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의 혼의 드라마 - 칼레의 시민
대해의 깊은 곳은 보이지 않는다.
푸른 하늘의 아득히 먼 곳도 보이지 않는다.
위대한 용기도 얕은 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종종 겁쟁이로 보이는 경우까지 있다.
금년 봄에 있었던 졸업식에서 조각가 로댕의 이야기를 했다.
그의 걸작의 하나로 칼레의 시민이 있다. 이것은 14세기의 역사적 사실에서 소재를 취한 작품이다.
칼레란 프랑스 북부의 항구도시이다. 도버해협을 사이에 두고 영국과 서로 마주보고 있다.
이야기는 영국과 프랑스와의 백년전쟁(1337-1453)중에 있었던 일이다.
1347년에 칼레시는 영국군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벌써 1년간이나 이런 상태가 계속되었다.
시를 구해 내어야 할 프랑스왕 필립6세에게도 버림받고 말았다.
그때 시민은 어떻게 생명을 유지했을까 −
이 극한의 상황 속에서 지금도 역시 전 유럽의 사람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인간 드라마가 칼레시에서 탄생된 것이다.
그 혼의 드라마를 그린 것은 독일의 작가 게오르크 카이저(1878−1945), 반 나치스의 작가로서도 유명한 그의 희곡인 <칼레의 시민>은 전세계의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일본에서도 상영되고 또한 많은 사람이 읽었다.
원작은 조금 어려운 면도 있으므로, 오늘은 청춘시대의 기억을 더듬어서 극히 대충의 줄거리만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날 아침 칼레의 시민들에게 영국왕 에드워드 3세로부터 使者(사자)가 왔다. “도시를 파괴당하지 않으려면, 하나의 조건을 받아들여라”라는 것이다.
전쟁에 패한 칼레시로서는 묵묵히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패한다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비극이다. 인생도 또한 절대로 승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조건이란 − 사자는 말한다.
“내일 아침까지 6명의 시민대표를 영국왕에게 보내는 것이다. 그 6명은 모자를 써서는 안 된다. 구두도 신어서는 안 된다. 맨발로 가련한 죄인의 옷을 입고, 목에 포승을 묶고 오라.
그리고 국왕 앞에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도시는 파괴로부터 구해질 것이다.”
굴욕적인 요구였다. 인간을 우롱하는 오만한 말이었다.
전쟁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입장이 우위인 것을 내세워 사람을 내려다보고 억압하며, 이용하려고 거만하게 뽐내는 인간은 어느 세상에나 있다. 그러한 권위 권력에 절대로 져서는 안 된다.
시민들은 노했다. 도저히 이런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다. “무기를 들자!”라는 소리가 있었다.
그러나 옥쇄(玉碎: 명예나 충절을 지키어 기꺼이 목숨을 바침)는 100퍼센트 확실하다. 여성도, 어린이도, 노인도, 전원이 희생될 것이다.
마을도 항구도 파괴될 것이다. 그러면 “모두 함께 죽지 않겠는가!”라는 소리가 우세하였다.
프랑스군의 대장, 두게스 클란이 그러한 사람들을 선동했다.
“싸우자!” 대장의 소리는 용감하였다.
사람들은 흥분상태가 되었다.
“훌륭하게 돌진하여 죽으면 되는 것이다!”
그 쪽이 떳떳하고, 이 오랜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 대장의 칼 위에 한사람 또 한사람, 맹세를 위해 손을 올려놓고 있었다.
이 젊은이도, 저 노인도 - 그러나 단 한 사람 손을 올려놓은 것을 거부한 사람이 있었다.
그때까지 조용하게 논의를 듣고 있던 산피엘이었다.
그는 말했다.
“나는 반대한다. 우리는 후세를 이어나갈 사람들을 위해서도 − ”
“이 항구는 우리들 시민이 땀 흘린 노동으로 만든 것이다. 시민이 자신의 팔로 무거운 돌을 옮기고 등을 굽혀 힘껏 노력하여 고생한 결정이다. 이렇게 하여 灣(만)을 깊게 파내려 갔다. 훌륭한 방파제가 구축되었다. 모든 나라의 배가 안심하고 정박하고 항해할 수 있는 항구가 되었던 것이다.”
“6명의 시민을 희생시킨다는 것은 물론 애끊는 심정이다. 그러나 칼네 항구는 우리의 생명보다도 귀중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항구는 세계의 만민에게 행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 이 항구도 인류를 위한 하나의 ‘행복의 항구’이다.
소중한, 이 보배인 항구를 단연코 지켜내지 않으면 안 된다. 악에 유린되어서는 안 된다. 권위에 이용되어서도 안 된다.
인류를 위해 정의를 위해서 − 그 ‘항구를 지켜내는’ 진실한 용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여기에 문제가 있다. 건설하는 것도 인간, 파괴하는 것도 인간, 일체는 인간에 의해 인물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무모한 전투를 충고하는 산피엘의 말에 사람들은 “뭐라고, 겁쟁이다!” “비겁하지 않는가!”라고 제각기 욕을 퍼부었다.
그러나 잘 알아듣도록 되풀이해서 설득하는 산피엘의 냉정한 소리에 점차로 찬동의 의견이 더해졌다.
“그러면 − ” 한 사람의 시민이 발언했다.
“누가 영국의 국왕 앞에 갈 것인가!”
‘스로 죽을 자는 누구인가!’ − 이 질문에 장내는 순식간에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누구나 얼굴이 굳어져 버렸다. 그리고……,
“그러면 내가 가겠다!”라고 일어선 사람은 산피엘이었다.
정말로 위대한 인물은 중요할 때야말로 태연자약하게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사이에 이상한 감동이 움직였다. 이미 그를 겁쟁이라고 하는 인간은 없었다.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생각한다. 사람들을 부추겨 무모한 옥쇄로 향하게 하는 인간이 ‘용자’인가. 스스로 생명을 버리고 사람들을 지키고 조국을 지키는 자가 ‘용자’인가.
많은 사람에게 명령하고 완성된 조직을 사용하여 뭔가를 시킨다는 것은 간단하다. 또 훌륭하고 힘이 있는 듯이 보인다.
또한 그것이 필요한 경우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용기’가 아니다.
홀로 선 산피엘에게 또 한 사람의 시민이 조용히 다가왔다.
‘두 사람 째’였다. 혼은 혼을 흔든다. “좋다. 나도!” 세 사람 째였다. 네 사람, 다섯 사람, 계속되었다.
앞으로 한 사람이다. 사람들을 부추겼던 그 대장은 나오지 않았다. − “좋다. 내가!” 두 명의 형제 쟉크와 피엘이 동시에 말했다.
6명이면 되는데 7명이 되어 버린 것이다. 예상 밖의 일이었다. 어떻게 할까.
“그럼 추첨으로 한 사람을 빼자!” − 장소를 바꾸어 제비뽑기를 하게 되었다.
그것은 두려운 광경이었다. 처음에 7명은 목숨을 버릴 각오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생명이 구출될 새로운 찬스가 생긴 것이다.
아내의 얼굴, 자식의 얼굴이 떠오른다.
어머니나 애인이 “부디 저 사람이 제비뽑기에 당첨되기를!”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용자의 마음의 우주에도 폭풍우가 휘몰아쳤다.
자신의 ‘용자’는 이미 자청한 것으로 훌륭하게 증명했다.
‘구제되어도 좋은 것이 아닐까!’ − 인간의 심리는 미묘하다. 차차로 불안과 고뇌의 먹구름이 일어났다.
천으로 가린 접시에 7명이 한 사람씩 손을 넣었다.
푸른 구슬이면 죽음. 목숨을 건 제비뽑기이다.
첫 번째 한 사람 푸른 구술이었다.
두 사람 째 또 푸른 구슬이었다. 세 사람 째, 네 사람 째, 다섯 사람 째 또 푸른 구슬이었다.
“어떻게 된 것인가!” 한 사람이 천을 들었다. 놀랍게도 7개 모두 푸른 구슬이었다.
놀라는 사람들에게 산피엘은 말했다.
“내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왜? 처음에 우린 목숨을 버릴 각오였다. 그러나 망설이게 되었다. 결심이 흔들린 것이다. 그러면 목숨을 버려 대업을 이룰 수는 없다!”
‘누가 뽑혀도, 뽑히지 않아도 모두의 마음에 원망과 후회의 얼룩이 남겨 버린다.’라고 생각한 것이다.
모두의 눈에 보이지 않는 ‘일념의 흔들림’을 그는 간파한 것이었다.
그 혼자만은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제안으로 내일 아침 시장에 가장 늦게 도착한 사람이 희생을 면하는 것으로 되었다.
다음날 아침 많은 시민이 시장에 모여 있었다.
누가 가장 빨리 올까?
모두 산피엘이 첫 번째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 3명의 용사가 서로 앞뒤를 다투어 도착했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죄인의 옷을 입히고 맨발로 만들어 목에 포승을 걸었다.
‘산피엘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다음에 반드시 올 것이다.’ 그러나 네 번째도 다른 사람이었다.
모두 눈동자엔 동요의 빛이 짙어졌다.
다섯 번째, 그리고 마침내 여섯 번째! 그래도 산피엘은 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6명이 희생되는 것인가 − .
“우리들은 속았다! 그는 처음부터 오지 않을 작정이었던 것이다. 지금쯤 우리들의 고지식함을 비웃고 있겠지!” 6명 중의 1명이 외쳤다.
모든 시민이 노했다. “그는 우리 모두를 배신했다!”
살기를 띤 사람들이 그의 집으로 몰려가려고 달렸다.
그 때 − 검은 천으로 덮은 관 하나가 조용히 운반되어 왔다.
옆에는 산피엘의 노부가 서 있었다. 노부는 말했다.
“이것은 산피엘입니다. 아들은 말했습니다. ‘나는 먼저 가니까 여섯 사람이여, 뒤따라 오라.’ 이렇게 말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산피엘은 한번 일어선 용사들을, 누구 한 사람 망설이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누가 최초이든지 누가 최후이든지 스스로 일어선 ‘선택된 용사’의 긍지를 모두에게 다하게 하고 싶었다.
그것을 위해서는 자기가 제일 먼저 모범을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 진정한 ‘용자’가 있었다. 6명의 혼은 오저에서부터 흔들렸다.
그리고 반석 같은 결의로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마을 밖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제 아무런 망설임도 없었다. 아주 상쾌했다. 모습은 죄인이어도 마음은 황제였다. 왕자였다.
비록 세상의 비난을 한 몸에 받고 옥으로 끌려가는 몸이 될지라도 마음은 영원한 왕자이다. − 이것이 은사를 모신이래, 관철해 온 나의 변치 않는 삶의 방식이다. 따라서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어떠한 비판과 편견, 중상과 오해가 소용돌이칠지라도, 또 동지조차도 나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진실’은 반드시 후세에 증명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제군이 반드시 증명해 준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재빨리 영국왕에게도 전해졌다.
6명 앞에 왕의 사자가 달려왔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6명은 사자에게 그렇게 말했다. 책망당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자는 “국왕의 특별한 처분으로 ‘누구의 목숨도 끊어서는 안 된다’라는 명령이다! 칼레마을은 구제되었다!”라고 알렸다.
이윽고 왕이 마을로 들어섰다. 그리고 산피엘의 관 앞에서 왕 스스로 무릎을 끊고 그 앞에서 공손히 절했던 것이다.
적과 우리 편을 초월해, 인간으로서 진정한 戰士(전사)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나의 아름답고 고귀한 혼에 의해 칼레 마을도 항구도 시민도 구제되었던 것이다.
인생은 투쟁이다.
사람은 모두 전사이다. 전사로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생명의 규칙이다. 싸움을 피하는 것은 그 자체가 패배인 것이다.
그러나 싸움이 항상 화려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오히려 눈에 띄지 않는 고독한 ‘자신과의 싸움’이 그 99퍼센트를 차지한다. 그것이 현실이다.
어떤 경우는 다른 사람 앞에서 보기 좋게 깃발을 휘두르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다른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희생을 ‘인내’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 쪽이 위대하다.
진정한 용자는 때로는 볼품없고 눈에 띄지 않는 것, 바로 그것이다.
또한 많은 동료가 있을 때는 누구나 용기가 난다. ‘투쟁’을 이야기하는 것도 용이하다.
그러나 진정한 ‘책임’을 지닌 인간인가 아닌가는 혼자가 되었을 때의 행동으로 결정된다.
나의 모토 중 하나는 “파도는 장해에 부딪힐 때마다 그 완고한 度(도)를 더한다!”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홀로 설 때 강한 자는 진정한 용자이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16세부터의 나의 신념으로 되어 있다.
☞ (1990.7.17) 창가학원 영광제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