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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그때 그 시절 귀한 사진들

작성자신비아|작성시간24.01.28|조회수2 목록 댓글 0

이동하는 야외 가설극장

60년대 파티장에서의 남자배우들 1960년대 초반으로 추측되는 사진이다.

당대의 인기 남자배우들이 파티장소에서 술잔을 주고 받으며, 즐거워하는 모습이다.

<황해>,<윤일봉>, <주선태>, <최무룡>,<김진규>, <김승호>등 한 시대를

풍미한 남자배우들의 모습인데,

40여년이 지난 지금<주선태>, <최무룡>, <김진규>, <김승호><황해>등의

배우들은 이미 고인이 되었으며, 앞으로 40년후,

<권상우>,<장동건>, <이병헌>등 현재의 톱배우들이 원로가 되었을때?

청춘극장 회원들중에서 생존해 계시는분이 몇이나 될까? 가끔 이런 사진들을 보면

“인생의 덧없음”을 더욱 실감한다.

조선말기 사진(수원과 인천 우편일부인)-

수원 장안문(長安門). 수원 화성(華城)의 북문으로 정조 때 건축되었다.

서울의 남대문과 비슷한 형태지만 규모가더 크고 바깥에 옹성을 갖추었다.

무지개문 위에 2층 누각을 올리고 양쪽 계단으로 오르게했다.

남한산성 수어장대(守禦將臺).경기도 광주 남한산성 안에 있는 조선 후기의 2층 건물.
인조 때 남한산성을 축조하면서 지은 4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았다.

아래가 넓은 데 비해 2층은 좁은 형태이다.

정면에‘수어장대’라고 쓰인 현판이 걸려 있다.

수원 화서문(華西門).수원 화성의 서문으로 보물 제403호. 단층 누각에 옹성을 쌓았다.
멀리 장안문이 보인다. 화성은 남문인 팔달문과

북문인 장안문이통행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화서문은 비교적 한적한 편이었다.

수원 화홍문(華虹門).수원 화성의 북쪽 수문으로 북수문(北水門)이라고도 불렀다.

7개의 석조 무지개로 수문을 만들고 수문 돌다리 위에 다시 처마 곡선이 유연한
문을 만들었다. 왼편 뒤쪽으로 장안문이 보인다. 주변의 자연풍광이 아름답다.

수원 전경. 멀리 화성이 보이는 수원의 모습. 동생을 업은 아이 앞으로

물이 마른 내와 다리가 보인다. 기와집과 초가집이 뒤섞여 있다.

수원 화홍문과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왼쪽이 화홍문이고 오른쪽 바위 위에

세워진 정자가 방화수류정이다. 이 정자에 오르면 주변을 두루 살피고 경치를
즐길 수 있었다. 소를 매어두고 한가롭게 쉬는 농부와 주변 경관이 썩 잘 어울린다.

건릉(健陵). 경기도 화성군 안녕리에 있는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孝懿王后 金氏)의합장릉.

홍살문 뒤에 제례를 치르는 정자각(丁字閣)이 있다.

정조가 승하한 직후에는부친 사도세자(思悼世子) 묘인

현륭원(顯隆園 ; 현재의 융릉) 동쪽에 능을 만들었지만

훗날 왕후와 합장하며 서쪽으로 옮겨건릉이 되었다.

화성장대(華城將臺).성벽 정상에 있어

안팎을 두루 살피며 군사를 지휘하던 2층 문루다.

정조가 쓴 ‘화성장대’ 현판이 걸려 있었다. 화성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어 서장대(西將臺)라고도불렀다.

화녕전(華寧殿). 정조의 어진(御眞)을 보관하는 전각.

부왕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를지극한 효성으로

받든 것을 본받고 기리기 위해 순조가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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