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는 한 번 지은 죄는 없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함무라비법전처럼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아 버리지 않는 한 그 잔여의식은 고스란히 피해자에게 남아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절대로 없앨 수가 없다. 그 결과를 받아야 한다. 죄를 지어놓고 그 결과를 안 받겠다고 하면 진짜 도둑놈 심보고 안 받도록 어떻게 해 준다고 한다면 완전 사기꾼이다.
아니, 돈 빌려준 사람은 있는데 돈 꾸어간 사람이 돈도 안 갚고 이제 그만하자고 하면 그게 말이 되는 법인가. 그러므로 죄는 참회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성질이 아니다. 기도한다고 용서를 받지는 못한다. 잘못을 저질렀다면 고통을 받아야 한다.
그러니 참회한다고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당신이 악을 행하든지 선을 행하든지 즐거움과 고통은 그림자처럼 그대를 뒤쫓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인과의 법칙이다.
불교의 참회는 과거에 지은 죄업으로 너무 많은 고통을 받아왔기에 이제는 그런 고통이 싫다는 전제하에 그런 행위로부터 벗어나겠다는 다짐이라고 했다.
친구와 비슷한 남자를 보았다. 반가워서 뒤통수를 쳤다. 그런데 아니다. 그 사람이 가만히 있겠는가. 그도 신경질이 나서 나의 뒤통수를 쳤다. 이제 인과는 없어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거의 확실하게 친구의 뒷모습이 보였다. 반가워서 또 뒤통수를 쳤다. 그런데 저번의 그 아저씨다. 그도 신경질이 났고 고의도 아닌 나도 신경질이 났다. 둘 다에 미움의 인과가 맺혀졌다.
여기서 끝이 나야 했다. 그런데 그것이 그리 되지 않는다. 이번에는 정말 확실한 친구의 뒷모습이다. 그래서 자신있게 또 뒤통수를 쳤다. 그런데 아뿔싸! 이번에도 아니다. 그 사람이다.
잡히면 맞아 죽는다. 그래서 냅다 도망가 버렸다. 그 사람은 분명히 이렇게 이를 갈았을 것이다. 이건 고의다. 잡히기만 잡혀봐라. 아작을 내 놓을 테니까. 그렇게 해서 그 사람에게 복수의 인과가 심어졌다. 그것을 어떻게 지울 수가 있단 말인가.
진정한 참회는 여기서 일어난다. 이제 절대로 먼저 뒤통수를 치지 않겠다. 확실히 알고 난 뒤에 그때 반가움을 표현해야겠다 라고 다짐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불교의 참회라는 것이다.
-공파스님-