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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해병대 4성장군인 고 강기천 해병대사령관 공적비 건립 추진

작성자우화등선|작성시간21.12.13|조회수2,460 목록 댓글 0

최초 해병대 4성장군인 故 강기천 해병대사령관 공적비 건립 추진

 

 

고향사랑에 남다른 열정과 사랑을 실천한 故 강기천 전 해병대 사령관의 큰 업적을 공적비(功績碑)에 새겨 후손들에게 아름다운 고향사랑 정신을 전파해야 합니다.”영암 해병대전우회(회장 안중한)는 24일“2019년 11월 19일 93세 일기로 별세한 영암 출신 강기천 해병대 사령관의 업적을 기리는 공적비 건립에 대한 지역주민들의 여론이 일자 건립 추진위를 발족해 공적비 건립에 나선다”고 밝혔다.

 

 

해병대 최초의 4성 장군인 전 강기천 해병대사령관은 1946년 해군 소위로 임관하여 1952년 해병대로 자리를 옮긴 뒤 해병대 제1전투단 작전참모, 해병대 5대대장을 지냈다, 특히 6.25 당시 장단.사천강 지구 전투에 참전해 제2차 중공군 대공세를 막아내며 수도 서울 방어에 기여했다. 1966년 7대 해병대사령관으로 취임한 고 강기천 사령관은 1969년 1월 해병대 최초로 대장으로 승진했다. 해병대사령관이 대장이 된 사람은 고 강기천을 비롯해 총 3명이다.

 

해병대 첫 4성 장군 강기천 전 사령관은 특히 1960년대 어려운 고향의 관내 중.고등학교 등 후배양성에 필요한 학교 증축 및 운동장 보수지원을 아낌없이 실천해 지역민들의 귀감을 샀다.

 

또한 군민의 숙원사업을 찾아 교량건설, 삼호(목포) 비행장과 영암 삼호 용당에 해군 기지을 유치하며 지역발전에 일조하는 등 남다른 고향사랑을 보인바 있다.

 

공적비 건립 추진에 앞장서고 있는 안중한 영암 해병대전우회 회장은“글로서 다 나열할 수 없는 고인의 이 같은 업적에도 시간이 흘러 지역민들의 기억 속에 잊혀 지지 않을까하는 안타까움이 앞선다”면서“해병전우회와 지역주민들의 뜻을 모아 공적비 건립에 적극 나서겠다”고 강조했다

 

 

고 강기천 사령관은 해병대 최초 4성 장군이라는 타이틀이 따라붙고 있다. 그는 6.25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추앙을 받고 있으며, 해병대 7대 사령관으로 1966년 7월 1일부터 1969년 7월 1일까지 역임했다. 1927년 11월 11일생인 그는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망호리가 고향으로 1960년 6월 24일 국방대학원을 졸업하였으며, 1967년 2월 20일 마산대학교 법정학사를 졸업(현 경남대학교)하고, 1967년 9월 29일 연세대학교 경영학원 석사를 수료했다.

 

 

 

 

 

 

1946년 10월 28일 해군소위로 임관하여 1948년 12월 29일 해군 신병교육대장, 1950년 6월 27일 해군 부산항만경비대장, 1953년 3월 1일 해병대사령부 인사국장을 거쳐 1958년 1월 4일 육군대학을 졸업하여 1960년 7월 7일 해병대사령부 기획첨모부장(작전)으로 부임하며 상관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여 군인다운 군인으로 인정을 받았다. 1961년 7월 28일 해병대사령부 행정참모부장, 1961년 8월 10일 해군 준장으로 진급하여 1963년 2월 21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 겸 법제사법위원장을 거쳐 1964년 5월 1일 해군 준장, 1966년 7월 1일 소장으로 진급하여 1966년 해병대 제1상륙사단장, 1966년 7월 1일 해병대 제7대 사령관(대장)으로 있다가 1969년 1월 1일 예편했다.

 

 

고 강기천 사령관은 1970년 1월 9일 대한석탄공사 총재, 1970년 2월 1일 한국 레크리에이션협회 총재, 1970년 4월 1일 한국유스호텔협회 회장, 1973년 2월 27일 제9대 국회의원, 1979년 9월 10일 영남화학주식회사 사장, 1982년 6월 28일 한국.이스라엘 친선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고 강기천 사령관은“나는 고향을 버려도 고향은 나를 버리지 않는다.”“공자는 노나라에서 네 번이나 추방을 당하면서도 고향을 찾았고, 예수는 이스라엘의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면서도 고향을 버리지 않았다”고 자신을 버리지 않은 고향을 그리워했다.

 

고 강기천 사령관은 8.15 광복과 더불어 조국의 간성(干城)이 되고자 1964년 3월 창군기에 해군에 입대했다. 국토방위의 신성한 임무를 수행하던 중 6.25 동란을 당하여 나라 전체는 물론 폐허가 된 공향의 참상을 보고 실지 회복과 향토부흥에 큰 관심을 가졌던 강기천 장군이다.

 

특히 농도(農道)인 전남 발전의 핵이 되는 영산강 유역 개발사업의 기틀을 마련하고 고향인 영암지역 발전에 누구보다 많은 열정을 쏟았던 그다.

 

지금에 와서야 쌀농사가 천덕꾸러기 신세가 됐지만, 헐벗고 굶주림에 시달리던 1960년대 전후에는 논두렁에 콩을 심을 정도로 식량증산이 치우선 과제였다. 이에 따라 영산 유역 개발 사업은 나중에 우리나라 농촌 근대화의 표본이 되었다. 이처럼 국가적인 대업을 이루게 한 결정적인 배경에는 영암 출신인 강기천 전 해병대사령관이 있었다. 그는 혁명정부의 국가재건최고회의 법사위원장으로 있으면서 우리날 4대강 우역개발 중 가장 먼저 착공하게 된 대역사를 이뤄냈다. 강기천 사령관은 재경 영암군향우회 초대회장을 역임하는 등 향우회 초석 다지는 것은 물론 향우회를 통한 지역사회 발전을 기했으며, 고향과 향우들에게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었다.

 

 

강기천 회고록‘나의 인생 여정’에서 국제 평화의 산실인 유엔의 기치 하에 그 멀고 먼 나라들로부터 낮 설고 물도 선 한반도에까지 출정하여 공산 침략군을 무찌르기 위해 우리를 도와 함께 피 흘리며 싸움으로써 우리 대한민국이 처해있던 그 누란의 위기를 극복하고 기사회생하게 해준 그 수많은 자유우방국의 군인들과 그 평화의 십자군을 파견해 준 정부와 국민들의 은혜는 오늘에 살고 있는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대대에 이르기까지 영원히 기억되어야할 것이다.

 

또한 6.25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나 자신을 비록 싸움터에서 풀을 가로 누리듯이 적을 쓰러뜨린 공의 횡초지공(橫草之功) 조차 없는 사람이긴 하지마는, 특히 나는 해군 육전대장 시절이나 해병5대장 시절에 나와 함께 싸우다 전몰한 그 전몰장병들의 희생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며, 또한 나의 사단장 및 해병사령관 시절에 월남 전선에서 전사한 영령들의 영전에 세상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고 썼다.

 

 

혁명정부시절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최고위원 겸 법제사법위원장과 우리나라에서는 몇 안 되는 4성 장군을 역임한 강기천 장군도 유년시절이 그리 순탄지만은 않았다.

 

당시 일본에서 기계학교를 졸업한 부친은 귀국하여 목포에서 철공소를 운영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와 영암읍 회문리에서 정미소와 기계류를 취급하는 공구상을 운영했다. 그런데 이유는 뚜렷하지 않았지만 정미소가 문제가 되어 일본인에게 미움을 샀고, 정미소 운영도 중단되었으며 자신은 강제로 군에 입대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마침 목포에서 전해에 본부를 둔 해병병단의 모병소식을 친구로부터 전해 듣고 곧장 달려가 지원해 간부요원으로 입대하게 되었다. 이때가 1946년 3월 16일의 일이다.

 

강기천 전 사령관은 5남3년 중 장남으로 태어나 현 영암초등학교의 전신인 영암공립심상소학교를 졸업(28회)하고 상급학교로 진학을 위해 진로를 모색하고 있던 중 뜻하지 않게 해군에 입대한 그는 결국 그로부터 23년간 직업군의 길을 걷게 되었다. 나중에는 동생 2명도 해군에 몸담아 3형제 해군이라는 보기 드문 사례를 남겼다. 

 

달(月)이 난 영암은 별(星)도 난다. 휘영청 둥근달과 함께 수많은 별들이 반짝거리고 있다. 최초 해병대 4성 장군인 강기천 전 해병대 사령관 같은 인물을 배출한 고장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최초 해병대 4성 장군인 강기천 해병대 전 사령관은 영암의 인물이다. 영암은 강기천 장군을 초대 법무부장관을 역임한 낭산 김준연 선생 다음으로 영암의 인물로 추앙(推仰)하고 있다.

 

 

그가 태어난 고향은 명산인 '월출산' 이 있다. 월출산은 산에서 달이 난다하여 달 월(月), 날 출(出), 뫼 산(山)자를 써 붙여진 이름이다. 영암은 여러 장군들을 배출한 고장이다. 아직까지 4성 장군은 강기천 장군뿐이다. 그래서 영암에 뜨는 별, 강기천 장군의 4성이 밤하늘에 그려지고 있다고 본다. 샛별(금성) 같은 별이 그에게도 모자에 견장에서 반짝인다. 그 별은 다시 밤하늘을 수놓고 있다. 세상을 비추고 있다.

 

뛰어난 산세를 자랑하고 탁월한 기(氣)를 분출하는 월출산은 그가 꿈과 희망을 키웠던 산이었고, 기개(氣槪)를 펴며 기백(氣魄)을 다졌던 진취적인 기상(氣象)을 표출한 산이다. 그는 고향을 떠나 있어도 월출산의 기운찬 뛰어난 정기(精氣)와 경치(景致)를 항상 잊지 않았으며 동경(憧憬)의 대상이었다. 자신의 신적 존재인 자신의 꿈을 키워준 자신의 정신적 지주가 된 월출산은 늘 그의 가슴에 자리했기에 월출산은 희망(希望)이었다.

 

 

최초 해병대 4성 장군이라는 타이틀을 붙은 만큼 훌륭한 별을 단 장성을 배출한 영암은 달(月)이 나는 고장에서 별(星)도 나는 고장으로서의 이젠 월출산을 또 다른 이름의 별이 난‘성출산(星出山)’이라고 불러도 지나침이 없다. 멋진 달과 아름다운 별은 영암에서 나고 있다.

 

 

해병대사령관 故 강기천 공적비(功績碑) 제막 기념식

 

-일정 : 2021.12.16일(목)

-시간 : 오후 1;30

-장소 : 영암읍 기찬랜드 4성교 앞

-진행 : 공적비 제막과 추모의식 오후 1시 50분

           열린음악회(해병대동우회, 빅밴드 18인조)

 

고 강기천 사령관 공적비 제막식 행사에 많은 참여를 부탁드린다고 주최 측은 당부했다. 특히 향우들의 관심과 애정을 바란다면서 공적비 제막식을 위한 헌성금 접수를 하고 있다.

 

-헌성금 접수 계좌

농협 351-3816-6665-53 해병대전우회장 이창식

 

*헌성금 접수는 24일까지 마감합니다.

 

 

김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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