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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교훈글-주지육림(酒池肉林)

작성자신비아|작성시간23.06.22|조회수0 목록 댓글 0

주지육림(酒池肉林)

酒 : 술 주
池 : 못 지
    肉 : 고기 육
    林 : 수풀 림

술로 만든 못과 고기로 이룬 숲이라,
극히 호사스럽고 방탕한 술잔치를 비유하는 말이다.

하(夏)나라의 마지막 왕 걸(桀)은
황음무도(荒淫無道)하고 탐욕스러웠으나
남다른 힘과 지략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하나라를 망하게 한 여인이 있었는데,
바로 말희(妺喜)라는 여자이다.

걸왕(桀王)이 한창때,
유시(有施)씨의 소국(小國)을 공격했다.
유시씨는 대항할 힘이 없어
많은 진상품을 바치고 항복했다.

그 진상품 가운데 말희라는 여인이 끼어 있었다.

걸왕은 말희에게 한눈에 반해 빠지고 말았다.
말희는 궁궐을 다시 짓게 하고,
주지육림을 만들어 질탕하게 놀면서
걸왕을 부패하게 만들었다.

말희는 한 가지 일이 끝나면 또 다른 일을 꾸미어
하 왕조의 국력을 기울게 만들었다.

걸왕의 이런 행태를 보다 못 한 현신 관룡봉(關龍逢)은
눈물을 흘리면서 간하다가 참수되고 말았으며,
선관(膳官; 궁궐의 주방을 맡은 관리) 이윤(伊尹)은
충간을 듣지 않는 걸왕을 버리고
당시 상(商)나라의 수도였던 박(亳)으로 도망쳐
탕왕(湯王)을 섬겨 상나라 창업의 일등 공신이 되었다.

당시 탕왕은 덕을 갖춘 군장으로 제후들의
협력을 얻어 국력을 확장해 가고 있었다.

걸왕의 횡포가 날로 자심하여
백성들의 마음이 그를 떠났다는 것을 안 탕왕은
드디어 걸왕 타도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걸왕은 명조(鳴條)의 싸움에서 대패하여
달아나다가 남소(南巢)에서 죽었다.

이로써 초대왕 우(禹)로부터 제17대 왕 걸까지
약 500년에 걸쳐(BC22세기∼BC17세기) 존재하였던
중국 최초의 왕조였던 하나라는 문을 닫고 말았으며,
탕왕의 상나라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사기(史記) 하본기(夏本紀)에 나온다.

그런데 상나라(殷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도
하나라 마지막 왕 걸왕의 전철을 밟고 말았다.

주왕은 자질이 뛰어나고 식견이 높았으며,
두뇌가 명석하여 남을 꿰뚫어 보는
날카로운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총명할 뿐 아니라 용력도 뛰어나
맹수를 맨주먹으로 때려잡을 정도로
뛰어난 체력과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뛰어난 자질을
덕을 쌓는 데 쓰지 않고,
자만에 빠져 신하들이 간하는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뛰어난 입담으로 자신의 비행을
합리화하거나 덮어 버렸다.

그는 천하에 자기보다 나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또한 주색과 향락에 대해서도
아주 호탕하여 달기(妲己)라는
여인에게 빠지고 말았다.

달기는 유소(有蘇)씨의 딸로서,
일찍이 주왕이 유소씨를 토벌했을 때
전리품으로 획득한 미녀였다.

주왕은 달기를 얻고 아주 기뻐했으며,
달기의 아름답고 요염한 자태에 빠져
그녀의 환심을 살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다했다.

주왕은 달기가 원하는 대로
궁중의 음악을 더욱 관능적이고
분방한 음악으로 바꾸고,
수도 조가(朝歌)에 녹대(鹿臺)라는
거대한 금고를 만들어 무거운 세금으로
그 금고를 채웠으며 거교(鉅橋)에
곡식 창고를 세워 곡식으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 사구(沙丘)의 이궁(離宮)을
더욱 확장하여 그 안에
길짐승과 날짐승을 놓아길렀다.

그는 귀신에 대해서도 오만하고 불경했다.
주왕은 또한 달기의 청을 받아들여
술로 채운 연못과 고기 안주를 매단 나무로
이루어진 주지육림을 만들어
수많은 알몸의 남녀들이 그 안에서
서로 쫓게 하고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

불평을 하는 백성들에 대한 공포정치의 일환으로
불구덩이 위에 기름을 칠한 구리 기둥을 걸어 놓고
그 위를 걷게 하는 포락(炮烙)의 형(刑)을 시행하였다.

당시 은(殷) 왕조에는 천자의 정치를 보좌하는
삼공(三公)으로 서백 창(西伯 昌; 후의 周文王),
구후(九侯), 악후(鄂侯)가 있었다.

구후에게는 아름다운 딸이 있어
주왕의 부인이 되었는데 주왕에게 죽임을 당하였으며,
구후도 죽임을 당하여 그 시체가 젓으로 담가졌다.

악후가 이를 간(諫)하다가 역시 죽임을 당하고
시체는 포(脯)로 만들어졌다.

서백 창은 이를 듣고 탄식하다가
유리(羑里)의 옥에 갇히고 말았다.

서백의 가신들이 주왕에게 미녀와
재물을 바치고 그를 석방시켰다.

서백은 자신의 영토의 일부인 낙서(洛西)의 땅을 바치고
포락의 형을 면제받은 후, 자기 땅으로 돌아갔다.

충신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주왕을 간하였지만
대부분이 죽음을 당하거나 스스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왕자 비간(比干)은 간하다가 심장을 갈기갈기 찢겼으며,
기자(箕子)는 옥에 갇혔다.

주왕은 이 밖에도 임신한 여자의 배를 가르고
뼈가 시려 강을 건너지 못하는 노인의 다리를 자르는 등,
포악한 짓을 자행하였다.

서백 창이 죽고 그의 아들 발(發)이 그 뒤를 이었으니,
그가 바로 주(周)나라의 공식적인 초대 왕인 무왕(武王)이다.

무왕은 아버지 서백 창을 문왕으로 추증하고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을 사부로 삼아
민심을 끌어 모으고 군대를 정비하여
포악한 주왕을 응징하기 위한 준비를 해 나갔다.

그리고 때가 되자 무왕은 주왕을 멸하기 위해
동쪽을 향해 진군을 계속하여 은의 교외인
목야(牧野, 하남(河南) 기현(淇縣) 서남)에서 진을 쳤다.
주왕도 70만의 병력을 동원해서 목야로 나왔다.

하지만 주왕의 폭정에 시달리던
은나라 대부분의 군대는 무왕의 토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으므로 항복하지 않으면
주나라 군대에 가담해 버렸다.

은나라 군대는 일패도지(一敗塗地)하고 말았고,
주왕은 목야에서 도망쳐 수도 조가에 있는
녹대 위로 올라가 불을 지른 후,
보석으로 장식한 옷을 입고
그 속으로 몸을 던지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사기 은본기(殷本紀)와
사기 주본기(周本紀)에 나오는데,
하나라의 걸왕과 은나라의 주왕이 각각
말희와 달기에 빠져 술로 채운 연못과
고기 안주를 매단 나무로 숲을 만들어 즐겼다는 말에서
주지육림(酒池肉林)이 유래했다.

-옮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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