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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발심은 스스로

작성자만강(晩江)손정민|작성시간24.03.10|조회수3 목록 댓글 0

 

사람마다 주린 창자를 밥으로 달랠 줄은 알아도 불법을 배워 어리석은 마음을 고칠 줄 모르누나. 행동과 지혜의 갖춤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고, 자기와 남이 함께 이로운 것은 새의 두 날개와 같다.

하늘은 천태만상을 보아도 분별 냄이 없고 天視萬象黙無言 대지는 쉼 없이 돌고 돌아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는다.

大地回轉次不動 우리 범부는 보지도 듣지도 못한 근거 없는 말들로 시시비비를 그칠 줄 모르니 어찌 온전한 정신으로 뜻있게 산다고 하겠는가?

옛말에 대인大人은 자기 걱정에 여념이 없고 소인배는 남의 일만 걱정한다 했으니 우리 인간들이

인체기능을 잘 활용하면 군자에서 성현, 부처까지 그 인격을 이룰 것이요, 잘못 악용하면 인간다운 인간은 물론이고 보잘것 없는 금수나 벌레에도 미치지 못하는 하잘것없는 인품에 그칠 것입니다.

사람이 만물 중 상위를 차지한다는 것은 말로 표현하고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가졌기 때문인데, 하는 말이나 행이 진실성이 없고 아집과 우월감에 사로잡혀 허위와 기만으로 행이 뒤따를 수 없는 말은 숭고한 빛을 잃는 것입니다.

사람이 인격을 갖춘다는 것은 육화六和가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눈은 사물을 보되 바로 보고 정확히 볼 줄 알아야 눈의 기능을 다하는 것이요,

소리는 듣는 귀 역시 남의 말을 잘 듣고 선의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니 나쁜 말이나 불미스러운 얘기는 스스로 소화해서 밖으로 표현할 때 부드럽고 조용히 덕을 이룰 수 있어야 귀의 기능을 다하는 것입니다. 코와 입은 우리 생명의 열쇠를 가지고 있으니 마치 숨 한번 잘못 쉬어도 한 세계, 즉 소우주가 무너진다.

입 한번 잘못 떼어 대사를 그르친 경우가 고금에 한둘이 아님은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국주國主가 망발을 서슴지 않는다면 국운이 위태로울 것이요.

한 가장의 실언은 패가망신를 초래하게 됩니다.

이렇듯 입은 재해의 근원이며 문이라 했으니 신중하고 조심해야 하며 신행身行은 후학後學이 본받을 수 있는 위의가 있어야 합니다.

성인의 말씀에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짐승은 화살의 화가 뒤따르고, 날기를 좋아하는 새는 그물의 재앙을 면키 어렵다 했으니, 사람이 행行을 가짐에 어찌 쉽게 생각하겠습니까?

사람은 인격의 척도가 언행에 있으니, 몸가짐이 단정하고 말은 무게와 신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인격을 형성함에도 신체기능이 조화를 유지해야 하며 하나라도 어긋나면 곧 균형을 잃고 스스로가 하나의 지옥을 만들고 그 함정에 스스로 빠지는 것입니다.

한 국가가 발전함에도 여러 신하의 화합이 있어야 하고 한 가정의 융창도 가정이 화목해야 하며 한 단체의 운명도 화합이 절대의 근본입니다.

승가僧伽란 화합이란 말이며 부처님도 화합을 극구 칭찬하셨습니다.

유교가 사서삼경이 없고 윤리 도덕관이 희박해서 망한 것이 아니며, 불교는 팔만대장경의 가르침이 적어서 전법포교가 안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화합하고 몸소 수행하고 열심히 전법하여 불은佛恩에 만분지일이라도 보답한다는 사명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불생수심부지도 不生修心不知道 후세수칭대도사後世誰稱大道師 수도修道를 한다는 것은 발심이 첫째입니다.

발심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도를 닦겠습니까.

왜 닦는지, 또 누굴 위해서 무엇 때문에

수도하는지 조차 잊고 있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도는 익혀서 연습하는 것이 아니고 생사의 긴 밤에 꿈을 때느냐, 못 깨느냐 하는 일도양단一刀兩斷의 해결 문제입니다.

진정한 발심을 했다면 주저할 것 없이 간절한 마음으로 한 걸음 옮기기 전에 해결한 후 걸음을 옮겨야지 도를 모르고 걷는 걸음 밑에는 오로지 사지死地만 기다릴 뿐이라 어디로 옮겨 놓을지 막연합니다.

발심은 따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야 합니다.

인생의 생명은 한정되어 있는 것인데

이를 착각해서 영원히 존재할 줄 알고, 설사 죽음의 사자가 언젠가는 온다는 숙명적 이치는 알면서도 탐진貪嗔의 속박에 얼켜 실지의 생사가 고임을 실감할 줄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많은 업을 짓는 것입니다.

생사가 고인 줄 분명히 알아서 일분일초도 늦추지 말고 용기와 분심忿心으로 수미산을 뛰어넘은 후에

비로소 도의 맛을 조금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발심이 중요한 동시에 어떻게 닦느냐의 방법도 매우 중요합니다.

집을 지으려면 목수에게 배우고 글은 학자에게 배우듯이, 도를 닦으려면 우선 명안종사明眼宗師를 찾아가서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근기에 따라 화두를 받고 언하言下에 개오開悟해서 생사 밖의 도리를 얻어 보면 49년의 광장설인 부처님의 교훈이 자기 손바닥 위에 있고 불조가 눈 안에 있어 사자후를 내뱉게 될 것입니다.

도를 깨닫기도 어렵지만 선지식을 만나기는 더욱 어려우니, 수도자는 명안종사 만나기를 서원을 세워서 차근차근 첫 걸음부터 배우고 익혀야 할 것입니다. 급히 먹는 밥이 체하고 계단을 건너뛰면 구르기 쉽듯이 수도인의 가장 큰 병도 도를 쉽게 얻으려는 것이니, 진정한 생사해탈의 도리를 알려면 천만 리 멀다 말고 눈 밝은 선지식을 찾아서 53선지식을 친견한 선재동자의 변할 줄 모르는 대신심大信心을 본받아야 합니다.

요즘 간혹 발심 없이 자비慈悲문중에 들어온 사람들이 뜻 없는 삶에 이미理味없이 받은 화두가

자다 먹는 떡과 같아 아무 맛을 모르고 세월만 보내니 행여 아까운 시간을 허비할까 걱정스럽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敎나 화두라고 하는 것은 달을 가리킨 손가락에 불과한 것이니 달을 봐야지 손가락만 붙들고 있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마음 그릇 비우고 와서 나의 법을 배우라하셨고, 과거의 모든 선지식들이

쉬어가라 했으며 끝없는 세월동안 익혀온 나쁜 버릇 고치면 된다 하였으니 우리도 나쁜 업을 고치면 될 것입니다.

 

-성수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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