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들 '삥땅' 역사 깃든 월급봉투… '집으로 바로 가자' 글귀 인쇄도 1977년 3월부터 한동안 경찰관 월급봉투에 새로운 문구 한 줄이 인쇄됐다. '집으로 바로 가자', 일종의 경고문이었다 (조선일보 1996년 7월 2일자). 월급을 현금으로 누런 봉투에 넣어 주던 시절, 모처럼 목돈을 손에 쥔 남자들이 종종 술집으로 직행했기에 이런 글귀까지 인쇄된 것이다. 하지만 월급날은 남편이 좀 늦게 들어와도 타박하지 않는 아내들이 많았다. 눈 빠지도록 기다리던 아내 앞에 '옜다' 하며 봉투를 내민 가장은 "여보 수고 많았어요" 한마디 들으면 으쓱해졌다. 월급봉투는 '수렵시대에 남자들이 숲에서 잡아온 노루·산돼지와 다를 것 없는 전리품(이어령)'이라고 할 만했다. 1980년대까지 이어진 월급봉투 시대에 회사 경리부 직원들은 한 달에 한 번 전쟁을 치렀다. 직원 수 3500여 명의 어느 백화점은 수십억원의 현금과 수표를 7개 은행에서 찾아 봉투에 나눠 담기 위해 직원 40명을 임시로 차출해 작업했다. 월급봉투의 추억은 '월급 삥땅(횡령)'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아내 몰래 돈을 떼어내기 위해 갖가지 묘안들이 속출했다. 봉투 겉에 적힌 공제액을 부풀려 변조하고 수령액은 줄인 뒤 차액을 빼내는 게 고전적 수법. 1960년대 인기 라디오 드라마 '아차부인 재치부인'의 주인공은 아예 경리부에서 월급봉투 양식을 하나 구해 통째로 위조하는 수법을 썼다. 샐러리맨의 애환을 그린 김수용 감독의 1964년 작 영화 '월급봉투'에서 주인공은 월급 명세표에 가짜 부의금을 추가해 적었다. 당시 조선일보의 영화 소개 기사는 '월급을 횡령해 술값으로 쓰는 평범한 소시민'이라고 주인공을 설명했다. 최희준이 부른 영화 주제가는 "월급날은 남몰래 쓸쓸해진다 이것저것 제하면 남는 건 빈 봉투"라고 노래해 큰 공감을 얻었으나 1년 뒤 금지곡이 됐다. '남한 사람들이 이렇게 못산다'는 식으로 북한에 이용당할 소지가 있다는 게 이유였다. 1980년대 은행 전산화 시대의 전개와 함께 월급봉투는 자취를 감춰가기 시작했다. "가장의 자존심이 무너졌다" "부계(父系)사회 근본을 뒤흔드는 변혁"이라는 탄식이 나왔다. 하지만 온라인 시대의 큰 물결은 도도히 흘러갔다. 그래도 이번 추석엔 월급봉투를 한시적으로 부활하는 회사가 있다고 한다. 최소한 보너스만은 현금으로 봉투에 넣어 준다는 것. 연휴 기간에 한국은행이 공급하는 추석 자금 중 상당 부분도 회사원들에 대한 현금 지급에 쓰인다. 추억의 봉투를 받고 추억의 '삥땅'을 하는 사원들이 얼마나 될지 궁금해진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입니다 |
< 모셔온 자료 입니다 >
다음검색
스크랩 원문 :
그대가 머문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