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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형성 바로 며칠 전에도 함께 어울렸던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누구라도 그 사실을 믿지 못할 것이다. 사고 소문의 와전이겠거니 하고 생각하다가, 비록 시신은 직접 보지 못할망정 영안실에서 많은 문상객을 직접 확인하고서야 그 친구가 정말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사람들은 지인(知人)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영원히 사는 사람은 없다는 무상감으로 달랜다. 그리고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수시로 체험하면서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라는 명제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리라고 확신한다. 그런데 차르바카라고 불리는 고대 인도의 유물론자들은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라는 명제를 진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명제는 직접 확인된 사실이 아니라 추리에 불과한 것이므로 보편타당한 진리라고 간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그 명제는 이제까지 만난 적이 있던 어떤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의 경험을 근거로 하여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라고 추리한 것에 불과하며, 따라서 그 명제는 논리적 비약이요 가정이라고 했다. 억지를 부린 듯하고 궤변처럼 들리기는 하지만, 모든 사람이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직접 확인을 할 수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죽는 것을 보기 전에 먼저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 생명이 영속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 인류가 노력하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그들의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그러한 주장을 통해, 우리가 확실한 것으로 믿고 있는 지식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사실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 사실을 말로써 표현함으로써 증언이 성립됩니다. 예를 들어 판사의 추리에 의해 인권을 제한할 수 있는 재판에서 사실의 전말이 모호할 경우, 증언은 사실을 판단하는 결정적인 기준이 되기도 한다. 여기서 증언은 직접 확인한 사실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증언자가 어떤 사건을 직접 목격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증언이 사실을 그대로 전한 것이라고는 단정할 수 없다. 어떤 대상을 말로써 표현할 때는 이미 그 대상을 직접 지각한 감관이 아닌 다른 심리 기관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눈· 귀· 코· 혀 ·피부라는 다섯 가지 감관으로 대상을 파악하는 것이 직접 지각이다. 이 직접 지각을 불교 용어로는 현량(現量)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대체로 이미 직접 지각이 아닌 지식을 직접 지각이라고 믿으며 살고 있다. 예를 들어 장미꽃을 보았다고 하자. 나는 그 독특한 향기와 색깔 및 꽃잎 등의 모양을 직접 목격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그때 거기서 장미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이 증언을 들은 사람은 내가 장미꽃을 보았다는 사실은 인정하겠지만, 그는 결코 내가 본 그대로의 장미꽃을 연상하지는 못한다. 그는 장미꽃에 대해 일반적으로 알려진 특징, 즉 독특한 향기와 모양 등을 연상하면서 내가 본 것과 유사하거나 다른 장미꽃의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요즘처럼 접종에 의한 개량이 다양할 경우, 나와 그 사람이 떠올리는 장미꽃의 차이는 더욱 커질 것이다. 위의 예에서 내가 ‘장미’라는 말로 표현하기 이전에 내게 직접 인식된 것을 직접 지각, 즉 현량이고 하고, 그 모습을 자상(自相)이라고 한다. 자상이란 말로써 인식되기 이전의 대상 자체를 가리킨다. 그리고 내가 직접 목격한 대상을 어떤 말로써 표현할 때, 예를 들어 장미라는 이름으로 표현할 때, 장미라는 말에 의해 떠올리는 모습은 공상(共相)이 된다. 공상이란 어떤 대상이 갖추고 있는 공통적인 모습을 가리킨다. 사람들은 그 말에 의해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을 떠올린다. 이렇게 말로써 그 대상을 떠올리는 것이 추리이며, 불교 용어로는 비량(比量)이라고 불린다. 따라서 말 즉 추리에 의해 떠올릴 수 있는 대상의 모습은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대상의 일반적인 모습인 공상일 뿐이다. 우리가 직접 목격한 사실을 전하는 데도 여러 가지 오해와 모호함이 발생하는 것은 자상과 공상, 또는 직접 지각과 추리를 혼동한 데서 기인한다. 다시 말해서 나는 직접 목격한 사실을 전하지만, 나의 말을 듣는 사람에게는 그 사실이 추리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다. 내가 인식한 특수한 대상 자체, 즉 자상이 상대방에게는 그 대상의 일반적인 모습, 즉 공상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직접 지각한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결과적으로 거의 모두 추리가 되어 버린다. 우리의 대부분의 지식은 이 같은 추리에 의해 형성되어 있다. 유식학의 분석에 의하면, 8식 중의 전(前)5식, 즉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이 대상을 인식하는 방법은 직접 지각이고, 제6식인 의식이 대상을 인식하는 방법은 추리이다. 우리가 말을 통해 어떤 대상을 알아차린다면, 그렇게 형성된 앎은 의식의 작용에 의한 추리의 내용이다.
-직접 지각과 추리 현량 즉 직접 지각이란 예를 들어 눈으로 대상을 직접 보고 아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눈의 인식 기관인 안식에 의해서만 직접 지각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함께 작용함으로써 그것이 형성된다. 전5식 중의 나머지 4식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전5식이 직접 지각의 일차적인 도구이기 때문에 보통 직접 지각을 전5식의 인식 방법으로 간주한다. 이렇게 간주하는 이유는 전5식 자체로는 말을 일으킬 수 없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한다는 데에 있다. 그런데 제8식인 아뢰야식도 직접 지각으로써 대상을 인식한다고 간주된다. 그 이유는 아뢰야식은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서 작용하면서 마음이 부닥치는 상황을 분별하지 않고 부닥치는 그대로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6식인 의식의 활동 중의 일부도 직접 지각이 된다. 어떤 대상을 눈으로 보면서 대상의 형상을 알아차리면서도 아직은 그것을 이름 등의 말로써 구별하지는 않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예를 들면, 지금 밖에서 여러 가지 소음이 들려오고 있음은 알지만 아직은 그 소음 중에서 자동차 소리와 음악 소리를 구별하지는 않는 경우가 의식의 직접 지각이다. 또한 참선을 닦는 중에 마음의 활동이 고요히 가라앉은 상태의 의식도 대상을 분별하지 않기 때문에 역시 직접 지각이다. 다만 선정(禪定)에 들어 있을 때의 분별없는 상태의 직접 지각을 ‘정심(定心)의 현량’이라고 칭하고, 이 밖의 직접 지각을 ‘산심(散心)의 현량’이라고 칭하여, 그 둘을 구분한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직접 대면하고 있을지라도 그것을 묘사하기 위해 개념 또는 말을 동원하면, 그 개념이나 말에 의한 인식은 직접 지각의 영역을 넘어선 추리의 영역에 속하게 된다. 추리 즉 비량은 대상의 공통적인 모습을 인식하는 것이며, 이 인식은 말에 의해 형성된다. 다시 말해서 비량은 눈앞에 있거나 없는 대상에 대해 말을 사용하여 그것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추리하여 아는 인식 방법이다. 눈앞에 없는 대상에 대한 비량의 예를 들면, 그것은 멀리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상황을 보고서 거기에 불이 있다고 아는 경우이다. 눈앞에 있는 대상에 대한 비량의 예를 들면, 그것은 어느 꽃을 보고서 그 색깔이나 모양 등에 따라 장미꽃이라고 판단하는 경우이다. 어느 경우이든 이러한 판단은 이미 널리 통용된 지식에 의거하여 이루어진다. 비량이라는 인식 작용의 특징은 그것이 반드시 말을 사용하여 인식하다는 데 있다. 말에 의해 파악되는 사물의 모습을 곧 공상이라고 한다. 이것은 또 널리 통용된 지식이기도 하다. "이 꽃은 장미이다“라고 말할 때, 이 말에 의해 지각되는 장미가 공상이다. 이 판단에서 사용되고 있는 ‘이’ ‘꽃' '장미’라는 개념은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눈앞의 꽃에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장미꽃에 대해서도 통용된다. 왜냐하면 다른 장미꽃에 대해서도 나는 마찬가지로 ”이 꽃은 장미이다“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말을 사용한 인식, 즉 비량은 제6식만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8식 중에서는 오직 의식만이 추리의 기능을 지닌다. 이제까지 설명한 직접 지각과 추리는 인도 철학 일반에서 통용되는 바른 인식 방법이다. 여기에 추가되는 또 하나의 바른 인식 방법은 성언량(聖言量), 즉 신뢰할 만하고 권위 있는 말씀에 의거하는 추리이다. 그런데 6식 모두와 제8식이 바른 인식 방법인 직접 지각과 추리로써 대상을 인식하는데도, 우리의 인식이 반드시 옳지만은 않은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우리가 흔히 오인이라고 말하는 그릇된 인식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그릇된 인식, 즉 오인을 유식학에서는 비량(非量)이라고 한다. 이것은 추리를 뜻하는 비량(比量)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 비량은 직접 지각과 추리의 대상을 잘못 파악하는 인식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흔히 “너는 그것을 잘못 보았어.”라고 말하여 상대방의 오인을 지적하기 일쑤이므로, 오인이 눈과 같은 감관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유식학에 의하면, 전5식과 아뢰야식은 오인을 일으킬 수가 없고, 제6식인 의식과 제7식인 말나식만이 오인을 낳는다. 이 점에 대해서는 설명이 좀더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