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기록 - 간사이 청년평화 문화제
간사이 청년평화문화제
압권의 ‘6층 원탑’과 ‘간사이 혼’
역사적인 대법전의 무대 구(舊) 간사이 본부자리에 간사이 기념회관이 오픈했다.
간사이 문화회관에서 남쪽으로 도로를 하나 사이에 두고 구(舊) 간사이 본부 자리에 간사이 기념회관이 있다.
여기는 일찍이 오사카 대법전의 중심무대로서 전혼을 불태웠던 잊을 수 없는 장소다.
은사 도다 선생님의 자애어린 말씀이 떠오른다.
“간사이에서 어떻게든 가난한 사람과 병자를 없애고 싶다. 그를 위해 간사이에 가주었으면 한다. 나를 대신하여 부탁하네. 바빠지겠지만 아무쪼록 만사를 잘 부탁하네.”
이렇게 의탁 받고 나는 간사이를 가고 또 갔다.
아내는 전혀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상당히 고심했을 것이다. 보험도 해약하고 전화 채권도 팔았던 것 같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염려하신 도다 선생님이 아내에게 전화만은 절대 팔아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고 한다. 모든 것을 알고 계셨던 참으로 고마운 스승이었다.
간사이 기념회관 역시 3층 건물로 작년(1996년) 12월에 오픈했다.
여기에는 ‘간사이 혼’의 정수가, 그 동안의 많은 역사를 이야기해 주는 물품이나 전시를 통해 언제나 소개되고 있으며 찾아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 하나만을 보아도 ‘간사이 혼’을 세대에서 세대로 계승해 가려는 전통정신이 느껴져 역시 대 간사이의 금주성임을 실감케 한다.
정면 입구에는 ‘6층 원탑’의 조각상이 놓여 있다. 청년들이 6층의 인간원탑을 완성시켰던 역동감 넘치는 조각상이다.
1982년, 아직 이른 봄이었던 3월 22일간사이 청년문화제의 식장이었던 오사카시 나가이(長居)육상경기장의 상공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개어 양광이 춤추고 있었다.
나는 식장으로 향하는 여러 갈래의 길, 옛 간사이본부를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의 일을 상기하고 있었다.
1956년 새해가 밝은 지 얼마 안 된 1월 4일이었다. 내 청춘의 많은 역사를 새긴 옛 간사이본부는 본래 오사카 음악학교(현재 오사카 음악대학)로 쓰던 3층 건물이었다.
거기서 오사카의 대법전을 앞두고 ‘대법흥륭 소원성취’라고 쓴 어본존님을 배알하고 나는 ‘이번 싸움은 이겼다!’고 확신했다.
그 취지를, 같이 있던 동지들에게 선언하고 모두 하나가 되어 싸운 결과는 11, 111세대의 홍교라는 불멸의 금자탑이었다. 여기서 항간에 기적이 실현되었다고 떠들썩했던 승리가 탄생한 것이다.
남자부 매스게임은 경기장 가득 8개의 5층 원탑을 완성시킨 다음, 가운데 압권의 6층 원탑을 세우려 하고 있었다.
1층에 60명, 2층에 20명, 3층에 10명, 4층에 5명, 5층에 3명 그리고 정상인 6층에 한 사람을 태워 떠받들었다. 정점은 빌딩 3층 높이였다. 체육대학 등에서도 성공한 예는 없었다고 한다.
일어설 때 조금이라도 호흡이 맞지 않으면 균형이 흐트러져 무너진다. 바람이 강하게 불어도 흔들려서 설 수 없다.
모두의 호흡이 정확히 맞지 않으면 도저히 불가능한, 참으로 극한의 도전이었다.
당시 나의 장남은 교사로서 간사이학원에 근무하고 있었다. 남자부 매스게임의 연습은 자주 학원 체육관을 연습장으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 같다.
오랜 연습기간을 통해 ‘6층 원탑’은 딱 한 번, 그것도 직전이 되어 성공했을 뿐이라고 한다. 놀랍게도 원탑의 정점은 체육관 천장에 닿았다고 한다.
장남은 그 때 그 자리에 함께 있었는데 고난 끝에 마침내 성공하여 서로 어깨를 껴안고 좋아하는 원탑 팀과 그 기쁨을 함께했다.
나는 그 상황에 대해 듣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의 사고를 염려하여 아무쪼록 무리가 없도록 하라는 전언을 보냈다.
순간의, 불가사의한 느낌의 정적이 나가이 육상경기장을
순간의, 불가사의한 느낌의 정적이 경기장을 감싸고 있었다.
모두 숨을 죽이며 중앙의 일점을 바라보았다.
간사이의 전 동지는 자신의 아이들이나 다름없는 청년들이 과감하게 6층 원탑에 도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시각에 간사이 곳곳에서 성공을 기원하는 창제의 소용돌이가 일고 있었다.
“6층 원탑, 성공했나요?” 문화제 종료 시각에 성공 여부를 묻는 전화가 간사이 문화회관, 세이쿄신문 간사이 본사에 쇄도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간사이 벗의 마음은 그 자리에는 없었지만 줄곧 나가이 육상경기장을 향해 있었던 것이다. 과연 대간사이다.
문화제가 열렸던 1982년은 정신회를 사칭하는 악승들이 학회원을 괴롭히고, 연이어 닛켄종에서 광포파괴의 책동을 비밀리에 꾸미고 있을 때였다.
악의 책략에 의해 내가 움직이는 일도 통제되는 상황이었다.
전년 11월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사자분신의 결의를 담아 3년 만에 간사이를 방문했다. “왔습니다!” 이 한 마디를, 노고를 함께해 온 간사이의 동지가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도중에 시코쿠에 들렀다. 거기서 저 유명한 늙으신 어머니의 쌓고 또 쌓은 광포의 법성을 지켜 나가자는 태양의 노래가 탄생했다.
태양의 노래는 체면이나 세상의 평판까지도 모두 던져 버리고 끝까지 싸워 오신 초창기 부모님들의 마음을 이어받아, 먹구름을 걷어내고 전진을 기약하는 청년부들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했기 때문인지 전국에서 널리 애창되었다.
시코쿠에서 또다시 간사이로 돌아온 나에게 문화회관 로비에서 청년들이 호소했다.
“‘학회 여기에 있노라! 스승 건재 하노라!’를 만천하에 알리는 문화제를 개최하고 싶습니다. 10만의 청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라고.
그 때까지 문화제는 오랫동안 개최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어쨌든 청년들의 그 의기가 기뻤다.
“좋아요, 합시다!”
그렇게 답하자 청년부 대표들이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너무나도 기뻐했던 것을 기억한다.
간사이 각계의 다수의 내빈을 초대하여, 시작은 신래자 1만 명의 행진으로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학회의 상황이 최악으로 보였던 그 때, 실로 간사이의 청년부가 묘법 광선을 위해 반전공세를 염원하며 기획한 문화제였다.
그리고 아직 신년의 들뜬 기운이 거리에서 사라지지 않았을 때부터 연습이 시작되어 이 날을 맞이한 것이다.
6층 원탑의 1층 부분이 먼저 단단히 짜여졌다. 60명으로. 이제부터 차례대로 위에 39명을 태워갈 것이다.
“발이 땅에 파묻히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움직이지 않겠다. 흔들리지 않겠다! 쓰러지지 않겠다!”
2층과 3층을 만들 청년들이 어깨에 발을 올리며 차례차례 올라탔다.
“이제 간다! 좋아!” 서로 신호를 주고받으면서 혼신의 힘을 다해 일어섰다.
4층과 5층의 청년들이 등뼈를 꼬듯이 일어섰다.
멀리서도 조금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흔들리지 마라! 멈춰라!”
생각해 보면 ‘간사이 혼’은 문화제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어 왔다.
1966년 9월, 태풍이나 다름없는 비바람 속에 고시엔에서 ‘비의 문화제’가 열렸다.
‘결행해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나는 도요나카회관(지금의 도요나카 평화회관)에 있으면서 개최를 결정했다.
니시구치 현 간사이장(당시 남자부 총합본부장)은 그 곳에서 시종일관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후 그는 언제나 간사이의 중추로서 활약해 왔다.
그 때 청년들의 열기를 받아들여 시간을 앞당겨서 개최할 것을 결정했던 것이다.
잠시 그쳤던 비가 또다시 세차게 내렸다.
순백의 드레스를 전혀 주저함 없이 진흙탕 속에 담그고, 물웅덩이에 몸을 적시는 여자부들의 헌신적인 연기가 모든 것을 상징하고 있었다.
얼굴에까지 흙탕물을 튀기는 남자부들의 체조팀에는 대학생이었던 후지와라 현 오사카장(당시 학생부 부장)이 있었다. 문화제에 이르기까지 그가 쓴 일기가 그 해 〈제3문명〉 11월호에 게재되었다.
‘본무대와 똑같은 시간대로 했던 총리허설에서 카드섹션의 글자가 춤추듯 완성된 순간, 이것으로 도쿄 문화제를 이길 수 있다. 아니 반드시 이겨 내겠다’고 쓰고 있다.
도쿄에 대한 좋은 의미에서의 이 경쟁심이 때로는 도쿄가, 때로는 간사이가 전체를 견인하며 동서가 서로 호응하는 광포의 전진을 이끌어왔던 것이다.
여기에 예리하게 착안하여 심복으로 나를 간사이에 보내셨던 은사의 혜안(慧眼)에는 감사와 더불어 경탄을 금할 수가 없다.
비의 문화제에는 후일담이 있다. 주은래 총리가 일찍부터 학회를 주목하도록 지시하던 중국으로 문화제의 기록필름이 건너간 것이다.
나와 주은래 총리의 회견에서 통역을 맡아 주셨던 임여온 여사(현재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가 증언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진흙투성이가 되어 힘차고 발랄하게 연기하는 모습을 보고 정말로 훌륭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울러 창가학회가 대중을 기반으로 한 단체임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중일우호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단체임을 깊이 인식했습니다.”
그 후로도 학회는 중일우호를 위해 말이 더 필요 없을 만큼 최선을 다했다.
마침내 6층 원탑이 완성되었다!
전 동지의 기원과 이체동심의 결정(結晶)
정점의 남자부가 신중하게 발에 힘을 주며 일어서려 하고 있었다. 6층 원탑은 최후의 가장 중요한 단계를 맞이한 것이다.
장내에 술렁거림은 사라지고 불가사의한 정적이 감돌았다. 불과 몇 초에 지나지 않는 시간이 영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나는 마음속으로 제목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것이 나도 모르게 소리가 되어 입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간사이는 비와 꽤나 인연이 있는 것 같다. 나가이에서 전날 열릴 예정이었던 문화제 첫째 날(3월 21일)은 역시 대폭우로 중지되었다. 관계자들은 꽤나 낙담했을 것이다.
나는 즉각 밤에 열릴 스태프 회의에 출석하기로 했다.
비에 젖은 스태프가 유니폼을 입은 채 회장인 간사이문화회관에 속속 모여들었다.
나는 한 사람 한사람을 끌어안듯 “방심하지 말고, 당일을 준비해 주었으면 한다. 비가 내려서 오히려 다행이었다.”고 격려했다.
이것으로 일념을 바꿀 수가 있었다고 리더들은 나중에 이야기했다.
리더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무엇인가.
“중심자는 끊임없이 희망과 용기, 확신을 주는 방향으로 모두를 격려해 간다. 이것밖에 없다!”는 것은 간사이를 지속적으로 다닌 나에 대한 은사의 지도였다.
정점의 청년이 호흡을 조절했다. 흔들렸다. 다시 한 번 동지의 어깨에 손을 놓고 몸의 자세를 가다듬었다. 흔들린다.
‘일어서라! 우리들을 믿고 일어서라!’ 아래에서 떠받드는 98명의 동지들이 마음속으로 외쳤다.
반쯤 일어선 자세에서 두세 번 무릎을 폈다. 다리가 휘청거렸다. 하지만 단숨에 일어섰다. 지상 9미터. 섰다! 일어섰다!
이 때 카드섹션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금지(금니나 금박을 입힌 바탕)의 선명한 필적으로 ‘간사이 혼’이라고 썼다.
들끓는 박수와 환성. 정점의 청년이 자랑스러운 듯 얼굴을 들어올렸다.
연기는 끝났다. 퇴장. 팔을 들어올렸다.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 부둥켜안았다.
간사이의 노래 ‘상승의 하늘’과 템포 있게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태양의 노래’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불렀다. 힘센 젊은이들은 주먹으로 눈가를 훔쳤다.
그들은 지금에서야 말했다.
“만약 전날(문화제 첫째 날) 원탑 연기를 시도했더라면 피로가 축적되어 6층 원탑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라고. 그 만큼 한계에 이르는 도전이었던 것이다.
이후 안전을 고려해서 문화제에서는 6층 원탑이나 5층 원탑은 연기종목에서 빼게 되었지만 하나의 위대한 금자탑이 세워진 것은 분명했다.
문화제는 그 해부터 계속 각지에서 개최되어 갔다.
청년 육성에 크나큰 힘을 발휘하며 일시적인 광포파괴의 책동을 완전히 타파해 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민중의 평화세력의 확고한 존재를 널리 알려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학회 역사 마디마디에서 볼 수 있듯 또다시 간사이는 내가 구축한 상승의 전통을 계승하여 실로 돌파구를 열어 주었던 것이다.
나는 문화제 식순이 적힌 팜플렛에 단가를 적어 간사이의 청년들에게 증정했다.
아아 간사이 하늘도 개고 땅도 개어라
십만의 제자인 용자는 역사 구축했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