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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장막 연극을 보러 갔는데, 시작할 시간이 지나서도 막이 오르지 않으면 사람들은 동요한다. 장막을 보며 시작을 기다리는 동안에는 장막 뒤에서 펼쳐질 세계를 궁금해 한다. 더 기다려도 막이 오르지 않으면, 아직 참을 만한 사람은 장막 뒤의 세계를 자기 나름대로 상상하면서 궁금증을 달랠 것이지만, 더 참지 못하는 사람은 점증하는 궁금증으로 불만을 터뜨릴 것이다. 그래서 극장은 아우성의 도가니로 번지고 묵묵히 기다리던 사람도 그 소요에 동참한다. 이 소요는 막이 오르면서 그친다. 연극이 아닌 실제의 삶에도 장막이 있다. 인생에는 진실을 가리는 장막이 있다. 이 같은 장막에 싸여 있는 동안은 온갖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장막 뒤의 진실을 모르니 우선 답답할 것이다. 이 답답함은 상상력을 동원하게 하여 장막 뒤의 모습을 그려 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그림을 사실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미 발동된 상상력은 그 특유의 분방성으로 인해 한 가지 그림을 그려 내는 데 그치지 않고, 수시로 여러 가지 사실을 연출한다. 그래서 사실은 언제라도 뒤바뀌고, 이에 대응하는 생각과 행동도 두서없이 변하면서 괴로움과 갈등을 낳는다. 진실을 가리는 장막으로 인해 우리 마음에 발생하는 모든 사태를 불교에서는 번뇌라고 한다. 우리는 모두 자기에게 어떠한 번뇌가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이렇게 인정하는 것은 그 번뇌를 막연히 심리적 괴로움 또는 정신적 고통이라고 이해하는 차원에 그칠 뿐이다. 그 번뇌가 자신과 세계에 대한 진실을 가리는 장막과 필연적으로 연계되어 있다는 좀더 심오한 차원에서 번뇌를 이해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런데 진실을 가리는 장막과 번뇌 사이의 필연적인 연계를 이해는 데서 유식학은 수행의 이론으로 적용될 수 있다. 실제로 유식학의 수행론도 이로부터 출발한다. 장막이 없으면 번뇌도 없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번뇌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의 생각에 장애, 즉 진실을 가리는 장막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과 같다. 이는 마치 영화관에서 장막(스크린)에 비치는 영화를 보면서, 영상의 내용이 장막 위에 조작된 가공(架空)의 세계임을 잠시 잊은 채, 그 내용에 따라 웃고 울고 긴장하고 화내거나 답답해하는 등의 번뇌에 싸이는 것과 같다. 이 경우, 영화의 내용 전체가 바로 번뇌이며, 이 번뇌는 장막에서 비롯된다. 영화는 허위의 세계이다. 이 허위의 세계는 스크린(장막)이라는 불가결의 바탕 위에서 연출되지만, 다른 두 가지 요건이 없으면 영화는 성립되지 않는다. 두 가지 요건이란 하나는 영상이고 다른 하나는 착각이다. 여기서 영화는, 스크린 위에 비친 영상이 실제 세계가 아니라 사실은 착각일 뿐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무지(무명)에 의해서 가능하게 된다. 유식학을 적용하면, 영상과 착각은 각각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영화를 가능하게 하는 바탕인 스크린은 무지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번뇌장은 ‘번뇌라는 장애’라는 뜻으로 번뇌와 같은 말이다. 번뇌라고만 말해도 되는 것을, 장애가 된다는 뜻을 강조하여 번뇌장이라고 표현했다. 소지장은 바르게 알아야 할 것을 방해하는 장애라는 뜻으로, 인식의 대상이 되는 객관 세계에 대한 장애를 가리키며, 착각을 일으키는 무지라고 이해할 만한 말이다. 따라서 번뇌장과 소지장은 그 기능이 서로 다른 별개의 장애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 둘은 하나의 사태에 대해 발동하는 양상을 두 가지 측면에서 표현한 말이다. 번뇌장과 소지장의 차이를 알리는 전통적인 비유가 있다. 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하던 옛날에 사람들은 나무를 밑동까지 잘라 쓰지 않고, 계속 자랄 수 있을 만큼의 줄기를 남겨 두었다. 그와 같이 가지 친 나무는 언뜻 보면 사람이 서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특히 밤이나 어두울 때 그것을 본 사람들은 어떤 사림이 자기를 지켜보고 있는 양 깜짝 놀라기도 한다. 이때 가지 친 나무를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곧 번뇌장이며, 그것을 나무일뿐이라고 알지 못하는 마음이 소지장이다. 이렇게 보면 번뇌장과 소지장은 무지라는 같은 뿌리의 양면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렇듯 번뇌장과 소지장은 그 뿌리가 동일하더라도, 진실을 방해하는 데서는 사뭇 다른 양상으로 구분된다. 이 구분은 유식학 특유의 이론적 고찰에 속한다.
-아집과 법집 인간이 객관 세계의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이해하는 습관을 지니고 사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서 객관 세계를 중심으로 자기를 이해하는 반대 방향으로부터의 이해도 가능하다. 즉 자기에게 적용되는 사실을 객관 세계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객관 세계에 적용되는 사실을 자기에게도 적용하여 이해하는 것이다. 이 같은 두 가지 경우에서 자기 위주의 이해를 아집(我執)이라고 하고, 객관 세계 위주의 이해를 법집(法執)이라고 한다. 이 구분에 따르면 번뇌장은 아집에서 발생하여 세계 전체에 적용하는 장애이며, 소지장은 법집에서 발생하여 자기에게까지 적용하는 장애이다. 그러나 번뇌장은 소지장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그 둘의 뿌리는 동일하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소위 진실이라는 객관적 사실을 모르는 데서 고통으로 이어지는 번뇌를 일으킨다. 군에 입대한 아들을 둔 어머니는 아들이 어떻게 지내는지를 몰라, 전에 들은 무성한 소문으로 아들을 걱정하다가, 면회하여 직접 보고서야 걱정을 물리친다. 서로 만나서는 변함없는 사랑에 안도하던 연인도 잠시만 헤어져 있으면, 그동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몰라 온갖 상상을 지어내어 번뇌를 자초한다. 나와 세계에 대한 이해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번뇌는 자기 존재에 대한 습관적인 믿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예를 들어 ‘나의 몸’, ‘나의 물건’, ‘나의 생각’ 등을 확신하면서, 이것들과 들어맞지 않은 사실을 겪을 때 불만이나 갈등 따위의 고통을 느끼는 번뇌를 일으킨다. 그런데 나의 생각이라는 것이 어떻게 발생하는가? 그것은 우리의 육체에 부속하는 감각 기관들의 산물이다. 그리고 감각 기관들은 불교에서 ‘법’이라고 불리는 요소들의 집합일 뿐이다. 요소들은 모였다가 흩어지고 수시로 변하는 무상한 것들이다. 인간과 세계는 요소들의 이합집산이며 변화일 뿐이라는 것이 객관 세계의 진실이다. 이 진실을 모르는 것이 소지장이다. 이 진실을 모를 때, 세계를 저렇게 유지하는 본체가 있듯이 나에게도 그와 같은 본체가 있다고 생각하여 자기에 대한 집착을 낳는다. 그래서 나의 몸이나 생각에 집착하여 그것을 앞세우며, 이 집착이 번뇌를 낳는다. 이제 유식학의 설명을 적용해 보면, 수행이란 소지장을 제거하는 노력이다. 우리는 자아라고 불리는 ‘나의 본체’가 있다고 믿으며, 아울러 세계에도 세계를 구성하는 본체가 있다고 믿기 쉽다. 전자의 믿음은 번뇌장이 되고, 후자의 믿음은 소지장이 된다. 다시 말해서 나의 본체가 없음을 모르는 무지가 번뇌장이고, 세계의 본체가 없음을 모르는 무지가 소지장이다. 바꾸어 말하면 번뇌장은 자기 자신에 대한 무지를 낳고, 소지장은 세계 전반에 대한 무지를 낳는다. 그리고 번뇌장은 소지장에 부수하는 무지이다. 그렇다면 유식학에서는 어떻게 아는 것이 진실을 아는 것이라고 말하는가? 요약하자면 객관 세계는 본체가 없이 식(識), 즉 마음 작용일 뿐이라고 아는 것이 진실을 아는 것이다. 이 진실을 알지 못하는 것이 곧 소지장이다. 이 같은 취지에서 유식학의 대가인 인도의 안혜(安慧)는 자아에도 외부 세계에도 본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가르치려는 목적으로 『유식삼십송』에 대한 주석서를 저술했다. 그는 이 주석서의 머리말에서 소지장을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유식 공부의 궁극적 목적임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유식학이란 수행을 위한 공부이다. 따라서 번뇌장과 소지장을 이해하는 것은 수행의 전제 조건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