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말의 충신을 제사한 장충단 남산 동쪽 봉우리를 종남산(終南山)이라고 흔히 부른다. 이 산기슭 아래 장충단 공원은 남산의 맑은 물이 흐르고 있어 옛날부터 서울 사람들이 많이 찾던 곳이다. 특히, 이 부근의 ‘버터약수’는 위장병에 좋다하여 유명하였다. 이 곳에 공원을 만든 것은 지금으로부터 84년 전 일이다. 그 당시 일제(日帝)는 한국인의 민족혼을 빼앗기 위해 장충단(奬忠壇)을 훼손하고 경성부(京城府)에서 일본식 공원을 만들었다. 원래 장충단은 일명 충렬사단(忠烈祠壇)으로 외국 세력이 침입하여 풍운이 감돌던 1900년 고종황제의 명으로 국가에 충성을 다하다가 목숨을 바친 충신들을 제사하는 제단이었다. 이 단은 현재 장충단공원 내의 리틀야구장 북쪽, 동국대학교 정문 부근에 세워져 있었다. 이 곳은 조선 후기의 서울 성곽 남쪽을 수비하던 어영청의 분영(分營)인 남소영(南小營) 터였다. 장충단을 세우게 된 직접적인 사건은 을미사변(乙未事變)이다. 지금으로부터 108년 전인 을미년 8월 20일 새벽 - 명성왕후 민비를 시해(弑害)하기 위해 미우라(三浦) 일본공사는 대원군을 앞세우고 일본 불량배들을 이끌고 경복궁에 난입하였다. 일본 불량배들은 민간인 복장이나 한국 훈련대 복장으로 변장하여 그들의 흉계를 감추려고 하였다. 홍계훈(洪啓薰) 궁성 수비대장은 이날 새벽 경복궁에 밀려드는 난군들의 총성을 듣고 변란이 일어난 것을 알았다. 그는 군부대신 안경수와 함께 1개 중대의 시위대 병력을 이끌고 허둥지둥 광화문에 도착하였다. 홍계훈은 광화문에 도착하는 즉시 난군이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문을 가로막았다. 칼을 빼어든 그는, “웬 놈들이냐 썩 물러가라.” 고 난군들을 호령하였다. 이 호통에 일본 불량배들과 난군들은 잠시 멈칫거렸다. 그러나 이들은 문을 막아 선 홍계훈에게 집중 사격을 가하면서 밀고 들어왔다. 홍계훈은 6발의 총을 맞고 칼로 난자당해 몸은 두 동강이 났다. 또한 이경직(李耕稙) 궁내대신은 이날 밤 궁중에서 숙직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새벽 3시경 궁궐 밖이 소란하더니 곧 일본 불량배들이 건청전(乾淸殿) 내의 왕과 왕비의 침소를 침입하였다. 이때 왕을 호위하던 신하들은 모두 피신해 버렸는데 이들은 왕과 세자를 끌어내어 위협하였다. 그러나 이경직은 왕의 신변을 끝내 보호하려다 그 자리에서 살해당하고 말았다. 이들은 밀실을 샅샅이 뒤져 궁녀들을 위협하고 드디어 명성왕후를 찾아내었다. 그리고는 명성왕후를 등 뒤에서 칼로 허리를 난도질하여 살해하고, 우물에 던졌다가 다시 끌어내었다. 그리고 비단이불에 싸서 송판에 옮겨 경복궁 후원 숲 속에서 석유를 뿌린 다음 불에 태워서 산 속에 묻었다. 일제의 이 만행에 온 국민이 분노로 치를 떨었던 것은 물론이다. 이로부터 5년 후 광무 4년(1900) 5월에 고종황제는 원수부(元帥府)에게 갑오년 이후부터 을미사변 때 국가를 위하여 끝까지 난군들을 막다가 목숨을 잃은 홍계훈, 이경직 외에 희생된 장병들을 위하여 단(壇)을 쌓게 하고, 장례원(掌隷院)으로 하여금 춘추로 제사하는 것을 실시하도록 하라는 조칙을 내렸다. 이에 조정에서는 사당을 건립하는 안과 단을 설치하는 안을 황제에게 올렸다. 고종황제는 단을 설치하되 1년에 춘추로 두 번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이에 따라 원수부는 제단 1동과 부속건물 2채를 짓고, 주변을 정화하는 공사를 마무리 한 것이 이 해 10월이었다. 공사가 마무리되자 고종은 친히 이 단의 이름을 장충단(奬忠壇)이라고 지었다. 그러자 황태자(순종)가 ‘장충단’이라 쓰고, 충정공 민영환이 비문을 지은 비석을 장충단 앞에 세웠다. 총 143자의 장충단 비문에는 「고종황제가 나라를 다스리는 중에 갑오, 을미 등의 사변을 만났을 때 군인으로서 어려움에 당면하여 목숨을 잃은 사람이 많으니 슬프다. 그 서릿발 눈보라에도 늠름하고 당당했던 뛰어난 절개는 밝기가 해와 별 같다. 충성과 의리를 길이 기려 제사를 지내라는 어명이 있어 단을 쌓고 비를 세워 표창하고 아울러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노니 백세(百世)에 빛남에 보답함이로다. 그 사기(士氣), 군인들의 마음을 북돋을지니 그 아름다움은 크고도 장 하도다」라고 씌어 있다. 조선말에 정교(鄭喬)가 지은 『한국계년사(韓國季年史)』에 보면, 1900년 11월 12일, 일본 낭인들이 경복궁에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 때 순국한 훈련대장 홍계훈을 위시하여 이도철(李道撤) 등과 전몰한 사졸들을 제향 하였다고 하였다. 천도교에서 운영하던 개벽사(開闢社)에서 1929년 10월에 발행한 『별건곤』(경성호)에 실린 장충단 사진을 보면 규모가 큰 단층 기와집으로 나타나 있고, 넓은 축대 위에는 본 건물인 사당 1동 외에도 부속건물 2채를 짓고, 장충단이라고 쓴 비석을 세워 놓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자 군인은 아니지만 을미사변 때 순국한 궁내부대신 이경직과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 때 사형 당한 시종 임최수(林最洙) · 참령 이도철(李道撤) 등도 제사에 빠뜨려서는 아니 된다는 여론이 있자, 이듬해인 광무 5년 2월에 육군법원장 백성기(白性基)가 고종황제에게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폐하 신의 생각으로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때 순직한 문관들도 그 영혼을 장충단에 모시는 것이 타당할 줄로 아옵니다.” 하자 고종은 고개를 끄덕이며, “충의를 표창하고 절개를 장려하는 것에 어찌 문무를 구별할 것이냐. 경의 의견이 자못 이치에 합당하니, 이 일을 장례원(掌隷院)으로 하여금 처리케 하리라.” 하였다. 이로 인해 장충단의 신위(神位)는 증가되었다. 이 곳에 모신 신위는 대부분 항일 인물이었으므로 장충단의 제사는 장병들의 사기를 높여 주었다. 당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이 노골화 되고 명성황후를 시해한 만행에 분노를 금할 수 없던 무렵에 이러한 항일, 배일의 순국열사를 장충단에 모셔 제향하는 일은 장병들을 크게 감격시켰고, 온 국민들의 장충단에 대한 경모심(敬慕心)을 높여 애국 순열 사상이 고조되어 갔다. 이리하여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널리 애창된 「한양가」에는 남산 밑에 지어진 장충단 저 집 나라 위해 몸 바친 신령 뫼시네. 태산 같은 의리에 목숨 보기를 터럭같이 하도다. 장한 그 분네. 라는 가사가 있다. 장충단에 제향된 인물들을 살펴보면, 임오군란 때 구식군인들에게 피살된 흥선대원군의 중형(仲兄)인 영의정을 역임한 이최응(1815~1882), 선혜청 당상이던 민겸호(1838~1882), 선혜청 당상을 지냈다하여 민겸호와 함께 피살된 김보현(1826~1882), 호군으로 재직 중 피살된 민창식(1841~1882) 등이 제향되었다. 다음에 갑신정변 때 살해된 인물로는 순종의 장인으로 사대당의 대표적 인물인 민태호(1834~1884), 병조판서로 사대당의 중진이었던 조영하(1845~1884), 박문국 당상으로 「한성순보」를 발간하던 사대당의 거물이었던 민영목(1826~1884), 사대당의 보수파로 한규설의 형인 한규직, 수신사·영선사로 일본, 청나라에 다녀온 뒤 협판 군국사무 등을 지낸 윤태준(1839~1884), 기기국 총판을 지낸 사대당의 거물이었던 이조연(1843~1884), 세력이 컸던 환관 유재현(?~1884) 등이 있다. 을미사변과 관련하여 장충단에 제향된 인물로는 앞에서 소개하였던 훈련대장 홍계훈과 궁내부대신 이경직이 있다. 그리고 1895년 11월 28일 춘생문사건을 일으킨 인물로 시종 임최수와 참령(參領) 이도철 등이 있다. 이들은 을미사변으로 궁중에서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는 고종황제를 모시고 나와 친일정권을 타도하고 새 정권을 수립하여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복수를 하겠다고 미국인을 비롯하여 러시아공사 등 25명의 외국인과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 춘생문사건을 일으켰다가 실패했으므로 재판에서 임최수와 이도철은 사형을 언도 받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신 유배, 징역형을 받았다. 이에 따라 이 두 사람도 장충단에 제향되었다. 장충단이 건립된 이래 9년간 매년 춘추로 제사를 지낼 때에는 군악을 연주하고 군인들이 조총(弔銃)을 쏘면서 엄숙하게 거행했으나 융희 2년(1908)에 이르러 일제의 주권 침탈이 노골화 되면서 반일감정을 부추긴다하여 제사가 폐지되었다. 그 후 장충단이 자리했던 이 곳은 1919년 6월부터 일본식 공원으로 꾸며져 장충단비는 남산 숲 속에 버리는 가하면 벚꽃 수천 그루를 심고, 광장 · 어린이놀이터 · 산책로 · 공중변소 · 교량 등의 시설을 하고, 장충단공원이란 이름으로 경성부가 관할하였다. 또한 이 곳에는 상해사변(上海事變) 때 결사대로 전사한 육탄 3용사(三勇士)의 동상을 세워 한국인의 역사의식을 말살하려 하였다. 일제 때 훼손된 장충단 지역은 6·25전쟁 때 사당마저 소실되어 흔적마저 없어지고 말았다. 장충단은 고종황제가 을미사변 때 일본 낭인(浪人)들의 경복궁 난입을 막다가 순국한 장병을 제사하기 위한 초혼단(招魂壇)이므로 일본 침략에 대항하려 했던 항일, 배일사상이 깃든 사적이며, 오늘날 동작동 국립묘지의 헌화하고 참배하는 현충관(顯忠館)과 유사하다. 일제가 1908년부터 장충단 제사를 폐하도록 압력을 가하여 중지시킨 것이나 1919년부터 벚꽃 등을 심고 일본식 공원으로 조성한 것은 우리 민족의 혼을 말살하려 한 것이므로 이를 복원하는 것은 늦은 감이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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