것처럼 카프카는 고대 서사극을 현대 입장에서 교정한 것이다. 그의 오디세우스는 호머의 그것과는 더 이상 공통점이 없으며 전체의 신화세계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그리고 그의 행동은 "사실의 잘못 평가"로 드러난 것이다. 만약 카프카의 화자가 사이렌의 노래는 모든 것을 뚫고 들려진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사이렌을 제압할 수 있었던 방법을 쓴 호머의 권위를 뒤흔들어 놓을 것이다. 호머의 작품에서 주인공과 그의 동료들에게 귀를 막을 것을 충고한 것은 키르케다. 카프카에게 그것이 무의미하다면 키르케가 현대 작품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 논리에 맞는 일이다. 괴벨Goebel의 의견에 의하면 키르케의 전략은 신화를 현대적으로 파악하는데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 대신에 오디세우스의 살려는 의지가 중심에 놓이게 된다. 이렇게 해서 카프카는 신화의 영웅에 대응해서 탈신화의 반영웅을 대립시킨 것이다.


2.2 신화의 변형 - 상황의 轉倒

카프카의 작품에서는 두가지의 그럴싸한 보호수단Rettungsmitteln이 동시적으로 사용된 것이 모순이다. 오디세우스는 사이렌의 노래를 못 듣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왁스를 사용한다. 그는 또 자신을 묶도록 단단한 사슬을 받아들인다. 그는 아마도 왁스 하나만으로는 보호될 수 있으리라고 확실히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카프카는 신화의 여러 순간을 반대로 뒤집는다. 오디세우스는 혼자 있으며 강력한 키르케도 그의 동료들도 그가 위험에 처했을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들이 아니다. 그는 책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순진하고 소박하며 무지하기까지 하다. 모든 것은 사이렌으로부터 그의 보호가 가능하게 보이지 않는 쪽으로 돌아가고 있다. 카프카는 사이렌에게 노래보다 더 무시무시한 무기를 부여하면서 신화는 다시 轉倒된다. 즉 소설의 결정적 轉倒를 체험하게 된다.

침묵이 그들에게 부여된 무기다. 노래 앞에서는 사람들은 아마 더 보호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침묵 앞에서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화자는 추측한다. 그러나 사이렌을 이겨냈다고 말한 사람은 이러한 "잡다한 자기 과대평가" 때문에 역할을 곧장 끝내 버리고 만다. 다시 말하면 침묵의 힘은 결코 침묵 그 자체에 있지 않고 오히려 지나가는 항해자들이 "자기의 탁월한 능력으로 사이렌을 정복했다"고 믿는 기고만장한 誤判을 야기 시키는 데 있다. 오디세중에서 오디세우스가 뛰어난 책략가라고 작품의 이 구절에 이르기까지 언급된 바가 없다. 그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정말 역설적인 과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자신의 파멸을 의미할 수도 있는 기고만장한 승리감에 전혀 빠지지 않기 위해서 눈치 채지 않게 사이렌을 정복할 어떤 계획을 마련해야 한다.

사이렌은 이중의 의미가 있다. 그들이 노래를 부르면 지나가는 사람들을 파멸시키기 위해서 그들은 유혹하고자 하는 것이고 반대로 그들이 침묵을 지키면 지나가는 항해자들에게 가짜 승리감을 주어서 속인다. 그것이 결국 파멸로 판명되어진다. 카프카의 작품을 계속해보면 사이렌이 신속하게 오디세우스에게 침묵의 무기를 사용한다. 화자는 그들이 놀라운 무기를 사용한 두 가지 이유를 진술한다. 그들이 오디세우스를 무서운 상대자로 인식했거나 또는 그들이 이 영웅의 행복에 찬 얼굴을 한 번 보고 난 뒤, 그것도 왁스와 사슬밖에 생각 못한 그런 영웅인데, 그들이 아주 간단하게 노래하는 것을 잊어 버렸을 경우다. 오디세우스가 우선 섬을 스쳐갔을 때 사이렌이 노래한 것으로 믿는다. 그는 그의 보호수단에만 몰두해 있었다. 여기에서 일어난 것이 쌍방간의 오해다.

오디세우스는 왁스와 사슬의 보호수단 때문에 노래에 대해 안전하다고 믿었다. 사이렌은 그의 얼굴에 가득 찬 행복을 보고는 마음이 흔들렸고 그래서 침묵을 지킨 것이다. 이 침묵은 오디세우스가 극복한 노래로 해석된다. "오디세우스는 그 침묵을 오해했고 사이렌은 오디세우스의 오해를 오해한 것이다." 나우만은 이것을 고대 희랍비극의 용어에 해당하는 "소설의 전환Peripetie"으로 표시하고 있다. 신화의 배우들이 실제로 만나게 되는 것을 방해한 것은 이중 오해이다. 오디세우스는 지략이 뛰어났기 때문에 여기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지만, 그는 스스로 속은 것이다. 그가 전체 상황을 잘못 평가했기 때문이다. 침묵으로부터 어떤 사람도 빠져 나올 수 없다고 작품은 이야기하고 있다. 호머가 사이렌의 노래에 대항한 보호수단을 써서 오디세우스를 안전하게 구했듯이 오디세우스가 침묵에 대비해서 특별한 안전 전략을 세우고 자신의 안전을 시도한다면 이 침묵은 이겨내기 어려운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니까 카프카의 오디세우스는 사이렌의 유혹하는 노래로부터 보호받고자 하며 더 위험스러운 침묵에 대해서 그는 아무 것도 듣지 못했다. 카프카의 오디세우스는 호머의 주인공과는 반대로 도전에는 결코 관심이 없으며 그 자신이 실제로 어떤 위험에 놓이게 되었는지 의식하지 못한 채 그 위험을 무시한 것이다. 사이렌의 시각에서 보면 노래와 침묵에 대비해 무장한 상대가 올 것이라고는 전혀 믿고 있지 않은 상황이다. 그리고 그들은 침묵을 무기로 간주하지 않고 오로지 침묵을 지켰다. 단지 행복이 가득한 모습에 대한 동경에서 침묵한 것이다. 괴벨은 결국 반영웅의 구조로 이끌어지는 이러한 상황의 역설을 지적하고 있다. 오디세우스는 결코 사이렌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카프카는 위험을 이렇게 간과 bersehen하거나 건성으로 듣는 것 berh ren을 "결단성"이라 부른다.

오디세우스가 막강한 상대를 그의 의식 밖으로 추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그들Sirenen 가까이 갔을 때 그들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었다." 그는 그들에게 자신을 유혹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도 주지 않는다. 그는 오직 혼자서 살아 남을 생각을 하고서 사이렌들과 대립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한 "결단성"을 가지고 항해해서 성공한다. "침묵으로부터 도망가는 그의 결단성", "끝없는 자기 신뢰감" 같은 것이 승리를 보장한다. 끝없는 자기 신뢰감이 스스로 선택한 보호수단과 관계된다. 보호수단은 외부의 도움 없이 그의 내심으로부터 솟아난 것이다. 오디세우스는 어떠한 요구도 주장하지 않고 "오직 자신을 믿고 어떤 것도 욕심 내지 않는다."

조켈Walter H. Sokel은 이러한 의미와 연관해서 반영웅을 죄 없는 인간으로 해석한다. 오디세우스는 여기서 오직 살아남을 의지만을 보인 것이지 권력에의 의지나 전쟁의 의지를 나타내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그의 보호가 성공하게 된다. 이 점에 있어서 이 오디세우스는 카프카의 대부분의 다른 작중인물과 구별된다. 다른 작중인물들은 보호는 받았지만 거의 예외 없이 좌절되고 만다. 그들은 권력을 무조건 얻으려고 했고, 그래서 카프카의 눈에 비치기로는 그들이 죄를 지은 것이다. 오디세우스의 반대입장으로서 [성]의 카 K, [소송]의 요셉 카Josef K와 [법 앞에서]의 시골남자를 들 수 있다. 오디세우스의 보호조치는 "아이러니하게 설계된 기적"으로 여겨진다.

왁스와 사슬은 노래에 대비한 보호수단이었으나 결과적으로 별 쓸모 없이 된다. 그러나 "침묵의 위험"을 사실 그대로 공공연히 인정한다는 태도로 무의식적으로 갖춘 수단(왁스와 사슬)이 침묵에 대항하는 데 도움이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오디세우스는 사이렌의 섬을 통과한다. 사이렌에게도 스스로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그들이 오디세우스가 지나가는 항해를 보면서 그를 그리워하고 그를 "더 이상 유혹하려고 하지 않고" 그의 두 눈에서 발하는 광채를 차지하려고 했다. 작품이 진행되는 바로는 사이렌은 이러한 실패 이후 의식을 가졌더라면 그들은 완전히 파멸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역시 살아남는다.

이순간 힘의 위치가 뒤바뀌는 일이 일어난다. 사이렌은 의미를 상실하였고 다시 의미를 가지려고 노력하는 존재가 되었고, 반면에 오디세우스는 모든 신화적 존재가 부러워하는 대상이 된다. "오디세우스, 즉 시도하는 인간으로부터 접근할 수 없는 권력의 사이렌이 된 것이다." "지금은 사이렌들이 진짜 유혹 받은 자가 된 것이다" 권력관계가 뒤집어짐으로서 [오디세] 작품과 반대되는 사실이 역력히 나타났다. 호머의 [오디세] 작품에는 사이렌들이 오디세우스에게 제압된 후 파멸을 선고받는데 반해, 카프카는 그들을 살려준 사실이 위에 말한 사실에 상응한다. 작품 [사이렌의 침묵]에는 그들이 살아남는다는 행복감으로 가득 찬 오디세우스가 그들 곁을 지나가는 바로 그 순간에 그들은 의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 자신을 망각하고 신화적 존재의 일인 꾀어내고 유혹하는 일을 망각한 것이다.

만약 그들이 의식을 가졌었더라면 그들은 자신들의 멸망을 의식했을 것이고 호머의 서사시에 전래되어온 바와 같이 그들은 바위에서 바다의 깊은 심연으로 몸을 던졌을 것이다. 카프카는 작품의 다른 장소에서 그의 사이렌을 악의 없고 평화스럽고 힘없는 존재로 서술하고 있다. 1921년 11월 로버트 클롭슈토크Robert Klopstock에게 보낸 편지에 보면 같은 내용이 적혀있다. 그곳에서 그들(Sirenen)이 유혹하기 위해서 노래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不姙性을 한탄한 것이다. "사람들이 그들이(Sirenen) 유혹할 뜻을 갖고 있었다고 믿는다면 맞지 않는 평가다. 그들이 맹수의 발톱을 갖고 있고 자궁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들은 그것을 소리 높이 탄식한 것이다. 이러한 탄식이 그렇게 아름답게 울렸다는 것은 그들로서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사이렌의 침묵] 작품은 본래 오디세우스에게 헤피 엔드로 끝날 수도 있는 작품이다. 오디세우스는 도피했고 호머와는 다르게 사이렌들은 생존해 있다. 호머의 오디세에서는 사이렌 신화에 결말이 내려졌다. 신화는 극복되면 수수께끼가 풀리고 배우들에게도 더 이상 신화의 생명이 계속되지 않는다. 마치 외디푸스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난 뒤 스핑크스가 그후 파멸된 것과 비슷하다.


2.3 신화의 파괴 - 二重性과 기만

카프카 작품의 마지막 장에는 부록(Anhang)이 표시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지금까지 확실했던 모든 것이 그대로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파악할 수 없는 것 (das Unfa bare)이 일어난 것이다. 이것에 의하면 오디세우스는 물론 지략이 풍부했으며, "아마도"Vielleicht 사이렌이 침묵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이렇게 그는 사이렌, 諸神들, 심지어 운명까지도 제압했던 것이다. "지략적인" 오디세우스라는 부가어를 쓰면서 카프카의 작품은 돌연히 호머의 텍스트에 접근한 것이다. 부록은 어린애 같은 천진난만한 미숙한 수단이 보호수단이 되었다는 증거의 도입문장과 더 이상 일치하지 않는다. 여기서 오디세우스는 결코 미숙한 것으로 입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知性으로 특징 지워진다. 호프만W.Hoffmann은 부록까지의 텍스트를 "신화의 변형"으로 이해한다고 했으나 카프카의 주인공은 그후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그는 어린애 같은 천진난만한 수단을 믿고 있는 사람의 역할을 한다." 그는 침묵에 대해 알고 공공연한 승리가 가져다줄 수 있는 결과에 대해 알고 있다. 즉 자기 도취의 위험에 대해 알고 있다. 이렇게 그는 "명성을 포기하기로" 자제하고 있다. 무의식적 행동을 통해 사이렌을 정복한 사건은 가상사건(假象事件)으로 포장된 것이고 무의식적인 자기 환상 대신에 의식적인 속임수가 등장한다. 오디세우스는 천진난만한 역할을 한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노르베르트 라트Norbert Rath는 카프카의 작중인물을 "사이렌과 무언극 경쟁"을 벌린 최초의 배우로 표시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오디세우스의 얼굴에 드러난 행복감은 첫 假面이고, 그가 神들에게 들이댄 방패는 원시 배우놀이로, 그리고 가상사건은 첫 각본으로 비유된다. 오디세우스가 천진난만한 역할을 하면서 사이렌을 진짜로 훑어 볼 수 있었다면 그것은 인간의 오성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베다 알레만은 "이러한 사건의 설명할 수 없는 점"이 부록에서 다시 상향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것에 의하면 오디세우스는 몇 개의 의식층을 자유자재로 다스릴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가 자신에게 그의 수단을 믿게 하는 것일 것이고, 두 번째 의식에서는 망각의 가상사건이 끝나게 되고, 세 번째 의식에 의해서 그는 假象을 훑어볼 수 있고 그것을 의식적으로 대치한다. 오디세우스의 보호조치는 이중적으로 성공한다. 그가 일부에서 "천진난만하고-미숙하게 조종된 전술"에 의해 사이렌을 제압하는 반면에 부록에서는 꼭 같은 방법이 지성과 계산에 의해 인정되고 있다.

괴벨은 이러한 모순을 "진짜 역설"이라고 주장한다. 만약 반영웅이 모든 것을 논리적으로 대처한다면 그는 오로지 도피하는길 밖에 없다. "오디세우스는 논리에서 뛰쳐나온 것이다." 그는 침묵을 놀이로 보았으며 그것을 지나쳐 버린 것이다. 그는 진실을 따라 했고 "정말 아무 것도 듣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이렌이 실제로 침묵했기 때문이다. 역설은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존속한다. 마지막으로 부록이 의혹을 더 강하게 한다. 그리고 그것이 너무 사변적이고 불확실하다. 작가는 한마디 한마디에 특별한 주의를 쏟고 있다. 의혹을 불러일으키는 표현은 "아마도vielleicht"라는 단어다. 텍스트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아마도〔…〕그는 정말로 사이렌이 침묵했던 것을 알아 차렸을거다." 이 표현에 의하면 오디세우스가 천진난만한지 아니면 꾀 많게 행동했는지 끝까지 확실하지 않다.

작품 [사이렌의 침묵]은 "여러 개의 가능성 사이를 맴도는 카프카의 불확실성의 표본 작품이다." 이 작품의 서술대상은 주인공의 책략과 보호조치다. 호머의 작품을 알고 있는 독자는 모든 점에서 불확실하게 느껴진다. 모든 것이 二重性을 띄고 있다. 침묵에 대한 이유조차도 이중적이고 모순적이다. 침묵이 서술적으로 파악될 수 없기 때문에 그 원인이 이야기되어지지 않고, 아마 되어질 수가 없을 것이다. 작품의 처음에 사건이 하나의 증거력의 뒷받침 속에서 일어난다면 그 증거력은 끝에 가서 "아마도"를 통해 다시 유명무실하게 되고 만 것이다. 이렇게 오디세우스는 한편으로는 순진한 자로서 어린애 같은 천진난만한 수단을 사용한 것으로 서술되어 있고, 다른 한편으로 그는 끝에 가서 "아마도" 꾀 많은 자로 되어 있다. 이것은 화자와 독자 사이를 농락하는 기만극이다.

카프카의 텍스트에는 고대 신화와는 반대로 여러 가지의 다른 형식이 등장한다. 호머의 텍스트에서 각자가 서술했던 것은 (말하자면 페아켄Ph aken 궁정에서 오디세우스 등과 같은) 카프카에게 있어서는 익명의 텍스트가 된다. 고대 신화의 口傳의 방법에서 글로 제시하는 증거의 방법으로 바뀐다. 카프카는 구술적(口述的)서술에서 벗어났고 이야기로 전하는 화법에서 글로 쓴 이야기가 생겨 난 것이다. 사이렌 신화의 새로운 표현법이 생겨난 것이다. 카프카는 口述的 소설의 전래를 해체시킨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신화는 근대의 시각, 작가의 현재 시각을 벗어나서는 더 이상 "믿을 만하고 완전하게"전래될 수 없다는 것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하인츠 폴리처Heinz Politzer는 이 경우에 언어 콤플렉스를 지적하고 있는데, 이 언어적 콤플렉스는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 있었던 독일어 사용 유태인 소수인 집단의 소속인으로서 카프카가 겪고 있었던 일이다.

카프카는 "서로서로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자신의 언어능력을 회의하기 시작했던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렇게 [사이렌의 침묵]에서는 등장인물들 사이에 그러한 커뮤니케이션이 단절되었고 심지어 눈길이 마주치는 것조차도 거부되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멀리 향하고 있는 그의 눈길에서 곧 피해 나갔다." 이러한 연관 속에서 카프카의 잠언록에서 한 문장을 인용할 수 있다. "침묵은 완전성의 부가어에 속한다." 사람들은 주인공이 그의 목표를 달성했다고 단순히 생각하지만 카프카는 이것을 본질적으로 이상한 일로 받아드린다. 인간인 오디세우스는 그의 논리적 합리적 인간 존재를 포기하면서 자신의 운명을 피해야할 상황이다. 거만한 존재가 되려는, 영웅이 되려는 시도에 어떤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

카프카는 그 대신에 두 가지의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는데 "허위 속에서의 삶이나 또는 인식 속에서의 죽음"이다. 텍스트는 매순간마다 모든 가능성을 위해서, 그에게 일어난 모든 것을 위해서 이중성을 남겨 두고 있다. 작가는 사건의 서술을 유혹하는 세력과 개개인 사이의 대립에 한정시키고 있다. 도대체 신화와 더불어 무엇이 일어났는가? 적어도 오디세우스로 이루어진 에피소드의 구조는 파괴된 것이다. 카프카의 경우에 사이렌과 오디세우스가 위치를 바꾸기 때문이다. 과거의 불합리함이 밝혀진 것이다. 텍스트는 항상 이중해석의 가능성을 주고 있다. 작가는 그의 현재 위치로부터 글을 쓰고 신화를 현재에 적용시키기 때문에 카프카는 그의 텍스트의 권위를 위해서 변형과 제한의 방법을 가장 본질적인 것에만 한정시키고 있다.

동시에 카프카는 인간이 신화의 힘으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는지를 "신화의 세계로부터 소외"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신화에의 접근을 통해서 신화로부터의 소외가 완성되는 이중적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오디세우스는 사이렌에게 어울리고, 가상의 놀이를 함께 하며 "속이면서" 그는 그들을 "모방하고", 그렇게 함으로서 자신을 보호한다. 그는 현실을 모방하면서 신화의 영역을 파괴한다.
신화는 아직까지 한번도 무조건적으로 파괴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이 텍스트에서 극복되어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수단을 가지고 제압된 것이다. 카프카는 호머의 작품에 손을 대었고, 호머에서는 영웅이 사이렌으로부터 달아나지만 카프카에서는 신화가 사이렌의 이름 속에 살아있다. 그것은 신화가 비판되어야한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원래 신화는 현대작가의 시각에서 비판되어진다. 침묵하는 사이렌은 그 자체가 모순이며 오디세우스를 보호한다는 것은 단순히 儀式에 불과하다. 사이렌이 살아남아야 하는 것과 똑 같이 오디세우스 역시 위험을 극복해야한다. 사람들은 신화에 대항해서 오직 계략으로서 자신을 방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카프카는 변형으로서 이성과 계략을 신화에 동원한다. 트릭, 천진난만한 보호수단, 침묵 그리고 계략들이다. 이 모든 것들이 독자는 물론 주인공에 의해 무용지물이 된다. 카프카의 작중인물은 신화에 뛰어 들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수단Mittelchen을 믿으며 "더 잘 알고 있는 지식"에 반대하는 행동을 한다.

이렇게 해서 현대 영웅의 유혹을 뿌리치고 동시에 자기 신격화의 현대적 위험에 대항한다. 호머의 오디세에서는 오디세우스가 결코 침묵하지 않았다. 사이렌에 대한 승리로 명예를 높일 수 있었다. 비록 카프카가 현대 시각으로부터 오디세우스와 사이렌을 해석하고, 신화적 세력이 결코 승리해서 안되는 방법으로 한다고 해도 태고의 신화적 세력에 경의를 표하는 태도가 보여진다. 사이렌이 노래한 이래 그들은 노래로서 마적이고 유혹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기교를 보여준다. 그들은 알려진 바와 같이 영웅의 노래를 부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한번 개작된 후 모든 신화들은 아무 것도 아니게 되었다.

핑어후트는 카프카의 사이렌을 예술의 편파적 의식에서 나온 파괴와 현혹의 비유표시로 해석했다. 작가가 여기서 증명하고자 한 것은 이러한 예술을 회피할 수 없다는 점이다. 카프카는 알려진 바와 같이 한 예술 즉 쓴다는 일에 상당히 몰입했던 작가다. 유일한 보호조치는 작품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순진성과 간계의 결합이다. 핑어후트에 의하면 예술의 이러한 문제는 이미 호머의 서사시에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호머의 작품이 그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카프카의 오디세우스도 자신을 구제할 수 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카프카는 그의 결론을 일방적으로 확실히 맺을 필요가 없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아마도"(vielleicht)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카프카가 호머의 에피소드를 개작하기 위한 동기를 어디서 얻어서 그것의 변형으로 받아드렸을까? 여기에 대해서 하르트무트 빈더Hartmut Binder는 카프카가 알고 있던 책 한 권을 지적하고 있다. 프란츠 블라이Franz Blei와 막스 브로트는 줄레 라뽀르그Jules Laforgue의 [삐에로, 익살꾼]Pierrot, der Spa vogel을 번역했었다. 이 책의 마지막에 보면 두 사람의 번역자에 의해 공동으로 작성된 "마녀와 패거리Circe und ihre Schweine"라는 대화록을 볼 수 있다. 빈더는 카프카의 作品 [사이렌의 침묵]을 위의 책과 유사한 방법으로, 다시 말해서 "잘못된 전통을 고치기 위한 類似한 시도로 받아들이고 있다.


4. 결 론

신화의 뜻은 "말"(Wort) 또는 이야기를 의미하며 그것은 神들이나 神的存在, 영웅 그리고 魔的인 存在에 대해 보고하거나 이야기해준다. 神話는 太古時代나 先史時代의 사건들에 대해서도 이야기로 서술하고 있다. 신화는 대체로 설명할 수 없는 것, 수수께끼 같은 것, 비밀스럽고 불합리한 것을 내용으로 삼고 있다. 선사시대의 문화와 祭祀儀式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宗敎的 意味를 가졌으며 이것이 순수한 발생적 신화로 간주될 수 있다. 이것들의 목적은 세계를 自然現象을 가지고 해석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현상들에 神的인 또는 神話的인 이름이 부여되었고 나중에 역사와 함께 지나오면서 이야기로서 전래되어 왔다. 이 속에서 신화의 개념에 대한 일차적 정의가 결국 "말" 또는 "이야기"로서 설명되어진다.

랑케 그라베스에 의하면 祭祀行事를 서술하는 짧은 글을 진짜 神話로 정의되고 있다. 이 견해에는 서술적 표현의 요소인 문학적 요소뿐만 아니라 종교적 의미의 요소도 포함되어 있다. 原始民族의 祭祀와 숭배행위에는 항상 종교적 배경이 있으나 신들이나 영웅들에 대한 순수한 문학적 서술은 선사시대 사람들의 신화신앙과 반드시 공통점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태고시대에 창조적으로 반복되어온 儀式行爲는 대체적으로 종교적 예배 행사이며 그 의미는 神話信仰과 결부된다. 선사시대의 신화는 세계상을 표현했다. 원시민족들이 제사행위를 통해서 표현하려고 했던 세계는 그들이 이해할 수 없었고 설명할 수 없었던 자연세계다.

그래서 그들은 이런 설명할 수 없었던 실제적인 사실에 神的인-神話的인 이름을 붙였다. 이야기로 전래된 진짜 신화적 사건이 변천되기 시작하고 그것이 문학에 도입된 것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부터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神話와 종교가 결별하고, 신화는 예술적 표현으로서 종교성을 상실하고 예술(문학)과 신화의 고리가 마련된다. 신화는 점차적으로 신들과 영웅 그리고 신적 존재에 대한 '우화적 이야기'로 더 많이 이해되어졌고 이미 고대 문학들도 그 이미지에 따라 재구성되었고 다양한 문학장르에 도입되었다.

헤르만 브로흐에 의하면 神話는 文學의 原形이며, 그 原形 속에 우주 창조론과 인간과 세계에 대한 모든 지식이 내포되어 있다. 작가는 시대를 초월한 신화적인 것을 요구하며 삶의 근원으로 거슬러 갈 수 있는 새로운 신화를 희망한다. 그러나 현대 학문의 인식론, 인식행위가 신화를 추방했다. 철학도 종교도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 낼 수 없으며 신화의 힘은 실증주의에 의해서 소멸된다. 그러나 문학만이 신화에 대한 동경을 실현시킬 수 있다.

신화는 학문적으로 연구되고 분석되어 왔다. 그 결과로 수백년이 지나오면서 개개의 신화는 본래의 의미대로 해석되어질 수 없었고 개작되어 왔으므로 탈신화의 문제가 등장한다. 신화의 개념의 변천에서 고대 신화를 찾는 소리가 점점 높아졌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고대와 결부된 새로운 신화작품에 대한 동경이 점점 커졌다. 이와 관련해서 파우스트, 나폴레옹 또는 돈 쥬앙과 같은 역사적 인물 등이 신화적으로 표시되었으며 제임스 조이스, 토마스 만 나아가서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들이 신화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카프카의 문학의 예언적 성격, 즉 새로운 우주 창조론의 예감과 새로운 神統譜의 예감 등이 새로운 신화 구현의 성격을 표현한다.

카프카의 문학에 등장하는 그리스 신화의 내용에는 본래의 신화내용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카프카는 전래된 고대의 소재들을 개작해서 재구성한다. 그는 한편으로 현대에 있어서 신화의 변화된 의미 요구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하려고 하고 다른 한편으로 탈신화의 방법으로 자기 고유의 문학을 만들려고 한다. 그는 신화의 유혹에 쫓아가지 않고, 그것을 낯설게 느끼고 개작을 하고, 바로잡고, 탈신화시키고, 새로운 해석을 붙이고, 문제화시키고 활성화시킨다.

소위 카프카의 방식이라 불리어지는 바와 같이 항상 새로운 어떤 것이 창조되어진다. 현대 작가들 중에서 신화적 소재를 변화시켜서 이용한 작가들은 특히 릴케, 호프만슈탈, 오스카 와일드, 앙드레 지드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카프카는 이들 보다 한 걸음 앞서서 신화개작을 통해서 신화를 비평했다. 물론 신화는 그대로 인정되지만 카프카의 개작은 과격한 신화비평이다. 그의 신화비평 작업은 기존의 소재와 모티브의 대부분을 부정적인 것으로 도치시킨다. 그래서 그는 자기 이전에 이미 개작되어 왔던 전설, 영웅전 그리고 신화 등을 문학의 소재로 선택할 때 이러한 소재들이 간직한 진실을 훼손하고, 진실의 내용을 종종 아이러니하게 흔들어 놓는다.

카프카의 신화비평은 그의 단편 [사이렌의 침묵]에서도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작품 [사이렌의 침묵]에서 우선 제목부터가 역설적이고 호머의 원작의 의도를 훼손하고 있다. 호머의 [오디세]의 열두번째 노래에 나오는 사이렌은 그녀들의 아름다운 노래로 지나가는 항해자들을 유혹해서 파멸시키는 존재인데 반해 카프카의 작품은 사이렌에게 노래 대신 침묵으로 무장시킨다. 사이렌의 노래 유혹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서 비상한 보호조치를 취했던 [오디세]의 영웅 오디세우스는 카프카에게 있어서는 어린애 같은 천진난만하고 미숙한 보호수단을 취하고도 침묵 때문에 무사히 구조된다.

[오디세]의 모험욕이 강한 영웅 오디세우스와는 반대로 카프카의 영웅은(사실은 반영웅) 호머의 그것과는 아이러니하게 상당한 거리가 있다. 카프카는 고대 서사극을 현대 입장에서 개정하고, 신화의 영웅에 대응해서 탈신화된 이야기의 반영웅을 대립시킨다. 작품 서두에서부터 話者는 허구세계를 전개시키고 그 다음에 따라 오게되는 증거력을 요구하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이러한 증거는 요구를 상실하게 되고 끝에 가서는 완전히 없어진다. 카프카의 신화 '바로잡기'는 '증거'로 그 기능이 전환된다. 그것은 불충분하고, 어린애 같은 천진난만한 미숙한 수단(왁스와 쇠사슬)이 사이렌의 노래 유혹으로부터의 보호수단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증거를 말한다.

그러나 작품의 마지막의 부록Anhang에서는 지금까지 확실했던 모든 것이 그대로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파악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아마도"라는 표현으로 부록은 어린애 같은, 천진난만한 미숙한 수단이 보호수단이 되었다는 증거의 도입문과 더 일치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는 정말로 사이렌이 침묵했던 것을 알아 차렸을 거야"와 같이 텍스트의 표현은 오디세우스가 천진난만한지 아니면 꾀 많게 행동했는지 끝까지 확실하지 않다는 것으로 그 진실이 이중적이고 모순적임을 말해 준다. 이렇게 작가는 그의 결론을 일방적으로 확실히 맺지 못하고 "아마도"라는 말로 끝맺는다.

카프카는 신화의 여러 순간을 반대로 뒤집고 변형시키며, 이중성과 속임수를 통해 내용을 바꾸면서 이야기의 전래를 해체시키고, 그것을 통해서 신화는 현대의 시각, 작가의 현재 시각을 벗어나서는 더 이상 믿을 수 없고 완전하게 전래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카프카는 신화를 상이한 요소들과 새로이 결합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신화는 현대로 세련된 변신을, 현대는 신화로 세련된 변신"을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기교를 통해서 작가는 새로우면서 동시에 차별적인 통찰력으로서 세계를 관찰하고 동시에 현대 시점에서 전설적인 고대세계로 시선을 돌린다. 동시에 카프카는 인간이 신화의 힘으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는지를 신화세계로부터 소외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신화에의 접근을 통해서 신화로부터 거리가 유지되는 이중적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역설적 방법으로 작가는 한편으로 신화의 현대적 의미를 찾고 다른 한편으로 그것을 부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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