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인간세기의 빛 (123)
청년이여 광포의 혁명아가 되어라!
나의 스승인 도다 조세이 선생님은 도코 니시간다의 좁은 학회 본부에서 자주 말씀하셨다.
“요시다 쇼인은 4평 남짓에 불과한 강의실에서 인재를 육성했다. 여기가 쇼카손주쿠다. 내가 있는 바로 이곳이 위대한 혁명아가 출현할 ‘묘법의 쇼카손주쿠’다.”
나는 운 좋게도 이 학회 본부에서 선생님의 심원한 법화경 강의를 받았다. 그때의 커다란 감동과 맹세를 스물한 살 때 일기에 써 두었다.
“저 메이지 유신 혁명아들이 떠난 도량 쇼카손주쿠. 이것은 희생이고 마지막 유혈(流血) 정치혁명이기도 했다.
이제 이 도량(학회본부)을 떠나는 청년. 이것은 생명 대철학을 엄호하고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평화혁명이리라.”
◇
시대를 만드는 것은 ‘사람’이다.
그 사람을 만드는 것은 ‘사제(師弟)’다.
막부시대 말 동란 속에 쇼카손주쿠에서는 다카스기 신사쿠, 구사카 겐즈이라는 두 사람의 영웅호걸을 비롯해 내로라는 유신회천(維新回天)의 인재들이 등장했다.
원래 소카손주쿠는 요시다 쇼인의 숙부가 시작하여 외숙부가 그 뒤를 이은 서당과 같은 사설학교였다. 그런데 쇼인이 ‘제3대’의 중심자가 되어 바야흐로 ‘혁명아’를 양성하는 단련장으로 새롭게 바꾸었다.
“지금은 벽지이지만 쇼카손주쿠가 있는 이 땅에서 반드시 대단히 뛰어난 인물이 나올 것이다.”
이러한 대망(大望) 속에 쇼인이 본격적으로 제자 육성을 개시(開始)한 지 150주년.
그 기간은 1년 남짓에 불과했지만 쇼인은 “지극히 정성스러운데도 남을 감동시키지 못하는 자는 아직도 없었으니”(맹자) 라는 말을 명시하고 오로지 성실하게 교육에 전념했다.
쇼인은 한 사람이라도 스승의 정신을 계승할 성실한 제자가 나오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후에 쇼인은 옥중에서 ‘내 뜻을 알라’ 라고 제자에게 바라는 마음으로 “내 마음을 안다면 내 뜻을 계승해 더욱 크게 실현해야 한다.”는 유서를 남겼다.
1859년 10월 27일 스승 요시다 쇼인은 에도의 덴마초 감옥에서 사형에 처해졌다. 그때 쇼인의 나이는 서른 살이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자신이 바라던 것을 제자들의 마음속에 맥맥히 남길 수가 있었다. 쇼인 한 사람의 죽음으로 수많은 쇼인을 만들었던 것이다.” 라고 수호회에서 도다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확실히 스승이 정성을 다한 불길은 제자들에 의해 지펴졌다. 분기한 제자는 천하를 움직여 신시대를 열었다.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제자 다카스기 신사쿠였다.
1956년 도다 선생님으로부터 ‘야마구치 개척 투쟁’의 지휘를 명받았을 때, 나는 가장 먼저 오카야마에서 시모노세키로 달려갔다. 급행 침대열차인 ‘아미구사’ 호로 시모노세키역에 도착한 것은 10월 9일 아침 6시 58분이었다.
곧바로 동지들과 같이 근행을 한 뒤 사신오품초를 배독했다.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나의 제자라면 제종(諸宗)의 원조(元祖)보다도 뛰어남이 백천만억 배이다. 일본국 중의 사람들이여, 나의 말제들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 나의 문하는 과거세를 살피건대 팔천만억 배나 오랫동안 무량의 부처를 섬긴 대보살이다. 미래를 논하건대 실로 광대한 공덕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절대로 경멸해서는 안 된다.”(어서 342쪽, 취의)
우리들은 원기 왕성했다. 단노우라, 다시 말해 시모노세키 앞바다에서 승리를 결의한 ‘요시쓰네’처럼! 그리고 또 시모노세키에서 궐기한 ‘신사쿠’처럼 싸우겠다고!
민중을 구해야 한다. 적을 무찔러야한다. 내편을 늘려야 한다!
이후 4개월 만에 나는 이 야마구치에서 약 열 배가 되는 정의로운 인재확대의 역사를 만들었다.
어떠한 고투도 극복하고 만천하에 승리의 함성을 외쳐야 비로소 진정한 제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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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시모노세키는 열아홉 살 때 쇼인의 제자가 된 다카스키 신사쿠가 가장 자부심을 가졌던 ‘기헤이타이(奇兵隊)’의 발상지였다. 기헤이타이는 ‘유지(有志)’로 구성된 군세(軍勢)로서 무사 이외에 지원병을 모집해 편성했다.
그러므로 ‘정규군’과는 다르게 ‘기헤이카이’라고 했다.
도다 선생님도 “기헤이타이는 무사들이 잘난 체하며 바보 취급을 하던 백성과 지역 주민들로 구성된 부대로 훌륭하게 막부군을 무찔렀다.”고 높이 평가하셨다.
신사쿠가 ‘기헤이타이’를 창설한 착상(着想)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그 하나가 스승의 구상이었다.
“제후(諸侯)에게 의지하지 말고 초망(재야의 사람)의 지사를 모집한다.” “의지할 사람은 초망의 영웅뿐.”
그러므로 민중의 힘을 궐기시켜 시대를 변혁할 돌파구로 삼는다. 쇼인은 ‘앞장서서 타인에게 의지하지 말고 나 스스로 해보이자!’고 초망궐기(민중궐기)를 외쳤던 것이다.
쇼인인 순직하고 4년 후, 다카스기 신사쿠가 창설한 기헤이타이는 스승에게서 제자로 계승된 하나의 결실이었다고 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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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다 선생님은 신사쿠를 좋아하셨다.
“한 번 만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 ” 하고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역사상 호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선생님과 둘이서 신사쿠의 인물에 관해 대화한 일도 정말 그립다.
선생님이 “다이사쿠 다이사쿠” 하고 부르시다 “신사쿠 신사쿠”하고 부르신 적도 가끔 있었다.
내 아내에게도 “신사쿠에게는 하기성 제일의 미인이라고 불리는 마사코라는 부인이 있었다. 하지만 날마다 동분서주하던 신사쿠는 아내와 함께 보낼 시간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현명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가정을 돌보며 훌륭하게 자식들을 키웠다. 가네코도 똑같구나.”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도다 선생님이 신사쿠라는 인물의 혼의 진수에서 발견하신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스승의 원수를 갑겠다는 집념이었다.
형장에서 사형에 처해지고 죄인으로서 고즈캇파라에 묻힌 스승 쇼인의 유골을 신사쿠 등이 이장한 때는 1863년 1월이었다. 이때 신사쿠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신사쿠가 맨 앞에선 스승의 유골을 운반하는 행렬은 에바라군의 와카바야 시무라로 향했다. 도중에 우에노다이의 옆을 흐르는 시노부 하천에 이르러 미하시 다리를 건너려고 할 때었다.
거기에 서있던 파수꾼이 “이 다리는 쇼군이 다니는 다리이므로 부정(不淨)한 자는 사용할 수 없다.”고 제지했다.
신사쿠는 격노했다. 큰소리로 꾸짖었다. “근왕(勤王)의 지사의 유골을 이장하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가!” 너무나도 힘찬 기백에 파수꾼이 즉시 물러났다.
위대한 나의 스승을 모욕하는 자는 이 목숨을 걸고서라도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는 사자후(師子吼)였다.
“자신이 부끄럽다. 아직도 옛날의 원수를 갚지 못한 것을.” (나는 자신을 부끄러이 여긴다. 아직까지 스승의 원수를 갚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드시 원수를 갚아 보이겠다.)
유명한 이 시는 신사쿠가 쇼인의 무덤 앞에서 읊은 외침이었다.
도다 선생님은 이 신사쿠의 혼에, 옥사한 마키구치 선생님의 원수를 반드시 갚겠다고 일어선 자신을 일치시켰다. 그리고 불이(不二)의 제자인 나를 찾아내셨다.
나는 야마구치 하기시에 있는 쇼카손주쿠의 사적지를 발걸음을 옮기면서 벗에게 말한 적이 있다.
“쇼인도 훌륭했지만 제자가 훌륭했기 때문에 쇼인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다. 은사 도다 선생님의 위대함도 제자인 우리들이 선양하지 않는다면, 세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으면 선생님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제자의 길이다.”
도다 선생님을 만난지 60년. 나는 마키구치 선생님과 도다 선생님을 정의의 대위인으로 전 세계에 선양했다. 스승의 정의를 끝까지 외쳐온 인생에 한 점의 후회도 없다.
문호 괴테는 “정열은 정열을 낳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정열의 확대가 있어야 비로소 위대한 승리도 있다.
내가 대담한 토인비 박사는 인류사를 통관(通觀)하고 일본의 역사와 문학에도 정통하셨다. ‘만엽집’과 ‘겐지이야기’도 읽으셨다 ‘이 나바의 하얀 토끼’와 ‘가구야 공주’(다케토리 이야기)도 알고 계셨으며 가끔 옛날이야기로 대화가 이어진 적도 있었다.
왕성한 탐구심으로 계속 배우는 인생은 이처럼 마음이 약동하고 충실한가 하고 나는 감탄했다.
박사는 에도시대에서 메이지 유신에 이르는 변혁의 원동력은 어디에 있는지에 관해서도 예리하게 통찰하셨다.
그 에너지는 지배계층에서 배제되고 억눌려 있던 민중들 사이에 쌓여 있었다. 이것이 박사의 분석이었다.
“인간의 활동은 결코 동결(凍結)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서서히 끓어오른다. 그리고 거기에 뚜껑을 덮으면 반드시 넘친다.”고 박사는 달관하고 계셨다.
끓어 넘치는 민중의 힘을 결집해서 시대를 움직인 것이 바로 신사쿠의 ‘기헤이타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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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전부터 일본의 각 지역에서 민중세력은 대두했다.
그러나 ‘새벽이 오기’도 전에 쓸쓸히 사라져 가는 사례는 적지 않았다. 그 중에서 어째서 신사쿠는 이렇게도 선명하게 역사에 빛나는 민중의 진열을 창출할 수 있었는가!
이것도 도다대학에서 다룬 논제 중 하나였다. 당연히 여러 차원에서 초점을 맞출 수 있겠지만 도다 선생님과 내가 논의했던 포인트가 있다.
그 첫째로 근본에 ‘사제의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헤타이를 결성할 때 핵심이 된 사람들은 쇼카손주쿠의 동창생들이었다.
이들은 스승 쇼인이 신분의 차이를 두지 않고 동지로서 대우하며 양성한 제자들이었다. 거기에 계층을 초월한 우수한 인재들이 용감하게 모여들었다.
둘째로 모두가 ‘지원병’이었다.
이것이 다른 지역에서 실시했던 강제적인 병역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기헤이타이에 들어가는 기준은 무엇보다도 ‘뜻’에 있었다.
조슈를 비롯해 각지에서 모인 정예가 그대로 신사쿠와 같이 쇼인 문하의 ‘뜻’에 맞게 궐기했던 것이다.
셋째로 신사쿠는 모두에게 자부심과 책임감을 갖게 했다.
번(蕃)의 철저한 신분 속에서 신사쿠는 고심을 거듭한 끝에 기헤이타이에 모인 무두가 무사로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주장했다.
그와 동시에 신사쿠는 기헤이타이에 조직을 만들어 엄격한 규율을 정했다. ‘기헤이타이 대원은 인민의 모범이 되어라’는 지침도 명확하게 제시했다.
도다 선생님은 “기헤이타이에는 굶주려서 오는 사람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사람도 신사쿠에 의해 우국지사로 변했다.”고 통찰하셨다.
신사쿠는 지역에서 필담을 나누었던 천뤼친이라는 벗이 눈병을 앓았다는 소식을 듣고 “성심(성실한 마음)은 하늘도 관통한다. 병 따위는 두려워하지 말고 조국을 위해 목숨을 소중히 해주게”하고 진심으로 격려했다.
누구에게나 어떠한 상황에 청하더라도 격려하며 힘을 이끌어 내는 것이 진정한 지도자다.
그리고 넷째로 신사쿠는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1863년 6월 신사쿠는 외국과의 전쟁으로 피폐한 조슈번에서 새로운 군대의 편성을 맡는다.
신사쿠는 서둘러 전쟁터를 시찰해 무사들이 약체화 된 모습을 간파하고 곧바로 기헤이타이 결성을 윗사람에게 건의했다. 이것이 받아들여져 ‘움직이면 천둥과 번개처럼’이라는 평판대로 순식간에 민중을 규합했다.
구상을 발표한 지 불과 3일 만에 수십명의 세력이 되었으며 이후 입대 희망자는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이 기헤타이의 성공은 잇달아 새로운 ‘민중부대’를 창설하였고 ‘쇼타이(諸隊)’는 5천 명의 세력이 되었다.
스피드는 승부다. 내가 지휘를 했던 ‘야마구치 개척투쟁’도 전광석화와 같은 확대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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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든 시대가 아무리 변천해도 싸움에서 중요한 점은 신분이나 처지도, 직함도 아닌 정말로 싸우겠다는 투혼과 불타오르는 기개가 있는지 없는지 이다.
안일에 빠져 보신에 급급한 사람들은 일단 위급할 때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진정한 혁명아란 맨몸으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사람이다.
성훈에도 이러한 비유가 설해져 있다.
“맨몸으로 맹자가 용감하게 돌진하여 대진(大陣)을 파함과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맹자가 물러서서 일진(一陣)조차 파하지 않음과는 어느 쪽이 뛰어납니까.”(어서 123쪽 통해)
창가의 광선유포 투쟁은 말하자면 현대의 초망궐기다.
고뇌에 짓눌리고 권력에 압박 받아온 민중이 ‘지용의 보살’이라는 큰 사명에 불타 위풍 당당히 일어서서 투쟁했다. 그 중에서도 새로운 청년의 용감한 전진이 바로 승리의 최대 원천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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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야마구치현에 요시다 쇼인이라는 훌륭한 선생님이 있었다. 쇼인에게는 두 제자가 있었다. 한 사람은 구사카젠즈이, 또 한 사람은 다카스키 신사쿠였다.”
1957년 4월 3일. 도쿄의 학회본부에서 열린 스기나미지부 ‘소년소녀부 회합’에서 도다 선생님은 ‘쇼인 문하의 쌍벽’이라고 칭찬하던 두 제자에 관해 말씀하셨다.
그리고 선생님은 겐즈이도, 신사쿠도 이십 대에 요절한 것을 한탄하셨다.
“살아 있었으면 국가를 위해 크게 활약했을 것이다. 장수해야 한다. 그리고 민중을 위해서 투쟁해야 한다.”
도다 선생님은 멀리 응시하시면서 말씀하셨다. 그날 나는 오사카에 있었다. 급히 전한 오사카 참의원 보궐선거를 지원하는 지휘를 맡고 있었다. 나는 당시 스물아홉 살이었다. 신사쿠는 폐병으로 목숨을 잃은 나이와 같았다.
도다 선생님은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는 사랑스러운 제자를 신사쿠처럼 죽게 해서는 안 된다고 늘 기원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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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시쿠가 파란만장한 인생의 막을 시모노세키에서 내린 때는 1867년 4월 14일 미명(未明)이었다.
메이지유신의 전해였다. 휴일도 없이 분주한 가운데 병마는 급속히 진행되었다. 지휘를 했던 막부와 각혈로 쓰러져 약8개월 후에 죽음을 맞이했다. ‘죽어서도 외적과 싸운다’는 각오로 유해는 가까운 기헤이카이 진영에 매장되었다.
이 이야기를 하실 때 도다 선생님은 언제나 병약한 내 몸을 걱정하시며 “다아사쿠는 서른 살까지 밖에 살지 못한다”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그리고 “다이사쿠, 반드시 살아야 해. 내 수명을 주겠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도다 선생님으로부터 수명을 물려받아 불이(不二)의 제자로 살며 투쟁해왔다.
저 ‘3.16’의 후계의식을 한 지 50년. 창가의 사제는 세계의 찬연히 승리의 역사를 남겼다. 그리고 나는 생애 이 창가의 ‘제자의 대도’를 아주 성실하게 달려갈 결심이다.
청년이여 내 뒤를 계승하라!
광포의 혁명아가 되어라!
나의 제자들이여! 그
대들도 신사쿠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