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정통법을 받은 분이 마하가섭존자이고, 그 다음 분이 아난존자인데 아난존자가 열반
드실 때의 그 열반상은 우리에게 굉장한 신심을 느끼게 합니다.
그분은 신통을 여실하게 증명했습니다.
부처님의 금관을 역사(力士)들이 횃불로 불을 붙였지만 붙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기름을 부어도 안 붙으니까 부처님께서 자비심으로 화광삼매(火光三昧)라,
직접 자기 몸에 불을 내어 스스로 금관을 태우고 몸을 태워 사리를 만든 것입니다.
우리 불성 가운데는 땅기운, 물기운, 불기운이 다 들어 있습니다.
인간이란 정말 기묘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 즉 우리 불성을 가리켜서 마니보주(摩尼寶珠)라, 여의주(如意珠)라,
온갖 것이 다 나오는 보물구슬이라고 합니다.
그런 위대한 마음을 두고서도 모르니까 우리 인간을 가리켜서 '금을 가지고서 얻어먹는 거지'라고 그럽니다.
그런 값진 보배를 가지고도 가진 줄을 모르고 하찮은 일에 생명을 낭비한단 말입니다.
금을 잔뜩 곳집에 넣어 놓고 거지행세를 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무한공덕장인 우리 마음을 캐내는 작업을 하면서 사업도 하고
사회 일도 하면 훨씬 잘될 것입니다.
우리 몸 가운데는 물과 불이 다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불만 생각하면 불이 되고, 물만 생각하면 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삼명육통이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석가모니한테 꿀릴 필요도 없고 예수한테 주눅들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본래 부처고 하느님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에게도 열등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게을러서 그렇지 못할 뿐입니다.
<아함경>에 전하는 부처님 말씀중에 "영생불멸하는 그 길은 분명히 있는데
우리 중생이 가고 안 가고 하느니라."
영생의 길은 분명히 있는데 중생이 게을러서 가고 안 가고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신여의통은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고, 불경을 보면
부처님께서 그렇게 하신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지금 원자력이 무시무시한 힘을 내지만 그보다도 훨씬 더 무한한 성능이
불성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짐작을 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다음에 누진통, 이것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번뇌를 마저 다
떼어버리는 그런 신통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해탈(解脫)이라, 우리는 한사코 해탈을 해야 됩니다.
해탈을 해야만이 우리 삶은 완성이 됩니다.
우리 삶의 보람은 우리 스스로 해탈의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모두가 다 허망한 것이고 가짜입니다.
생명이라 하는 것은 무상한 것이어서 어느 때 갈지 모르는 것 아닙니까?
병들어 죽을지, 사고를 당할지, 천재지변으로 갈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무상한 인생에 있어서 가장 급박한 것이 무엇인가?
가장 절박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를 찾는 일'입니다.
참다운 자기는 바로 부처입니다.
따라서 부처가 되는 것이 우리들의 지상과업인 것입니다.
모든 번뇌의 구속을 다 끊어버리고 해탈의 길로 가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구속을 받고 삽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마르크스주의, 공산주의 때문에 얼마나 구속을 많이 받았습니까?
또 김일성주의 때문에 우리 북녘 동포들이 얼마나 처절한 속박 속에서 고생을 합니까?
불교는 그런 구속을 다 푸는 것입니다.
관념적인 구속, 제도적인 구속을 다 풀어서 성불하기 좋은 제도로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불하기 제일 좋은 제도가 바로 승가의 법인데, 진정한 승가의 법은 감투나 놓고 싸우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해탈이라, 해탈에는 지혜해탈(智慧解脫)과 선정해탈(禪定解脫)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치로 해서 먼저 부처님의 경전 말씀과 선지식들이나 조사 스님들의 가르침에 따라서 기본적인 길을 알고 가야 합니다.
불교공부는 그래서 하는 것입니다.
지혜해탈은 이론적으로 막히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학자들은 보통 이론적인 체계만 서면 공부를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교의 세계에서 보면 그것은 지혜해탈에도 미처 못 간 것이니, 참다운 해탈은 어림도 없는 것입니다.
참다운 해탈은 선정이라, 참선을 해서 우리 생리와 심리가 아울러 맑아지고 이른바 환골탈태(換骨奪胎)하여 우리 몸뚱이 역시 정화가 되어서 나쁜 짓을 할래야 할 수 없게 되어야 합니다.
공자가 칠십이 되어서 말한 "내 마음대로 행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 이런 정도가 되어야 선정해탈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해도 우주의 도리에 어긋남이 없는 정도가 되려면 평소에 우리 행동을 도덕적으로 훈련시켜야 하고, 그와 동시에 우리 마음이 우주의 근본진리인 부처님을 여의지 않아야 합니다.
부처님이라 하는 본질을 떠나지 않는 공부가 참선공부입니다.
화두나 염불이나 주문이나 무엇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그것이 우주의 본바탕을 의미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저 하늘 어디에 따로 있고, 부처님은 극락세계에 계신다고 생각하면 참선이 못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나 밖에나, 어디에나 다 존재하는 하느님, 부처님, 이렇게 생각할 때만이 참다운 참선공부가 됩니다
- 청화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