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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좌담회 어서(御書) 참고자료 - 아부쓰보어서(보탑어서)

작성자다사랑|작성시간15.02.26|조회수975 목록 댓글 3

2015년 3월, 좌담회어서 참고자료

아부쓰보어서(보탑어서)


묘법에 살아가는 사람이 ‘보탑’

우리 생명을 최고로 빛내갑시다


말법(末法)에 들어와서 법화경(法華經)을 수지(受持)하는 남녀(男女)의 모습 이외(以外)에 보탑(寶塔)은 없느니라.

만약 그렇다면 귀천상하(貴賤上下)를 가리지 않고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자신(自身)이 보탑(寶塔)이고 자신(自身)이 또한 다보여래(多寶如來)이니라.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 이외(以外)에 보탑(寶塔)은 없으며, 법화경(法華經)의 제목(題目)이 보탑(寶塔)이고 보탑(寶塔)이 또한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어서전집 1304쪽 6행-8행)


※ 아부쓰보(阿佛房)


니치렌대성인 재세 당신의 신자(信者). 이부쓰보 닛토쿠(阿佛房日得)를 말한다.

아부쓰보(阿佛房)는 호(號), 닛토쿠(日得)는 법명(法名), 속명(俗名)은 엔도사에몬노죠다메모리(遠藤左衛門尉爲盛)라고 하며, 원래 쥰토쿠상황(順德上皇)의 북면(北面)의 무사(武士)로서, 1221년(승구3년) 상황(上皇)이 사도에 유배됐을 때 함께 사도로 가서 정주(定住)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니치렌대성인이 사도유죄 중에 쓰가하라 삼매당에서 대성인을 힐난(詰難)하려다 도리어 절복되어 염불을 버리고 처(妻)인 센니치니(千日尼)와 함께 귀복(歸復)했다고 한다.

이후 1274년에 대성인이 유죄사면(流罪赦免)되어 가마쿠라로 돌아갈 때까지의 2년 나머지, 대성인에게 상수급사(常隨給使)하고, 대성인의 미노부산 후에도, 고령의 몸으로서 3회에 걸쳐 공양물을 가지고 미노부를 심방(尋訪)하고 있다. 1279년(홍안2년) 3월 21일 서거. 당시 91세였다고 한다. 


※ 아부쓰보어서(阿佛房御書)


1272년(문영9년) 3월 13일, 니치렌대성인이 51세 때, 사도유죄 중, 쓰카하라에서 쓰셔서, 사도의 아부쓰보에게 주신 어서.

내용은 아부쓰보가 공양을 했을 때, 법화경의 견보탑품에 있어서, 보탑용현(寶塔涌現)의 의의(意義)를 질문한 것에 대하여 답변하시고 있다.

보탑이란 어본존을 말하고,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는 자는 그 몸이 보탑이며 다보여래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또한 아부쓰보를 북국(北國)의 도사(導師)라 하시고, 정행보살(淨行菩薩)이 다시 태어나서 대성인을 방문한 것과 같아고 말씀하시며, 깊은 신심을 치하하시고 있다.


☞ 어서사전 1001쪽


우리지역에 승리의 ‘보탑’을


법화경 견보탑품 제11에서 칠보로 장식된 거대한 보탑이 대지에서 출현해 공중으로 떠오릅니다. 법화경 설법회장에 모인 사람들은 이 전대미문의 일에 모두 경탄하고 환희했습니다.


니치렌대성인은 “이 보탑은 무엇을 의미합니까?”라는 아부쓰보의 질문에 이 어서를 보내며, 보탑은 묘법을 수지한 자신의 모습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을 읽은 아부쓰보는 얼마나 감격했을까요.


아부쓰보는 본디 염불종의 강신자로 생각됩니다. 염불은 말법시대 중생은 죄업(罪業)이 깊으므로 아미타불의 자비가 없으면 구제될 수 없다고 설합니다.

대성인은 이렇게 인간의 무력함과 보잘 것 없음을 설한 가르침과 반대로, 사람은 누구나 생명 속에 존귀하기 그지없는 불계(佛界)가 있으며 묘법을 신수(信受)하면 그 불계를 나타내서 보탑과 같이 빛낼 수 있다고 인간의 위대함 가능성을 밝히셨습니다.


“귀천상하를 가리지 않고...”라고 말씀하며 불계를 나타내는 데에는 처지나 신분 등은 전혀 상관없고 오직 묘법을 부르는 수행을 열심히 하는가 여하에 달려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묘호렌게쿄 이외에 보탑은 없으며...”라고 말씀하며 보탑이 남묘호렌게쿄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대성인은 불계를 나타내는 우리의 수행을 위해 남묘호렌게쿄라는 근본법(根本法)을 어본존으로 도현하셨습니다.


대성인은 사도의 무명(無名)문하에 대해 이와 같이 최대로 칭찬하며 격려하셨습니다. 대성인불법(佛法)의 위대함은 자신뿐 아니라 남의 생명에 있는 보탑을 발견하는 데 있습니다.


이케다 SGI 회장은 “내 몸의 보탑을 보고, 우리 벗의 보탑을 본다. 그리고 ‘보탑’ 또 ‘보탑’으로 숲을 이루어 우리 지역을 장엄하게 장식하고 나아가 지구를 장엄하게 장식합니다. 광선유포라는 ‘보탑’을 우리 지역에 세워야 합니다. 나는 이만큼 해냈다는 ‘영원한 금자탑’을 남겨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지역에 위대한 승리의 보탑을 세웁시다.


가슴속의 보탑품


깊은 신심으로 니치렌대성인을 받든 여성문하로 니치뇨부인이 있습니다. 니치뇨부인은 미노부에 계신 대성인에게 법화경 28품에 연관해서 스물여덟번 공양하기로 뜻을 세웠습니다.


대성인은 그 진심에 부응해서 “법화경 보탑품에서 다보여래(多寶如來), 석가여래(釋迦如來), 시방(十方)의 제불(諸佛), 일체의 보살이 모였습니다. 이 보탑품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하고 생각해보니 니치뇨부인 가슴속에 있는 팔엽(八葉)의 심연화(心蓮華) 안에 있다고 니치렌은 보았습니다. 그것은 연(蓮)의 열매 속에 꽃이 있고 왕후(王后)의 뱃속에 태자(太子)를 회임(懷妊)한 것과 같습니다.”(어서 1249쪽, 취의)


대성인은 다짐하듯이 “니치뇨부인 마음속에 보탑품이 있습니다. 범부에게는 보이지 않으나 석가, 다보, 시방의 제불은 보시고 있습니다. 니치렌도 또한 이를 짐작하고 있습니다. 아, 이 얼마나 존귀한 일입니까.”(어서 1250쪽, 취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뜻 깊은 삶을 영위하는 니치뇨부인의 가슴속에 모든 부처와 보살이 모여 거행된 보탑품의 장엄한 의식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탑품에 관한 지도는 대성인이 사도에 유배되었을 때 목숨바쳐 받든 아부쓰보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말법에 들어와서 법화경을 수지하는 남녀의 모습 이외에 보탑은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신분이나 처지에 상관없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하는 사람은 그 몸이 보탑이고 또한 다보여래입니다. 아부쓰보가 그대로 보탑이고 보탑이 그대로 아부쓰보입니다.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면 그곳이 그대로 보탑이 있는 곳이 됩니다.”(어서 1304쪽, 취의)


‘불가사의한 보탑은 나 자신이었는가!’ 아부쓰보는 얼마나 놀라고 기뻐했을까요.

진실한 행복은 서방극락정토와 같이 어딘가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지금 있는 곳에서 묘법을 위해 끝까지 살며 사명을 다하는 신심에 칠보로 장식된 보탑과 같이 생명의 행복이 찬연히 빛납니다.


☞ ‘월간법련(2010.04)’ 에서 


보아라! 

우리 가슴속에 보탑은 찬연하다


민중만큼 존귀한 것은 없습니다.

민중만큼 현명한 것은 없습니다.

현대의 저류에는 ‘민중의 시대’로 향하는 확실한 방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인간을 수단화하고 인간성을 짓밟은 탁류 역시 격렬하게 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의 ‘우뚝 솟은 인간’을 육성하는 일이 기로에 선 시대에서는 일체의 근간이 됩니다.


사회를 정화하고 인간존경의 사상을 창조하며 생명존엄의 가치를 확립하려면 ‘한 사람’을 육성하는 일이 21세기 종교의 최대 책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민중의 시대’를 여는 돌파구는 먼저 한 사람입니다. ‘한 사람’이 자신의 내적인 ‘보배’에 눈 뜨는 그 순간에 민중개가의 아침 해가 떠오릅니다.


일체는 한 사람의 인간혁명에서


새로운 시대를 창조하는 진실한 ‘나라의 보배’ ‘사회의 보배’는 도대체 무엇인가 남아프리카공화국 만델라 전(前) 대통령은 27년 반에 이르는 옥중투쟁을 견딘 끝에 비도(非道)한 인종차별의 벽을 부수고, 민중승리의 새벽을 열었습니다. 그 만델라 전 대통령이 인생의 신념으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엇보다 귀중한 재산은 어떤 순도 높은 다이아몬드보다 성실하고 강인한 민중이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성실하고 강인한 민중’이 탄생하면 사회는 틀림없이 선(善)한 방향으로 바뀝니다. 민중 한 사람 한사람이 바로 최고의 ‘보배’입니다.

그러므로 그 일체의 기점이 되는 한 사람의 진실한 소생이 중요합니다.


한 사람이 ‘자신’이 지닌 진실한 가능성을 알았을 때 한 사람의 위대한 인간혁명이 시작됩니다. 존극하고 위대한 자신의 가능성에 눈뜬 사람은 타인도 존귀한 존재임을 압니다.


자타가 서로의 존엄성을 진심으로 인정하면 인류는 경애를 높일 수 있습니다.

자타를 덮고 있는 무명을 걷어내면 인류는 상극과 갈등의 숙명을 전환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존극한 ‘보탑’이라고 깨달은 한 사람이 일어서면 이 지구에 평화와 행복의 큰 탑을 일으켜 세울 수 입습니다.

그러기 위한 니치렌대성인불법입니다.

일체는 ‘자신’의 내적인 혁명으로 결정됩니다.


‘자신’의 본디 모습에 눈떠라. 이 불법의 극리를 가르친 어서가 <아부쓰보어서(보탑어서)>입니다. 니치렌대성인이 아부쓰보에게 가르쳐준 ‘위대한 자신의 깨달음’의 자취를 살펴보겠습니다.


말법에 법화경을 수지하는 사람이 보탑


“지금 니치렌의 제자 단나 또한 이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석존 재세의 성문과 마찬가지로 말법인 지금 니치렌대성인 문하도 또한 ‘기심의 보탑’을 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글월은 대단히 유명합니다.

“말법에 들어와서 법화경은 수지하는 남녀의 모습 이외에 보탑은 없느니라. 만약 그렇다면 귀천상하를 가리지 않고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는 자는 자신이 보탑이고 자신이 또한 다보여래이니라.”

마키구치 선생님도 이 부분을 중심으로 여러 곳에 붉은 줄을 긋고 연찬하셨습니다.

아부쓰보는 말할 것도 없고, 함께 편지를 읽었을 부인 센니치니도 얼마나 놀라고 감동했을까요.

대성인이 말씀하신 ‘기심의 보탑’은 경문상으로만 듣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자신들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빙긋이 웃었을지도 모릅니다.


본디 ‘귀천상하’는 사람들을 차별하는 말입니다. 신분이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 지위가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불법은 ‘귀천상하를 가리지 않고’ 입니다. 사회적인 위치 등은 전혀 상관없습니다.

<어의구전>에 “나의 몸을 봄은 삼천구족(三千具足)의 탑을 보는 것이고 나의 마음을 보는 것은 삼천구족의 부처를 보는 것이니라.”(어서 797쪽)는 말씀처럼 보탑은 내 몸, 그 안의 다보여래는 내 마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최고의 인간존엄 사상이 있습니다.

만인의 생명이 존엄함을 모르고 타인을 차별하는 사람은 사실은 자신의 존엄을 손상시키고, 반대로 만인은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자신의 보탑을 더욱 빛나게 합니다.


현실의 ‘모습’으로 정의를 증명


대성인은 여기서 “법화경은 수지하는 남녀의 모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습’은 밖으로 나타난 자태, 행동입니다. 추상적이고 이념적인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모습’이며, 지금 여기서 열심히 사는 한 사람 한사람 그 자체입니다.

대성인은 이렇게 사는 사람 이외에 보탑은 없다고 단언하십니다.


어본존을 수지하고, 제목을 봉창하며 불법을 홍통하는 사람의 ‘모습’은 틀림없이 묘법의 당체로서 순간순간 빛납니다.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나타내는 범부가 그대로 ‘존극한 보탑’으로 나타납니다.

고뇌로 가득 찬 현실 속에서 매정한 욕설에도 굽히지 않고, 자신의 숙명전환을 위해 그리고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황금 같은 존귀한 땀방울은 흘리며 꿋꿋하게 투쟁하는 학회원의 ‘모습’이 바로 틀림없는 보탑입니다.


대성인은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는 자는 ‘자신’이 ‘보탑’이고, 또 ‘자신’이 ‘다보여래’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보여래는 법화경을 증명하는 부처입니다. 증명자는 결코 방관자가 아닙니다. 법화경은 설하는 곳에 반드시 뛰어 들어가기로 맹세했습니다. 법화경이 최고로 진실한 가르침이며 부처가 되는 길이라고 증명했습니다.


나는 경애하는 다보회(多寶會), 보수회(寶壽會), 금보회(錦寶會)의 지도부 여러분의 영매(英邁, 영민하고 비범함)한 자태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원숙한 인생의 벗을 곧잘 ‘다보의 증명자들’ ‘다보의 존귀한 동지’라고 칭송하셨습니다.

20년, 30년, 50년이라는 세월을 순진하게 신앙을 관철하며 나와 함께 파란만장한 광포와 인생의 산을 타고 넘으면서 “이 불법은 위대하다.” “학회는 올바르다.”고 외치며 몸으로 증명하신 분들입니다. 설령 무명(無明)이라 해도 불법상 그리고 인간으로서 최고로 존귀한 대영웅입니다.


그 확신에 찬 한마디의 무게는 인생 그 자체의 무게입니다. 사는 모습 그 자체가 묘법의 증명입니다.

이번 동일본대지진의 고난 속에서 “이것저것 다 빼앗긴 나지만, 오직 하나 남은 가슴의 등불”이라고 읊으며 “또 일어선다.”라고 굳게 맹세한 다보회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나는 그 노래를 눈물겹게 들었습니다.

여기저기에 “좌절하지 않는다.”라는 불굴의 정신을 불태우는 부모가 계신다, 그 신념에 찬 모습을 동지도 또 지역 유지분들도 신뢰하며 흠모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러러 보는 대보탑이며, 불법의 정의를 증명하는 다보여래입니다. 전 세계에 있는 다보회 여러분의 건강과 장수를 나와 아내가 기원하고 또 기원하고 있습니다.


어본존은 만인을 비추는 명경(明鏡)


<본문> (어서 1304쪽 8행)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 이외(以外)에 보탑(寶塔)은 없으며, 법화경(法華經)의 제목(題目)이 보탑이고 보탑이 또한 남묘호렌게쿄이니라.


여기부터 대성인은 “아부쓰보, 당신 자신이 묘호렌게쿄의 보탑입니다.” “당신도 칠보의 광채를 발하고 있습니다.” “당신 자신이 부처입니다.”라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아부쓰보 자신이 보탑이라는 의미를 전개하십니다.


먼저 대성인은 “법화경의 제목이 보탑이고, 보탑이 또한 남묘호렌게쿄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법화경에서 설한 보탑은 남묘호렌게쿄 이외에 어디에도 없습니다. 법화경의 제목이 바로 보탑이고, 그것을 대성인은 어본존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어의구전>에는 “지금 니치렌 등의 동류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는 자는 명경에 만상을 비추는 것과 같이 지견하느니라. 이 명경이란 법화경이고 별해서는 보탑품이니라.”(어서763쪽)고 말씀하셨습니다.

거울이 없으면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습니다. 하물며 ‘기심의 보탑’은 그것을 보는 명경이 없으면 누구도 볼 수 없습니다. 거기에 대성인이 어본존을 나타내신 이유도 있습니다.


니치렌대성인은 어본불로서 자신의 생명을 어본존으로 도현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어본존을 명경으로 삼아 남묘호렌게쿄의 제목을 봉창했을 때 자신에게 내재(內在)한 부처의 생명이 강성하게 용현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이 가슴속에 보탑을 일으켜 세우는, 바로 그러기 위한 어본존입니다.


☞ 승리의 경전 ‘어서’에서 배운다 (33) ‘아부쓰보어서’ 에서

http://m.cafe.daum.net/seikyoohknews/R9dO/46?listURI=%2Fseikyoohknews%2F_rec (상)


http://m.cafe.daum.net/seikyoohknews/R9dO/47?listURI=%2Fseikyoohknews%2F_rec (하)


대화의 황금물결을


법화경의 회좌(會座)에서는 칠보(七寶)로 장식된 거대한 보탑이 다보여래와 함께 용현한다.

이 보탑은 대체 무엇을 나타내는가.

니치렌 대성인은 아부쓰보의 질문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말법(末法)에 들어와서 법화경을 수지(受持)하는 남녀의 모습 이외에 보탑은 없느니라.”

“아부쓰보가 바로 보탑이고 보탑이 바로 아부쓰보이며 이것 이외의 재각(才覺)은 무익하니라.” (어서 1304쪽)


다름 아닌 당신의 생명이 바로 존귀하기 그지없는 보탑이라는 말씀이다.

이 보탑은 무엇에도 침범 당하지 않는다. 무엇에도 지지 않는다. 생로병사라는 온갖 고뇌를 상락아정의 향기로운 바람으로 전환한다.


대성인은 사도에서 목숨이 위태로운 대난을 당하면서도 서민 한 사람 한사람에게 말을 건네 스스로 크나큰 부처의 생명에 눈뜨게 했다.

‘한 사람’의 마음을 바꾸면 ‘모든 것’이 바뀐다. 우리가 펼치는 대화는 대성인 사자(使者)로서 생명의 보탑을 즐비하게 세우는 투쟁이다.


언제나

광포의 동지를

격려하고

음지에서 지휘하는

값진 땀이로구나


☞ (0911) ‘여는글’ 에서

http://m.cafe.daum.net/seikyoohknews/VTeO/22?listURI=%2Fseikyoohknews%2F_rec


보탑이란 妙法蓮華經의 오자(五字)


SGI회장 : 妙法蓮華經의 설법에 의해 妙法蓮華經의 보탑이 용현한다.

우리들이 자행화타에 걸쳐 묘법을 봉창할 때 우리들의 생명이 보탑으로 된다. 보탑이 출현한다. 봉창되는 법도 妙法蓮華經. 봉창하는 우리들도 妙法蓮華經입니다.


도다 선생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다.

“승려가 된 어느 학자에게 내가 ‘법화경을 설할 때 보탑이 나타난다고 법화경에 있다. 그런데 대성인은 법화경을 설하셨지만 보탑이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는데, 대체 그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 사람은 곤란해 했습니다.

보탑에 대해 아부쓰보가 대성인에게 여쭈어 봤을 때 ‘아부쓰보가 바로 보탑이고 보탑이 바로 아부쓰보이며’(어서 1304쪽)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당신들의 몸 그 자체가 보탑인 것입니다. 그 보탑 속에 당신들의 몸속에 석가, 다보의 이불(二佛)이 앉아 계시어 상행보살이라는 분을 불러냈습니다.”


스다 : 불법을 관념으로 받아들이기 쉬운 학자의 함정이군요. 보탑을 어딘가 먼 곳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SGI회장 : 도다 선생님은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의 생명에는 불계(佛界)라는 아주 불가사의한 생명이 명복(冥伏)되어있다. 이 생명의 힘과 상태는 상상도 할 수 없으며 필설로도 다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을 우리들의 생명체 위에 구현할 수는 있다. 현실적으로 우리들의 생명 그 자체도 명복되어 있는 불계를 구현할 수 있다고 설해 밝힌 것이 보탑품의 의식이다.

즉 석가는 보탑의 의식으로서 기심(己心)의 십계호구(十界互具), 일념삼천(一念三千)을 나타내는 것이다.”


보탑품의 의식은 불계(佛界)라는 존엄한 생명을 구체적으로 설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왜 구체적인 형태로 妙法蓮華經가 밝혀지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그것은 오로지 ‘멸후를 위해서’입니다. ‘영법구주를 위해서’입니다.


이제까지 법화경을 듣고 신해(信解)하면 반드시 성불할 수 있다고 설해 왔다. 보탑의 출현은 그 법화경의 힘을 실증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제까지는 ‘이(理)’로서 설해져 왔던 것이 보탑품부터는 ‘사(事)’로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事)’는 본문(本門)입니다. 보탑품부터 본문의 서분(序分)이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보여래의 ‘증명’이라는 것도 탑 속에서 “좋구나, 좋구나” 하며 법화경이 진실임을 ‘말’로 증명한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다보여래와 보탑의 출현 그 자체가 妙法蓮華經의 ‘현증(現證)’으로 되어있다.

‘견보탑’이라는 제명(題名)은 보탑의 출현을 통해 ‘妙法蓮華經를 보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妙法蓮華經를 ‘실체험(實體驗)’ 한 것입니다. 즉 나의 몸이 妙法蓮華經임을 보탑이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성인은 보탑품을 ‘명경(明鏡)’ 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지요.


☞ ‘법화경의 지혜 제3권’ 에서

 

 

 

 

첨부파일 2015년3월 좌담회어서 참고 - 아부쓰보어서(보탑어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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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청남 | 작성시간 15.02.28 어디에서 이 많은 자료를~
    보탑을 우뚝 세우듯ㅡ 감사합니다
  • 작성자이미금 | 작성시간 15.03.01 저도 많은 도움이
    되엇네요.감사합니다
    '' 글에 포함된 스티커
  • 작성자lion father | 작성시간 15.03.04 좋은자료 감사합니다.
    좌담회에서 유용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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