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기획
‘3·16’에서 배운다
유사시 광포의 싸움터에 달려갈 수 있느냐 없느냐다
올해, 도다(戶田) 선생님이 광선유포의 일체를 후계의 청년에게 의탁한 ‘3·16’ 기념식전 60주년을 맞이한다. 이 가절을 경축하는 3월 ‘세계청년부총회’를 목표로 청년부 벗이 광포확대에 도전한다. ‘3·16’의 의의와 정신을 배우고 역사를 확인한다.
어떠한 사업도 후계자로 결정된다.
광선유포도 사제정신이 차세대로 계승되어야만 영속적인 발전이 있다.
법화경의 주제는 부처가 제자에게 부촉해 멸후의 광선유포를 의탁하는 데 있다.
성훈에 “영산일회 엄연미산(靈山一會儼然未散)”(어서 757쪽)이라고 씌어 있다. 법화경을 설한 영취산에서 연 허공회는 엄연히 아직 흩어지지 않고 상주한다는 의미다.
이케다(池田) 선생님은 1958년 3월 16일의 광선유포 기념식전을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3·16’의 대의식이 ‘영산일회 엄연미산’(영산일회는 엄연히 아직 흩어지지 않고)을 방불케 한다고 생각했다.”
“이 대의식은 법화경에서 설하는 부촉의식에 통하는 의의가 있다. 나는 마음속 깊이 그렇게 확신했다.”
스승의 불석신명(不惜身命)의 정신을 영원히 남기고, 스승이 제자에게 광포의 바통을 의탁한 날이 ‘3·16’이다.
◇
도다(戶田) 선생님은 왜 ‘3·16’을 ‘후계의식의 날’로 정했는가.
그 이유 중 하나는 이케다 선생님을 비롯해 미래를 의탁할 수 있는 청년이 성장하고 광포의 기반을 갖추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도다 선생님이 제2대 회장에 취임한 1951년 5월, 실질적인 학회원은 3000명, 두달 뒤 개최한 남자부 결성식 참석자는 약 180명, 그리고 여자부 결성식 참석자는 74명이다.
그러나 불과 6년 뒤인 1957년 12월, 도다 선생님의 생애 원업인 75만 세대 절복을 달성했다.
그 확대의 선두에 선 사람이 이케다 선생님이다.
1952년, 가마타지부의 지부간사로서 지휘한 ‘2월투쟁’에서는 당시 지부의 한계를 부순 201세대 절복을 달성했다.
1953년, 남자부 제1부대장에 취임하고 약 4배의 진용을 확대했다.
분쿄지부의 지부장대리로서 ‘전진 또 전진’을 구호로 분쿄지부를 제1급 지부로 발전시켰다.
나아가 1955년 ‘삿포로 여름투쟁’에서는 열흘 동안 388세대라는 일본 제일의 확대를 달성하고, 이듬해 1956년의 ‘오사카투쟁’에서는 한달 동안 ‘1만1111세대 절복’이라는 불멸의 금자탑을 세웠다. 그해부터 시작한 ‘야마구치 개척지도’에서도 10배에 가까운 확대를 달성했다.
이케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75만 세대 절복은 사제의 서원이었다. 그것을 실현하는 일이 제자의 사명이고 승리의 결실을 내고서야 비로소 후계자가 될 수 있다.”
만약 사제의 서원이 달성되지 못했다면 ‘3·16’의 대의식은 완성되지 못했다.
광포확대의 승리가 있었기에 ‘3·16’의 식전이 실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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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3월, 시즈오카에서 대강당 준공 축하행사를 시작했다. 하루에 7000여명, 한달 동안 20만명이 모인 전례 없는 규모의 행사였다.
이케다 선생님은 운영의 모든 책임을 맡았다. 열차와 버스 등 수송수단을 확보하고 정리와 유도의 행사요원 체제 등 검토해야 할 과제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이미 지난해 가을부터 협의를 시작해 연초에는 몇번이고 수송회의를 열었다.
당시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오후 2시부터 수송회의. 실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최고 수뇌(이사) 때문에 현장의 청년들이 얼마나 애로를 겪을지 걱정스럽다”
“저녁 무렵, 선생님을 뵈었다. ‘힘들어도 자네들이 학회를 지켜야 하네’라고 엄하게 지도하셨다.”(‘젊은 날의 일기’ 1958년 1월 18일)
이케다 선생님은 좀처럼 진척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축하행사의 무사고와 대성공을 지휘했다.
그렇게 맞이한 3월 1일, 대강당 준공 축하행사를 개최했다. 도다 선생님은 쇠약한 몸을 이끌고 참석했다. 많은 동지 앞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4개월 만이었다.
행사가 끝난 뒤, 엘리베이터에서 준엄한 사제의 명장면이 탄생했다. 도다 선생님이 이케다 선생님에게 후사를 의탁하는 유언을 남겼다.
“이것으로 내 일은 모두 끝났다. 나는 언제 죽어도 좋다. 다이사쿠 다음은 자네 차례다. 부탁하네!”
축하행사가 끝난 뒤, 대강당 앞에 있는 광장에서 음악대와 고적대가 잇달아 연주하고 있었다.
도다 선생님은 대강당에서 나와 이케다 선생님의 부축을 받아 음악대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내가 북을 치겠다.”
도다 선생님은 직접 큰 북을 쳤다. 이케다 선생님은 바로 북소리에 맞춰 지휘를 했다. 학회가 연주가 시작되고 주위에 있던 청년들은 음악에 맞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세이쿄신문은 이 순간을 “모두 ‘이러한 스승이 계신다면’이라고 서원한 순간이었다”고 보도했다.
나아가 도다 선생님은 홋카이도 유바리의 여자부원에게도 혼신의 힘을 다해 격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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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3월 5일, 이케다 선생님은 축하행사가 진행되는 속에 ‘오사카사건’의 재판에 출정하기 위해 오사카로 떠났다.
도다 선생님은 인사하러 온 이케다 선생님에게 병상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재판은 쉽지 않은 싸움이 되겠지. 그러나 마지막은 이긴다. 금은 금이다.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
은사의 말대로 84차례의 공판 끝에 1962년 1월 25일에 무죄판결을 선고받았다.
축하행사가 시작되고 일주일이 지난 무렵, 3월 16일에 총리가 방문하기로 결정되었다.
“아주 좋은 기회다. 그날 청년부를 부르자. 장래를 위해 광선유포의 모의시험, 즉 예행연습이 되는 의식을 거행하지 않겠는가!”
이케다 선생님은 축하행사와 함께 기념식전도 지휘하게 되었다.
3월 11일에 개최한 남자부간부회에서 식전 개최를 정식으로 발표했다. 그날 여자부에도 그 소식을 전했다.
휴대전화와 메일은 물론이고 집전화조차 없던 시절이다. 그러나 방문과 전보 등으로 순식간에 전해졌다.
교통비를 마련하고 회사에 사정을 이야기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바로 전날인 15일에 ‘지금부터 도다 선생님 슬하로 가자!’고 연락을 받은 사람도 있었다. 그럼에도 모두 매우 기뻐하며 스승 곁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도다 선생님은 늘 말씀하셨다.
“유사시에 광선유포의 싸움터에 달려갈 수 있느냐 없느냐다.”
유사시에 인간의 진가가 나타난다. 기념식전에 달려온 청년 6000명은 은사의 지도를 체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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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훈에 “대범천왕(大梵天王)·제석(帝釋) 등도 내려와서”(어서 1022쪽)라고 씌어 있다. 범천과 제석은 법화경 행자(行者)를 수호하는 제천선신의 리더다. 요즘으로 말하면 사회 지도층이라고 할 수 있다.
광선유포의 때에는 그 지도자들의 공명과 상찬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이다.
지금 전 세계의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는 지도자가 SGI의 이념과 행동을 상찬하고 많은 현창을 수여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케다 선생님은 말했다.
“이러한 의식 하나하나는 저 ‘3·16’ 의식의 정신을 계승했다 해도 좋을 것이다.”

흰 눈으로 뒤덮인 후지산 기슭에 벚꽃이 아름답게 피었다. 자! ‘세계청년부총회’를 향해 승리의 꽃을 우리가 활짝 피우자.(2017년 4월, 시즈오카현 후지노미야시 후지자쿠라자연묘지공원)
1958년 3월 15일 저녁, 도쿄의 출발지는 광선유포 기념식전에 참석하는 청년으로 넘쳤다. 이튿날 16일, 열차를 타고 출발한 제1진의 청년들이 오전 3시가 지나 시즈오카에 있는 회합장소에 도착했다. 도쿄에서 버스를 타고 온 벗도 잇달아 모여들었다.
도다(戶田) 선생님은 하얀 입김을 내쉬며 달려온 청년들을 위해 정성껏 음식을 준비해 놓았다. 돈지루(돼지고기를 잘게 썰어 넣은 된장국)였다.
청년들에게 사전에 ‘밥그릇과 젓가락을 지참하라’고 철저히 공지했다. 그 말의 의미를 처음 안 순간이었다.
도다 선생님은 돈지루에 사용한 돼지 세 마리의 가죽을 남겨 두도록 지시했다. 이케다(池田) 선생님은 은사가 서거한 뒤, 그 돼지가죽으로 필통을 만들어 청년 대표에게 선물했다.
거기에는 ‘스승의 마음을 잊지 말라’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도다 선생님이 청년을 생각하면서 돈지루를 준비하는 한편, 이케다 선생님은 거동조차 힘든 도다 선생님의 건강을 염려해 은사가 탈 ‘거가’를 준비했다.
팔걸이의자 주위에 난간처럼 손잡이를 두른 거가였다. 제작비용은 모두 이케다 선생님이 부담했다.
3월 15일, 이케다 선생님은 도다 선생님에게 거가를 완성했다고 보고했다. 잠시 동안 거가를 바라보던 도다 선생님은 갑자기 엄한 어조로 말했다.
“너무 크다. 이렇게 크면 전투에선 쓸모가 없다!”
이케다 선생님은 걱정이 되어 달려 온 제작 담당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다 선생님은 이런 하나하나의 일을 통해서 우리를 진지하게 훈련시키고 있다. 고마운 일이 아닌가. 지금 질타해주신 말씀도 선생님의 자애다.”
불이(不二)의 제자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청년들을 육성하려는 스승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깊이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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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서원에 일어선 청년들을 비추기 시작했다.
3월 16일 오전 8시, 청년 6000명이 대강당 옆에 있는 광장에 모였다. 이날 방문하기로 한 총리를 맞을 준비도 시작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상황이 바뀌었다. 외교상의 문제가 생겼다는 이유로 참석할 수 없다는 총리의 전화가 걸려왔다.
도다 선생님은 전화에 대고 격분했다. “청년 6000명이 오래 전부터 준비하고 기다렸다. 청년을 속이는 결과가 되지 않는가.”
총리가 사과의 뜻을 전하자 도다 선생님은 외쳤다.
“내게 사과하라는 말이 아니다. 사과는 청년들에게 해야 한다!”
전화를 끊은 도다 선생님은 이케다 선생님을 비롯해 청년부 리더를 불러 총리 가족이 대리로 참석한다고 전하고 이렇게 말했다.
“아무도 오지 않더라도 청년들과 대의식을 치러야 하지 않겠는가!”
총리가 말한 ‘외교상의 이유’는 구실이었다. 사실은 ‘한 나라의 총리가 종교단체의 회합 따위에 참석하는 것은 당찮다’고 간섭한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다 선생님은 사랑하는 청년을 위해 직접 사력을 다해 격려하겠다고 결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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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득이하게 식전의 식순을 변경해야 했지만 청년들은 신속하게 대응했다.
식전준비가 진행되는 속에 도다 선생님이 탈 거가를 담당한 멤버는 거가를 흔들리지 않게 옮기기 위해 연습을 반복했다. 식전을 치루는 장소 주변은 지면이 고르지 못해 거가의 수평을 유지하려면 모든 사람이 호흡을 맞춰야 했다.
정오가 되기 전, 총리 가족이 도착하자 음악대가 연주를 시작했다. 그 무렵, 도다 선생님은 이케다 선생님의 부축을 받아 식전 장소로 이동했다. 현관 앞에는 거가가 놓여 있었다.
은사는 다시 한번 질책했다. “너무 커서 실전에는 적합하지 않다. 싸움을 할 수 없다!”
그때 이케다 선생님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와 말했다. “잘 알았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 거가는 제자가 진심을 다해 만들었습니다. 부디 타주십시오.”
제자의 말에 은사는 방긋 웃었다.
도다 선생님은 거가의 팔걸이의자에 앉아 유연하게 청년을 지켜보았다. 도다 선생님의 모습을 보고 “싸움에는 대장군을 혼(魂)으로 하며”(어서 1219쪽)라는 성훈을 되새기는 벗도 있었다. 거가는 청년들 속으로 나아갔다.
도다 선생님은 식전이 끝난 뒤 말했다. “건강이 좋아지면 저 거가를 타고 일본 전역을 돌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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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2시 40분, 이케다 선생님의 사회로 식전을 시작했다.
내빈이 인사한 뒤, 단상에 선 도다 선생님은 열렬히 선언했다.
“창가학회는 종교계의 왕자(王者)다.”
이 선언에 대해 소설 ‘인간혁명’ 제12권 제4장 <후계>에 이렇게 씌어 있다.
“이 말은 도다가 생애를 건 광선유포의, 그야말로 승리의 대선언이 되었다. 또 그가 청년들에게 말한 인생 최후의 대사자후가 되었다.”
식전이 끝난 뒤 도다 선생님은 내빈과 간담했다. 총리의 가족 중 한 사람은 식전에 참석한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미래를 향해 발전하는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까지의 기성종교와 다른 젊은 힘을 갖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오후 2시 반 무렵, 도다 선생님은 이케다 선생님이 선도하는 거가에 타고 청년들의 박수에 감싸여 식전 장소를 뒤로 했다.
이케다 선생님은 음악대 멤버들과 함께 모든 행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청년들을 배웅했다. 이윽고 음악대원도 돌아갈 시간이 되었을 때, 이케다 선생님은 음악대장에게 부탁했다.
“미안하지만 한곡 더 연주해주지 않겠는가. 2층에 도다 선생님이 계신다.”
음악대가 연주한 곡은 ‘성락추풍오장원’이었다. 시인 도이 반스이가 삼국지의 영웅, 제갈공명이 만년에 느낀 고충을 읊은 내용이다.
이케다 선생님은 당시를 이렇게 술회한다.
“나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선생님 들어주십시오. 청년부는, 제자는 의기양양합니다. 안심하십시오.’”
도다 선생님의 몸은 ‘3·16’을 기점으로 급속도로 쇠약해졌다.
그러나 병석에 있으면서도 건강이 좋아지면 이케다 선생님을 불러 사제의 대화를 거듭 나눴다.
어느 때는 “오늘은 어떤 책을 읽었는가” 하고 물으면서 지도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독서를 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어느 날 아침에는 “어제는 멕시코에 간 꿈을 꾸었다네” “자네의 진짜 무대는 세계다” 하고 말했다. 불이의 제자는 은사의 말 그대로 전 세계에 후계의 제자가 약동하는 시대를 열었다.
또 어느 날은 종문이 부패하는 조짐을 느끼고 이케다 선생님에게 엄명을 내렸다. “추격의 손을 늦추지 마라!”
그것이 도다 선생님의 마지막 지도였다.
◇

도다 선생님이 서거하기 직전에 꿈에서 본 멕시코에도 많은 지용의 벗이 용솟음친다.
식전을 개최하고 1년이 지난 1959년 3월 16일, 이케다 선생님은 청년부 대표와 함께 도다 선생님의 묘소를 찾았다.
광포의 모든 원업을 달성한 도다 선생님은 1958년 4월 2일에 서거했다.
‘학회는 공중분해 될 것’이라고 세상이 떠들썩한 속에서 이케다 선생님은 학회를 실질적으로 지휘하면서 벗의 마음에 용기와 희망의 등불을 끊임없이 비추었다.
이케다 선생님은 은사의 묘소 앞에서 청년들에게 말했다.
“해마다 3월 16일을 청년부의 전통의 마디로 만듭시다.”
도다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 ‘3·16’을 광포후계 서원의 날 ‘3·16’으로 만든 사람은 이케다 선생님이다. 우리가 지금 이 의의를 알고 각자 성장의 마디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이케다 선생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이 ‘3·16’의 정신을 계승하고 영원하게 만들 사람은 누구인가.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이다.
이케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그대여! 창가 삼대(三代)가 걸어온 인생의 길을 이어갈 그대들이여!
지금 이때 지금 자신이 있는 곳에서 단호히 승리하며 나아가라!
그 집념의 승리 또 승리에 인내 강한 한 걸음 또 한 걸음의 전진에 ‘3·16’이라는 사제의 보관(寶冠)은 더욱 빛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 | 화광신문 : 18/03/02 124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