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탑과 다보탑의 수난사
1. 석가탑
석가탑과 다보탑은 그 명성에 걸맞는 역사적 배경과 아름다운 자태를 지닌 까닭에
근대로 접어들면서 들어서면서 도굴범에 의한 약탈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 땅에
둥지를 틀고 살아왔던 우리의 조상들은 사찰내에 있는 유물에 손을 댄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들은 바로 신앙이요, 생활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땅을 36년간 강점했던 일본인에게는 한낮 골동품에 불과했다.
그들의 눈에는 오랫동안 우리를 지켜주었고, 보호받아왔던 유물이 단순히 진귀하고
값나가는 물건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때문에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수많은 우리의
문화유산이 이들에 의해 도굴되고, 일본으로 불법 반출되는 일이 허다하였다.
이같은 사정은 불국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불국사의 유물 중 일본인들의 주목들 받았던 것은 다보탑이었다. 이에 반해 석가탑은
그리 주목을 받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도 외형에서 주는 멋이 석가탑은
다른 일반형석탑과 같은 양식임에 비해 다보탑은 완전히 다른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때문에 일본인들은 다보탑을 철저히 유린했다. 이후 해방된
이 땅에서는 석가탑에 대한 도굴이 자행되었다. 비록 미수에 그친 사건이었지만,
탑내에서 수습된 유물로 보아 ‘만약 이들이 도굴범의 수중에 들어갔더라면’
하는 상상은 우리를 몸서리치게 한다. 도굴이 성사되었다면,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통해 세계최초로 금속활자를 사용했던 사실은 물론, 이를 통해 석가탑은 물론
불국사가 지닌 성격, 사리용기를 통해 당시 금속공예의 수준을 알 수 있는 자료의
확보는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었다 해도 지나침이 없으리라.
이렇듯 우리의 문화유산 중 수위(首位)에 자리할 수 잇는 가치를 지닌 다보탑과
석가탑은 일본인과 내국인에 의해 유린당하는 수난을 겪어왔다. 이 장에서는
양 탑이 지닌 수난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석가탑
750년경에 건립되어 일제강점기에도 무사했던 석가탑은 1966년에 이르러 일대
위기를 맞이했다. 일제로부터 도굴의 기법을 전수 받은 이 땅의 도굴범들은 불국사에
침입하여 석가탑을 도굴하고자 했다. 이들에게도 석가탑은 우리가 지키고 보존해야
할 문화유산이 아니라 그저 돈 나가는 물건이 들어있을 도굴의 대상이었다.
당시 중앙과 지방지에서 이 사실을 크게 보도하였다. 당시 각종 신문의 지면을
차지했던 석가탑 관련 기사의 내용은 정영호교수에 의해 정리되어 전체적인 내용이
소개된 바 있는데(韓國精神文化硏究院, 『佛國寺三層石塔 舍利具와 文武大王海中陵
』, 1997) 이를 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千年을 살아온 국보21호 석가탑에 이유 모를 상처가 생겼다. 신라시대 佛塔(불탑)의
진수이며 일명 무영탑으로 불려 왔고 아사달과 아사녀의 이야기 등 수많은 전설을 안은
석가탑이 6일 탑신이 갑자기 세 군데나 깨어지고 금이 갔다. 6일 오후 2시쯤 경주
불국사 경내에서 범영루 보수공사를 하고 있던 한 감독이 석가탑에 이상이 있음을 발견
하여 곧 경주시 교육청에 알렸다. 경주 교육청에서는 현장에 나가 2층 탑신의 서편이
사방 1자 가량 떨어져 나가고 3층 탑신에 금이 생겼으며 3층 동쪽 탑신의 모서리에 파편
조각처럼 여러 군데가 떨어져나간 것을 밝혀냈을 뿐 석가탑 상처의 확실한 원인을 규명
하지 못하고 있다. 귀중한 탑에 흠이 갔으나 현지 교육청은 아직 버팀대를 괼 단계는
아니라고 말하고 탑신과 기단석을 서로 이은 쇠로 된 쐐기가 삭아서 탑신의 중력이
기울었고 오랜 풍화작용과 300여년전 임진왜란 때 불탄 영향으로 생겼던 상처가 뒤늦게
작용한 것이 아닌가 보고 있다. 현지 교육청은 망치로 때려 떨어진 것처럼 생긴
석가탑의 돌 조각을 불국사에 보관중이다. 이러한 보고를 받은 도교육위원회는
7일 문교부의 감독관과 문화재위원 및 특수기술자의 파견을 긴급 요청하고 金判永
교육감이 현지에 나갔다. 교육위원회 당국자는 전에는 이상이 없었던 것인데 이번에
갑자기 이 같은 이상이 생겼다고 말하면서 완전보수를 하려면 2층 이상은 해체,
복원공사를 해야 될 것 같다고 했다.
불국사 대웅전 앞에 있는 국보 제21호 석가탑(일명 무영탑)이 지난 8월 29일 밤
동해남부 일대에 있었던 미진(2도 가량)으로 흔들려 탑이 6도 가량 남쪽으로
기울어졌으며, 탑신 4개처가 떨어지고 2층갑석 하단부가 균열되었음이 8일 현지조사에
서 돌아온 도교육위원회 직원에 의해 밝혀졌다.
불국사 대웅전 오른쪽에 있는 국보 제21호 불국사 3층석탑인 석가탑이 지난 8월 29일에
있었던 지진으로 심한 균열이 생기고 약 7도 가량 서남쪽으로 기울어져 도괴직전에
있음이 6일 뒤늦게 발견되어 金判永 도교육감이 현지를 답사하고 이의 해체 복원을
문교부에 긴급 요청하였다.
위의 내용을 보아 도굴 즉시 석가탑이 훼손된 사실이 알려졌고, 이는 지진에 의한
것이라는 미온적인 결론에 도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석탑의 훼손 사실은
알았지만, 아무도 도굴범이 석탑에 손을 댄 사실은 상상도 못하고 있다.
단순히 지진으로 인한 피해라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같은 추론은 민족의
정서로 보아 당연한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누가 민족의 보배인 석가탑을 도굴할
것이라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러나 이내 상황은 반전된다. 다음의 기사
내용을 보자.
불국사의 석가탑 훼손 사항을 조사한 문화재위원 황수영(동국대) 교수는 사흘동안의
현지조사를 마치고 12일 귀경했다. 황교수는 훼손의 원인은 사리장치를 노린 탑
도둑의 짓이라는 조사결론을 문화재관리국에 보고하였다. 황교수는 이번 일이
처음부터 탑 도둑의 짓으로 여겨졌다고 말하면서 관계자들에게는 너무나 유명한 탑
도둑단인 ‘경상도파’의 짓이 아닌가 의심이 간다고 말했다. 황교수는 피해상황에
비추어 사리장치가 실제로 도둑맞을 가능성은 작은 것 같다고 비쳤다. 황교수가 말하는
조사경위와 그 결과는 대략 다음과 같다.
석가탑 훼손 소식이 처음 들린 것은 7일 경주박물관의 전화를 받았을 때였다. 황교수는
9일 온전한 탑을 본지 한달 만에 상처입은 탑을 다시 보았다. 처음의 조사대상은 10여개
의 파편이었다. 1층 탑신에서 3개, 2층 탑신에서 3개, 3층 탑신에서 4개가 떨어졌는데
떨어진 파편 중 큰 것은 60㎝ 길이에 두께가 3㎝였다. 이 파편에서는 풍화(風化)로 인한
자해(自解)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 석재인 화강암은 풍화가 있으면 그 속의 철분
(雲母)에 녹이나 누렇게 변색하는데 파편은 새하얗다. 또 지진이 아니라는 증거는
불국사의 기왓장이 성하고 기와공사중인 자하문에서 흙 한 점 떨어지지 않았다는 상식
적인 것 말고도 각층 탑신이 다 움직였는데 2층의 기단부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잡았다. 탑을 실측하는 데만 이틀이 걸렸다. 그 결과 1층 옥개석이 남쪽으로
2.5㎝, 2층 탑신이 남쪽으로 4㎝, 3층의 옥개석은 북쪽으로 4㎝ 어긋난 사실을
확인했다. 높이 7.8㎝, 3cm까지 7m를 오르내리기에는 사다리가 필요했다. 바로 탑
앞쪽의 자하문 공사장 사다리 3개를 손쉽게 쓸 수가 있었다. 공사장에는 소형
재키도 있었다.
추리는 너무나 당연했다. 8원 29일의 미진(微震), 1개월이나 걸린 경주지방 초유의 개수
공사, 이 우연을 경상도 일대 산간의 탑 1천 3백여개를 다 뒤졌다는 실력파요 요즘에는
재키까지 들고 다닌다는 ‘경상도파’가 캐치했다면...... 탑을 들면 약간 뒤로
물러난다. 이것은 숱한 탑을 보수한 황교수가 체험으로 터득한 바이다. 그렇다면
각층이 어긋난 반대쪽에 재키를 대고 든 것이다. 그 쪽에는 재키를 대었던 것같은
흠집이 나 있다. 그리고 가장 무거운 1층 옥개석의 어긋남이 적은 것으로 보아 재키는
크지 않았으며 솜씨가 익숙했음에 틀림이 없다.
범행의 추리는 윗층부터 차례로 들어 사리장치를 찾았다는 것. 그러나 황교수는 사리는
건재하다는 심증이 있는 듯이 말한다. 그 까닭을 황교수는 공언하기를 꺼렸는데 사리장
치는 탑신 중 도둑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다는 것처럼 들렸다. 그리고 익숙한
도둑이 사리장치를 놓쳤다면 그 까닭은 사리봉안처를 정하는 데 정법(正法)이 없다는
데에도 있다고 말했다.
위의 가사 내용을 보면 지진에 의한 피해로부터 도굴로 인한 석탑의 훼손으로 상황이
반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지를 조사했고, 훼손된 부재를 통해 도굴범에 의한
소행이라 결론을 내렸던 황수영선생님. 아마 선생님의 석탑에 대한 예리한 관찰과
통찰력이 아니었더라면 아마도 석가탑과 그 안에 봉안되어 있던 각종 사리장치는
영영 우리의 곁을 떠났을 지도 모른다. 아울러 사리장치는 안전할 것이라는 선생님의
예측은 정확히 맞았다. 1966년 9월 30일에 개최된 ?피해문화재 수습대책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10월 13일에 석가탑에 대한 해체작업이 착수되었고, 이 날 도굴범이 노리
던 사리장치가 2층탑신석에 마련된 사리공에서 수습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후 황수영선생님의 예측대로 석가탑을 도굴했던 일당이 검거되어 이 사건이 전모가
공표되었다 . 당시 신문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석가탑 도굴범 구속, 일당 7명 - 6회에 걸쳐 유명 사찰서 8백만원어치 : 18일밤 서울
시경은 불국사 석가탑을 비롯 고적의 탑과 분묘를 도굴해오던 전문도굴단 주범 김준철
(45세, 경주시 배반동), 윤사만(40세, 경주시 배반동), 유태웅(27세, 월성군 내남면 노곡
리), 주종수(34세, 대구시 대신동) 등 일당 7명을 절도혐의로 구속하고 도굴공범 李모
(30세), 申모(34세) 등 6명을 지명수배했다. 주범인 김 등은 지난 3일밤 ‘경북 여2009
’ 택시를 대절, 불국사에 도착하여 미리 준비했던 재키로 석가탑 2번 탑신을 끌어올렸
으나 보물을 발견 못해 실패 다시 5일밤에 3번 탑신을 끌어올렸으나 역시 보물이 없어
미수에 그쳤다. 이들은 또한 3월초 경주시 남산의 절터를 도굴, 5치(寸) 짜리 순금불상
등 2점을 골동품상에게 매각한 것을 비롯하여 전후 6차례에 걸쳐 월광사, 통도사 등
유명한 사찰의 고적만을 도굴, 사리, 구슬, 금?은부처 등 시가 8백여만원 어치의 유물을
도굴한 혐의를 받고 있다.
위의 내용을 보면 김준철 일당은 택시를 대절했고, 2일간의 야밤에 틈타 석가탑에
손을 댄 점으로 보아 주도면밀한 준비와 집요한 도굴이 자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황수영교수님에 의한 현지조사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이들은 석탑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도굴범들은 3일밤에 먼저 초층탑신을
들어올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도 석탑에 사리를 봉안할 때 일층탑신에 가장 집중
된다는 사실에 입각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지만, 이들의 예상은 빗나가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이어 5일 밤에 3층탑신을 들었지만,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결국 2차례에 걸친 석가탑에 대한 도굴로 인해 비록 탑에는 손상을 주었지만, 그들이
노렸던 사리장치는 안전했던 것이다. 위의 기사를 보면 이들은 2층탑신에도 손을
댄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사리장치는 도굴되지 않았고, 황수영,
최순우, 진홍섭, 정영호선생에 의해 고스란히 수습되어 세상에 공개되었다.
만약 2층탑신에 대해 완벽한 도굴행위가 자행되었다면……… 이후의 상황은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
2. 다보탑
다보탑은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석조물중 유일한 석탑이다.
뿐만 아니라 7세기 중반 통일신라시대의 뛰어났던 문화적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탑으로, 종교를 위해 무든 것을 헌신했던 인간의 심성(心性)이 그대로 배어있는
유물이다. 어찌 필설(筆舌)로써 이를 다 할 수 있겠는가?
이 땅을 강점했던 일본인들은 이를 간과하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이 석탑을
주목했던 일제는 1925년경 다보탑을 수리한다는 핑계로 이를 전면 해체했다.
당시 다보탑 보수현장에는 한국인들의 접근을 전면 봉쇄했다고 한다. 여러 가지 정황
으로 보아 그들의 목적은 보수공사라는 명목하에 탑 내에 봉안되었을 사리장치에
눈독을 들였던 것이다. 이같은 의도는 당시 발굴이라는 이름 하에 저질러졌던 수많은
문화재의 약탈에서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일제는 이를 진행하면서 아무런 보고서는
물론 간단한 기록조차도 남기지 않았다. 결국 당시 보수공사의 목적이 어디에 있었는
가를 분명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석가탑의 예를 보아 다보탑에도 분명 통일신라시대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사리장치가 봉안되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는데, 당시 금동
불상 2구와 사리장엄구 일체를 가져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다보탑의 네 모퉁이에
있던 돌사자 4기중 3기가 없어졌다. 다보탑의 돌사자는 탑에 못지 않게 통일신라시대
의 예술적 능력이 한껏 발휘된 작품이다. 때문에 당시 경주군 주석서기(主席書記)를
지냈던 木村靜雄은
“원컨데 신라문화의 보존상에 다행있기를 기원할 뿐이다. 그리고 나의 부임전후에
도둑들에 의하여 환금(換金)되어 내지(內地. 일본)로 반출되어 있는 석굴암불상 2구와
다보탑 석사자 1쌍과 기타 등감(燈龕)등 귀금물(貴金物)반환을 위하여 보존상의 완전을
얻는 것이 나의 종생(終生)의 소망이다.”
라고 그의 회고록에서 기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 국내의 고적조사를 주관했던
關野 貞은
“다보탑의 기단 사우(四隅)에는 석사(石獅)를 안치하였다. 그 모습은 가슴이 튀어나오
고 머리는 조금 쳐들어 일본 동대사 남대문의 석사의 자세와 유사한 곳이 있다. (중략)
일본 영락시대(寧樂時代)의 석조사자는 하나도 잔존하는 것이 없으므로 이 석사는 분황
사의 것과 함께 당시의 형식을 상상할 수 있는 자료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다보탑에 놓여있던 사자는 매우 뛰어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분명 4마리가 있어야 할 사자는 현재 한 구만 남아있다.
나머지 3마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1902년 일본인 관야 정(關野 貞)이 조사
할 때에는 각 면 1구씩 모두 네 마리가 있었다고 한다. 이후 1909년 그가 다시 불국사
에 왔을 때에는 그 중 2구가 없어졌다고 한다. 1916년(大正 5)에 발간된 『朝鮮古蹟圖
譜』에 수록된 사진에는 2구가 보이는 점으로 보아 1902년에서 1909년 사이에 2구가,
이로부터 1916년 사이에 1구가 없어져 결국 석사자 3구는 일제강점기에 반출되었음
을 알 수 있다. 이는 단순한 추정이 아니다. 당시 일본인들이 남긴 기록가운데서 그들
에 의해 3마리의 사자가 반출되었음을 찾을 수 있다.
관야 정은 그의 저서인 『朝鮮의 建築과 藝術』에서
“듣는바에 의하면 이 중 비교적 완전한 2구는 나인(那人. 일본인) 모(某)에 의하여
일본으로 반출되다고 한다.”
라 기록하고 있다. 관야정 그 자신도 일본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국민의 소행을
기록함으로써 다보탑의 석사자가 일본으로 반출되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모씨는 석굴암에 있던 소형의 대리석제 석탑도 가져갔다. 이는 당시
조선총독부 박물관 촉탁이었던 諸鹿英雄의 ?경주의 신라시대 유적에 대하여?라는 강
연문에서
“구면관음 앞에서 현존하는 대석상에 불사리(佛舍利)가 봉안되었다고 구전된 소형의
훌륭한 대리석제의 탑이 있었던 바, 지난 1908년(명치 41) 봄 존귀한 모(某) 대관(大官)
의 순례후 어디론지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은 지금 생각하여 애석하기 짝이없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1908년 경주를 방문했던 모 대관은 석굴암의 대리석제 석탑과
다보탑의 사자가 반출한 것이다. 황수영교수는 당시 경주를 방문했던 모 대관이 당시
통감이었던 曾?荒助로 지목하고 있다. 關野 貞 도 석굴암 석탑의 반출자로 같은 인물
을 주목하고 있지만, “진위는 알 수 없다”라고 하면서 은근히 자국민을 보호하고
있다. 결국 소네 아라스케에 의해 1908년 다보탑의 사자 2마리와 석굴암의 석탑이,
이후 누군가에 의해 1마리가 반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일본인들에 의한 다보탑 석사자의 반출은 많은 저항이 있었을 것으로 예견된다.
이들이 가방에 넣어 가져갈 만큼 소형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불국사의 많은
승려들과 경주사람들이 이를 방관했을리 없다. 아마도 목숨을 걸고 이를 지키고자
했고, 일제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 어딘가에 있을 다보탑의
사자 3구와 석굴암의 대리석제 소탑은 지금도 제자리를 찾아오길 학수고대하고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일제강점기에 도굴와 약탈의 대상이 되었던 다보탑은 현대에 들어와 다시
한번 수난을 당한다. 지난 1987년 대선을 장식했던 루머중의 하나이다.
본래 10원짜리 동전에는 불상이 없었는데, 민자당의 후보진영에서 대통령의 당선을
위해 돌불상을 새겼다는 것이다. 당시 투표권을 행사할 정도의 연령을 지닌 사람이라
면 누구나 이를 기억할 것이다. 필자 역시 여러 사람들에게서 이같은 소문을 들었고,
일일이 다보탑의 사진을 보여주며 불상이 아니라 이는 사자이며, 본래 다보탑에는
네 마리의 사자가 있었음을 알려주었던 기록이 새롭다. 이는 1883년 1월 10원짜리
동전의 숫자와 모양을 바꾸고 그림도안을 실물에 가깝게 변경하는 과정에서 다보탑에
있는「돌사자상」이 들어간 것이 와전된 것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비록
헤프닝으로 끝난 사건이었지만, 어쩐지 씁씁할 느낌이다.
다보탑은 앞서 여러 차례 강조했지만, 세계에서도 단 한 기 밖에 없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따라서 우리 조상의 신앙심과 지혜 그리고 예술적 능력을 대내?외에
과시할 수 있는 문화재인 것이다. 그런데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상대방을 모략하
는 도구로 사용했다는 사실은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훝날 20세기 후반부의 사람들이
문화재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 반문할 때 다보탑을 정치적 이용한 이 사건은 지금도
우리의 문화유산을 지키고 보존하기 위해 땀흘리는 많은 이들을 노력을 절하시키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문화재를 바라보는 시각은 ‘어느 시대에 만들었는가?’, ‘가격으로 치면 얼마나
될까?’ ‘얼마나 귀중한 물건인가?’ 등 다양하다. 그렇지만, 이는 현재적 관점에서
의 시각일 뿐이다. 그렇지만 이를 만들고 사용했던 당시의 사람들에 있어서는 바로
생활이자 신앙이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보존하고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다보탑과 석가탑 역시 우리의 문화유산 중 하나이다. 언제 만들었는가? 왜 중요한가?
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는 이를 통해 살아 숨쉬고 있는 통일신라시대 사람들의 혼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다보탑과 석가탑은 일제강점기 이래 도굴이라는 수난을
당했고, 현대에 들어서는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한결같이 아름다운 자태와 당당한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너희들이 어떠한 수난을 주어도 항시 곁에 있으면서, 부처님의 자비와 큰 덕을 베풀겠
다며 잔잔한 미소를 띄고 있는 듯 하다. 마치 부처님이 인간의 모든 허물을
너그럽게 모든 것을 용서하고, 안아주듯이………
통일신라시대로부터 줄 곳 불국사를, 경주를, 그리고 이 땅을 지켜왔던 양 탑에 대해
현대를 살아가며 문화재를 공부하는 한 사람으로써 그저 미안할 따름이다. 석가탑,
다보탑 그리고 이를 안고 있는 불국사는 신라인에게 그랬듯이 현재에도 미래에도
우리에게 피안(彼岸)의 세계임은 분명하다.
1. 석가탑
석가탑과 다보탑은 그 명성에 걸맞는 역사적 배경과 아름다운 자태를 지닌 까닭에
근대로 접어들면서 들어서면서 도굴범에 의한 약탈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 땅에
둥지를 틀고 살아왔던 우리의 조상들은 사찰내에 있는 유물에 손을 댄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들은 바로 신앙이요, 생활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땅을 36년간 강점했던 일본인에게는 한낮 골동품에 불과했다.
그들의 눈에는 오랫동안 우리를 지켜주었고, 보호받아왔던 유물이 단순히 진귀하고
값나가는 물건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때문에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수많은 우리의
문화유산이 이들에 의해 도굴되고, 일본으로 불법 반출되는 일이 허다하였다.
이같은 사정은 불국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불국사의 유물 중 일본인들의 주목들 받았던 것은 다보탑이었다. 이에 반해 석가탑은
그리 주목을 받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도 외형에서 주는 멋이 석가탑은
다른 일반형석탑과 같은 양식임에 비해 다보탑은 완전히 다른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때문에 일본인들은 다보탑을 철저히 유린했다. 이후 해방된
이 땅에서는 석가탑에 대한 도굴이 자행되었다. 비록 미수에 그친 사건이었지만,
탑내에서 수습된 유물로 보아 ‘만약 이들이 도굴범의 수중에 들어갔더라면’
하는 상상은 우리를 몸서리치게 한다. 도굴이 성사되었다면,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통해 세계최초로 금속활자를 사용했던 사실은 물론, 이를 통해 석가탑은 물론
불국사가 지닌 성격, 사리용기를 통해 당시 금속공예의 수준을 알 수 있는 자료의
확보는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었다 해도 지나침이 없으리라.
이렇듯 우리의 문화유산 중 수위(首位)에 자리할 수 잇는 가치를 지닌 다보탑과
석가탑은 일본인과 내국인에 의해 유린당하는 수난을 겪어왔다. 이 장에서는
양 탑이 지닌 수난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석가탑
750년경에 건립되어 일제강점기에도 무사했던 석가탑은 1966년에 이르러 일대
위기를 맞이했다. 일제로부터 도굴의 기법을 전수 받은 이 땅의 도굴범들은 불국사에
침입하여 석가탑을 도굴하고자 했다. 이들에게도 석가탑은 우리가 지키고 보존해야
할 문화유산이 아니라 그저 돈 나가는 물건이 들어있을 도굴의 대상이었다.
당시 중앙과 지방지에서 이 사실을 크게 보도하였다. 당시 각종 신문의 지면을
차지했던 석가탑 관련 기사의 내용은 정영호교수에 의해 정리되어 전체적인 내용이
소개된 바 있는데(韓國精神文化硏究院, 『佛國寺三層石塔 舍利具와 文武大王海中陵
』, 1997) 이를 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千年을 살아온 국보21호 석가탑에 이유 모를 상처가 생겼다. 신라시대 佛塔(불탑)의
진수이며 일명 무영탑으로 불려 왔고 아사달과 아사녀의 이야기 등 수많은 전설을 안은
석가탑이 6일 탑신이 갑자기 세 군데나 깨어지고 금이 갔다. 6일 오후 2시쯤 경주
불국사 경내에서 범영루 보수공사를 하고 있던 한 감독이 석가탑에 이상이 있음을 발견
하여 곧 경주시 교육청에 알렸다. 경주 교육청에서는 현장에 나가 2층 탑신의 서편이
사방 1자 가량 떨어져 나가고 3층 탑신에 금이 생겼으며 3층 동쪽 탑신의 모서리에 파편
조각처럼 여러 군데가 떨어져나간 것을 밝혀냈을 뿐 석가탑 상처의 확실한 원인을 규명
하지 못하고 있다. 귀중한 탑에 흠이 갔으나 현지 교육청은 아직 버팀대를 괼 단계는
아니라고 말하고 탑신과 기단석을 서로 이은 쇠로 된 쐐기가 삭아서 탑신의 중력이
기울었고 오랜 풍화작용과 300여년전 임진왜란 때 불탄 영향으로 생겼던 상처가 뒤늦게
작용한 것이 아닌가 보고 있다. 현지 교육청은 망치로 때려 떨어진 것처럼 생긴
석가탑의 돌 조각을 불국사에 보관중이다. 이러한 보고를 받은 도교육위원회는
7일 문교부의 감독관과 문화재위원 및 특수기술자의 파견을 긴급 요청하고 金判永
교육감이 현지에 나갔다. 교육위원회 당국자는 전에는 이상이 없었던 것인데 이번에
갑자기 이 같은 이상이 생겼다고 말하면서 완전보수를 하려면 2층 이상은 해체,
복원공사를 해야 될 것 같다고 했다.
불국사 대웅전 앞에 있는 국보 제21호 석가탑(일명 무영탑)이 지난 8월 29일 밤
동해남부 일대에 있었던 미진(2도 가량)으로 흔들려 탑이 6도 가량 남쪽으로
기울어졌으며, 탑신 4개처가 떨어지고 2층갑석 하단부가 균열되었음이 8일 현지조사에
서 돌아온 도교육위원회 직원에 의해 밝혀졌다.
불국사 대웅전 오른쪽에 있는 국보 제21호 불국사 3층석탑인 석가탑이 지난 8월 29일에
있었던 지진으로 심한 균열이 생기고 약 7도 가량 서남쪽으로 기울어져 도괴직전에
있음이 6일 뒤늦게 발견되어 金判永 도교육감이 현지를 답사하고 이의 해체 복원을
문교부에 긴급 요청하였다.
위의 내용을 보아 도굴 즉시 석가탑이 훼손된 사실이 알려졌고, 이는 지진에 의한
것이라는 미온적인 결론에 도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석탑의 훼손 사실은
알았지만, 아무도 도굴범이 석탑에 손을 댄 사실은 상상도 못하고 있다.
단순히 지진으로 인한 피해라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같은 추론은 민족의
정서로 보아 당연한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누가 민족의 보배인 석가탑을 도굴할
것이라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러나 이내 상황은 반전된다. 다음의 기사
내용을 보자.
불국사의 석가탑 훼손 사항을 조사한 문화재위원 황수영(동국대) 교수는 사흘동안의
현지조사를 마치고 12일 귀경했다. 황교수는 훼손의 원인은 사리장치를 노린 탑
도둑의 짓이라는 조사결론을 문화재관리국에 보고하였다. 황교수는 이번 일이
처음부터 탑 도둑의 짓으로 여겨졌다고 말하면서 관계자들에게는 너무나 유명한 탑
도둑단인 ‘경상도파’의 짓이 아닌가 의심이 간다고 말했다. 황교수는 피해상황에
비추어 사리장치가 실제로 도둑맞을 가능성은 작은 것 같다고 비쳤다. 황교수가 말하는
조사경위와 그 결과는 대략 다음과 같다.
석가탑 훼손 소식이 처음 들린 것은 7일 경주박물관의 전화를 받았을 때였다. 황교수는
9일 온전한 탑을 본지 한달 만에 상처입은 탑을 다시 보았다. 처음의 조사대상은 10여개
의 파편이었다. 1층 탑신에서 3개, 2층 탑신에서 3개, 3층 탑신에서 4개가 떨어졌는데
떨어진 파편 중 큰 것은 60㎝ 길이에 두께가 3㎝였다. 이 파편에서는 풍화(風化)로 인한
자해(自解)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 석재인 화강암은 풍화가 있으면 그 속의 철분
(雲母)에 녹이나 누렇게 변색하는데 파편은 새하얗다. 또 지진이 아니라는 증거는
불국사의 기왓장이 성하고 기와공사중인 자하문에서 흙 한 점 떨어지지 않았다는 상식
적인 것 말고도 각층 탑신이 다 움직였는데 2층의 기단부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잡았다. 탑을 실측하는 데만 이틀이 걸렸다. 그 결과 1층 옥개석이 남쪽으로
2.5㎝, 2층 탑신이 남쪽으로 4㎝, 3층의 옥개석은 북쪽으로 4㎝ 어긋난 사실을
확인했다. 높이 7.8㎝, 3cm까지 7m를 오르내리기에는 사다리가 필요했다. 바로 탑
앞쪽의 자하문 공사장 사다리 3개를 손쉽게 쓸 수가 있었다. 공사장에는 소형
재키도 있었다.
추리는 너무나 당연했다. 8원 29일의 미진(微震), 1개월이나 걸린 경주지방 초유의 개수
공사, 이 우연을 경상도 일대 산간의 탑 1천 3백여개를 다 뒤졌다는 실력파요 요즘에는
재키까지 들고 다닌다는 ‘경상도파’가 캐치했다면...... 탑을 들면 약간 뒤로
물러난다. 이것은 숱한 탑을 보수한 황교수가 체험으로 터득한 바이다. 그렇다면
각층이 어긋난 반대쪽에 재키를 대고 든 것이다. 그 쪽에는 재키를 대었던 것같은
흠집이 나 있다. 그리고 가장 무거운 1층 옥개석의 어긋남이 적은 것으로 보아 재키는
크지 않았으며 솜씨가 익숙했음에 틀림이 없다.
범행의 추리는 윗층부터 차례로 들어 사리장치를 찾았다는 것. 그러나 황교수는 사리는
건재하다는 심증이 있는 듯이 말한다. 그 까닭을 황교수는 공언하기를 꺼렸는데 사리장
치는 탑신 중 도둑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다는 것처럼 들렸다. 그리고 익숙한
도둑이 사리장치를 놓쳤다면 그 까닭은 사리봉안처를 정하는 데 정법(正法)이 없다는
데에도 있다고 말했다.
위의 가사 내용을 보면 지진에 의한 피해로부터 도굴로 인한 석탑의 훼손으로 상황이
반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지를 조사했고, 훼손된 부재를 통해 도굴범에 의한
소행이라 결론을 내렸던 황수영선생님. 아마 선생님의 석탑에 대한 예리한 관찰과
통찰력이 아니었더라면 아마도 석가탑과 그 안에 봉안되어 있던 각종 사리장치는
영영 우리의 곁을 떠났을 지도 모른다. 아울러 사리장치는 안전할 것이라는 선생님의
예측은 정확히 맞았다. 1966년 9월 30일에 개최된 ?피해문화재 수습대책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10월 13일에 석가탑에 대한 해체작업이 착수되었고, 이 날 도굴범이 노리
던 사리장치가 2층탑신석에 마련된 사리공에서 수습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후 황수영선생님의 예측대로 석가탑을 도굴했던 일당이 검거되어 이 사건이 전모가
공표되었다 . 당시 신문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석가탑 도굴범 구속, 일당 7명 - 6회에 걸쳐 유명 사찰서 8백만원어치 : 18일밤 서울
시경은 불국사 석가탑을 비롯 고적의 탑과 분묘를 도굴해오던 전문도굴단 주범 김준철
(45세, 경주시 배반동), 윤사만(40세, 경주시 배반동), 유태웅(27세, 월성군 내남면 노곡
리), 주종수(34세, 대구시 대신동) 등 일당 7명을 절도혐의로 구속하고 도굴공범 李모
(30세), 申모(34세) 등 6명을 지명수배했다. 주범인 김 등은 지난 3일밤 ‘경북 여2009
’ 택시를 대절, 불국사에 도착하여 미리 준비했던 재키로 석가탑 2번 탑신을 끌어올렸
으나 보물을 발견 못해 실패 다시 5일밤에 3번 탑신을 끌어올렸으나 역시 보물이 없어
미수에 그쳤다. 이들은 또한 3월초 경주시 남산의 절터를 도굴, 5치(寸) 짜리 순금불상
등 2점을 골동품상에게 매각한 것을 비롯하여 전후 6차례에 걸쳐 월광사, 통도사 등
유명한 사찰의 고적만을 도굴, 사리, 구슬, 금?은부처 등 시가 8백여만원 어치의 유물을
도굴한 혐의를 받고 있다.
위의 내용을 보면 김준철 일당은 택시를 대절했고, 2일간의 야밤에 틈타 석가탑에
손을 댄 점으로 보아 주도면밀한 준비와 집요한 도굴이 자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황수영교수님에 의한 현지조사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이들은 석탑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도굴범들은 3일밤에 먼저 초층탑신을
들어올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도 석탑에 사리를 봉안할 때 일층탑신에 가장 집중
된다는 사실에 입각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지만, 이들의 예상은 빗나가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이어 5일 밤에 3층탑신을 들었지만,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결국 2차례에 걸친 석가탑에 대한 도굴로 인해 비록 탑에는 손상을 주었지만, 그들이
노렸던 사리장치는 안전했던 것이다. 위의 기사를 보면 이들은 2층탑신에도 손을
댄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사리장치는 도굴되지 않았고, 황수영,
최순우, 진홍섭, 정영호선생에 의해 고스란히 수습되어 세상에 공개되었다.
만약 2층탑신에 대해 완벽한 도굴행위가 자행되었다면……… 이후의 상황은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
2. 다보탑
다보탑은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석조물중 유일한 석탑이다.
뿐만 아니라 7세기 중반 통일신라시대의 뛰어났던 문화적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탑으로, 종교를 위해 무든 것을 헌신했던 인간의 심성(心性)이 그대로 배어있는
유물이다. 어찌 필설(筆舌)로써 이를 다 할 수 있겠는가?
이 땅을 강점했던 일본인들은 이를 간과하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이 석탑을
주목했던 일제는 1925년경 다보탑을 수리한다는 핑계로 이를 전면 해체했다.
당시 다보탑 보수현장에는 한국인들의 접근을 전면 봉쇄했다고 한다. 여러 가지 정황
으로 보아 그들의 목적은 보수공사라는 명목하에 탑 내에 봉안되었을 사리장치에
눈독을 들였던 것이다. 이같은 의도는 당시 발굴이라는 이름 하에 저질러졌던 수많은
문화재의 약탈에서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일제는 이를 진행하면서 아무런 보고서는
물론 간단한 기록조차도 남기지 않았다. 결국 당시 보수공사의 목적이 어디에 있었는
가를 분명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석가탑의 예를 보아 다보탑에도 분명 통일신라시대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사리장치가 봉안되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는데, 당시 금동
불상 2구와 사리장엄구 일체를 가져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다보탑의 네 모퉁이에
있던 돌사자 4기중 3기가 없어졌다. 다보탑의 돌사자는 탑에 못지 않게 통일신라시대
의 예술적 능력이 한껏 발휘된 작품이다. 때문에 당시 경주군 주석서기(主席書記)를
지냈던 木村靜雄은
“원컨데 신라문화의 보존상에 다행있기를 기원할 뿐이다. 그리고 나의 부임전후에
도둑들에 의하여 환금(換金)되어 내지(內地. 일본)로 반출되어 있는 석굴암불상 2구와
다보탑 석사자 1쌍과 기타 등감(燈龕)등 귀금물(貴金物)반환을 위하여 보존상의 완전을
얻는 것이 나의 종생(終生)의 소망이다.”
라고 그의 회고록에서 기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 국내의 고적조사를 주관했던
關野 貞은
“다보탑의 기단 사우(四隅)에는 석사(石獅)를 안치하였다. 그 모습은 가슴이 튀어나오
고 머리는 조금 쳐들어 일본 동대사 남대문의 석사의 자세와 유사한 곳이 있다. (중략)
일본 영락시대(寧樂時代)의 석조사자는 하나도 잔존하는 것이 없으므로 이 석사는 분황
사의 것과 함께 당시의 형식을 상상할 수 있는 자료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다보탑에 놓여있던 사자는 매우 뛰어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분명 4마리가 있어야 할 사자는 현재 한 구만 남아있다.
나머지 3마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1902년 일본인 관야 정(關野 貞)이 조사
할 때에는 각 면 1구씩 모두 네 마리가 있었다고 한다. 이후 1909년 그가 다시 불국사
에 왔을 때에는 그 중 2구가 없어졌다고 한다. 1916년(大正 5)에 발간된 『朝鮮古蹟圖
譜』에 수록된 사진에는 2구가 보이는 점으로 보아 1902년에서 1909년 사이에 2구가,
이로부터 1916년 사이에 1구가 없어져 결국 석사자 3구는 일제강점기에 반출되었음
을 알 수 있다. 이는 단순한 추정이 아니다. 당시 일본인들이 남긴 기록가운데서 그들
에 의해 3마리의 사자가 반출되었음을 찾을 수 있다.
관야 정은 그의 저서인 『朝鮮의 建築과 藝術』에서
“듣는바에 의하면 이 중 비교적 완전한 2구는 나인(那人. 일본인) 모(某)에 의하여
일본으로 반출되다고 한다.”
라 기록하고 있다. 관야정 그 자신도 일본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국민의 소행을
기록함으로써 다보탑의 석사자가 일본으로 반출되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모씨는 석굴암에 있던 소형의 대리석제 석탑도 가져갔다. 이는 당시
조선총독부 박물관 촉탁이었던 諸鹿英雄의 ?경주의 신라시대 유적에 대하여?라는 강
연문에서
“구면관음 앞에서 현존하는 대석상에 불사리(佛舍利)가 봉안되었다고 구전된 소형의
훌륭한 대리석제의 탑이 있었던 바, 지난 1908년(명치 41) 봄 존귀한 모(某) 대관(大官)
의 순례후 어디론지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은 지금 생각하여 애석하기 짝이없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1908년 경주를 방문했던 모 대관은 석굴암의 대리석제 석탑과
다보탑의 사자가 반출한 것이다. 황수영교수는 당시 경주를 방문했던 모 대관이 당시
통감이었던 曾?荒助로 지목하고 있다. 關野 貞 도 석굴암 석탑의 반출자로 같은 인물
을 주목하고 있지만, “진위는 알 수 없다”라고 하면서 은근히 자국민을 보호하고
있다. 결국 소네 아라스케에 의해 1908년 다보탑의 사자 2마리와 석굴암의 석탑이,
이후 누군가에 의해 1마리가 반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일본인들에 의한 다보탑 석사자의 반출은 많은 저항이 있었을 것으로 예견된다.
이들이 가방에 넣어 가져갈 만큼 소형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불국사의 많은
승려들과 경주사람들이 이를 방관했을리 없다. 아마도 목숨을 걸고 이를 지키고자
했고, 일제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 어딘가에 있을 다보탑의
사자 3구와 석굴암의 대리석제 소탑은 지금도 제자리를 찾아오길 학수고대하고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일제강점기에 도굴와 약탈의 대상이 되었던 다보탑은 현대에 들어와 다시
한번 수난을 당한다. 지난 1987년 대선을 장식했던 루머중의 하나이다.
본래 10원짜리 동전에는 불상이 없었는데, 민자당의 후보진영에서 대통령의 당선을
위해 돌불상을 새겼다는 것이다. 당시 투표권을 행사할 정도의 연령을 지닌 사람이라
면 누구나 이를 기억할 것이다. 필자 역시 여러 사람들에게서 이같은 소문을 들었고,
일일이 다보탑의 사진을 보여주며 불상이 아니라 이는 사자이며, 본래 다보탑에는
네 마리의 사자가 있었음을 알려주었던 기록이 새롭다. 이는 1883년 1월 10원짜리
동전의 숫자와 모양을 바꾸고 그림도안을 실물에 가깝게 변경하는 과정에서 다보탑에
있는「돌사자상」이 들어간 것이 와전된 것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비록
헤프닝으로 끝난 사건이었지만, 어쩐지 씁씁할 느낌이다.
다보탑은 앞서 여러 차례 강조했지만, 세계에서도 단 한 기 밖에 없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따라서 우리 조상의 신앙심과 지혜 그리고 예술적 능력을 대내?외에
과시할 수 있는 문화재인 것이다. 그런데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상대방을 모략하
는 도구로 사용했다는 사실은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훝날 20세기 후반부의 사람들이
문화재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 반문할 때 다보탑을 정치적 이용한 이 사건은 지금도
우리의 문화유산을 지키고 보존하기 위해 땀흘리는 많은 이들을 노력을 절하시키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문화재를 바라보는 시각은 ‘어느 시대에 만들었는가?’, ‘가격으로 치면 얼마나
될까?’ ‘얼마나 귀중한 물건인가?’ 등 다양하다. 그렇지만, 이는 현재적 관점에서
의 시각일 뿐이다. 그렇지만 이를 만들고 사용했던 당시의 사람들에 있어서는 바로
생활이자 신앙이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보존하고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다보탑과 석가탑 역시 우리의 문화유산 중 하나이다. 언제 만들었는가? 왜 중요한가?
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는 이를 통해 살아 숨쉬고 있는 통일신라시대 사람들의 혼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다보탑과 석가탑은 일제강점기 이래 도굴이라는 수난을
당했고, 현대에 들어서는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한결같이 아름다운 자태와 당당한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너희들이 어떠한 수난을 주어도 항시 곁에 있으면서, 부처님의 자비와 큰 덕을 베풀겠
다며 잔잔한 미소를 띄고 있는 듯 하다. 마치 부처님이 인간의 모든 허물을
너그럽게 모든 것을 용서하고, 안아주듯이………
통일신라시대로부터 줄 곳 불국사를, 경주를, 그리고 이 땅을 지켜왔던 양 탑에 대해
현대를 살아가며 문화재를 공부하는 한 사람으로써 그저 미안할 따름이다. 석가탑,
다보탑 그리고 이를 안고 있는 불국사는 신라인에게 그랬듯이 현재에도 미래에도
우리에게 피안(彼岸)의 세계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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