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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선조 비운의 왕비 3인

작성자신비아|작성시간23.03.30|조회수2 목록 댓글 0

《조선조 비운의 왕비 3인》

1392년 58세에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정비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 1337~1391)를 시작으로 마지막 임금 제27대 순조의 정비 순명효황후 민씨(純明孝皇后 閔氏, 1872~1904)에 이르기까지 모두 27명의 조선의 정비들 가운데 가장 불행했던 왕후는 누구였을까?

¤ 노비로 전락한 조선 최고 불운의 왕비, 제6대 왕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 宋氏, 1440~1521)

​불행에 순서가 있을까마는 조선 제6대 왕 단종(1441~1457)의 정비였던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 宋氏, 1440~1521)가 가장 불운한 왕후가 아닐런지 싶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 金氏)와는 서로 한자가 다른 '정순왕후(定順王后)'의 시호를 받은 송씨.

<JTBC '인수대비(2012)' 중 정순왕후 송씨(조정은 분)>

​고려 시대, 한때 세도 있는 명문가이기도 했지만 여산 송씨 집안은 고려 제25대 왕 충렬왕과 26대 충선왕의 권력싸움에서 패하며 3족이 멸하고 노비로 전락했으나 천운으로 인척이었던 기황후가 원나라 황후가 되면서 신분이 복원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정순왕후 송씨는 판돈녕부사 등을 역임한 송현수(宋玹壽)의 딸로서, 1454년 2월 19일 15세의 나이로 한 살 연하의 단종과 혼인하여 왕비에 책봉되었지만 단종이 보위에 오른 지 2년 만인 1455년에 김종서 등을 죽음으로 내몰며 많은 희생을 치른 계유정난(1453년)으로 정권을 쥐고 있던 수양대군에게 양위하고 상왕이 되자 불과 16세의 어린 나이에 왕대비가 되었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으로 바로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은 단종을 보호하던 세종의 후궁 혜빈 양씨(惠嬪 楊氏, ~1455) 때문인데, 혜빈 양씨는 단종의 친모인 문종비 현덕왕후 권씨(顯德王后 權氏, 1418~1441)가 단종을 낳고 얼마 못 가 산후병으로 사망하자 세종의 명으로 단종을 보살펴왔는데, 단종 3년인 1455년 옥쇄를 수양대군에게 내놓지 않고 "세자와 세손이 아니면 전할 바가 아니다"라고 하자 그날로 그녀의 셋째 아들인 영풍군(永豊君) 이전(李瑔)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1457년 성삼문, 박팽년 등의 사육신이 주축이 되어 추진하던 단종 복위 운동이 발각되면서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었고, 정순왕후 송씨도 '군부인(郡夫人)'으로 강등되었다가 이후 관비가 되었다.

​동대문 밖으로 추방된 정순왕후는 시녀들이 얻어온 식량으로 끼니를 때울망정 세조가 내린 집과 식량은 받지 않고 초암을 지어 시녀들과 염색업을 하며 생활했는데, 이후 세조는 "신분은 노비이나 노비로서 사역할 수 없게 하라"라는 명과 함께 아무도 근접할 수 없도록 정업원(淨業院, 부군을 잃은 후궁들이 출궁하여 여생을 보내던 곳)으로 보내져 평생토록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15세에 왕후가 되고, 16세에 왕대비가 되었다가 18세에 군부인으로 강등, 남편 단종이 사사 내지는 살해되며 노비로 전락, 이후 64년을 홀로이 남편의 명복을 빌다가 1521년(중종 16) 82세의 나이가 되어서야 겨우 남편을 쫓아갈 수 있었지만 합장되지 못했다.

​이후 단종의 복위가 주장되었으나 무산되었고, 숙종 24년인 1698년 12월 7일 단종과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의 신원이 복위되어 시호를 받고 종묘 영녕전에 신위가 모셔질 수 있게 되면서 능호를 사릉(思陵)이라 했는데, 이는 억울하게 살해된 남편을 사모한다는 뜻에서 지어진 것으로 단종의 능인 장릉(강원도 영월읍 소재)을 향해 정순왕후 능인 사릉(경기도 남양주 소재)의 소나무들이 고개 숙여 자랐다는 이야기가 한때 전해졌다고 한다.

​¤ '7일의 왕비', 제11대 왕 중종비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 愼氏, 1487~1557)

<KBS2 '7일의 왕비(2017)' 속 단경왕후 신씨(박민영 분)>

단경왕후 신씨는 연산군의 정비였던 폐비 윤씨 오빠 신수근(愼守勤)의 딸로, 13세인 1499년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晉城大君)과 혼인, 1506년 중종반정으로 진성대군이 중종으로 추대되면서 왕후가 되었으나, 연산군의 매부였던 아버지 신수근이 중종반정에 반대한 일로 반정세력에 의해 살해되면서 공신들의 압력으로 왕후에 오른 지 8일 만에 역적의 딸이란 오명을 받고 폐위되면서 1506년 9월 9일 초저녁 궁궐을 떠났다.

​왕후 책봉식도 없이 왕후로 머물던 7일이란 기간은 중종이 아내 신씨를 폐위하지 않고 왕후로 삼으려 버틴 시간이라 할 수 있는데, 야사에 의하면 중종은 조강지처인 단경왕후를 그리워하며 그녀의 사가가 있는 인왕산 동쪽을 한없이 쳐다보곤 했는데, 이 소식을 접한 신씨는 인왕산에 있는 바위에 자신의 분홍색 치마를 펼쳐놓곤 했다고 한다.

궁궐에서 인왕산 바위에 펼쳐진 치마가 보일 리 없으련만 어쨌든 중종은 그로 인해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하니 신씨에 대한 중종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일화로, 인왕산의 이 바위는 후에 '치마 바위'로 불렸고, 후사가 없었던 단경왕후는 중종반정으로 남편과 아버지를 모두 잃고 50년의 세월을 홀로 지내며 평생토록 인왕산에 올라 궁궐을 바라보며 남편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그러나 중종의 마음은 변해서 단경왕후가 폐비된 이후로,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 尹氏, 1491~1515)에게서 1남(왕세자 이호, 12대 인종) 1녀를 두었고, 제2계비인 문정왕후 윤씨(文定王后 尹氏, 1501~1565)에게서 1남(경원대군 이환, 13대 명종) 4녀를 두는 등 이후로도 9명의 후궁에게서 9남 6녀를 더 두어 폐비된 단경왕후를 포함하여 모두 12명의 부인에게서 11남 11녀를 두었다.

​영조 15년인 1739년에 복위되었고, 왕후의 묘는 '온릉(溫陵, 경기도 양주 소재)'이라 칭해졌다.

​¤ 외로운 2인자, 제21대 왕 영조비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 徐氏, 1693~1757)

<SBS '해치(2019)' 속 정성왕후 서씨(최수임 분)>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서씨는 영조의 철저한 외면과 미움 속에도 내쳐지지 않고 조선 왕비 중 가장 긴 33년간의 외톨이 왕비 자리를 지켜내었다.

​정성왕후는 12세인 1704년 연잉군 이금과 혼인하여 달성군부인에 책봉되었고, 1721년(경종 1년) 후사를 보지 못한 경종이 이금을 왕세자로 책봉함에 따라 세제빈(世第嬪)이 되었고, 1724년 경종의 양위를 받은 남편 연잉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정식 왕비가 되었지만 둘의 사이는 최악이어서 창덕궁으로 보내진 이후 경희궁에 따로 머물던 영조는 거의 찾아보질 않았다고 한다.

​자식이 없었던 정성왕후는 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의 소생인 사도세자를 양아들로 입적하여 친자식처럼 따뜻하게 대했고, 사도세자 또한 정성왕후를 대하는 데에는 극진해서 사도세자가 궁내에서 따르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명이었는데, 그래서 정성왕후 살아 생전에는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를 정성왕후가 잘 조율하여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으나 그녀 사후에 둘의 관계는 극으로 치달려 결국에는 1762년 '임오화변(壬午禍變)'이 일어나고 말았다.

​정성왕후가 사망하던 1757년 4월 3일 당일에는 영조가 출산하다 난산으로 22세로 요절한 화평옹주(和平翁主, 1727~1748) 이후로 제일 총애했던 화완옹주(和緩翁主, 1737~1808)의 남편 정치달도 급작스레 사망하였는데, 영조는 조강지처인 정성왕후의 빈소를 찾는 대신 딸인 화완옹주를 위로코자 딸의 사가로 향했을 만큼 정성왕후와는 '적과의 동침'도 못 되는 관계였다.

​광기 어린 사도세자를 따뜻하게 가슴에 품으며 사도세자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던 온화한 성품의 정성왕후, 시어머니인 숙종의 두 번째 계비 인원왕후 김씨(仁元王后 金氏, 1687~1757)를 극진히 섬겼던 효부 정성왕후를 영조는 왜 그토록 미워했을까?

​정사 기록으로는 알 수 없고, 다만 야사에서는 영조와의 첫날밤에 영조가 정성왕후의 손을 보고 왜 이리 손이 곱냐는 물음에 고생을 안 해 손에 물을 묻히지 않아서 그러노라 대답한 것이 화근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 말이 영조에게는 평생 트라우마처럼 괴롭혔던 무수리 출신의 어머니 숙빈 최씨(淑嬪 崔氏, 1670~1718)를 업신여긴다 오해한 탓으로 그 뒤 정성왕후를 쳐다도 안 보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 왕릉 42기가 모셔져 있는 경기 고양시 홍릉(弘陵)에는 유일하게 정성왕후 묘 옆 왕의 자리가 비어있다.

애초에 영조가 사후에 자신이 묻히겠노라 정성왕후 옆에 가묘 형식의 유택(幽宅)을 지어놨지만, 영조 사후 정조가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를 의식하여 원릉(元陵, 경기 구리시)을 따로 조성하여 안장하며 정성왕후는 살아생전에 당했던 무시를 죽어서도 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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