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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백만명이 굶어죽은 조선대기근

작성자신비아|작성시간23.05.07|조회수1 목록 댓글 0


백만명이 굶어죽은, 17세기 조선을 강타한 경신대기근.

"연산에 사는 노비 순례가 다섯살된 딸과 세살된 아들의 인육을 먹었는데, 사실여부를 물었더니 큰 병을 앓고 굶주리던 차에 아들과 딸이 병들어 죽어 삶아 먹었으나 죽여서 먹은 것은 아니다 하였습니다.

순례는 보기에 흉측하고 참혹해 얼굴이나 살갗,머리털이 조금도 사람모양이 없고 마치 귀신의 형상같았으니 반드시 실성한 사람일것입니다.

그렇지만 실성하였다하더라도 이는 실로 예전에 없던 일이고 범한 것이 매우 흉악하므로 가두어 두었습니다.

해당부서를 시켜 처리하게 하소서.(1671년 충청감사 이홍연)

"서울내외에 굶어죽은 시체가 길가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혹은 부모 처자가 서로 베고 깔고 함께 죽은 경우도 있고, 혹은 어미는 이미 죽고, 아이가 그 곁에 엎드려 젖을 만지며 빨다가 곧이어 따라 죽기도 합니다.

울고불고 신음하는 소리에 지나가는 자도 흐느낍니다.

더우기 전염병은 날로 치솟아 열풍이 불꽃을 일으키는 듯한 기세입니다.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드문데, 걸렸다하면 곧 죽습니다.

사방에서 죽어가는 참상은 전쟁에 비길바가 아닙니다.
더구나 보리와 밀을 이미 그르쳤고,수수와 좁쌀도 모두 벌레가 파 먹었으니 겨우 살아남은 백성들은 생기가 사라져버렸습니다."

(1671년 대사헌 장선징)

17세기는 유난히 추웠다.
전지구적으로 평균기온이 1-2도 내려가고 서늘한 여름과 추운 겨울이 잦은 이상저온이 장기간 지속됐다.

이는 자연재해로 연결됐고, 기근과 전염병,불황 그리고 내란과 전쟁을 불러 일으켰다.

17세기는 위기의 시대였다.
이 시기는 15세기부터 시작된 소빙기가 절정에 이른 시대였다.

내란과 전쟁의 와중에서 많은 나라들이 망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다.

거대한 제국이었던 명나라도 끝내 쓰러지고 말았다.

17세기 동아시아에서는 명.청교체,왜란,호란등 침략과 전쟁이 끊이지 않았는데 그 직격탄을 맞은 나라가 조선이었다.

임진왜란이후 인구가 감소하고 농토가 황폐화된 와중에서도 자연재해는 끊임없이 밀어닥쳤다.

<실록>에 수록된 천변재이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기근과 전염병이 가장 심한 시기가 1651년부터 1700년이었다.

이 기간은 생존환경면에서 조선조 역사상 최악의 시기라고 한다.

그 가운데 대기근도 여러 차례 발생했다.

재해가 끊이지 않자, 조선도 대응책을 갖추었다.

진휼을 전담하던 임시기구였던 진휼청을 상설기관으로 만들고 독자적재원을 갖추게 하였다.

또 당시 백성들의 큰 부담이었던 공물납을, 대동법을 시행하여 그 수취액을 1/5-1/6까지 줄여주었다.

1670년(현종 11)은 새해벽두부터 불길한 징조가 나타났다.

서울하늘에서 붉고 푸른 햇무리가 관측된 것이다.

사람들은 위망과 쇠란의 징조라고 숙떡거렸다.
다른 날에는 유성들이 떨어졌다.

1670년 2-5월, 극심한 가뭄과 냉해가 전국을 휩쓸었다.

4월은 밀과 보리를 수확하고 조,콩,벼의 씨를 뿌리는 시기로 1년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달이다.

이달에 재해가 들면 1년 농사는 끝장이다.

가뭄으로 5월 모내기마저 물건너 갔다.

1670년 5-6월, 우박,서리가 전국을 강타했다.

특히 평안도가 피해가 심했는데 전체 42개 고을중 3분의 2가량이 냉해피해를 입었다.
이때 수해와 풍해가 겹쳤다.

1670년 6월, 태풍과 폭우가 한반도 전역에 쏟아졌다.
충해가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병충을 당시 사람들은 황충이라고 불렀는데, 황이란 메뚜기로 풀,나무,소나무,잣나무의 잎을 갉아 먹는 피해를 내고 충이란 벌레로 알곡을 갉아 먹는 피해를 낸다.
특히 함경도의 피해가 심했다.

1670년 7월, 우박과 함께 서리와 눈이 전국에 내렸다.

서리가 일찍 내려 추수를 눈앞에 둔 작물이 모두 말라 죽었는데 특히 함경도의 피해가 심각했다.

1670년 7월, 제주도에 초대형 태풍이 몰아쳤다.

해일이 밀고들어와 온갖 초목들이 짠 바닷물에 절어 죽어갔다.

전체인구 4만 2700여명이 굶주렸고 도민의 20-30%가 사망한 것으로 추측된다.

1670년 8월, 냉우(冷雨)가 내렸다.
전라도가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1670년 8월, 삼남지방에 진도가 높은 지진이 발생했다.

1670년 겨울, 혹심한 추위가 닥쳤다.

경상도에서 추위때문에 밀과 보리가 말라죽었다.

제주도에서는 쌓인 눈이 3m나 되었는데, 산에 먹을 것을 구하러 올라갔다가 얼어 죽은자가 91명이나 되었다.

1671년 3월, 찬바람과 된서리,찬비, 눈이 잇따라 내리는 추위가 작년부터 계속 이어졌다.

전국 일원에 10m이상의 폭설이 연거푸 내렸다.

이 추위로 수확철에 접어든 밀,보리와 성장중인 가장과 조가 상하고 모내기용 볏모가 말라죽었다.

1670-71년 재해는 냉해,가뭄,수해,풍해,충해등 5대재해가 겹친 유래없는 대재해였다.

이어 전염병과 가축병이 겹치면서 대재앙이 되었다.

1670년, 전국 360개 고을 모두 자연재해로 농사를 망쳤다.

이중 심한곳이 103개, 그 다음이 156개였고, 나머지 100개 고을조차도 평년의 대흉작 수준이었다.

예전같으면 성한 곳이 더러 있었는데 그해는 한 곳도 없었다하니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이 기근은 1671년까지 이어졌다.

이 두해의 대기근을 경신대기근이라 한다.

경신대기근은 조선 역사상 최악의 대기근으로 최대규모의 식량고갈상태를 가져왔다.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1670년 1월 충청도에서 장계가 올라왔다.

전염병이 도내에 돌고 있어 감염자가 513명이고 사망자가 30명에 이르렀다는 내용이다.

2월에 접어들자 전염병은 전국으로 확산되어갔다.

병에 걸리면, 다리에 경련이 일어나고 온몸이 뒤틀리며 구토와 설사가 멈추지 않다가 맥없이 쓰러져 죽어 갔다.

빠른 전염률, 높은 사망율,심한 통증이 특징이었다.

역병은 다음해 봄철이 되어도 수그러 들줄을 몰랐다 마침내 그해 가을사상 최대의 사망자를 내며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대기근으로 영양실조에 걸린 기아자들이 면역력을 잃고 쉽게 감염됐고, 그들이 먹을 것을 찾아 떠도는 바람에 확산된 것이다.

그리하여 서울, 지방, 빈부귀천이나 남녀노소 가릴것 없이 광범위하게 감염되고 죽어갔다.

그러자 병을 피해 떠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많은 관리들이 감염되어 죽었고, 멀쩡한 신하들도 감염을 피하기 위해 줄줄이 사직서를 냈다.

임금은 입궐을 독려하고 사직서를 물리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때문에 행정공백이 커졌고, 교통, 통신망이 마비되기도 했다.

전염병이 한창일 때 우역이라는 가축병이 발생했다.

우역은 1670년 7월 처음 발병하여 이내 전국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조선대기근 해 황해도에서 소 2만2165마리가 죽었다.

경신대기근때 우역으로 죽은 소는 4만여두에 이른다.

전체 농가의 4%이상이 소를 잃은 셈이다.

소의 대량폐사는 엄청난 재산손실이다.

이는 조선의 1년 벼농사와 맞먹고 호조의 2년 수입과 비슷하다.
또한 농사와 운송에도 치명타였다.

경신대기근은 기근,전염병,가축병,혹한이 삼중 사중으로 겹친 대재앙이었다.

대재앙의 종착지는 굶주림과 병으로 인한 수많은 죽음들이었다.

시장에는 곡물이 나오지 않았고, 나온 곡물은 가격이 천청부지로 올라있었다.
상인들은 사재기에 열을 올렸다.

식량이 바닥나자, 사람들은 먹을수만 있다면 풀뿌리든 나뭇잎이든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먹었다.
그 중 으뜸은 솔잎과 도토리였다.

하지만 도토리도 재해로 인해 성한 것이 없었다.

바짝 마르고 누렇게 부황 든 사람들은 옥수숫대를 가루로 만들어 풀과 섞어 먹었는데 열흘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떠도는 유랑민과 거지들이 길에 가득찼다.

먹을 것을 찾아 고향을 떠난 무리들이었다.

운봉에서는 전체 가호의 20%인 300여호가 집을 비웠다.

이들은 굶주린 배를 채우려 먹을것이 있으면 까마귀떼처럼 달려들어 주어 먹었다.

머지않아 노약자는 죽고 건장한 자는 도적이 되었다.

1671년, 전년 가을에 수확한 곡식이 떨어지는 새봄이 오자, 기아자가 대량으로 발생하기 시작했다.

1671년 5월 경상도에서 굶주림에 허덕인 자는 24만명으로 전체도민의 25%에 달했다.

아사자에 대한 보고는 1670년 7월부터 보인다.

8월로 접어들며 본격적으로 아사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1671년 아사자로 보고된 수는 십여만 이지만, 빙산의 일각일뿐이다.

문책을 두려워한 지방관들이 사실을 축소,왜곡해서 보고했고, 촌락이나 도로에서 굶어 죽은 자들은 대부분 누락시켰기 때문이다.

경신대기근 시기 역병에 감염된 자는 5만2천명, 사망한자는 2만 3천명으로 보고 되었다.
이 역시 극히 일부분일뿐이다.

병든 사람은 병으로 죽고, 병없는 사람은 굶어서 죽었다.
시체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사람들이 전염될 것을 우려하여 꺼리고, 기운 있는 자들이 드무니 길가에 방치된 시신은 끝없이 이어졌다.

도데체 이 2년간 기근과 염병으로 얼마나 죽었을까?

1671년 12월 사간원 헌납 윤경교는 상소에서 기근과 여역으로 떠돌다 죽은자들과 고향에서 죽은 사람들을 합하면 그 수가 일백만에 이른다고 하였다.

그 여섯달전 대사헌 장선징도 일백만을 언급하였다. 이는 1669년 호적상 인구가 516만이기에 전 인구의 25%에 이른다.

1672년 호적을 보면 473만으로 43만명이 줄어있지만 호적에 등록되지 않은 외거노비등을 감안하면 당시 조선의 인구는 천만명을 넘기때문에, 일반적으로 100만명설은 크게 과장되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먹을 것이 부족해지자 사람들은 자녀들을 팔거나 죽이고 거리에 내버리곤 했다.

버려진 아이들이 거리에 득실거렸다.

어떤 자들은 무리를 모아 도적질을 했다.

금산에서는 향청좌수 이광성이 무리 수백을 모아 군량미를 탈취하려고 했다.

서울에서는 굶주린 병졸들이 도적질을 하다 체포되어 처형되기도 했다.

또 유언비어가 수시로 나돌아 조정의 골치거리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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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명이 굶어죽은, 조선을 강타한 경신대기근 2편/ 조선은 어떻게 위기에 대응했나?

17세기, 전지구적으로 발생된,평균기온이 1-2도씩 내려가는 이상저온현상은 자연재해와 기근, 전염병을 연이어 몰고왔다.

그 영향으로 동아시아에서는 명.청 교체,왜란,호란등 침략과 전쟁이 끊이지 않았는데, 그 중심부에 조선이 있었다.

임진왜란이후 농토가 황폐화되고 백성들의 삶이 곤궁에서 헤매이는 와중에서도 자연재해는 끊임없이 찾아왔다.

특히 1651년부터 1700년 사이는 조선에서 기근과 전염병이 가장 심했던 시기로, 생존환경면에서 최악의 시기였다.

그 기간중에 백만명이상이 굶어 죽은 경신대기근(1670-71년)과 을병대기근(1695-96년)이 있었다.

재해가 끊이지 않자, 조선도 대응책을 갖추었다.

진휼을 전담하던 임시기구였던 진휼청을 상설기관으로 만들고 독자적재원을 갖추게 하였다.

또 당시 백성들의 큰 부담이었던 공물납을, 대동법을 시행하여 그 수취액을 1/5-1/6까지 줄여주었다.

1670-71년 재해는 냉해,가뭄,수해,풍해,충해등 5대재해가 겹친 유래없는 대재해였다.

이어 전염병과 가축병이 겹치면서 대재앙이 되었다.

역사는 이 시기를 경신대기근이라 부른다.

초기에는 기우제와 여제, 대사면령등 소극적으로 대응하던 조정은 재해가 연이어 닥치고, 전염병이 돌자 본격 대응책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조정은 도성과 지방에 의관과 의녀, 의서와 약재를 보내 병자 치료를 독려했다.

서울에서는 활인서가 환자치료를 도맡았다.

공조,진휼청,의국이 환자를 수용할 천막과 자리, 급식용식량,간장,소금, 치료용 의사,약재를 지원했다.

1670년 여름이 시작되자, 전국에서 먹을 것을 찾아 사람들이 서울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1671년 1월 도성내외에 진휼를 개설하여 무료급식을 시행하자, 기아자들이 도처에서 구름처럼 몰려왔다.

이때문에 서울에 전염병이 들불처럼 번져병자가 수천에 이르렀다.

활인서의 막사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 사이 전염병은 궁궐안으로까지 번져 숙경공주가 죽고 왕은 황급히 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도성의 사대부와 관리들 중에서도 감염자가 급증했으며 죽는자도 많았다.

1671년 6월 활인서에 수용된 환자 수는 2만여명에 이르렀다.

이는 서울인구의 10%가 넘는 숫자였다.

활인서에서 수많은 병자들이 치료받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죽고 감염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높고 골이 깊다.
즉 일백리안에 비오고 볕나는 곳이 다르고, 한고을 안에 마르고 습한 곳이 같지 않아 한 지역안에서도 재해를 경미하게 입은 곳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기근이 닥치면, 이쪽에서 저족으로 옮기거나 위를 털어 아래를 보충하는 방식으로 극복했다.

그런데 경신대기근은 어느 고을도 피해가지 못했다.
곡식을 융통할 곳이 없었다.

민간에서 보유한 곡식이 바닥나자 사람들은 관아에서 환곡을 대출해 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관아도 이미 크고 작은 기근으로 빌려주기만 해서 창고가 텅 비어있었다.

전처럼 이웃 고을에서 구입 할수도 없었다.
그 곳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지주나 부농에게 손을 내밀어 보지만, 그들 역시 자기 소유의 노비들조차 굶기고 쫓아내는 형편이었다.

대기근이 언제까지 갈 것인지 예측을 못하기에 한 톨의 쌀이라도 비축하려는 것이었다.

또 조선은 국가재정이 어려울 때마다 재력가들에게 강탈에 가까운 방법으로 많은 기부를 받았기에 그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시장에서는 사재기가 성행하고 곡물가는 천정부지로 솟아 있었다.

그나마 보이지도 않았다.
조정은 쌀을 시중가보다 낮게 시장에 방출하고, 백성들에게 빌려주고, 상인들에게도 방매했다.

여기에는 훈련도감, 어영청, 수어청등이 보유한 비상식량이 동원되었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한편 구황서인 <구황촬요>를 전국에 배포하고, 송금령을 해제해 백성들이 산에서 솔잎을 채취하도록 허용했다.

유망하는 백성들이 늘어나고 굶어 죽는 자들이 나오자, 조정은 감독관을 파견하여 지방관들이 적극적으로 진휼에 나서도록 독려했다.

1670년 가을에 접어들자 각 고을의 비축곡이 바닥 났다.
이제 조정의 비축곡을 풀 차례였다.

먼저 한성부에서 도성민들에게 비축곡을 방출했다.

강화도에 비축한 목면을 가져와 추위에 떠는 사람들에게 옷감으로 사
용하도록 했다.

내수사도 무명 스무동과 삼베 열동을 보탰다.

경기도에는 강화도에 비축한 벼 7600석과 쌀 1만 4천석, 남한산성의 쌀 1만 4천석을 지원했다.

전라도와 경상도는 도내에 비축한 군량미를 사용하도록 했다.

조선은 호란이후 강화도와 남한산성에 방대한 비축곡을 저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국방요지인 평안도에도 막대한 곡물을 비축하고 있었다.

지금 이 세곳의 비축 물자를 조운선으로 실어와 진휼에 투입하고 있는 것이다.

1670년 한해 조정이 진휼에 사용한 재물은 쌀 4만2천석, 콩 6570석, 좁쌀 1만 1200석, 보리 9800석,밀 900석,은 6만 6800냥, 무명 45동,포 200동, 소금 500석이었다.

여기에 지방에서 사용한 수량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엄청난 국가재원이 기근구제에 투입됐다.

그러나 대기근의 절정은 아직 오지 않았다.

식량결핍으로 목숨이 위태롭고 종자가 고갈되어 농사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곡물방출은 효과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한정 비축곡을 방출 할수만은 없었다.

적은 곡물로 큰 효과를 낼수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진휼소의 설치였다.

진휼소에서 굶주린 자들에게 제공하는 설죽은 적은 재료로 많은 사람들을 먹일수 있어서 오래전부터 실시해온 기민책이었다.

1671년 1월 서울과 지방 모두에 진휼소를 설치했다.

진휼소는 기아자들에게 죽을 먹여 최소한의 영양가를 공급해서 사경을 헤매지 않게 하고, 임시 잠자리를 제공하며, 현지 농민에게 식량과 종자의 공급 및 전염병의 확산을 막는 방역조치를 취하는 것이 주 임무다.

진휼소가 문을 열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전국에서 굶주린자들이 서울로 몰려들었다.

2월달에는 하루에 2만여명이 몰려
들었는데, 이들을 위해 하루 서른 혹은 마흔 가마의 죽을 쑤었다.

닭이 울때 시작해 한낮에 이르러 끝나고 한낮부터 시작해 밤이 깊어서야 파였다고 하니, 온종일 쉼없이 죽을 쑨 것이다.

서울의 다섯 진휼소에 서울 인구의 30-40%되는 3-4만명이 몰려들었고, 5월 철수할 시점에, 수용되어 있던 기아자수는 3만 2040명이었다.

기아자들은 날마다 찾아왔다. 사족 부녀자들도 맨발에 얼굴을 가리고 죽을 달라고 애걸했다.

어떤 여인은 옆에서 남편이 갑자기 죽어도, 먹던 죽을 다 먹고 나서야 곡을 했다.

보고된 숫자를 보면 진휼소에서 죽을 먹은 사람들의 월평균은 전체 조선인구의 20-30%인 100-150만명은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4개월동안 500만명이상인 셈이니 평균적으로 조선인 전체가 죽을 얻어먹은 꼴이 된다.

진휼소의 곡물 사정은 긴박했다. 곡물이 떨어지면 소금,간장만 주고, 이도 떨어지면 미역등 해초류만 주었다.그래서 서로 먼저 죽을 타려고 밀고 당겼고, 서울에서는 한 노파가 넘어져 밟혀 죽는 사고까지 터졌다.

그해 여름 조정에서는 진휼소 개폐논쟁이 한창이었다.

진휼소를 열었는데도 1671년 봄과 여름사이에 사망자가 눈덩이처
럼 불어났기 때문이다.

이는 기민들이 모여들면서 전염병이 퍼졌기 때문이다.

양식이 떨어지고, 전염병의 매개처역활을 한다는 의견에 밀려 조정은 5월15일 전국의 진휼소를 철수시켰다.

철수후 굶어죽는자가 속출했다.
봄보리 농사마저 흉작이어서 죽는자들이 더했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현종 즉위후 크고 작은 재난으로 세금체납과 진휼비 지출이 급증해 국가재정은 적자를 면치못했다.

하지만 굶주린 백성들에게 세금을 부과 할수는 없었다.

결국 재해정도에 따라 등급을 나누어 군포를 감면해 주고, 각종 세금을 줄여 주었다.

하지만 마냥 줄여줄수는 없었다. 올해의 상납은 평년의 1/10에 불과한데 이마저도 줄인다면 나라의 비용은 어디에서 구하느냐는 신료들의 걱정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신대기근 2년간 수만석을 진휼에 쏟아부은데 반해 세금은 쥐꼬리만하게 들어왔다.
국고가 바닥났다.

주요 관청의 재고물량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백관의 봉록도 군병들의 급료도 지급하기 힘들었다.

국가를 유지하려면 3년분은 비축해야 하는데 한달분도 없는 형편이었다.

지출을 최대한 줄이고 가용재원을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국가예산을 가장 많이 잡아먹는 군사비와 왕실비용이 삭감됐다.

조선은 위기시마다 납속을 이용해서 재원을 마련했다.

이번에도 공명첩을 600장이나 발행했다.

불티나게 팔릴 것같던 공명첩이 팔리지 않았다. 단가를 낮추어도 찾는 이가 별로없었다.

모두가 어려운 시기였다.
결국 국내에서 곡물을 조달하는 일은 한계에 다다르고 말았다.

이때 조정에서는 청에서 곡물을 수입하자는 의견이 일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료들은 운송의 번거로움과 혹시 청에게

약점을 잡힐지 모른다는 우려로 반대해 무산되고 말았다.

1697년 또다시 백만명의 아사자를 낸 을병대기근때, 조선은 청나라에 양곡지원을 요청했다. 청은 다음해 압록강변에 쌀33만석을 실어와 1만석은 무상으로, 2만석은 유상으로 판매했다.

도적들이 들끓자, 순찰을 강화하고 5가작통법과 호패법강화등을 통해 유민통제를 적극적으로 실시했다. 하지만 이시기

현세구제의 비기,도참,미륵신앙이 백성들 사이에서 확산되어 갔다.

유망과 비기의 영향으로 백성들의 집단이주가 빈번해 졌는데, 특히 평안도주민들의 남쪽 이주가 두드러졌다.

아마 한반도의 한냉화에 따른 북쪽지방의 혹한과 전염병 때문으로 보인다.

인구수가 15세기에 경상도,평안도,충청도,전라도순이던 것이 17세기를 거치면서 경상도,전라도,충청도,평안도 순서로 바뀌었다.
대기근시대의 한 단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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