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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여설수행초(중-1) - 전 민중을 행복하게 만드는 자비에 넘친 절복행

작성자선라이즈|작성시간18.05.14|조회수1,299 목록 댓글 0

승리의 경전 어서에서 배운다 (14) 여설수행초(如說修行抄)(-1)

전 민중을 행복하게 만드는 자비에 넘친 절복행

 

 

19521월말, 나는 연이 깊은 도쿄 가마타 동지들 앞에서 ‘2월투쟁에 임하여 이렇게 역설했습니다.

도다 선생님이 탄생하신 달을 멋진 승리로 축하드립시다.”

2월은 니치렌대성인 성탄의 달이고 은사 도다 선생님이 탄생하신 달이기도 합니다. ‘2월투쟁사은에 감사하고 보답하려는 마음에서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위대한 불법을 만날 수 있었던 이유는 대성인이 말법에 출현해 만인을 구제하는 깃발을 높이 들고 묘법을 홍통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창가학회원으로서 올바른 신앙의 길을 걸을 수 있는 이유는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순교하신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선생님의 유지를 이어받아 도다 선생님이 광선유포를 위해 홀로 일어서셨기 때문 입니다.

 

광선유포는 부처의 깊은 자비심에서 일어난 여래행입니다. 그리고 부처가 지닌 진심을 곧바로 이어받은 제자가 도전하는 보살행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 한사람이 불법의 스승, 광선유포의 스승에 직결함으로써 광선유포를 추진하는 참다운 힘이 생깁니다.

 

학회는 75만 세대 절복이라는 도다 선생님이 세우신 서원을 받아들여 소생했습니다. 그 광대무변한 사은에 어떻게 보답하는가. 스승을 외곬으로 생각하며 젊은 제자가 분기한 것이 ‘2월투쟁입니다.

‘2월투쟁이 광선유포 확대를 위해 학회가 본격적으로 솔선해서 나선 첫 번째 대투쟁이었습니다.

도다 선생님의 사업을 계속해서 지켰던 내가 선생님 명을 직접 받아서 조직의 제일선에 뛰어든 실질적인 첫 출전이었습니다.

 

나는 오직 도다 선생님이 세우신 ‘75만 세대 서원을 단호히 실현해보이겠다는 일념밖에 없었습니다.

모두 도다 선생님을 위해!’라는 마음으로 싸웠습니다. 내 몸을 내던졌습니다. 결과적으로 바로 그것이 스승의 말씀처럼불법이 지닌 진수를 실천하는 여설수행입니다.

 

철저히 여설수행을 하면 반드시 벽이 무너집니다. 요컨대 여설수행은 스승에게 직결하는 불이의 실천입니다. 스승의 광대한 경애에 접했을 때 승리하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제에 철저하면 무한한 힘이 솟아나기 때문입니다.

 

나는 도다 선생님 슬하에서 여설수행의 신심과 행동을 배웠습니다. 선생님이 사업상 어려움으로 인해 학회 이사장직을 사임하셨을 때도 그랬습니다.

오직 홀로 엄연히 광선유포의 스승으로 정한 도다 선생님을 지키는 싸움 속에서, 나는 당시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여설수행초배독, 용기 있는 신심을 깊이 자각하다” “결국 신력과 행력으로 끝난다. 어본존에게는 법력과 행력이 있으시다. 이 어본존의 위대한 법칙이 지닌 힘을 실증하고 실험하며 체득하려면 자기 신심 외에 아무것도 없다.”(19501117)

 

여설수행하는 용기에 넘친 신력과 행력이 있는 곳에 반드시 위대한 불력과 법력이 나타납니다. 니치렌불법의 진수를 배우는 뜻에서, 이달에도 여설수행초를 배독하며 신력’ ‘행력의 뜻을 깊이 새기고자 합니다.

 

<본문> (여설수행초 50213~ 5035)

내가 말하노니 그렇지 않노라. 결국 불법을 수행하려면 사람의 말을 채용하지 말지니라. 오로지 우러러 부처의 금언을 지켜야 하느니라.(중략) 이러한 규정(規定)의 명경(明鏡)을 근본(根本)으로 해서 일분(一分)도 어기지 않고, 유유일승법(唯有一乘法)이라고 믿는 것을 여설수행(如說修行)의 사람이라고 부처는 정()하셨느니라.

 

<현대어역>

내가 말한다. “그것(모든 경도 성불하는 가르침이라고 믿는 것이 여설수행이라고 믿는 일)은 잘못이다.”라고, 불법을 수행하려면 사람의 말을 사용하면 안 된다. 오직 부처의 금언을 받들고 지켜야 한다. (중략) 이 법화경 경문의 규범을 명확한 본보기로 삼아 조금도 어기지 말고 다만 성불하는 가르침만이 있다.’고 믿어야 여설수행하는 사람이라고 부처는 정하셨다.

 

불의인 일불승을 향한 신을 확립하라!

 

이 어서에는 여설수행하는 행자는 어떻게 법화경을 믿는 사람인가.”라고 설문하십니다. 그리고 말법에 있어서 법화경에 대한 신()의 기본자세를 명확하게 밝히셨습니다.

 

석존의 불의를 밝힌 경전이 법화경입니다. 법화경에서 밝힌 불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제승일불승(諸乘一佛乘)’이고 만인성불(萬人成佛)’입니다.

제승 석존의 설법 중에서 남아 있는 여러 가지 가르침입니다.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의 삼승(三乘)’은 그 대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석존은 사람들 기근에 맞추어 여러 가지 가르침을 설했습니다. 그 참뜻은 사람들 기근을 조절해서 최종적으로 일불승을 가르치려고 했습니다.

일불승 사람들을 부처의 경애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탈 것이라는 의미로, 만인을 성불시키는 부처의 가르침은 최종적으로 이 일불승 외에는 없습니다. 일불승을 완전히 설한 경전이 법화경입니다.

 

법화경에서는 부처의 진의가 만인성불에 있음을 밝혔습니다. 동시에 성불하는 대법의 명칭을 묘호렌게쿄라고 밝히고, 그 철학적인 본질을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고 설했습니다.

그리고 석존 자신이 행한 궁극적인 성불의 인과를 본인본과(本因本果, 십계호구일념삼천)’이라고 지적하고, 법화경을 수행하는 공덕을 일념신해(一念信解)’ ‘육근청정(六根淸淨)’ ‘기죄필이(其罪畢已)’ ‘즉신성불(卽身成佛)’ 등으로 설했습니다.

또 만인성불을 실현하기 위한 광선유포의 대원을 내세우셨습니다. 이 대원을 위해 삶을 영위하는 것이 진실하고 영원한 보살도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렇게 법화경은 부처의 진의인 일불승을 여러 각도에서 가르칩니다. 그리고 법화경 전편이 일불승을 가르치는 데 일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법화경을 듣고 수지하면 일불승을 향한 신이 일어나고 성불을 방해하는 미혹을 타파합니다.

그리고 성불하는 인과가 우리 생명에 새겨져서 위대한 일생성불의 대공덕이 나타납니다. 구체적인 교법과 수행과 공덕의 일불승은 오직 법화경에서 설합니다.

 

러므로 법화경을 여설수행하는 행자로서 의 기본자세는 오직 법화경만 믿는다.”는 자세이어야 합니다. 불의(佛意)를 이해하지 못하고 다른 경에 마음을 옮기면 일불승을 향한 신심을 잃고 맙니다.

그런데 대성인 재세시에 많은 학자는 제승일불승을 오해하고 잘못된 의 자세를 주장했습니다. 그것은 제승은 모두 일불승이라고 법화경에서 개화하므로 염불, 진언, 선의 어느 것을 수행해도, 또 모든 경전에서 설하는 여러 부처와 보살을 믿는 신앙도 전부 일불승을 믿는 것이 된다.”는 잘못된 견해입니다.

 

여기에는 개회라는 사고방식을 둘러싸고 중대한 실수가 있습니다.개회궁극적인 진실을 밝히고 방편의 제교를 궁극적인 진실과 관계를 함께해서 통일한다는 의미입니다.

제교를 통일하는 궁극적인 진실, 즉 일불승은 오직 법화경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따라서 통일된 방편의 제교는 법화경에서 정확하게 위치가부여 되고 그 한도 내에서 법화경 일부를 표현하는 가르침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방편의 제교는 일불승인 법화경을 근본으로 했을 때 비로소 살릴 수 있습니다.

 

법화경의 근본 뜻을 모르는 학자들은 그릇된 의 기본자세를 주장했습니다. 그렇지만 법화경에서는 부처의 말씀으로 올바른 에 대한 기본자세를 명확하게 밝혔습니다.

그래서 이 단락에서 대성인은 사람들의 잘못을 인식시키고 올바른 을 확립하기 위해, 불법을 수행할 때는 사람(인사<人師>)의 말을 사용하면 안 된다.” “부처의 금언을 근본으로 해야 한다.”고 훈계하셨습니다.

 

리고 이 어서에서 법화경에 대한 올바른 의 기본자세를 나타내는 금언으로서, 법화경 개경인 무량의 경과 법화경 여러 품에서 많은 경문을 인용하셨습니다.

우선 무량의경에서는 경전에 대해서도 권경(權經, 방편)과 실경(實經, 진실)을 명확하게 구분해야 함을 밝힌 방편력으로써 하였느니라. 사십여년에는 아직 진실을 나타내지 않았느니라.”(법화경 29)는 경문이 있습니다.

역겁수행을 설하는 이전경에서 영원히 성불하지 못함을 밝힌 경문(“끝내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이루지 못하나이다.”-법화경 40)인용하셨습니다.

 

법화경에는 우선 부처 자신이 법화경에서 방편을 버리고 진실한 일불승을 설하는 것을 나타낸 경문(“세존의 법은 오래된 후에야 반드시 진실을 설하시느니라.”-법화경 29, “이승도 없고 또한 삼승도 없으며 부처가 방편으로 설한 것은 제외하느니라.”-법화경 129, “정직하게 방편을 버리고”-법화경 144)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화경을 믿는 사람은 오직 법화경만 믿어야 한다고 설하는 경문(“다른 경은 일게도 받지 아니하면”-법화경 206)도 있습니다. 그리고 법화비방(法華誹謗)을 훈계하는 경문(“만약 사람이 믿지 아니하고 이 경을 훼방하면, 곧 일체세간의 불종을 단절하는 것이니라. <중략>그 사람은 명을 마치면 아비옥에 들어가서법화경 198) 등을 인용하셨습니다.

그리고 결론으로 유유일승법(唯有一乘法, 오직 일승법만이 있을 뿐)’이라는 경문을 통해서 불법에는 일승법(일불승)만 있다며 단호한 신심을 세우는 사람이 여설수행하는 행자라고 제시하셨습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이 경문들은 절대로 배타적 신앙을 나타냈다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대성인은 어디까지나 불의(佛意)에 따라 일불승을 향한 신앙을 확립하라고 촉구하셨습니다.

 

법은 투쟁언송(鬪爭言訟), 백법은몰(白法隱沒)의 때입니다. 즉 부처의 진실한 가르침인 일불승을 모르고 불법으로서 통합하는 중심을 잃고, 불법내부에서 투쟁이 일어나 결국 불법 자체가 멸하게 되는 시대입니다.

대성인 재세 중에 일본불교가 8, 10종으로 분열된 상황은 일불승을 망각한 법멸의 위기를 나타낸 모습입니다.

 

대성인은 불법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법화경 신앙을 확립하고자 여기서 역설하셨습니다. 만인이 성불할 수 있게 하기 위해 궁극적인 생명존엄, 인간존경의 원리와 실천을 완전히 설한 경전은 법화경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법멸 위기는 인간의 위기이기도 합니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일불승을 향한 을 확립한 주체자를 배출하는 일이 법화경을 자각한 대성인 일문의 사명입니다.

 

<본문> (여설수행초 5037~ 14)

대저 불법을 수행하는 자는 섭절이문을 알아야 하느니라. 일체의 경론은 이 이문을 벗어나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나라 안의 여러 학자들은 불법을 대강은 배웠다고 할지라도 시각상응한 도를 모른다. (중략)

그런데 정상 이천년은 소승 권대승이 유포하는 때이고, 말법의 처음의 오백년에는 순원, 일실의 법화경만이 광선유포 하는 때이니라.

 

<현대어역>

불도수행을 하는 자는 섭수와 절복의 두 가지가 있음을 알아야한다, 모든 경과 논도 이 두 가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라 안의 여러 종의 승려는 불법을 배우는 듯하지만 시에 상응하는 수행법을 모른다. (중략)

정법과 상법의 2천년간은 소승교와 권대승교가 넓혀질 때다. 말법이 시작되고 5백년은 성불을 위한 가르침을 완전히 설한 법화경만 광선유포 하는 때다.

 

섭수, 절복은 시에 따라야

 

앞단에서는 말법에 여설수행하는 행자에 대한 기본자세를 논하셨습니다. 이번 단에서는 여설수행 하는 행자’, 즉 여설수행 하는 사람이 말법에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 지를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 단의 첫머리에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법화경만 신수한다면, 법화경에서 설한 오종의 수행을 안락행품에서 설하는 것과 같이 면려하는 사람을 여설수행하는 행자라고 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오종의 수행 수지’ ‘’ ‘’ ‘해설’ ‘서사하는 일입니다. 대성인은 이에 대해 묘호렌게쿄 오자의 수지라는 한 문장을, 말법에 법화경을 수행하는 근본으로 삼았습니다.

또 안락행품에서는 악세에 초신자가 법화경을 안락하게 수행해서 불과를 득하기 위한 섭수의 수행법을 설했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과 경전의 허물을 말하지 말지어다.”(법화경 431)라고 있듯이 악구를 하지 말고 침착하게 수행하는 자세입니다.

 

이 질문에서는 대성인이 말법의 수행으로 절복을 중요시 하는 데 대한 사람들이 품은 의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질문은 제종파 사람들뿐 아니라 대성인 문하도 함께 했습니다.

이에 대해 대성인은 우선 불법을 수행하는 사람은 섭수와 절복 두 가지 수행법을 알아야 한다.” 말씀하셨습니다.섭수홀로 조용히 불도수행에 전념하는 수행법입니다.

 

법화경은 안락행품처럼 섭수하는 수행도 설하고, 불경품처럼 모든 사람에게 법화경의 진실을 끝까지 알리는 절복하는 수행도 설했습니다.

본디 섭수와 절복은 때에 따라 필요한 수행이고, 섭수를 해야 할 때에는 냉정하게 판단해서 하고, 절복을 해야 할 때는 용기 있게 해야 합니다.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르다고 할 수 없습니다. 법화경에서도 두 가지 뜻을 설했습니다.

이에 대해 절복을 배척하는 섭수주의, 섭수를 인정하지 않는 절복주의 등은 섭절이문에서 벗어난 사상이 됩니다.

 

1272년에 쓰신 개목초사도어서애서 섭수와 절복에 관해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습니다.

개목초에서 말법에 섭수절복이 있으니”(어서 235)라고 하며 무지한 자와 악인이 국토에 충만했을 때는 섭수를 제일로 하고, 사지와 방법의 자가 많을 때는 절복을 제일로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어서에도 섭수절복을 시에 따라야 하며”(어서 957)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대성인은 어느 수행을 할지는 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이 어서에서 말하는 시각상응한 도입니다.

 

그런데 대성인 재세 때 불교신자들은 불교를 배우는 듯하지만 그 기준을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정법, 상법시대에 중심적 관행이었던 섭수에 편중해서, 대성인이 내세운 절복을 불교에서 하면 안 된다고 비난했습니다. 그것은 불교의 근본을 모르는 어리석은 모습이었습니다.

 

어서에서 가 중요한 예로서 농사를 짓는 데도 계절을 잘 가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불법에서도 이와 같이 소승경, 대승경, 실경 중에 어느 것을 유포시켜 이익을 득할 가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단순히 시간의 변화를 뜻하는 때가 아닙니다. 석존이 입멸한 후 을 받아들이는 변천을 감안해서 정법, 상법, 말법으로 시대를 구분한 것입니다.

그것은 중생의 생명상태와 중생을 둘러싼 사회와 국토에 관한 상황, 사상과 종교유포 순서를 포함한 종합적인 시대인식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대성인은 정법과 상법 2천년은 소승경이나 권대승경이 유포되는 라고 밝히셨습니다.

정법시대와 상법시대는 중생의 기근이 잘 갖추어진 사람이 많고, 과거세에 법화경과 맺은 연이 성숙해짐으로써 소승교나 권대승교를 연으로 해서 득도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또 대체적인 경향으로 일부 사람들이 득도하면 그들의 인격과 행동을 통해 사회에 좋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시대였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한편 말법은 순원, 일실의 법화경만으로 광선유포해야 할 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순원 방편을 포함하지 않고 완전히 성불하는 법만 전적으로 설하는 가르침입니다. ‘일실은 가장 진실한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순원, 일실의법화경 앞에서 말한 일불승을 철저히 설해 가르친 법화경을 말합니다.

 

불법이 멸할 위기에 처하고 더구나 중생의 생명을 유혹하는 악연이 넘치는 오탁악세인 말법시대에는 일불승을 강력히 설한 법화경 이외에는 중생과 시대를 구제하는 힘이 없습니다.

말법에는 일불승을 비방하는 방법의 마성이 세차게 날뜁니다.

 

대성인은 성불하기 위해 믿어야 할 법을 더없이 명확하게 어본존으로 도현하셨습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신을 가능하게 하는 창제행을 세움으로써 말법 중생에 내재하는 불성을 직접 촉발하는 하종불법을 확립하셨습니다. 그리고 대성인 자신의 실천을 통해서 니치렌불법 수행의 요점으로서 방법의 마성과 싸우는 절복을 실천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엄연히 주장하셨습니다.

 


첨부파일 승리(14)여설수행초(중-1).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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