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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역사 실체

작성자신비아|작성시간23.03.27|조회수1 목록 댓글 0

이 비밀협상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논쟁점을 던졌다.

 

 첫째 이 협상 내용에 미국과 일본이 한국과 필리핀을 상호 교환하는, 이른바 외교적 주고받기 흥정(quid pro quo)의 의미를 담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고,

 둘째 그것이 단순히 양국 고위관료간 의견교환 수준인지, 아니면 양국 간 장래의 행동을 상호 약속하는협정(agreement)의 의미를 갖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우선, 그 비밀협상이 한국-필리핀의 맞교환 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물론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에 약소국 문제를 외교적 흥정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일반적 추세였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전문의 내용상으로는 A 대신 B라는 논리가 선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더욱이 필리핀에 있어 미국의 입지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지배권 승인 요구는 외교적 흥정 대상으로 적절하지 않았다. 적어도 미국의 인식은 그러했다.

 

 일본은 한국 지배권 독점에 대한 국제적 승인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반면, 미국은 1898년  이래 이미 필리핀을 군사적으로 점령한 상태에서 반군 토벌작전을 진행하고 있던 점이 달랐다. 루스벨트 자신도 회담 3개월 후 태프트의 방일(訪日)이 외교적 흥정이었다는 소문이 일본 신문에 실리자 상당히 불쾌해하면서 미국은 영토보전을 위해 누구의 지원이나 보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고 언급한 바 있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했던가. 그것은 몇 가지 요인이 결합된 결과였다. 루스벨트의 인종주의적 문명관과 친일론적 인식도 중요한 원인이었고, 그것이 동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판단과 결합되면서 나타난 결과였다. 당시 미국의 주된 관심사는 중국시장이었다. 이미 1899년, 1900년 두 차례에 걸쳐 미국은 중국 문호개방 원칙을 천명해놓은 터였다. 즉 군사적 개입이라는 비용을 부담하지 않으면서 중국시장에서 미국의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고 있었다.

 

 문호개방 정책에 대해 일본은 외교적 지지를 보내고 있었던 반면, 러시아의 만주 진출은 문호개방 원칙에 대한 도전이라 인식했다. 따라서 루스벨트는 일본의 대(對)러시아 전쟁을 미국의 게임을 일본이 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할 정도였다. 미국의 그러한 기대감은 러일전쟁 후 일본이 만주로 진출하고 러시아와 다시 손을 잡게 되면서 적대감으로 바뀌게 된다. 그것이 동아시아에서 미일 충돌의 원인(遠因)이 됐다고 해도 전혀 틀린 것은 아니다.

 

협정인가, 각서인가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양국간 법적 의무를 가진 협정의 성격을 띠고 있는지, 아니면 단순한 의견교환, 즉 각서로 볼 것인지는 다소 복잡한 문제다. 태프트 장관이 회담 직후 루스벨트에게 보낸 전문에는 이 회담의 성격을 합의각서(agreed memorandum)로 밝히고 있다.

 

만약 그것이 단순히 각서라면 미국은 아무런 법적 의무도 위반한 것이 아니라고 일부 학자들은 주장해왔다. 법적 의무란 미국이 1882년 조미수호조약에 명기한, 우호적 중재(good office)와 관련한 체약국 의무를 의미한다. 게다가 태프트는 특히 한국 문제에 관한 그의 의견 표명에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루스벨트 대통령에게서 어떠한 지시도 받은 바 없으며, (외교문제에 관한 한) 태프트 자신이 어떤 직권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 그러면서도 그의 의견에 루스벨트 대통령이 동의할 것이라는 점을 덧붙이고 있다. 그 자신이 육군성 장관이라 외교 문제에 관한 그의 발언이 국무성 업무에 관여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를 바라는 우려도 이 전문에 드러나 있다.

 

이 비밀협상을 단순히 각서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비밀에 부쳐졌다는 점, 회담 내용상의 표현, 그리고 구체적인 외교적 거래를 명시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논리의 근거로 내세운다.

 

루스벨트는 밀약에 동의했다

 

반면 이것이 실제로 협약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드러난 형식보다는 국제정치적 중대성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를테면 이 비밀협상의 실질적 의미, 즉 일본과 미국의 정책 결정자들이 그 회담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으며, 협상 이후 미국의 한국 정책이 어떻게 수행됐는가 하는 관점에서 그 의미를 이해하고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루스벨트 자신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국제정치적 중요성과 미국의 외교정책적 영역에서 그 의미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한국 문제에 대한 태프트의 발언에 대해 루스벨트는 우리의 입장이 더는 그처럼 정확하게 언급될 수 없다 고 하면서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미국의 대한(對韓)정책에서 갖는 시기적 적절성과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루스벨트는 당시 미국 외교정책 결정과정의 핵심이었다. 1903년 여름 이후 미국 외교정책은 사실상 그가 주도했다. 그를 일컬어 일인(一人) 국무성이라고 불렀던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진실(1)

 

태프트는 회담에서 대통령에게서 아무런 지시도 받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으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태프트를 일본으로 보내기 전, 루스벨트는 한국 문제에 관한 자신의 의도가 무엇인지 태프트에게 미리 알려줬다. 그는 1905년 4월20일 태프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본이 한국을 지배한다는 조항이 포함되는 한 나는 강화조약의 일본측 안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의사를 표명한 바 있다. 일본의 한국 지배를 미국이 앞장서서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일본의 한국 지배에 대한 미국의 적극적 지지를 확인해준 것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다.

 

루스벨트는 태프트가 보낸 전문을 읽고 난 즉시 태프트에게 보낸 회신에서 당신이 가쓰라 백작과 나눈 대화는 모든 면에서 절대적으로 타당하다. 당신이 말한 모든 말을 내가 추인한다고 가쓰라에게 언급해주길 바란다고 하여 태프트의 발언을 대통령 자신의 의견으로 인정하는 한편, 가쓰라-태프트 협약의 내용을 미국의 공식 견해로 재확인시켰다.

 

더욱 주목해야 하는 점은 그 밀약의 국제정치적 위상을 루스벨트 자신이 어떻게 인식했느냐 하는 문제다. 1905년 11월, 그의 친구이자 영국 외교관인 스프링 라이스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나의 지시에 의해 태프트가 일본 수상 가쓰라와의 회담에서 재차 강조한 것은, 구체적으로 영일동맹에서 명기하고 있고, 또한 포츠머스(Portsmouth) 조약에서 인정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입장을 우리가 전적으로 승인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루스벨트에게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일본의 한국 지배에 관한 국제적 승인이라는 점에서 제2차 영일동맹이나 포츠머스 조약과 동등한 중요성을 갖는 협정이었다. 영국과 러시아가 조약을 통해 그렇게 했듯, 루스벨트도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했던 것이다. 적어도 미국의 핵심적 외교정책 결정자의 인식구도에는 그러한 등식이 성립돼 있었다.

 

아울러 루스벨트 외교방식의 특징을 고려해야 한다. 그는 공적인 외교 채널보다 사적 채널을 중시한 이른바 개인 외교(personal diplomacy) 방식을 선호했던 인물이다. 1905년 미국의 한국 외교에도 그 방식이 채택됐다. 태프트의 협상 임무에 있어 국무성 관료들은 사실상 철저히 배제됐다. 어쩌면 루스벨트 대통령은 한국 문제와 관련된 대일외교를 추진하는 데 교묘하게 국무성을 배제했을 것이다. 국무성 관료들 일부가 가지고 있던 친(親)러적 정서를 우려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국무성에는 그것에 관한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으며, 루트 국무장관이나 주일공사 그리스콤도 뒷날까지 그 내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 국익 실현을 위해 전쟁으로 할 일을 평화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외교다.  육군장관이 외교담당 국무장관이 된다.  그 때의 업적으로 191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다. 》》

 

한국의 사망증명서에 날인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한미 양국관계에, 그리고 한국의 운명에 큰 충격을 줬던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승만의 전기작가로 잘 알려진 로버트 올리버의 표현에 따르면 그 밀약은 한국의 사망증명서에 날인(to seal Korea s death warrant)하는 행위였다. 한국의 국제정치상 위상과 존립에 관해 미국과 일본의 고위층 사이에 합의된 의견이 교환되고 상호 확인됐다는 사실은 미국 정부가 1882년의 한미수호조약에 명시된 우호적 중재라는 체약국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기로 이미 결정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미국이 1903년 친일 구도를 골격으로 하는 외교정책을 선택한 이후 일본의 한국 문제 처리에 대해 보여준 행동 가운데 가장 명백한 의도를 담고 있는 행위가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다. 그런 사실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乙巳勒約)이 맺어지자마자 한국과 외교적 관계를 단절한 최초의 국가가 미국이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내용을 외교적 실행으로 옮겼던 것이다.

 

지난 9월30일 주미대사관에 대한 국회 외교통상위 국정감사에서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실재 여부가 쟁점화하자 신동아 11월호는 이와 관련한 연세대 김기정 교수(국제정치학)의 글을 실었다.

 

미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적극적으로 승인했으며, 다만 밀약의 성격이 협정이냐 각서냐 하는 형식상 논란만 남아 있다는 게 그 요지였다. 이 글을 읽은 고려대 대학원 석사과정(사학)의 만학도 하정인씨가 또 다른 시각의 기고문을 보내왔다.

 

 1924년 미국의 외교사학자 테일러 데넷(Taylor Dennett)은 미 국회도서관에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1901~09 집권)에 관한 사적(私的) 비망록과 외교서류 등을 조사하던 중, 1905년 7월27일 당시 미 육군성 장관이던 윌리엄 태프트와 일본 수상 가쓰라 다로 사이의 비공식 회담에 관한 합의된 비망록(Agreed Memorandum)을 우연히 발견했다.

 

데넷은 당시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일급의 중요 비밀사실을 알아냈다고 확신하고, 국무장관인 찰스 휴스에게 그 공문서를 공개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휴스는 즉시 태프트에게 의견을 물었고, 태프트는 공개를 반대하지 않았다.

 

데넷은 같은해 8월 매사추세츠주 윌리엄스타운에서 열린 미국 정치학회에서 이 문서 내용을 발표했고, 이는 미 현대사(Current History)지(誌)에 루스벨트 대통령과 일본 간 비밀협약(President Roosevelt s Secret Pact with Japan) 이란 제목의 논문으로 실렸다.

 

이것이 오늘날 전세계 역사기록은 물론 한국의 관련 정치․외교․역사 서적과 교과서에서 통례적인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근거이자 연원의 전부다.

 

에스더스의 반론

 

일본은 데넷이 발표한 당시에는 이 사실에 대해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다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일한 병합소사(日韓 倂合小史, 岩波書店, 216쪽)에 데넷의 논문을 그대로 수록했다. 그리고 1968년, 일본 외무성이 공식 간행한 일본외교연표 병 주요문서(日本外交年表 竝 主要文書, 1840~1945) 편에서는 본 각서 관계 서류는 소실되어 참고로 미 국무성 문서를 수록한다는 주(註)를 달고 데넷의 논문에 실린 주요 3개 항을 실었을 뿐이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의 국제정세, 그리고 루스벨트 개인의 사회적 다위니즘 (다윈이 제창한 진화의 학설)적인 제국주의 문명관에 근거를 둔, 조선에 대한 그의 선입관으로 미뤄볼 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과연 일본의 조선 병합의 주요 근거가 되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추론의 여지가 없는 역사적 진실일까.

 

1959년 미국 역사학자 레이먼드 에스더스(Raymond A. Esthus)는 현대사 저널(The journal of modern history)에 가쓰라-태프트 협약, 진실인가 신화인가 라는 논문을 발표해 가쓰라와 태프트 간의 메모는 루스벨트가 펼친 극동정책의 핵심부분이 아니었고 태프트는 외교적 흥정(quid pro quo)을 관철할 목적으로 파견된 밀사도 아니었다 고 데넷 이래 정설로 받아들여져 온 이 밀약에 최초의 반론을 제기했다.

 

우선 에스더스는 데넷이 합의된 비망록(Agreed memorandum)이라는 글귀에서 agreed 라는 어휘를 협정(agreement)으로 확대해석 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태프트의 일본 방문은 전임 필리핀 총독으로서, 그리고 육군성 장관으로서 마닐라를 방문하는 길에 도쿄에 들른 것일 뿐, 일본과 구체적 외교협약을 맺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어떤 기록에도 루스벨트가 태프트에게 일본을 방문해 극동문제를 토론하거나 타결하라고 한 훈령은 발견되지 않는다.

 

태프트와 가쓰라 두 사람의 만남은 러일전쟁 이후의 극동정세와 관련해 벌어질 수 있는 일말의 사태에 대한 예방 차원이었고, 가쓰라는 조선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하고 태프트의 의견을 물었던 것이다. 또한 태프트는 그의 관심사이던 필리핀 통치 및 방위 문제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고 가쓰라와 견해를 교환했다.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어떤 구체적 정책을 실천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에스더스는 미일 쌍방의 그 누구도 서명하지 않았고 양 당사국의 의무적 구속조항도 없는 이 비망록이 단순한 대화(conversation)의 기록이었다고 주장한다. 태프트는 당시 미 국무장관이던 엘리후 루트에게 보낸 보고서에 이를 대화의 합의된 비망록(agreed memorandom of conversation)이라고 표현했다. 이는 이 사실이 협정(agreement)이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비망록 본문에도 다음과 같은 시각이 교환됐다(the following views were exchanged)라고 씌어 있다.

 

루스벨트는 이날의 만남과 대화에 대한 태프트의 전문 보고를 즉시 추인했는데, 이는 1년 전인 1904년 6월 뉴욕주 오이스터만의 자택에서 열린 다카히라 주미 일본공사와의 오찬에서 러일전쟁 종결시 일본의 편을 들겠다고 약속한 사실을 재확인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가쓰라는 회동 말미에 이 비밀협약의 내용이 주일 미국대사인 그리스콤에게 전해지는 것을 삼가라고 태프트에게 부탁했다. 당시 조선에 호의적이던 그리스콤이 조선 당국에 이 사실을 알리면 일본이 이미 예정하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의 을사특약 조인(1905년 11월)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을 염려한 것이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진실(2)

밀약은 단순한 대화 기록… 조선 병합 승인한 협약은 없었다 

 

루스벨트의 우열 민족관

태프트가 방일한 지 3개월 후 일본의 친정부 언론기관인 고쿠민(國民)은 가쓰라와 태프트의 흥정 밀약을 보도했고, 주일대사 그리스콤은 10월4일 워싱턴으로 전문을 보내 비밀협정의 루머가 일본 언론에 회자되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 보고서를 접한 루스벨트는 나는 미국의 영토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것에 대한 대가로 어떠한 이에게도 무엇을 요구하거나 들어주는 일이 없다고 확인한다. 우리는 그러한 간섭을 막을 수 있는 완전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의 영토보전과 관련한 지원에 대해 어떠한 보장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언명하고, 이 문제를 일본공사 다카히라에게 추궁했다.

 

며칠 후 가쓰라는 다카히라를 통해 루스벨트에게 공식 견해를 표명했다.

 

고쿠민은 일본 정부 기관이 아니며 그 기사는 정부가 지시하거나 정보를 제공한 것도 아니다. 일본 정부는 조선에서 직면한 문제에 대한 미국 정부의 호의적인 태도를 인식하고 이에 감사한다. 이러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어떠한 제안이 있었다는 사실은 없다.

 

이는 일본 정부의 대(對)언론 발설에 대한 일반적 부정이 아니고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대한 루스벨트의 해석(조선과 필리핀에 관한 흥정의 부인)에 동의하는 일본 수상의 절대적인 설명이었다.

 

고쿠민은 일본 지도부와 가까운 친정부 기관이었다. 따라서 당시 포츠머스 강화회담이 실패했다는 국내 여론이 비등하자 일본의 큰 외교적 성공으로 해석될 수 있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정보를 일본 지도부가 흘렸을 가능성이 있다.

 

1905년 2월, 일본이 하와이나 필리핀을 공격하면 어떻게 하겠는가라는 언론인의 질문에 루스벨트가 무력에는 무력으로 싸워 이겨야 하며, 일본에 대처할 수 있도록 미국의 군비는 항시 강력하고 효율적이어야 한다고 답변한 사실은 고쿠민에서 비롯된 미일간 입장 차이에 대한 루스벨트의 견해를 뒷받침해준다.

 

이 모든 사실을 종합해볼 때 루스벨트 대통령이 러일전쟁에 따른 일본의 조선 병합을 양해한 것은 그의 언급대로 일본과의 비밀협정이나 협약에 기초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단지 그가 개인적으로 빠져든 우열 민족관에 입각해 일본의 조선 병합 그 자체가 세계 평화는 물론 열등하고 자치 능력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한국민의 장래를 위해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던 데 그 동기가 있다고 할 것이다.

 

다시 보기 필요한 밀약

 

역사적 진실을 추구하면서 부딪치는 어려움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과 그 진행과정이 모두 지나가버렸고 현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역사란 기록으로 전승되고 있는 것들, 그리고 후대인이 그것을 근거로 해서 새로 편집, 정리, 해석한 것일 뿐이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모두 과거에 관해 파악된 것, 이해된 것일 뿐이지 역사 그 자체는 아니다.

 

따라서 역사 연구의 지향은 과거 인간의 사상과 행위를 인식하고, 그 역사를 일어난 대로 재구성하는 데 있다. 과거를 재구성하는 데 근거가 되는 모든 자료, 즉 사료가 없으면 역사를 재구성해볼 수 없다. 물론 이 사료는 엄격히 비판되고 해석돼야 한다.

 

에스더스는 루스벨트와 미일관계에 관한 몇 권의 저서를 간행했고, 1924년 데넷의 논문 발표 이후 자신이 반론을 제기한 1959년까지 수많은 사료와 새롭게 발견된 사실들을 검증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흥정하지 않고 국력에 의한 외교정책을 집행한 루스벨트의 정통성과 러일전쟁 및 당시의 국제정세에서 강력하고 확고했던 미국의 태도를 추정하는 데 주력했을 것이다. (루스벨트는 러일전쟁의 중재에 대한 공로로 1906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일본은 어쩌면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가쓰라와 태프트의 대화를 이용하고 확대해석하려 했는지 모른다. 그러면 에스더스 같은 학자가 의문을 제기했는 데도 아무런 저항 없이 교과서에 밀약 부분을 실은 우리의 역사 인식은 무엇인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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