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1호,
숭례문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태조 이성계는 경복궁을 짓고 나자 두 차례에 걸쳐 20만 명의 장정을 동원하여 도성(都城)을 쌓았다.
이때 도성과 성문(城門)은 완공되었으나 성문 위에 누각은 미처 이루지를 못하였다.
{태조실록}을 보면, 도성에는 숭례문, 돈의문, 홍인문, 숙정문, 홍화문(후의 혜화문), 광희문, 소덕문(후의 소의문), 창의문 등 8개의 성문을 설치하기로 되어 있다.
그러나 8개의 성문 중에서 현재 남아 있는 성문은 남대문(숭례문), 동대문(흥인문), 숙정문, 창의문, 광희문 등 5개뿐이고, 최근에 서울시에서 혜화문을 복원하였다. 남대문의 원명은 숭례문으로서 이는 '동방예의지국'을 나타낸 이름이다.
그런데 남대문의 현판(懸板) 글씨를 세로로 쓴 데에는 어떤 사연이 깃들인 것으로 전해 온다. "여보게, 저기 보이는 숭례문의 현판을 세로로 쓴 특별한 이유가 있다던데 혹시 자네 알고 있나." "글쎄, 그거야 예(禮)를 숭상하는 문이라는 뜻에서 공손하게 표현한 것이 아닐까." "내가 듣기로는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관악산이 화산(火山)이므로 도성 안의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서 숭례문의 현판을 세로로 세워 놓았다는 구만" "도성 안의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서 현판 글씨를 세로로 썼다니…." "그러니까, 음양오행설에 따르면 '예(禮)'자는 불(火)에 해당되고, 불은 남쪽을 표시하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막으려면 숭례문 현판을 세로로 세워 놓아 불을 일으키면 맞불을 놓은 격이 되어 불길을 잡을 수 있다는 거지." 이처럼 남대문의 현판에 대해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 오지만, 이 현판 글씨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다.
먼저 태종 때 명필이던 공조참판 암헌 신색(申穡)이 숭례문의 현판 글씨를 썼다고도 하고, 중종 때 공조판서를 지낸 죽당 유진동(柳辰同)이 썼다고 하는 주장도 있으나 세종의 맏형 양녕대군의 글씨로 보는 이가 많다.
이 현판이 6·25전쟁 때 일부 손상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 이 현판이 임진왜란 중에 사라졌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 써서 달았더니 다는 대로 현판이 떨어지므로 모든 사람들이 의아하게 여겼다고 전해 온다.
한편, 순조 때 씌어진 {한경지략(漢京識略)}에 의하면 광해군 때 청파동의 배다리(舟橋) 밑 웅덩이 속에서 밤에 서광(曙光)이 비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서 파 보았더니 남대문 현판이 나왔으므로 다시 남대문에 걸었다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남대문을 들어서면 광화문이 정면으로 보이는 까닭에 서울을 주택으로 비유하면 남대문은 대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문은 현존하는 성문 중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데다가 조선 500년 문화의 상징적인 존재이며, 겹문루〔重層門樓〕건물로는 대표적인 건축물로 꼽히기 때문에 국보 제 1 호로 지정된 것이다.
남대문이 겹문루를 갖춘 것은 그 후의 일로서 당시 건축 기술이 능숙한 승군(僧軍)을 동원하여 2년 만인 태조 7년(1398)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남대문은 그 지대가 낮아 볼품이 없고, 또 풍수지리설에 연루되어 있었으므로 세종 15년(1433) 7월에 세종이 영의정 황희와 좌의정 맹사성 및 우의정 권진(權軫)을 불러 여러 가지 국정을 의논할 때, 세종은 "나의 생각으로는 남대문이 저렇게 낮고 평평한 것은 처음에 땅을 파서 평평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그 땅을 높게 돋우어서 산맥에 연결하게 하고 그 위에 문을 세우는 것이 어떤가" 하고 대신들에게 묻자, 황희 이하 모든 대신들이 모두 찬성하므로 곧 공사를 착수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때 남대문 공사뿐만 아니라 남대문 외지의 석축 등 수 많은 공사를 병행하게 되었으므로,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일시에 기공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즉 앞으로 풍년 때마다 하나씩 기공하여 백성들의 부역을 줄이도록 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남대문을 새로 짓는 공사는 뒤로 미루어 15년 후인 세종 29년(1447) 8월에 착공하였다.
이 때의 공사는 좌참찬(左參贊) 정분이 담당하였다. 이 때 남대문의 문루(門樓)와 홍예문을 완전히 헐어 내고 그 지대를 높게 돋우어 양쪽 산맥에 연결시킨 다음 그 위로 새로 홍예문을 내고 문루를 건축하였다. 따라서 이 공사는 보수나 중수가 아니라 완전한 신축이었다. 그런데 이 공사는 세종 29년 8월에 시작하였으나, 그 해 11월에 날씨가 매우 추우므로 공사를 중지하였다. 그래서 이듬해 즉 세종 30년 봄에 다시 공사를 계속하였다.
준공 날짜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으나, 세종 30년(1448) 5월에 「가뭄으로 모든 공사를 중지할 때 남대문 공사는 이미 완성을 고하게 되었으므로 혁파하지 아니하였다」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해 5월에 준공된 듯하다. 그로부터 32년이 지난 성종 때, 기초가 약했던지 남대문이 기울었다. 이때 남대문도 동대문처럼 옹성(甕城)을 쌓도록 채수(蔡壽)와 좌승지 김승경(金升卿) 등이 건의했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성종 9년(1478) 3월 20일에 우승지 박숙진이 아뢰기를 "옛 사람들이 말하기를 백성을 부릴 때에는 시기를 가려야 한다고 하였으며, {춘추(春秋)}에도 불시에 백성을 부리는 것을 비방하였습니다. 지금부터 농사가 한창인데 남대문을 중수(重修)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문이 크게 기울어지지도 아니하였으며, 또 공사를 일으킬 때도 아닙니다." 라고 하니, 세종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다만 이 문이 심히 기울어졌기 때문에 중수하라고 한 것이다. 명일 다시 조사하여 만일 심히 기울어지지 아니하였다면 정지하겠다." 라고 하였다.
이 당시 우승지 박숙진이 농사철을 이유로 반대도 하였지만, 또 다른 공사도 있으므로 남대문 중수를 착공하지 않았다. 이듬해, 즉 성종 10년(1479)에 남대문을 중수하였는데, 성종실록에는 이 해 1월에 장차 숭례문을 중수한다는 말이 있을 뿐이고, 착공 및 준공에 대한 기사는 없으나, 최근에 발견된 남대문 대들보에 씌어진 글로 미루어 성종 10년 4월 2일에 기둥을 세워 대들보를 올린 것이 확실하고, 준공은 5월쯤으로 보인다. 성종 10년에 중수한 남대문은 1962년까지 500여 년을 지나는 동안 월단(月團)의 석재 가운데 풍화작용으로 부서진 데다가 6·25전쟁 때에도 손상을 입었다.
이에 군사정부에서 1961년부터 1963년까지 문루와 홍예를 헐어서 중수하였다. 그러나 부서진 석재와 썩은 목재만 새 것으로 갈고, 다른 것은 모두 옛날 것을 그대로 사용하여, 옛날의 설계 그대로 복원하였다.
융희 1년(1907) 8월 1일 -. 이 날은 일제가 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킨 날이다. 이날 해산식에 불참하고 국운을 염려하여 비탄 속에 잠겼던 박성환(朴星煥) 대대장은 해산 명령을 전해 듣고, '군인으로서 굴욕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하여 차고 있던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이 광경을 목격한 부하 장병들은 분연히 궐기하여 탄약고를 부순 뒤, 무기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오자 다른 부대들도 이에 호응하였다. 이들은 남대문을 중심으로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이며 용전하였다.
그러나 기관총 등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적수가 못되어 200여 명이 사상하고, 500여 명이 잡혔다. 결국 군대는 강제 해산되었지만 500년 조선왕조의 상징인 남대문을 의지해서 최후까지 일제 침략군과 싸운 군인 정신이야말로 남대문과 함께 길이 남을 것이다.
한편,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시키고 통감(統監)이 된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융희 2년(1908)에 일본 왕세자(후일 明治)를 조선에 초청하였다. 이때 일제는 일본의 왕세자가 남대문을 통과해서 서울에 들어올 수 없다고 결정하고 대포로 남대문을 허물어 버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치자, 이를 부숴 버리지 못하고 남대문의 서쪽 성벽을 헐어 내고 도로를 냈다.
그 이듬해에는 동쪽, 즉 남산 쪽으로 연결된 성벽도 헐어 냄으로써 남대문은 날개를 잃은 새 모양 외롭게 서 있게 되었다. 한편, 전에는 남대문, 서대문, 동대문밖에 연못을 파서 각기 남지(南池), 서지(西池), 동지(東池)라고 불렀다. 특히, 남지는 연꽃이 유명하여 연지(蓮池)라고 칭했다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씌어 있다.
성종 때 한명회(韓明澮)는, "조선 초에 연못을 파서 도성의 화기(火氣)를 진압하게 하였다." 라는 말을 했으므로 연못을 판 이유는 화재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조 헌종 때 이규경이 지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를 보면, [남지(南池)가 폐기되고 물이 말라서 그 터만 남아 있다. 순조 23년(1823) 늦은 봄과 초여름 사이에 남대문밖에 사는 사람들과 돈과 쌀을 거두어 남지를 쳐내고, 물을 담아 옛모습을 다시 찾게 되었다.
이 당시 떠도는 말에 의하면 남인(南人)의 영수인 허목(許穆)이 대신이 되었을 때 이 연못을 쳐냈는데 지금 또 쳐낸다고들 하였다. 더구나 기이한 것은 그 날 남인인 채제공(蔡濟恭)이 복직되고, 또 남인으로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4명이나 되었다.] 는 기록을 보아 그 당시 붕당정치가 심할 때 남지가 남인의 득세와 연관이 있음을 시사(示唆)하는 것으로 보인다.
숭례문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태조 이성계는 경복궁을 짓고 나자 두 차례에 걸쳐 20만 명의 장정을 동원하여 도성(都城)을 쌓았다.
이때 도성과 성문(城門)은 완공되었으나 성문 위에 누각은 미처 이루지를 못하였다.
{태조실록}을 보면, 도성에는 숭례문, 돈의문, 홍인문, 숙정문, 홍화문(후의 혜화문), 광희문, 소덕문(후의 소의문), 창의문 등 8개의 성문을 설치하기로 되어 있다.
그러나 8개의 성문 중에서 현재 남아 있는 성문은 남대문(숭례문), 동대문(흥인문), 숙정문, 창의문, 광희문 등 5개뿐이고, 최근에 서울시에서 혜화문을 복원하였다. 남대문의 원명은 숭례문으로서 이는 '동방예의지국'을 나타낸 이름이다.
그런데 남대문의 현판(懸板) 글씨를 세로로 쓴 데에는 어떤 사연이 깃들인 것으로 전해 온다. "여보게, 저기 보이는 숭례문의 현판을 세로로 쓴 특별한 이유가 있다던데 혹시 자네 알고 있나." "글쎄, 그거야 예(禮)를 숭상하는 문이라는 뜻에서 공손하게 표현한 것이 아닐까." "내가 듣기로는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관악산이 화산(火山)이므로 도성 안의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서 숭례문의 현판을 세로로 세워 놓았다는 구만" "도성 안의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서 현판 글씨를 세로로 썼다니…." "그러니까, 음양오행설에 따르면 '예(禮)'자는 불(火)에 해당되고, 불은 남쪽을 표시하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막으려면 숭례문 현판을 세로로 세워 놓아 불을 일으키면 맞불을 놓은 격이 되어 불길을 잡을 수 있다는 거지." 이처럼 남대문의 현판에 대해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 오지만, 이 현판 글씨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다.
먼저 태종 때 명필이던 공조참판 암헌 신색(申穡)이 숭례문의 현판 글씨를 썼다고도 하고, 중종 때 공조판서를 지낸 죽당 유진동(柳辰同)이 썼다고 하는 주장도 있으나 세종의 맏형 양녕대군의 글씨로 보는 이가 많다.
이 현판이 6·25전쟁 때 일부 손상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 이 현판이 임진왜란 중에 사라졌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 써서 달았더니 다는 대로 현판이 떨어지므로 모든 사람들이 의아하게 여겼다고 전해 온다.
한편, 순조 때 씌어진 {한경지략(漢京識略)}에 의하면 광해군 때 청파동의 배다리(舟橋) 밑 웅덩이 속에서 밤에 서광(曙光)이 비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서 파 보았더니 남대문 현판이 나왔으므로 다시 남대문에 걸었다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남대문을 들어서면 광화문이 정면으로 보이는 까닭에 서울을 주택으로 비유하면 남대문은 대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문은 현존하는 성문 중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데다가 조선 500년 문화의 상징적인 존재이며, 겹문루〔重層門樓〕건물로는 대표적인 건축물로 꼽히기 때문에 국보 제 1 호로 지정된 것이다.
남대문이 겹문루를 갖춘 것은 그 후의 일로서 당시 건축 기술이 능숙한 승군(僧軍)을 동원하여 2년 만인 태조 7년(1398)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남대문은 그 지대가 낮아 볼품이 없고, 또 풍수지리설에 연루되어 있었으므로 세종 15년(1433) 7월에 세종이 영의정 황희와 좌의정 맹사성 및 우의정 권진(權軫)을 불러 여러 가지 국정을 의논할 때, 세종은 "나의 생각으로는 남대문이 저렇게 낮고 평평한 것은 처음에 땅을 파서 평평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그 땅을 높게 돋우어서 산맥에 연결하게 하고 그 위에 문을 세우는 것이 어떤가" 하고 대신들에게 묻자, 황희 이하 모든 대신들이 모두 찬성하므로 곧 공사를 착수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때 남대문 공사뿐만 아니라 남대문 외지의 석축 등 수 많은 공사를 병행하게 되었으므로,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일시에 기공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즉 앞으로 풍년 때마다 하나씩 기공하여 백성들의 부역을 줄이도록 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남대문을 새로 짓는 공사는 뒤로 미루어 15년 후인 세종 29년(1447) 8월에 착공하였다.
이 때의 공사는 좌참찬(左參贊) 정분이 담당하였다. 이 때 남대문의 문루(門樓)와 홍예문을 완전히 헐어 내고 그 지대를 높게 돋우어 양쪽 산맥에 연결시킨 다음 그 위로 새로 홍예문을 내고 문루를 건축하였다. 따라서 이 공사는 보수나 중수가 아니라 완전한 신축이었다. 그런데 이 공사는 세종 29년 8월에 시작하였으나, 그 해 11월에 날씨가 매우 추우므로 공사를 중지하였다. 그래서 이듬해 즉 세종 30년 봄에 다시 공사를 계속하였다.
준공 날짜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으나, 세종 30년(1448) 5월에 「가뭄으로 모든 공사를 중지할 때 남대문 공사는 이미 완성을 고하게 되었으므로 혁파하지 아니하였다」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해 5월에 준공된 듯하다. 그로부터 32년이 지난 성종 때, 기초가 약했던지 남대문이 기울었다. 이때 남대문도 동대문처럼 옹성(甕城)을 쌓도록 채수(蔡壽)와 좌승지 김승경(金升卿) 등이 건의했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성종 9년(1478) 3월 20일에 우승지 박숙진이 아뢰기를 "옛 사람들이 말하기를 백성을 부릴 때에는 시기를 가려야 한다고 하였으며, {춘추(春秋)}에도 불시에 백성을 부리는 것을 비방하였습니다. 지금부터 농사가 한창인데 남대문을 중수(重修)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문이 크게 기울어지지도 아니하였으며, 또 공사를 일으킬 때도 아닙니다." 라고 하니, 세종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다만 이 문이 심히 기울어졌기 때문에 중수하라고 한 것이다. 명일 다시 조사하여 만일 심히 기울어지지 아니하였다면 정지하겠다." 라고 하였다.
이 당시 우승지 박숙진이 농사철을 이유로 반대도 하였지만, 또 다른 공사도 있으므로 남대문 중수를 착공하지 않았다. 이듬해, 즉 성종 10년(1479)에 남대문을 중수하였는데, 성종실록에는 이 해 1월에 장차 숭례문을 중수한다는 말이 있을 뿐이고, 착공 및 준공에 대한 기사는 없으나, 최근에 발견된 남대문 대들보에 씌어진 글로 미루어 성종 10년 4월 2일에 기둥을 세워 대들보를 올린 것이 확실하고, 준공은 5월쯤으로 보인다. 성종 10년에 중수한 남대문은 1962년까지 500여 년을 지나는 동안 월단(月團)의 석재 가운데 풍화작용으로 부서진 데다가 6·25전쟁 때에도 손상을 입었다.
이에 군사정부에서 1961년부터 1963년까지 문루와 홍예를 헐어서 중수하였다. 그러나 부서진 석재와 썩은 목재만 새 것으로 갈고, 다른 것은 모두 옛날 것을 그대로 사용하여, 옛날의 설계 그대로 복원하였다.
융희 1년(1907) 8월 1일 -. 이 날은 일제가 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킨 날이다. 이날 해산식에 불참하고 국운을 염려하여 비탄 속에 잠겼던 박성환(朴星煥) 대대장은 해산 명령을 전해 듣고, '군인으로서 굴욕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하여 차고 있던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이 광경을 목격한 부하 장병들은 분연히 궐기하여 탄약고를 부순 뒤, 무기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오자 다른 부대들도 이에 호응하였다. 이들은 남대문을 중심으로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이며 용전하였다.
그러나 기관총 등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적수가 못되어 200여 명이 사상하고, 500여 명이 잡혔다. 결국 군대는 강제 해산되었지만 500년 조선왕조의 상징인 남대문을 의지해서 최후까지 일제 침략군과 싸운 군인 정신이야말로 남대문과 함께 길이 남을 것이다.
한편,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시키고 통감(統監)이 된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융희 2년(1908)에 일본 왕세자(후일 明治)를 조선에 초청하였다. 이때 일제는 일본의 왕세자가 남대문을 통과해서 서울에 들어올 수 없다고 결정하고 대포로 남대문을 허물어 버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치자, 이를 부숴 버리지 못하고 남대문의 서쪽 성벽을 헐어 내고 도로를 냈다.
그 이듬해에는 동쪽, 즉 남산 쪽으로 연결된 성벽도 헐어 냄으로써 남대문은 날개를 잃은 새 모양 외롭게 서 있게 되었다. 한편, 전에는 남대문, 서대문, 동대문밖에 연못을 파서 각기 남지(南池), 서지(西池), 동지(東池)라고 불렀다. 특히, 남지는 연꽃이 유명하여 연지(蓮池)라고 칭했다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씌어 있다.
성종 때 한명회(韓明澮)는, "조선 초에 연못을 파서 도성의 화기(火氣)를 진압하게 하였다." 라는 말을 했으므로 연못을 판 이유는 화재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조 헌종 때 이규경이 지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를 보면, [남지(南池)가 폐기되고 물이 말라서 그 터만 남아 있다. 순조 23년(1823) 늦은 봄과 초여름 사이에 남대문밖에 사는 사람들과 돈과 쌀을 거두어 남지를 쳐내고, 물을 담아 옛모습을 다시 찾게 되었다.
이 당시 떠도는 말에 의하면 남인(南人)의 영수인 허목(許穆)이 대신이 되었을 때 이 연못을 쳐냈는데 지금 또 쳐낸다고들 하였다. 더구나 기이한 것은 그 날 남인인 채제공(蔡濟恭)이 복직되고, 또 남인으로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4명이나 되었다.] 는 기록을 보아 그 당시 붕당정치가 심할 때 남지가 남인의 득세와 연관이 있음을 시사(示唆)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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