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권의 상징, 종묘 오늘날 서울에 남아 있는 문화재 가운데 종묘와 사직단이 있지만 많은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 500년간 국가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시설물은 종묘와 사직단이었다. 우선 종묘는 역대 왕과 그 왕비 그리고 추숭(追崇)된 왕과 그 왕비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종묘는 국가적으로 중대한 일은 먼저 종묘에 고한 후에 의정부에서 의결하고 시행하였다.
사직단은 국토의 신과 곡식의 신을 모셔 놓고 각각 제사를 지냈던 관계로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당연하였다.
그래서 조선왕조가 일제에게 주권을 빼앗긴 일을 흔히 ‘종묘사직을 잃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종묘는 현재 종로 3가와 4가 사이, 즉 세운상가 건너편 훈정동 1-2에서 와룡동 2-4에 걸친 대지 56,000여 평에 자리잡고 있다. 종묘는 오래 전부터 창경궁과 구름다리로 연결되어 해마다 벚꽃놀이 철이 되면 창경궁에 입장한 관상객(觀賞客)이 몰려들어 붐볐던 곳이다.
태조 이성계는 한양에 도읍하자 마자 건축한 것은 경복궁과 종묘·사직이었다. 그런데 종묘를 이 곳에 짓게 된 연유는 옛부터 묘동사서(廟東社西), 즉 궁궐 동쪽에 종묘, 서쪽에 사직단을 쌓는다는 원칙을 지켰기 때문이다.
태조는 한양에 천도하기 한달 전부터 궁궐·종묘·사직 등을 지을 자리를 정하고, 도로 등을 내는 도시계획을 세워 공작국(工作局)이란 기구를 설치했지만 건설공사는 서두르지 않았다. 이에 의정부에 해당하는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전하, 종묘는 조상을 받들고 효도를 숭상하는 곳이며, 궁궐은 존엄을 모시고 정령(政令)을 반포하는 곳이요, 성곽은 안팎을 엄하게 하고 국가를 견고하게 하는 시설입니다" "·····…" "그런데 전하께서 백성들의 노고를 생각해서 이들 시설을 건설하지 않는 것은 도읍을 중시하지 않는 것이나 근본을 중시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으음·····" "그러므로 전하께서 빨리 종묘, 궁궐, 성곽을 축조하여 조상에 대한 효경(孝敬)을 널리 알리고 백성들에게 존엄을 보이며 국가의 위세를 영원히 견고하게 해야 합니다" 라고 건의하였다.
이 건의를 들은 태조 이성계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내 어찌 도읍의 건설을 소홀하게 생각했으리오. 이제 종묘와 사직, 궁궐을 지을 것이니 지신(地神)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라. 그러나 이 공사에는 백성들을 동원하지 말고 승려들을 동원해서 시행하도록 하라" 고 명하였다. 이 같은 태조의 명에 따라 궁궐과 종묘, 사직을 짓는 기공식은 올렸지만, 건축자재가 미처 준비되지 않아 태조 3년(1394) 음력 12월 3일부터 승려들만 동원하였다.
그러나 인력이 부족하여 결국 각 지방의 장정들은 이듬해 1월부터 2월까지 동원하였다가 농사철이 다가오자 장정들은 일단 귀향시켰다. 하지만 승려들만으로 궁궐을 완공하기가 어려웠으므로 이 해 8월에 경기도와 충청도에서 1만 5천명의 장정을 다시 동원해 공사를 마무리 지음으로써 새 궁궐은 태조 4년(1395) 9월 25일에 준공되고, 종묘와 사직도 거의 완공을 앞두게 되었다.
종묘가 완공되자 개경에 있던 태조의 4대조 신위(神位)를 한양에 옮겨 오도록 하였다. 이때 각 관아의 관원 한 명씩을 뽑아 개경에 보내 신위를 모셔 오게 하였다.
이 신위가 한양에 도착되던 날 조정의 모든 관리들은 공복(公服)을 입고 서대문 밖 반송방(천연동)까지 나아가 맞이하였다. 권근(權近) 등이 모신 네 신위가 북소리 소라소리 가운데 각각 장엄한 모습으로 입성하였다.
신위가 봉안되고 나자, 태조 4년(1395) 10월 5일 태조 이성계는 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종묘에 도착하였다. 이어 종묘 동문 밖에서 4배를 하고, 면류관과 곤룡포로 갈아입고 정전에 나아가 제사를 지냈다.
이때 아헌(亞獻)은 세자가, 종헌(終獻)은 개국공신 김사형이 드렸다. 10월 5일, 새 궁궐과 종묘, 사직단이 완공되자 태조 이성계는 만면에 웃음을 띤 채 백관들을 거느리고 종묘로 향하였다. "오늘 상감마마께서 새로 지어진 궁궐을 돌아보시는 날이래" "그래서 새로 지은 종묘에 나가 제사를 드리기 위해 행차가 있다지 않은가" "그 뿐 아니라 새 궁궐의 준공을 축하하기 위해 죄인을 풀어주는 특사령을 반포하고, 문무백관들은 새 궁궐에 초청하여 큰 연회를 연다는군" 태조 이성계는 새 궁궐에서 베푼 연회석상에서 궁궐공사에 공이 큰 신하들에게 상을 내리고, 특히 도시계획을 담당했던 정도전(鄭道傳)에게는 금으로 장식한 각대(角帶) 하나를 하사하였다.
제사를 마친 태조 이성계는 수레를 타고 시가에 거둥하였다. 이때 성균관 박사가 학생들을 인솔하고 나와 조선 건국과 한양 천도, 종묘 이전을 경축하는 노래를 지어 읊었다. 그리고 운종가(雲從街)에 이르렀을 때에는 장악원(掌樂院) 소속 여자 악사(기생)들이 노래를 부르고 재주를 피우니 일대 장관이었다.
태조는 이에 수레를 도중에 세 번이나 멈추어 가면서 관람하였다. 태조가 환궁하자 여자 악사들이 전정까지 나와 다시 축하를 드렸다. 이때 신덕왕후 강씨도 발을 내리고 이를 즐겨 관람하였다. 이 축하행사는 조선 건국 후 최초 최대의 경축식이었으며 가두 경축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태조 때 세워진 종묘는, 정전(태실) 7칸으로 그 안에 석실 5칸을 마련하였고, 그 좌우에 익실(翼室, 협실) 각각 2칸씩, 공신당(功臣堂) 5칸, 신문(神門) 3칸, 동문 3칸, 서문 1칸으로 되어 있어 모두 담장 안에 있었다.
담장 밖에는 신주(神廚) 7칸, 향관청(享官廳) 5칸, 좌우 행랑 각각 5칸씩, 남행랑 9칸, 재궁(齋宮, 전) 5칸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후세로 내려올수록 종묘에 모실 분이 많아져 명종 원년(1546)에 정전 4칸을 증축하게 되어 태실은 모두 11칸이 되었다.
그런데 종묘는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에 왜군에 의해 모두 불타고 말았다. 종묘의 재건은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하고 시급한 것이었다.
그러나 전후의 경제난과 사회적인 불안은 그것을 뒷받침하여 주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불탄 지 26년 만인 광해군 즉위년(1608)에 재건되었다. 재건된 종묘는 불타기 직전의 규모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또다시 신실(神室)이 부족해지자 영조 2년(1726)에 정전 4칸을 증축하였고, 다시 헌종 2년(1836)에 2칸을 증축하였으며, 고종 7년(1870)에도 개수공사가 있었다. 그 규모에 대하여는 기록에 자세하지 않아 정확한 것을 알 수 없으나, 지금에 전하는 정전 19칸은 이 때 증축된 것으로 보이며, 결국 이 때 증축된 규모는 2칸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종묘의 제사는 조선시대에 1월, 4월, 7월, 10월(孟月) 상순과 납향에 올렸다. 종묘에는 별묘(別廟)로 영녕전(永寧殿)이 있다.
영녕전은 당시 국왕의 5세 이상의 조상 신위를 봉안하는 사당이다. 그러나 5세 이상의 조상이라 하더라도 공덕이 있는 왕은 백세불천주(百世不遷主)라 하여 현 국왕의 4세 이내와 함께 종묘 정전에 모셨다.
그리고 영녕전이라 이름한 것은 세종 3년(1421)에 처음으로 별묘를 세우고, 세종과 자손이 길이길이 평안하라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세종 원년에 정종이 승하하고 3년상이 지나자 종묘의 신실에 여유가 없어 정종의 신위를 봉안할 곳이 없었다. 이에 예조에서 중국 송나라에서 4조(四祖)를 위하여 별묘를 세우고 봉사한 예에 따라서 따로 사당을 세우고 태조가 추숭한 4조(목·익·도·환조)를 모시는 것이 옳다는 건의를 하게 되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별묘를 정묘 정전 서쪽에 새로 짓고 이를 영녕전이라 하였다.
이 때 이루어진 영녕전은 본전(本殿) 4칸에 동서로 협실 각각 1칸씩이었고 문 · 원(垣) · 계체(階체) 등의 규모는 모두 종묘와 같이 하였다. 그리고 우선 목조의 신위를 영녕전 제1실로 옮겼다.
그 후 추숭된 4조를 모두 영녕전으로 옮기게 되었으나, 연산군 2년에는 종묘 신실의 부족으로 종묘의 익실(협실)에 봉안하였던 정종의 신위를 영녕전의 익실로 옮기게 되었다. 영녕전도 종묘와 함께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불타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26년 후 광해군 즉위년에 재건되었는데, 이 때 재건된 영녕전의 규모는 기록에 자세하지 않아 알 수 없어도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직전의 규모라는 것이 짐작된다. 그렇다고 한다면 명종 원년 동서 협실이 각각 1칸씩 증축된 것으로 추측되어 그것을 합한 본전 4칸에 동서 협실 각각 2칸씩이었던 것이 짐작된다.
조선후기로 내려올수록 조상들의 신위가 늘어나서 영녕전 신실의 부족을 가져왔다. 그리하여 현종 8년(1667)에 동서 협실 각각 2칸씩을 증축하게 되어 모두 본전 4칸에 동서 협실 각각 4칸씩이 되었다. 그 후 자세한 규모는 알 수 없어도 헌종 2년(1836)과 고종 7년(1870) 2차에 걸친 증축을 거쳐 지금에 전하는 본전 4칸, 서협실 6칸, 동협실 5칸이 이루어졌다. 종묘를 지은 지 200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의주로 피난하면서 종묘의 신위를 여러 왕자들에게 옮기도록 하였다.
한편 서울을 점령한 왜군은 궁궐이 모두 불타 버렸으므로 종묘를 서울 주둔군의 사령부로 삼았다. 그러나 종묘에 주둔한 왜군은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다. 그러자 시민들은 모이기만 하면 수군거렸다. “종묘에는 날마다 밤만 되면 신병(神兵)이 나타나 왜병들이 피를 토하고 죽는 다는군.” “어젯밤에도 종묘 안에서 큰 폭음이 낫지 않았나. 그래서 알아보니 왜군들이 많이 폭사했대. 이것도 신병들이 터뜨린 것이 아닐까.” “종묘에는 신령이 있으니 여기를 짓밟은 왜군들을 그냥 둘 리 있겠나.” 이와 같은 이야기가 장안 각처에서 수군거리며 한동안 여러 사람 입에 오르내렸다.
이에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 서울 사령관은 두려운 마음을 금치 못해 종묘에 불을 지르게 하고 남별궁(南別宮)으로 이전하였다. 그 후 종묘의 신위는 병자호란으로 강화도에 이안(移安)하게 되었다. 그 후 종묘에 다시 봉안할 때 없어진 것은 새로 만들었으며 파손된 것은 땅에 묻고 새로 만들어 모셨다.
종묘에 얽힌 일화는 여러 가지 있지만 그 중에 하나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사색당쟁(四色黨爭)이 한참 심하던 조선 후기 -. 밤이 되면 정전 남쪽에 배향한 공신당에서 ‘투다 탁’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도 이상해서 알아보니 당파가 다른 신위끼리 서로 부딪치며 싸우는 소리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조선왕조 500년간 국가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시설물은 종묘와 사직단이었다. 우선 종묘는 역대 왕과 그 왕비 그리고 추숭(追崇)된 왕과 그 왕비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종묘는 국가적으로 중대한 일은 먼저 종묘에 고한 후에 의정부에서 의결하고 시행하였다.
사직단은 국토의 신과 곡식의 신을 모셔 놓고 각각 제사를 지냈던 관계로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당연하였다.
그래서 조선왕조가 일제에게 주권을 빼앗긴 일을 흔히 ‘종묘사직을 잃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종묘는 현재 종로 3가와 4가 사이, 즉 세운상가 건너편 훈정동 1-2에서 와룡동 2-4에 걸친 대지 56,000여 평에 자리잡고 있다. 종묘는 오래 전부터 창경궁과 구름다리로 연결되어 해마다 벚꽃놀이 철이 되면 창경궁에 입장한 관상객(觀賞客)이 몰려들어 붐볐던 곳이다.
태조 이성계는 한양에 도읍하자 마자 건축한 것은 경복궁과 종묘·사직이었다. 그런데 종묘를 이 곳에 짓게 된 연유는 옛부터 묘동사서(廟東社西), 즉 궁궐 동쪽에 종묘, 서쪽에 사직단을 쌓는다는 원칙을 지켰기 때문이다.
태조는 한양에 천도하기 한달 전부터 궁궐·종묘·사직 등을 지을 자리를 정하고, 도로 등을 내는 도시계획을 세워 공작국(工作局)이란 기구를 설치했지만 건설공사는 서두르지 않았다. 이에 의정부에 해당하는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전하, 종묘는 조상을 받들고 효도를 숭상하는 곳이며, 궁궐은 존엄을 모시고 정령(政令)을 반포하는 곳이요, 성곽은 안팎을 엄하게 하고 국가를 견고하게 하는 시설입니다" "·····…" "그런데 전하께서 백성들의 노고를 생각해서 이들 시설을 건설하지 않는 것은 도읍을 중시하지 않는 것이나 근본을 중시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으음·····" "그러므로 전하께서 빨리 종묘, 궁궐, 성곽을 축조하여 조상에 대한 효경(孝敬)을 널리 알리고 백성들에게 존엄을 보이며 국가의 위세를 영원히 견고하게 해야 합니다" 라고 건의하였다.
이 건의를 들은 태조 이성계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내 어찌 도읍의 건설을 소홀하게 생각했으리오. 이제 종묘와 사직, 궁궐을 지을 것이니 지신(地神)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라. 그러나 이 공사에는 백성들을 동원하지 말고 승려들을 동원해서 시행하도록 하라" 고 명하였다. 이 같은 태조의 명에 따라 궁궐과 종묘, 사직을 짓는 기공식은 올렸지만, 건축자재가 미처 준비되지 않아 태조 3년(1394) 음력 12월 3일부터 승려들만 동원하였다.
그러나 인력이 부족하여 결국 각 지방의 장정들은 이듬해 1월부터 2월까지 동원하였다가 농사철이 다가오자 장정들은 일단 귀향시켰다. 하지만 승려들만으로 궁궐을 완공하기가 어려웠으므로 이 해 8월에 경기도와 충청도에서 1만 5천명의 장정을 다시 동원해 공사를 마무리 지음으로써 새 궁궐은 태조 4년(1395) 9월 25일에 준공되고, 종묘와 사직도 거의 완공을 앞두게 되었다.
종묘가 완공되자 개경에 있던 태조의 4대조 신위(神位)를 한양에 옮겨 오도록 하였다. 이때 각 관아의 관원 한 명씩을 뽑아 개경에 보내 신위를 모셔 오게 하였다.
이 신위가 한양에 도착되던 날 조정의 모든 관리들은 공복(公服)을 입고 서대문 밖 반송방(천연동)까지 나아가 맞이하였다. 권근(權近) 등이 모신 네 신위가 북소리 소라소리 가운데 각각 장엄한 모습으로 입성하였다.
신위가 봉안되고 나자, 태조 4년(1395) 10월 5일 태조 이성계는 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종묘에 도착하였다. 이어 종묘 동문 밖에서 4배를 하고, 면류관과 곤룡포로 갈아입고 정전에 나아가 제사를 지냈다.
이때 아헌(亞獻)은 세자가, 종헌(終獻)은 개국공신 김사형이 드렸다. 10월 5일, 새 궁궐과 종묘, 사직단이 완공되자 태조 이성계는 만면에 웃음을 띤 채 백관들을 거느리고 종묘로 향하였다. "오늘 상감마마께서 새로 지어진 궁궐을 돌아보시는 날이래" "그래서 새로 지은 종묘에 나가 제사를 드리기 위해 행차가 있다지 않은가" "그 뿐 아니라 새 궁궐의 준공을 축하하기 위해 죄인을 풀어주는 특사령을 반포하고, 문무백관들은 새 궁궐에 초청하여 큰 연회를 연다는군" 태조 이성계는 새 궁궐에서 베푼 연회석상에서 궁궐공사에 공이 큰 신하들에게 상을 내리고, 특히 도시계획을 담당했던 정도전(鄭道傳)에게는 금으로 장식한 각대(角帶) 하나를 하사하였다.
제사를 마친 태조 이성계는 수레를 타고 시가에 거둥하였다. 이때 성균관 박사가 학생들을 인솔하고 나와 조선 건국과 한양 천도, 종묘 이전을 경축하는 노래를 지어 읊었다. 그리고 운종가(雲從街)에 이르렀을 때에는 장악원(掌樂院) 소속 여자 악사(기생)들이 노래를 부르고 재주를 피우니 일대 장관이었다.
태조는 이에 수레를 도중에 세 번이나 멈추어 가면서 관람하였다. 태조가 환궁하자 여자 악사들이 전정까지 나와 다시 축하를 드렸다. 이때 신덕왕후 강씨도 발을 내리고 이를 즐겨 관람하였다. 이 축하행사는 조선 건국 후 최초 최대의 경축식이었으며 가두 경축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태조 때 세워진 종묘는, 정전(태실) 7칸으로 그 안에 석실 5칸을 마련하였고, 그 좌우에 익실(翼室, 협실) 각각 2칸씩, 공신당(功臣堂) 5칸, 신문(神門) 3칸, 동문 3칸, 서문 1칸으로 되어 있어 모두 담장 안에 있었다.
담장 밖에는 신주(神廚) 7칸, 향관청(享官廳) 5칸, 좌우 행랑 각각 5칸씩, 남행랑 9칸, 재궁(齋宮, 전) 5칸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후세로 내려올수록 종묘에 모실 분이 많아져 명종 원년(1546)에 정전 4칸을 증축하게 되어 태실은 모두 11칸이 되었다.
그런데 종묘는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에 왜군에 의해 모두 불타고 말았다. 종묘의 재건은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하고 시급한 것이었다.
그러나 전후의 경제난과 사회적인 불안은 그것을 뒷받침하여 주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불탄 지 26년 만인 광해군 즉위년(1608)에 재건되었다. 재건된 종묘는 불타기 직전의 규모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또다시 신실(神室)이 부족해지자 영조 2년(1726)에 정전 4칸을 증축하였고, 다시 헌종 2년(1836)에 2칸을 증축하였으며, 고종 7년(1870)에도 개수공사가 있었다. 그 규모에 대하여는 기록에 자세하지 않아 정확한 것을 알 수 없으나, 지금에 전하는 정전 19칸은 이 때 증축된 것으로 보이며, 결국 이 때 증축된 규모는 2칸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종묘의 제사는 조선시대에 1월, 4월, 7월, 10월(孟月) 상순과 납향에 올렸다. 종묘에는 별묘(別廟)로 영녕전(永寧殿)이 있다.
영녕전은 당시 국왕의 5세 이상의 조상 신위를 봉안하는 사당이다. 그러나 5세 이상의 조상이라 하더라도 공덕이 있는 왕은 백세불천주(百世不遷主)라 하여 현 국왕의 4세 이내와 함께 종묘 정전에 모셨다.
그리고 영녕전이라 이름한 것은 세종 3년(1421)에 처음으로 별묘를 세우고, 세종과 자손이 길이길이 평안하라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세종 원년에 정종이 승하하고 3년상이 지나자 종묘의 신실에 여유가 없어 정종의 신위를 봉안할 곳이 없었다. 이에 예조에서 중국 송나라에서 4조(四祖)를 위하여 별묘를 세우고 봉사한 예에 따라서 따로 사당을 세우고 태조가 추숭한 4조(목·익·도·환조)를 모시는 것이 옳다는 건의를 하게 되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별묘를 정묘 정전 서쪽에 새로 짓고 이를 영녕전이라 하였다.
이 때 이루어진 영녕전은 본전(本殿) 4칸에 동서로 협실 각각 1칸씩이었고 문 · 원(垣) · 계체(階체) 등의 규모는 모두 종묘와 같이 하였다. 그리고 우선 목조의 신위를 영녕전 제1실로 옮겼다.
그 후 추숭된 4조를 모두 영녕전으로 옮기게 되었으나, 연산군 2년에는 종묘 신실의 부족으로 종묘의 익실(협실)에 봉안하였던 정종의 신위를 영녕전의 익실로 옮기게 되었다. 영녕전도 종묘와 함께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불타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26년 후 광해군 즉위년에 재건되었는데, 이 때 재건된 영녕전의 규모는 기록에 자세하지 않아 알 수 없어도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직전의 규모라는 것이 짐작된다. 그렇다고 한다면 명종 원년 동서 협실이 각각 1칸씩 증축된 것으로 추측되어 그것을 합한 본전 4칸에 동서 협실 각각 2칸씩이었던 것이 짐작된다.
조선후기로 내려올수록 조상들의 신위가 늘어나서 영녕전 신실의 부족을 가져왔다. 그리하여 현종 8년(1667)에 동서 협실 각각 2칸씩을 증축하게 되어 모두 본전 4칸에 동서 협실 각각 4칸씩이 되었다. 그 후 자세한 규모는 알 수 없어도 헌종 2년(1836)과 고종 7년(1870) 2차에 걸친 증축을 거쳐 지금에 전하는 본전 4칸, 서협실 6칸, 동협실 5칸이 이루어졌다. 종묘를 지은 지 200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의주로 피난하면서 종묘의 신위를 여러 왕자들에게 옮기도록 하였다.
한편 서울을 점령한 왜군은 궁궐이 모두 불타 버렸으므로 종묘를 서울 주둔군의 사령부로 삼았다. 그러나 종묘에 주둔한 왜군은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다. 그러자 시민들은 모이기만 하면 수군거렸다. “종묘에는 날마다 밤만 되면 신병(神兵)이 나타나 왜병들이 피를 토하고 죽는 다는군.” “어젯밤에도 종묘 안에서 큰 폭음이 낫지 않았나. 그래서 알아보니 왜군들이 많이 폭사했대. 이것도 신병들이 터뜨린 것이 아닐까.” “종묘에는 신령이 있으니 여기를 짓밟은 왜군들을 그냥 둘 리 있겠나.” 이와 같은 이야기가 장안 각처에서 수군거리며 한동안 여러 사람 입에 오르내렸다.
이에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 서울 사령관은 두려운 마음을 금치 못해 종묘에 불을 지르게 하고 남별궁(南別宮)으로 이전하였다. 그 후 종묘의 신위는 병자호란으로 강화도에 이안(移安)하게 되었다. 그 후 종묘에 다시 봉안할 때 없어진 것은 새로 만들었으며 파손된 것은 땅에 묻고 새로 만들어 모셨다.
종묘에 얽힌 일화는 여러 가지 있지만 그 중에 하나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사색당쟁(四色黨爭)이 한참 심하던 조선 후기 -. 밤이 되면 정전 남쪽에 배향한 공신당에서 ‘투다 탁’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도 이상해서 알아보니 당파가 다른 신위끼리 서로 부딪치며 싸우는 소리였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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