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에는 같은 점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괴로움 없이 즐겁게 살려한다는 점이 똑같습니다.
예술, 종교, 철학도 그 근본 목표는 전부 고통 없이 즐겁게 사는 데 있습니다.
불교도 이 세상은 괴로운 것이다, 어떻게 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나서 나고 죽음이 없는 열반의 세계에 가느냐. 거기에 근본 목표가 있습니다.
우리가 불교를 공부하려고 하면 부처님이 어떤 분이냐,
어디에 계시느냐,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흔히 타종교인들이 말하기를 불교는 우상을 숭배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모신 분이 부처님입니까.
부처님이라고 생각할 때는 부처님이 되는데 불상이라고 생각하면 불상이 됩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불상이 되기도 하고 부처님이 되기고 하고 골동품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은 불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과연 부처님이라고 부르는 부처님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화엄경』 소초를 낸 통현 장자라고 하는 유명한 거사가 있습니다.
그 분이 『화엄경』에 대해서 지은 글 중에는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은 중생의 마음속에 있다. 자기 근기가 감당하는 바를 따라서 부처가 되고 중생이 되는 것이지 다른 물건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일체 제불의 근원 자리를 알고자 할진 데는 자기의 무명 자리 그것을 깨달으면 그것이 본래의 부처더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명이라는 것 때문에 부처가 안 되고 있는 겁니다.
밝음이 없다는 겁니다. 밝음이 없으면 깜깜한 밤중과 같은 것입니다.
눈을 감아 버리면 바로 깜깜한 밤중입니다.
무명을 깨달으면 본래 자리가 부처가 된다.
눈을 감았다가 떠버리면 온갖 것을 다 알잖아요.
그것이 바로 깨달은 부처의 자립니다.
눈을 감았다가 뜬다는 것이 다를 뿐이지 감았을 때도 눈이요, 떠도 눈입니다.
그러나 눈을 감았을 때와 떴을 때는 엄청나게 다르지요.
부처와 중생이 그와 같다는 겁니다.
중생에게도 그 마음이 있고 부처에게도 그 마음이 있다는 겁니다.
마음, 부처, 중생이라고 하는 이 세 가지가 다 차별이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모두 부처가 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감았던 눈을 뜨기만 하면 되는데.
-원산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