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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내가 사라진다면

작성자신비아|작성시간22.12.22|조회수0 목록 댓글 0


인간은 누구나 늙고 죽는다.


그렇다면 늙고 죽음이라는 현상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유사 이래 인류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왔다. 신에게 기도하기도 하고,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냉동인간이나 동물복제를 통해 건강과 장수를 추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들은 결코 궁극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병고에서 벗어나려면 병의 원인을 알아야하는 것처럼, 늙고 죽음에서 벗어나려면 늙고 죽음의 원인을 알아야 한다. 늙고 죽음의 근본원인은 무엇일까?

궁극적으로 ‘내’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있으므로 ‘나의 늙고 죽음’이 있는 것이다. 결국 늙고 죽음을 극복하는 궁극적이고도 유일한 방법은 ‘내’가 사라지는 것이다. 내가 사라진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죽음을 ‘나의 사라짐’으로 생각하지만, 죽음은 단지 ‘내 몸’의 사라짐일 뿐이다. 몸이 사라진다고 해서 마음도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마음은 여전히 남아서 자신의 깜냥에 합당한 과보를 받는다. 베푸는 마음을 자주 연습했으면 부자가 되고, 화를 잘 냈으면 추하게 태어나고, 남이 잘 되는 것을 시기 질투했으면 천박한 가문에 태어나는 것이다.

결국 몸은 물론 마음까지 사라져야 온전한 ‘나’의 사라짐이라 말할 수 있다. 이 마음은 흔히 ‘생각’이라고 표현되는 시비 분별하는 마음을 말한다. 그런데 이 몸은 때가 되면 저절로 사라지는 것이므로 굳이 없애고자 애쓸 필요가 없다. 단지 마음만 쉬도록 해주면 된다. 그래서 ‘쉬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비 분별하는 마음, 즉 생각을 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붓다가 첫 번째로 권장한 방법은 바로 대면관찰(對面觀察)이다. 자신의 생각을 거울 보듯 영화 보듯 강 건너 불구경하듯 대면해서 관찰하되, 닉네임을 붙여서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그 생각은 더 이상 ‘나의 생각’이 아니라, ‘닉네임의 생각’(아바타의 생각)이 된다. 어떠한 생각이든 ‘닉네임의 것’(아바타의 것)으로 객관화시켜 관찰하면, 정작 나는 관찰자의 입장에 서게 된다. 이 관찰자가 바로 본 마음인 성품이다.

생각을 쉬는 두 번째 방법은 애초부터 이 성품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마하반야바라밀’을 염하면서, 그 소리를 듣는 것이다. 그리고 소리를 듣는 성품을 돌이켜 듣는 것이다. 몸과 마음은 생멸하지만 관찰자인 성품은 생멸하지 않는다. 예컨대 종을 치면 그 소리는 일어났다 사라지지만, 그 소리를 듣는 성품은 생겨났다 없어지지 않는다. 그 자체로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이다. 잠을 잘 때, 눈을 감고 자더라도 꿈속에서는 여전히 보고 듣는다. 육신의 눈은 감고 뜨지만 성품은 감고 뜨지 않는다. 항상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관찰자인 성품은 스스로를 볼 수는 없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거울과 같은 대상이 없이는 자신의 얼굴을 스스로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관찰자는 스스로 대상을 창조한다. 마치 푸른 허공에 구름이 일어나듯이, 몸과 마음이라는 대상을 창조해서 자신을 실감나게 알고 느낀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허공과 구름이 둘이 아니듯, 관찰자인 성품과 관찰의 대상인 몸과 마음 또한 둘이 아니다.

이러한 차원에 도달하게 되면, 늙고 죽음의 문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늙고 죽음을 벗어난다는 것은 결국 늙고 죽음에 철저해지는 것이다. 철저히 늙고 철저히 죽는 것이다. 생(生)이 오면 생과 마주하고, 사(死)가 오면 사와 함께 한다. 늙어갈 땐 늙어갈 뿐! 죽을 땐 죽을 뿐!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이것 뿐! 이것이 분별 망상인 생각을 쉬는 세 번째 방법이다.

그러므로 선사들은 말한다.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잠잔다.’ 겉보기엔 범부들과 다름없지만, 그 내용은 사뭇 다르다. 범부들은 밥 먹으면서 오만가지 번뇌 망상을 하며, 잠자면서 갖가지로 꿈을 꾼다. 몸과 마음이 나누어지고, 현상과 본성이 이원화된다. 하지만 선사들에게 몸과 마음은 둘이 아니다. 현상과 본성도 둘이 아니다.

결국 생로병사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단순해졌다. 태어날 땐 태어날 뿐! 늙어갈 땐 늙어갈 뿐! 아플 땐 아플 뿐! 죽을 땐 죽을 뿐! 항상 바로 지금 여기서 완전 연소할 뿐이다. 이것이 현상에 철저하면서 본성으로 돌아갈 수 있는 비법이다.

이렇게 시시각각 평상심을 유지하며 살 수 있다면 더 이상 수행이 필요 없거니와, 그렇지 않고 자꾸 시비 분별심이 일어난다면, 얼른 대면 관찰을 해야 한다. ‘달마가 욕심을 일으킨다.’ ‘달마가 화를 내려한다.’ ‘달마가 근심 걱정 하는구나.’ 이렇게 닉네임을 붙여 거울 보듯 영화 보듯 강 건너 불구경하듯 대면해서 관찰하면, 생로병사와 탐 진 치는 달마의 것이 되고, 정작 자신은 관찰자의 입장에 서게 된다. 이 관찰자는 한없이 크고 밝고 충만하다.

결국 참 나는 무아(無我)요, 무아는 대아(大我)이며, 대아는 시아(是我)다. 진정한 나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 고정된 실체가 없으므로 어떠한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으며, 바로 지금 여기에서의 내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바로 지금 여기에서 완전 연소하는 것이 참다운 무아의 삶을 사는 것이다
 
-월호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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