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요 8:1~11)
1. 정죄하지 않는 예수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성전에서 말씀을 전하는 예수님에게로 끌고 옵니다. 그들은 도무지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인을 현장에서 붙잡아서 예수님에게로 온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본문 4, 5절에 “선생님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라고 묻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간음한 자에게 죽음을 선고하였습니다. 신명기 22:22~24절에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 죽일 것이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신명기의 말씀을 가지고 이 간음한 여인을 판단합니다. 신명기의 말씀대로 이 여인은 돌에 맞아 죽을 죄를 지은 것입니다.
율법을 범한 이 여인을 향해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만 돌을 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모였던 많은 사람들도 함께 돌을 들었습니다. 그 돌은 정당한 돌이었습니다. 죄인을 심판하는 정당한 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간음한 여인을 향해서 예수님도 돌을 들어야 옳습니다. 예수님도 그 여인에게 돌을 던져야 율법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말씀에서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대로 돌을 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무엇을 쓰셨는지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현장의 상황입니다. 간음한 여인이 잡혀 와서 무리들 가운데 있습니다. 지금 무리들은 그 여인을 향해서 다 돌을 들어서 치려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만 돌을 들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땅에서 돌만 들면 이 여인은 죄인으로 심판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돌을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땅에다 무엇을 쓰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정죄의 돌을 들고 우리에게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긍휼과 자비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요한복음 8:15절에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한다”고 하십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서 ‘너는 죄인이야’라고 하시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함을 얻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율법대로 우리를 정죄하셨다면 우리는 죄를 숨길 수 밖에 없습니다. 율법은 우리의 죄를 숨기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고백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고백한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2. 죄인임을 일깨우시는 예수님
모인 무리들은 예수님이 이 간음한 여인을 어떻게 하실까? 주목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땅에서 일어나시는데 손에 돌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신명기의 말씀대로 ‘돌로 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돌로 치는데,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돌을 들고 있는 그들의 죄를 물으십니다. 죄 없는 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 그 자만이 이 여인의 죄를 심판 할 수 있다. 어떻게 죄인이 죄인을 판단 할 수 있느냐?
너희 속에는 이 여인의 간음함 보다 더 음란함이 있는데, 너희에 음란함을 숨기고 어떻게 이 여인을 판단하느냐고 주님을 말씀하십니다.
돌을 들고 있는 자들도 그들의 죄가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그들에게도 죄의 본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도 음란함이 있었고, 그들에게도 죄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돌을 들고 있는 그들을 향해서도 정죄하지 않습니다. 너희도 죄인이면서 이 여인을 심판하느냐고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들 스스로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시고 스스로 회개하게 하십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자신들은 의인이기에 이 여인을 심판할 자격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의는 사람들과 비교한 의입니다. 그들은 이 간음한 여인과 자신들과 비교해보니까 자신들이 의롭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를 하나님 수준으로 끌어올려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모두 다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의 차원에서 보면 죄인과 의인이 구별되는 데, 하나님 차원에서 보면 모두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3:23절에 말씀대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여긴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하나님 차원에서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정말 초라한 존재였습니다.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죄가 보였습니다. 자신의 허물이 보였습니다. 자신의 죄와 허물이 보이는 데 더 이상 돌을 들고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 앞에 서면 나 자신을 알게 됩니다. 내가 정말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됩니다. 나의 초라함을 보게 되고, 나의 죄를 보게 됩니다.
그 때 우리는 거듭나는 것입니다. 예수님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구원하소서. 변화시켜주소서. 저를 새롭게 하소서. 라고 그분을 붙드는 것입니다.
3. 단둘이 계신 예수님
자신이 죄인임을 보게 된 바리세인과 서기관, 그리고 모인 백성들은 어른에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성전에서 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안에 여자 외에 없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과 간음한 여인과 단 둘이 남은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아무말 없이 그냥 보내었다면 이 여인은 평생 죄책감으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간음한 여인으로 붙잡혀 거룩한 성전에 들어와서 많은 사람에게 자신의 죄가 들어났으니 이제 어떻게 얼굴을 들고 살 수 있단 말입니다. 다른 사람은 그를 용서해도 자기 스스로가 죄인이라는 이 죄책감으로 그는 평생 고통 가운데 살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묻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고 말입니다. 여인의 대답입니다. “주여 없나이다.”
예수님께서 왜 이 질문을 하신 줄 아십니까? 사람들 앞에 죄가 들어나서 죄의 수치심으로 가득한 그 여인의 수치심을 벗기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지금 얼마나 수치심을 가지고 있을까요? 아마 죽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미 이 여인을 돌을 맞은 것 보다 더 큰 상처를 입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죄의 상처를 치료하십니다. 그래 괜찮다. 너를 정죄할 자가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도 11절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 고 하십니다. 죄를 심판할 권한을 가지고 계신 그분도 죄를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은혜를 말씀하십니다. 유대교에서는 이 간음한 여인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이 여인의 인생은 끝입니다. 산 채로 매장되는 것입니다. 종교로서는 이 죄인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간음한 여인을 받아들이십니다. 왜요?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해결하시는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간음한 여인을 용서한 이 말씀을 굉장히 싫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거부합니다. 간음했으면 당연히 처벌을 받아야지. 그것이 옳지. 거기에 무슨 용서가 있냐고 합니다.
이 말씀은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믿는 사람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 내 안에 복음이 되어서 죄인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이 말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통해 나도 죄인임을 알 때 비로소 이 말씀이 다가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고마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찬양의 고백을 할 때 이 여인을 용서하게 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의 가르침이 잘못되었음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에게 죄인은 정죄의 대상입니다. 죄인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들도 구원을 얻는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죄인까지도 구원하시는 그분의 은혜를 믿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