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깨침·실천은 하나
백운스님
불교는 학문의 종교가 아니라 실천의 종교입니다.
범어사가 운영하는 금정불교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도
늘 강조하는 것은 실천입니다.
불교대학을 졸업했다고 해서
‘내가 불교에 대해서 많이 안다’는 자만심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학문으로 불교를 많이 안다고 해도
실천을 안 하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교 기초를 배우고 나면 직접
참선(參禪)의 길로 들어가라고 강조합니다.
직접 참선을 하고 수행을 쌓아나가는 것이 중요하지
이론을 조금 안다고 불교를 많이 알았네,
불교를 깨쳤네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신도들의 교육을 하면서 나는 한 가지 원이 생겼습니다.
재가자들을 위한 선방을 개원해 공부를 지도하는 것입니다.
스님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신도들이 스스로 참선하며 실천하는
공부를 할 수 있도록 계기를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재가자들은 참선에 대한 지도를 받을 기회가 많지 않아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조차모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신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참선 공부가
아주 겉돌고 있는 것을 발견할 때가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뭣고’라는 화두를 참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뭣고’가 뭔가 하고 물으면 뚜렷한 대답을 못할 만큼
피상적인 화두 참구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 불자님들은 ‘이뭣고’가 뭐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
이뭣고’는 ‘이것이 무엇인고’의 준말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무엇인고 할 때,
무엇을 ‘이것’이라고 하는지 알아야 할 것 아니겠어요?
화두의 전제가 되는 말 ‘이것’에 대한 아무런 가르침이 없이
무작정 화두를받아서는 참된 의심이 되지 않고
바른 공부를 이어갈 수가 없게 됩니다.
예를 들어 ‘개가 불성이 있느냐 없느냐’를 놓고
조주스님은 ‘없다’ 했거든요.
일체 중생이 다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왜 조주스님은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하지?
이것이 무엇이지? 하는 것이 바로 화두의 전제입니다.
꼬무락거리는 버러지라도다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조주스님은 어째서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했는가하는
의문을 전제해서 ‘이뭣고’를 해야 하는 겁니다.
제방의 선지식들은 무턱대고 화두를 주어선 안 됩니다.
이뭣고의 전제를 반드시 일러주고
참된 의심을 짓도록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이처럼 화두의 근본은 의심입니다.
즉 ‘시삼마(是甚 )’라는 말이죠.
이 시(是), 무엇 삼(甚) 마( )는 의문부호입니다.
일반적으로 시심마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심하다 할 때는 ‘심’이라 읽지만 ‘
무엇’이라는 뜻일 때는 ‘삼’이라고 읽어야 옳습니다.
간화선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번뇌에다
화두라는 혹을 하나 더 붙여서 하는 거라고
매도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러나 간화선의 요령은 하나의 의심으로
생각을 모아다른 것이 모두 떨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의심이 사실 혹은 혹이지만 그 의심을 함으로써
번뇌망상이 모두 떨어지고 그 의심이 똘똘 뭉쳐서
의심을 안 하려고 해도 의심이 되는
경지에 이르면 깨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간화선 위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간화선을 공부하는 이들이
화두의 전제를 알지 못하고
깊은 의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에
불교가 피상적으로 겉돌고 있는 실정입니다.
불교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불교가 뭔지 바로 알아야 하는 교학의
필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교학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교학을 통해 참선 공부의 길잡이가 되니
조사어록을 스스로 읽고,
공부를 점검할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고봉선사의 <선요>, 대혜선사의 <서장> 등
조사어록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초가 되면 토굴에 가든지,
선방에 가든지 중심을 잃지 않고 정진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교학이 반드시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선방에 가서 공부하기 위해 교를 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 자체가 전부인 듯한 잘못된 견해에 빠져서는 안 되지요.
이렇게 참선 공부를 해 나가면서
생활 속에서 실천을 해야 합니다.
불교는 아주 여러 방면으로 얘기할 수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아주 간단합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자리이타(自利利他)의 가르침입니다.
자리(自利)는 자기를 이롭게 한다,
즉 자기 수행으로 지혜를 닦는 것이고,
이타(利他)는 남을 이롭게 한다,
즉 중생을제도하는 것으로 복덕을 쌓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제도한다는 말을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에 둘을 보태면 셋이다,
넷에 셋을 보태면 일곱이다 하고
가르치는 선생님처럼 하는 게 제도가 아닙니다.
중생을 위해서 내가 헌신하는 것이 제도입니다.
물속에 있는 사람을 건지려면 물속에 들어가야 하잖아요.
물 바깥에 서서 이리 나오라고 아무리 손짓을 해도
나오질 못하듯이
중생을 제도한다는 것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헌신하는 것입니다.
물에 들어가고 진흙에 들어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중생을 건지는 것이 제도입니다.
중생을 위한 끊임없는 헌신은 복력을 쌓는 일이어서
지혜와 더불어 부처님이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요건입니다.
지혜와 복력을 구족하신 부처님이라는 표현을 들어보셨죠?
바로 스스로 지혜를 갖추기 위한 자기 수행뿐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한 헌신도 빠져서는 안 될 실천덕목입니다.
부처님께서도 과거 생에 삼아승지겁 동안
보살행을 닦아서 성불했다고 했습니다.
삼아승지겁이면 무한량의 시공(時空)을 말합니다.
그 무한량의 시간동안 중생을 위해서
헌신한 결과 성불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자기 수행과 헌신을 병행하는 불제자들이 많아지면
어려워만 보이는 부처님 가르침이 바로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그대로 드러나게 됩니다.
‘불사하는 문중에는 한 법도 버릴 바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 하더라도
놓치지 말고 실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부처님 당시, 눈이 어두운 노비구를 위해
손수 바늘에 실을 꿰어 주신것처럼
부처님은 중생을 위한 헌신을 한다는 생각도 없이 하신 분입니다.
오늘날까지 부처님의 가르침이 전해 올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부처님께서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헌신의 정신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는 이후
바로 열반에 드시려고 하실 때
시방의 부처님들께서
중생을 제도하겠다던 본원력을 잊어선 안 된다고
일깨우지 않았다면
부처님의 깨달음은 전해지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혼자만의 기쁨에 그치지 않고
중생을 위한 헌신을 몸소 실천하신 분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우리가 불교라는 이름으로
별별 소리를 다 하고 많은 이론을 얘기하지만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생각이라는 한계 속에서 합니다.
아무리 좋은 말도 식(識)으로 하면 가짜입니다.
무릇 마음이 있는 자는 모두 무상정등각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청정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생각으로 헤아리는 것을 넘어선 생각 너머에 있는
청정각성(淸淨覺性)에 이르러야 합니다.
원효대사의 ‘발심수행장’에는 이런 비유가 나옵니다.
사람이 변소에 있는 꼬리달린 벌레를 보면서 더럽다고 여기듯이
천상에서 보면 인간세상이 꼭 그렇게 본다고 했습니다.
아주 적절한 표현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난척 한다고 해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청정각성의 입장에서 보면 생각으로 살고 있는
우리 인간은 모두 가짜입니다.
불교니 깨달음이니 하고 논하지만
청정각성의 경지가 아닌 다음에는 모두 가짜입니다.
가짜인 나를 모두 부정한 그 자리에
여실히 존재하는
본래면목을 참구하는 불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모셔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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