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좌담회어서 참고자료 – 아부쓰보어서(보탑어서)
자신의 가능성에 눈뜨면
다른 사람의 존귀함도 깨닫는다
<어서전집 1304쪽 6행~8행>
말법(末法)에 들어와서 법화경을 수지(受持)하는 남녀의 모습 이외에 보탑(寶塔)은 없느니라. 만약 그렇다면 귀천상하(貴賤上下)를 가리지 않고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하는 자는 자신이 보탑이고 자신이 또한 다보여래(多寶如來)이니라. 묘호렌게쿄 이외에 보탑은 없으며 법화경의 제목(題目)이 보탑이고 보탑이 또한 남묘호렌게쿄이니라.
※ 아부쓰보(阿佛房)
니치렌대성인 재세 당신의 신자(信者). 아부쓰보 닛토쿠(阿佛房日得)를 말한다. 아부쓰보(阿佛房)는 호(號), 닛토쿠(日得)는 법명(法名), 속명(俗名)은 엔도사에몬노죠다메모리(遠藤左衛門尉爲盛)라고 하며, 원래 쥰토쿠상황(順德上皇)의 북면(北面)의 무사(武士)로서, 1221년(승구3년) 상황(上皇)이 사도에 유배됐을 때 함께 사도로 가서 정주(定住)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니치렌대성인이 사도유죄 중에 쓰가하라 삼매당에서 대성인을 힐난(詰難)하려다 도리어 절복되어 염불을 버리고 처(妻)인 센니치니(千日尼)와 함께 귀복(歸復)했다고 한다.
이후 1274년에 대성인이 유죄사면(流罪赦免)되어 가마쿠라로 돌아갈 때까지의 2년 나머지, 대성인에게 상수급사(常隨給使)하고, 대성인의 미노부산 후에도, 고령의 몸으로서 3회에 걸쳐 공양물을 가지고 미노부를 심방(尋訪)하고 있다. 1279년(홍안2년) 3월 21일 서거. 당시 91세였다고 한다.
※ 아부쓰보어서(阿佛房御書)
1272년(문영9년) 3월 13일, 니치렌대성인이 51세 때, 사도유죄 중, 쓰카하라에서 쓰셔서 사도의 아부쓰보에게 주신 어서.
내용은 아부쓰보가 공양을 했을 때, 법화경의 견보탑품에 있어서 보탑용현(寶塔涌現)의 의의(意義)를 질문한 것에 대하여 답변하시고 있다.
보탑이란 어본존을 말하고,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는 자는 그 몸이 보탑이며 다보여래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또한 아부쓰보를 북국(北國)의 도사(導師)라 하시고, 정행보살(淨行菩薩)이 다시 태어나서 대성인을 방문한 것과 같아고 말씀하시며, 깊은 신심을 치하하시고 있다.
☞ 어서사전 1001쪽
◇
우리 지역에 행복승리의 보탑을
우리 자신이 존귀하기 그지없는 ‘보탑’이라고 가르치신 어서입니다.
법화경 견보탑품 제11에서는 칠보(七寶)로 장식된 거대한 보탑이 갑자기 나타나고 사람들을 공중으로 이끌어 올려 드디어 ‘허공회 의식’이 시작됩니다. 이 보탑은 도대체 무엇을 나타내는 것일까요.
석존 재세의 성문(聲聞)들은 법화경을 듣고 보탑을 자기 밖에서가 아니라 자기 속에서 보았습니다. ‘기심(己心)의 보탑’입니다.
대성인 문하도 이와 똑같습니다. 대성인은 보탑이 “법화경을 수지하는 남녀의 모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추상적,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어본존을 믿고 열심히 삶을 영위하는 인간 자체가 보탑이라고 단언하셨습니다.
게다가 “귀천상하를 가리지 않고”입니다. 남묘호렌게쿄를 부르는 사람은 신분이나 지위를 가리지 않고 ‘자신’이 ‘보탑’이고 ‘다보여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숙명전환과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현실 사회에서 투쟁하고 승리하는 학회원의 모습이야말로 복덕으로 장식된 보탑입니다.
그리고 대성인은 “묘호렌게쿄 이외에 보탑은 없으며”라고 밝히시고, 법화경에서 설한 보탑은 모든 공덕을 간직한 남묘호렌게쿄를 나타낸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대성인은 성불(成佛)의 근본법인 남묘호렌게쿄를, 허공회 의식을 채택하여 어본존으로 도현하셨습니다.
이케다 SGI 회장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존귀하기 그지없는 ‘보탑’이라고 자각한 한 사람이 일어서면, 이 지구에 평화와 행복의 위대한 탑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한 니치렌대성인의 불법(佛法)입니다. 모든 것은 ‘자신’의 내적인 혁명으로 결정됩니다.”
자신의 보탑을 빛내어 우리 지역에 위대한 승리의 보탑을 세웁시다.
☞ 법련(1503)
◇
보아라! 우리 가슴속에 보탑은 찬연하다
민중만큼 존귀한 것은 없습니다.
민중만큼 현명한 것은 없습니다.
현대의 저류에는 ‘민중의 시대’로 향하는 확실한 방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인간을 수단화하고 인간성을 짓밟은 탁류 역시 격렬하게 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의 ‘우뚝 솟은 인간’을 육성하는 일이 기로에 선 시대에서는 일체의 근간이 됩니다.
사회를 정화하고 인간존경의 사상을 창조하며 생명존엄의 가치를 확립하려면 ‘한 사람’을 육성하는 일이 21세기 종교의 최대 책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민중의 시대’를 여는 돌파구는 먼저 한 사람입니다. ‘한 사람’이 자신의 내적인 ‘보배’에 눈 뜨는 그 순간에 민중개가의 아침 해가 떠오릅니다.
일체는 한 사람의 인간혁명에서
한 사람이 ‘자신’이 지닌 진실한 가능성을 알았을 때 한 사람의 위대한 인간혁명이 시작됩니다. 존극하고 위대한 자신의 가능성에 눈뜬 사람은 타인도 존귀한 존재임을 압니다.
자타가 서로의 존엄성을 진심으로 인정하면 인류는 경애를 높일 수 있습니다. 자타를 덮고 있는 무명을 걷어내면 인류는 상극과 갈등의 숙명을 전환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존극한 ‘보탑’이라고 깨달은 한 사람이 일어서면 이 지구에 평화와 행복의 큰 탑을 일으켜 세울 수 입습니다. 그러기 위한 니치렌대성인불법입니다. 일체는 ‘자신’의 내적인 혁명으로 결정됩니다.
‘자신’의 본디 모습에 눈떠라. 이 불법의 극리를 가르친 어서가 <아부쓰보어서(보탑어서)>입니다.
말법에 법화경을 수지하는 사람이 보탑
“말법에 들어와서 법화경은 수지하는 남녀의 모습 이외에 보탑은 없느니라. 만약 그렇다면 귀천상하를 가리지 않고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는 자는 자신이 보탑이고 자신이 또한 다보여래이니라.”
마키구치 선생님도 이 부분을 중심으로 여러 곳에 붉은 줄을 긋고 연찬하셨습니다.
아부쓰보는 말할 것도 없고, 함께 편지를 읽었을 부인 센니치니도 얼마나 놀라고 감동했을까요.
대성인이 말씀하신 ‘기심의 보탑’은 경문상으로만 듣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자신들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빙긋이 웃었을지도 모릅니다.
본디 ‘귀천상하’는 사람들을 차별하는 말입니다. 신분이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 지위가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불법은 ‘귀천상하를 가리지 않고’ 입니다. 사회적인 위치 등은 전혀 상관없습니다.
<어의구전>에 “나의 몸을 봄은 삼천구족(三千具足)의 탑을 보는 것이고 나의 마음을 보는 것은 삼천구족의 부처를 보는 것이니라.”(어서 797쪽)는 말씀처럼 보탑은 내 몸, 그 안의 다보여래는 내 마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최고의 인간존엄 사상이 있습니다.
만인의 생명이 존엄함을 모르고 타인을 차별하는 사람은 사실은 자신의 존엄을 손상시키고, 반대로 만인은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자신의 보탑을 더욱 빛나게 합니다.
현실의 ‘모습’으로 정의를 증명
대성인은 여기서 “법화경은 수지하는 남녀의 모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습’은 밖으로 나타난 자태, 행동입니다. 추상적이고 이념적인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모습’이며, 지금 여기서 열심히 사는 한 사람 한사람 그 자체입니다.
대성인은 이렇게 사는 사람 이외에 보탑은 없다고 단언하십니다.
어본존을 수지하고, 제목을 봉창하며 불법을 홍통하는 사람의 ‘모습’은 틀림없이 묘법의 당체로서 순간순간 빛납니다.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나타내는 범부가 그대로 ‘존극한 보탑’으로 나타납니다.
고뇌로 가득 찬 현실 속에서 매정한 욕설에도 굽히지 않고, 자신의 숙명전환을 위해 그리고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황금 같은 존귀한 땀방울은 흘리며 꿋꿋하게 투쟁하는 학회원의 ‘모습’이 바로 틀림없는 보탑입니다.
대성인은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는 자는 ‘자신’이 ‘보탑’이고, 또 ‘자신’이 ‘다보여래’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보여래는 법화경을 증명하는 부처입니다. 증명자는 결코 방관자가 아닙니다. 법화경을 설하는 곳에 반드시 뛰어 들어가기로 맹세했습니다. 법화경이 최고로 진실한 가르침이며 부처가 되는 길이라고 증명했습니다.
나는 경애하는 다보회(多寶會), 보수회(寶壽會), 금보회(錦寶會)의 지도부 여러분의 영매(英邁, 영민하고 비범함)한 자태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원숙한 인생의 벗을 곧잘 ‘다보의 증명자들’ ‘다보의 존귀한 동지’라고 칭송하셨습니다.
20년, 30년, 50년이라는 세월을 순진하게 신앙을 관철하며 나와 함께 파란만장한 광포와 인생의 산을 타고 넘으면서 “이 불법은 위대하다.” “학회는 올바르다.”고 외치며 몸으로 증명하신 분들입니다. 설령 무명(無明)이라 해도 불법상 그리고 인간으로서 최고로 존귀한 대영웅입니다.
☞ 승리의 경전 ‘어서’에서 배운다(33) 아부쓰보어서(上)
http://cafe.daum.net/seikyoohknews/R9dO/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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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본존은 만인을 비추는 명경(明鏡)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 이외에 보탑은 없으며, 법화경의 제목(題目)이 보탑이고 보탑이 또한 남묘호렌게쿄이니라.”
여기부터 대성인은 “아부쓰보, 당신 자신이 묘호렌게쿄의 보탑입니다.” “당신도 칠보의 광채를 발하고 있습니다.” “당신 자신이 부처입니다.”라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아부쓰보 자신이 보탑이라는 의미를 전개하십니다.
먼저 대성인은 “법화경의 제목이 보탑이고, 보탑이 또한 남묘호렌게쿄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법화경에서 설한 보탑은 남묘호렌게쿄 이외에 어디에도 없습니다. 법화경의 제목이 바로 보탑이고, 그것을 대성인은 어본존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어의구전>에는 “지금 니치렌 등의 동류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는 자는 명경에 만상을 비추는 것과 같이 지견하느니라. 이 명경이란 법화경이고 별해서는 보탑품이니라.”(어서763쪽)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거울이 없으면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습니다. 하물며 ‘기심의 보탑’은 그것을 보는 명경이 없으면 누구도 볼 수 없습니다. 거기에 대성인이 어본존을 나타내신 이유도 있습니다.
니치렌대성인은 어본불로서 자신의 생명을 어본존으로 도현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어본존을 명경으로 삼아 남묘호렌게쿄의 제목을 봉창했을 때 자신에게 내재(內在)한 부처의 생명이 강성하게 용현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이 가슴속에 보탑을 일으켜 세우는, 바로 그러기 위한 어본존입니다.
☞ 승리의 경전 ‘어서’에서 배운다(33) 아부쓰보어서(下)
http://cafe.daum.net/seikyoohknews/R9dO/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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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용의 보탑이 늘어서다
이번 교학 임용시험의 범위인 <아부쓰보어서>에 이렇게 씌어 있다. “말법에 들어와서 법화경을 수지하는 남녀의 모습 이외에 보탑(寶塔)은 없느니라.”(어서 1304쪽)
불계의 생명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갖추어져 있다. 묘법(妙法)을 신수한 사람은 누구나 가장 존귀한 보탑이다.
보탑의 생명을 빛내는 일에는 인종도, 출신도, 민족도, 성별도, 빈부차도 어느 것 하나 방해되지 않는다. 그리고 한 사람 한사람이 생명의 빛을 발산함으로써 이른바 ‘늘어선 보탑’이 사회도, 세계도 인간주의의 커다란 빛으로 감쌀 수 있다.
지금 세계 각국의 국제창가학회(SGI)에서 교학연수를 열고 있다.
어느 리더는 교학연수에서 아버지가 겪은 체험을 말했다.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해 글을 잘 쓰지 못하는 아버지가 교학시험을 계기로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실천 교학을 거듭해 마침내 교학부 ‘교수’가 되고 글씨도 명필이라고 칭찬받는다.
지위나 신분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에게 ‘배움의 장’을 열어 정의와 평화의 ‘교수’로 육성하는 일이 SGI의 교학운동이다.
올여름에도 아시아, 남북 아메리카 등 각지에서 연수가 열렸다. 유럽SGI가 이탈리아 밀라노 근교에서 교학연수를 열어 31개국에서 500여 명이 감연히 참석했다. 참석자 중 60%가 청년부였다.
더욱이 지난 9월, SGI 청년연수에 참석하기 위해 세계 60개국지역을 대표하는 젊은이들이 뜨거운 구도심을 품고 모였다.
이번 연수에서는 세계의 ‘화양자매’가 ‘행학의 이도’에 힘써 얻은 실증을 이야기하는 체험담대회를 밝고 의의 깊게 열었다.
나는 세계광포의 바통을 의탁할 보배로운 청년들을 만나 격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명존엄의 위대한 철학을 내건 창가(創價)의 젊은 세계시민들이 본문의 신시대를 열어 인류의 미래에 ‘용기’와 ‘인재’ 그리고 ‘단결’의 빛을 보내고 있다.
☞ 수필·민중개가의 대행진(27)
http://cafe.daum.net/seikyoohknews/V8es/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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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탑이란 묘호렌게쿄의 오자(五字)
SGI회장 :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설법에 의해 묘호렌게쿄의 보탑이 용현한다. 우리들이 자행화타에 걸쳐 묘법을 봉창할 때 우리들의 생명이 보탑으로 된다. 보탑이 출현한다. 봉창되는 법도 묘호렌게쿄. 봉창하는 우리들도 묘호렌게쿄입니다.
도다 선생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다.
“승려가 된 어느 학자에게 내가 ‘법화경을 설할 때 보탑이 나타난다고 법화경에 있다. 그런데 대성인은 법화경을 설하셨지만 보탑이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는데, 대체 그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 사람은 곤란해 했습니다.
보탑에 대해 아부쓰보가 대성인에게 여쭈어 봤을 때 ‘아부쓰보가 바로 보탑이고 보탑이 바로 아부쓰보이며’(어서 1304쪽)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당신들의 몸 그 자체가 보탑인 것입니다. 그 보탑 속에 당신들의 몸속에 석가, 다보의 이불(二佛)이 앉아 계시어 상행보살이라는 분을 불러냈습니다.”
스다 : 불법을 관념으로 받아들이기 쉬운 학자의 함정이군요. 보탑을 어딘가 먼 곳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SGI회장 : 도다 선생님은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의 생명에는 불계(佛界)라는 아주 불가사의한 생명이 명복(冥伏)되어있다. 이 생명의 힘과 상태는 상상도 할 수 없으며 필설로도 다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을 우리들의 생명체 위에 구현할 수는 있다. 현실적으로 우리들의 생명 그 자체도 명복되어 있는 불계를 구현할 수 있다고 설해 밝힌 것이 보탑품의 의식이다. 즉 석가는 보탑의 의식으로서 기심(己心)의 십계호구(十界互具), 일념삼천(一念三千)을 나타내는 것이다.”
보탑품의 의식은 불계라는 존엄한 생명을 구체적으로 설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왜 구체적인 형태로 묘호렌게쿄가 밝혀지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그것은 오로지 ‘멸후를 위해서’입니다. ‘영법구주를 위해서’입니다.
이제까지 법화경을 듣고 신해(信解)하면 반드시 성불할 수 있다고 설해 왔다. 보탑의 출현은 그 법화경의 힘을 실증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제까지는 ‘이(理)’로서 설해져 왔던 것이 ‘보탑품’부터는 ‘사(事)’로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事)’는 본문(本門)입니다. 보탑품부터 본문의 서분(序分)이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보여래의 ‘증명’이라는 것도 탑 속에서 “좋구나, 좋구나.”라며 법화경이 진실임을 ‘말’로 증명한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다보여래와 보탑의 출현 그 자체가 묘호렌게쿄의 ‘현증(現證)’으로 되어있다.
‘견보탑’이라는 제명(題名)은 보탑의 출현을 통해 ‘묘호렌게쿄를 보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묘호렌게쿄를 ‘실체험(實體驗)’한 것입니다. 즉 나의 몸이 묘호렌게쿄임을 보탑이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성인은 보탑품을 ‘명경(明鏡)’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지요.
☞ ‘법화경의 지혜 제3권’
2020년3월 좌담회어서 - 아부쓰보어서(보탑어서).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