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더러우면 사람들은 짜석아 쫌 씻고 다녀라고 합니다. 더럽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을 씻어라고 하는 자는 드뭅니다. 오염된 마음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몸이 더러운 것보다 마음이 더러우면 정말 큰 일 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오히려 마음이 더러운 사람들을 더 좋아합니다. 그것은 그들 마음이 이미 더러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사람에게 냄새나는 거지들과 함께 자라고 하면 못잡니다. 그러나 거지들은 함께 잘도 잡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염된 마음을 가진 사람과 청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함께 못삽니다. 살 수가 없습니다. 오염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끼리 함께 세상을 만들어 삽니다. 마치 술집에 술꾼들이 있고 담배부스에 담배피우는 사람들이 모여있듯이. 우리는 오염된 마음의 세계에서 벗어나 청정한 사람들과 살아야 숨을 쉴 수가 있습니다.
몸이 더러우면 비누로 씻습니다. 마음이 더러우면 무엇으로 씻습니까? 그것은 네 가지 믿음으로 우선 큰 오염을 씻어 냅니다.
첫 번째가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나는 생사에 고통받는 중생이 아니라 부처의 자식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나의 롤모델인 부처님을 믿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부처님 말씀입니다.
네 번째는 나를 이끌어주시는 보살들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네 가지 믿음입니다.
기신론에서 특이한 것은 불법승 삼보보다도 자신이 누구인지를 먼저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네 가지를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신과 부처님, 부처님 말씀, 불보살을 믿는 사람 있습니까? 없습니다.
알고는 있는데 믿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믿으면 그 사람은 이미 범부가 아닙니다. 스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님들도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기에 수행자라고 부릅니다.
一心 二門 三大 四信까지 설했습니다. 기신론의 구성요소입니다. 먼저 일심이라는 것이 두 문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중생의 마음속에는 부처의 체體 상相 용用이라는 세 가지 위대한 성품이 들어 있고 이것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면 우선 네 가지 믿음을 일으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다음은 이제 실천입니다. 이 실천을 오행수행이라고 합니다. 즉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지관입니다.
재가불자들의 신행생활에는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듣는 수준입니다. 통도사 화엄산림, 해인사 3월불사, 송광사 금강경산림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해마다 다 들었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어디서 큰스님 법문 한다면 찾아가 계속 듣기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신론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신론 배웠다는 사람치고 한 두번 배운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꼭 세 번 이상 들었다고 합니다.
나에게도 어떤 사람이 열정없이 느슨하게 몇 기수 다니고 말더니 자기 스승이 공파스님이라고 떠들고 다닙니다. 너무 황당한 일입니다. 난 한국에서 제자를 둔 적이 없고 이제까지 특별히 제자를 키운 적이 없습니다. 모두다 수강료를 내고 기신론 해동소를 배운 사람들로서 그냥 스쳐 지나갔을 뿐입니다. 좋은 스님이 지천에 널렸는데 뭣 한다고 내 제자라고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두 번째는 집에서 새벽염불하면 좋다고 습관처럼 줄기차게 기복염불을 하는 단계입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집안의 평안과 자식들의 건승을 빌면서 천수경 반야심경 화엄경약찬게 광명진언 천지팔양경을 읽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 신행에 강박관념을 갖고 있습니다. 하루라도 빠뜨리면 절단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진짜 그들은 앵무새처럼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중얼거립니다. 도량찬에서 일쇄동방결도량 이쇄남방득청량 할 때 쇄는 물 뿌릴 쇄자입니다. 아파트 방안에 앉아서 물도 안 뿌리고 입으로만 외웁니다. 염불의 뜻을 알아야 자신이 반조될텐데 말입니다.
세 번째는 기도하는 단계입니다. 전국에 유명하다는 사찰과 영험있다는 도량은 다 찾아 다닙니다. 기한을 정해놓고 가피를 내리라며 부처와 보살들을 은근히 겁박합니다. 그러다가 안되면 다시 거래를 시작합니다. 잘 아셔야 합니다. 기도는 자기 쪽으로 불보살을 끄집어 내리려고 하고 수행은 불보살이 계시는 쪽으로 자기를 끌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므로 불교에는 생활불교라는 것은 없습니다. 있다면 대단히 이기적인 발상입니다. 불교의 신앙은 자기가 주체가 아니라 불보살이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기억해 두셔야 합니다. 불교생활을 하면 나도 살고 가족도 살고 내 주위도 삽니다.
네 번째는 읽는 수준입니다. 경전과 논서를 끊임없이 읽습니다. 옛날 서당에서 공자왈 맹자왈 하듯이 주구장창 읽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읽고 또 읽다보니 이제 읽는데 도가 터져서 금강경을 5분만에 독파하고 능엄경을 15분내로 다 읽는다면서 자랑합니다. 경론이 원하는 길을 가지 않고 무조건 그것을 많이 읽는데 자기만족을 하고 있습니다. 진짜 모르는 경전이 없고 안 읽은 논서가 없습니다. 그래서 수행은 안합니까? 하면 그런 것은 관심도 없습니다. 너무 웃기는 사람들입니다. 눈을 감고 사물을 더듬고 있는 꼴입니다.
다섯 번째는 이제 참배하러 다니는 단계입니다. 즉 인도의 4대성지와 중국의 4대성지를 몇 번 다녀왔다에서 부터 봉정암 보리암 낙산사 뭐뭐 해인사 화엄사 불국사 어느 절 어느 사찰 안가본데가 없다고 떠벌리는 사람들입니다.
불교성지를 바로 옆에 둔 인도사람들이 불교를 믿습니까? 이 땅이 이미 부처님의 성지입니다. 불교를 정확히 알면 이 사바세계가 이미 석가모니부처님의 성지가 되어있습니다.
그 다음이 이제 사경하는 사람들입니다. 사경은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에 전법용으로 쓰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전각도장 새기듯이 고서가 된 한자를 베껴쓰고 있습니다. 그것을 그대로 베끼면 공덕이 됩니까? 아닙니다. 남이 그것을 읽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막상 전달해 읽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법화경도 수십 번 쓰고 금강경도 수백 번 쓰고 반야심경도 수천 번을 씁니다. 그러다보니 사경 권수만 쌓여져 갑니다. 버릴 수도 없습니다. 경전이란 죄스러움에 함부로 고물상에 팔지도 못합니다.
결국 그들은 절에 가서 돈을 주고 태우든지 탑 속에 매장합니다. 참 영양가 없는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사경보다 좋은 방법을 하나 가르쳐 드릴께요.
차라리 그러지 말고 통나무를 구해 집안에서 불상을 조각하십시오. 아니면 그림을 배워 부처님을 진짜 아름답게 그리십시오. 예전 불화처럼 그렇게 틀에 갇힌 불화는 도리어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줄 수 있으니 현대식으로 세련되게 그려 보십시오. 진짜 어느날 아주 멋진 부처님 한 분이 나타나실 것입니다. 모델이 이미 기가 막히게 좋으니까요.
아니면 뜨게질을 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따뜻하게 입혀주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것이 사경보다 눈도 안아프고 집중 잘되어 잡생각도 덜 나고 마음이 더 편안해지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자리이면서도 이타행이니 얼마나 좋습니까.
-공파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